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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나라, 경주남산 답사(3)/ 천상의 부처와 사방불...칠불암
칠불암 마애석불군은 경주남산의 계통도상 봉화곡(峰火谷)에 속하는 유적지다.
봉화골은 동남산에서 제일 깊은 골짜기인데 남산불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솜씨가 뛰어난 칠불
암 유적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신라 때의 절이름은 알지 못하나, 일곱 불상이 남아있는 곳에
근래에 작은 암자가 지어져 보통 칠불암(七佛庵)이라 호칭하게 된 것이다.
칠불암 유적답사는 통일전에서 서출지를 지나 남산리 3층석탑이 있는 마을로 진입한다.
마을 동장명의의 안내판에는 마을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날 수 있으니, 가급적 주차는 통일전
주차장에 하라는 당부의 글이 적혀있다.
통일전에 주차를 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한 일이긴 하지만, 염불사지 앞에 8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므로 일찍 서두른다면 그곳에 주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염불사지를 지나 칠불암으로 오르는 길은 넓고 경사가 완만하여 정상부근의 일부구간을
제외하면 수월한 산행이다. 출발지에서 2km 정도니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길 옆 바위마다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올려놓은 작은 돌탑들이 군인들의 제병행렬을 보듯
줄지어 서 있다. 나도 작은 돌 하나를 집어 올려본다...
신우대를 만나면 절이나 인가가 근방에 있다는 표시다.
스치는 맑은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든 신우대로 덮힌 터널 아래의
돌계단을 쉬엄쉬엄 밟으며 즐기는 운치를 무엇에다 비하리...
가파른 신우대터널의 하늘계단을 오르며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숨찬 가슴을 진정시키다 보면, 머리 위로 파랗게 열린 하늘이 길손을
반긴다. 칠불암이다...
마지막 돌계단에 힘을 주어 딛고 올라서면 황홀하고도 감격스러운
정토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정면의 사면불과 삼존불, 그 위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바위산 꼭대기의
신선암마애석불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마애불 옆의 칠불암은 휴일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로 좁은 암자 마당은 북새통이다.
칠불암코스는 이곳의 암릉능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 봉화대능선에 합류하여 고위봉과 금오산은
물론 남산일주도로와 연결되는 까닭에, 남산을 종주하거나 산행을 겸해 유적답사를 하는 이들이
즐겨찾는 길이다.
마애불 남쪽에는 큰 옥개석을 뒤집어 받침을 삼고 남은 탑재들을 모아 쌓은 어설프게 생긴 탑이
하나 있다.받침으로 사용한 옥개석은 네 토막 중 하나다.네 개의 토막을 합쳐서 한 개의 옥개석이
되도록 한 것인데,이런 형식은 감은사탑과 경주박물관 마당에 서 있는 고선사(高仙寺)탑이 있다.
이곳의 네 개 옥개석을 합쳐 놓으면 추녀 길이가 2.93m가 된다고 하니 거대한 석탑이 존재했다는
설명이다.
마당 한 켠에는 석등대석과 남은 탑재들이 모아져 있다.
남아있는 탑재들을 하나라도 제자리를 찾아서 배치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경주남산이 세계문화유산이란 것을 홍보하는 데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사찰 주변도
정리해야 할 것이고 깨어지고 넘어져 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많은 유적들을 관리하는 데도 힘써야
할 것이다. 이런 말하면 바로 나오는 대답이 예산타령인 줄 나도 안다.....
실제로 경주남산에 있는 사찰 중, 두 세 곳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경내가 지저분해 눈쌀을 찌푸리
게 한다.아니할 말로 수행을 위한 수행처를 만들 것이라면, 년중 사람의 발길로 몸살을 앓는 이런
국립공원이 아니더라도 그 목적에 부합되는 적당한 곳이 많이 있을 것이다.
사찰이 어떻게 세웠졌던 간에, 기왕 세워진 사찰이라면 깨끗하고 정갈한 도량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절이 크고 새로 지어야만 정갈한 도량인가, 작고 낡았어도 사람의
정성스런 손길이 간 만큼 윤이나고 주변이 밝아지는 법이다. 남산의 어느 절 통행로 옆에는
속옷과 다른 옷가지들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빨래줄이 버티고 있다.
경주남산 칠불암마애석불(慶州南山 七佛庵磨崖石佛), 보물 제200호
칠불(七佛)의 배경은 기기묘묘한 거암(巨岩)으로 하늘에 잇닿은듯 드높게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경사가 가파른 험한 산등성이에 절을 짓기 위해 동북(東北)양면에 돌축대를
쌓아 터를 만들고, 터 위에는 서쪽 바위면에 기대어 자연석으로 불단이 병풍처럼 솟아 있는데,
이 바위에 삼존대불(三尊大佛)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약 1.8m 간격을 두고 6면체의 바위(방주:方柱)가 삼존불 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듯이 솟아 있다.
이 바위의 면마다 여래상을 새겨 사방불(四方佛)을 나타내었으니 이곳 불상은 칠불(七佛)이
되는 것이다.
이 칠불은 천 수백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지내왔지만 삼존불의 코끝이 조금 상했을 뿐
대체로 완전하게 남아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삼존불의 손상된 코는 이후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존대불(三尊大佛)
높이 5m 너비 8m로 병풍처럼 솟아있는 절벽 바위면에 거의 입체불만큼
이나 높은 돋을새김으로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이 부처들은 규모에 있어서나 조각솜씨에 있어서 남산불상 중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다.
본존여래불은 두 겹으로 핀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당당히 앉은 모습
이다. 넓은 어깨를 위엄있게 펴고 먼 앞을 내다보며 항마촉지인을 표시한
모습은 삿된 것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엄숙한 기상이 넘치고 있다.
얇은 듯한 입술은 굳게 다물고,입 양가에 힘을 주어 부처의 얼굴이 더욱
엄격하게 보인다. 몸체는 전체가 직사각형으로 장대하게 솟아있어
위엄스럽다. 두 팔이 팔굽에서 거의 직각으로 꺾여있어 입체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은 가사의 옷주름은 고운 곡선을 그리며 부처의
몸을 감싸고 흘러내려 엄격한 몸체에 부드러움을 보태어 화기를 돋우었고,
두 다리 위에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무릎 아래서 잔잔히 물결치듯 나타난
것은 한없이 아름답다.
신라의 불상대좌는 보통 복련대(伏蓮臺)와 앙련대(仰蓮臺) 사이에 팔각
중대석이 놓이는데,이 대좌에는 중대석이 없고 복련대 위에 직접 앙련대
가 놓여있다. 밑으로 처진 복련대는 꽃잎이 좁고 길어 사실적인 데 비해
앙련대의 꽃잎들은 짧고 넓으며 끝이 두 개의 곡선으로 그려져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다.
이 불상들처럼 한 광배 안에 삼존을 나타낸 것을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
이라 한다, 이곳의 본존불을 아미타여래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고 하나,
이 여래상은 석가여래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삼존불 앞
사방불의 동면에 약사여래가 있으므로 서면 즉,삼존불과 마주보는 곳은
아미타여래가 있다. 두 아미타여래가 서로 마주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협시보살상(右脇侍菩薩相)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연화대좌 위에 서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집어 가슴
앞에 올려 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정병(淨甁:물병)을 들고 있다
손가락을 집어 가슴 앞에 올려든 것은 부처의 뜻을 중생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이고,물병을 들고 있는 것은 목마른 사람들께 물을 먹이듯이 괴로워
하는 중생들을 구하겠다는 이 보살의 약속이다.
풍만한 얼굴을 본존 쪽으로 약간 돌리고 시선도 바로 그 방향을 보고 있다.
굳게 다문 입술에 왼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승기지(僧祇支:보살의 가슴을
가리는 긴 헝겊)가 가슴을 감싸고 남은 자락은 수직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목에는 간단한 목걸이가 걸려 있고 허리를 감싸는 치마 주름 위를
과판(銙板: 국화 모양의 물건을 찍어 내는데 쓰는 판)이 딸린 띠로 꼭 동여
매고,흘러내린 치마자락은 발등을 덮고 양 옆으로 퍼지면서 잘다랗게
주름잡아 곱게 처리 되었다.
넓은 천의는 어깨에 걸쳐 두 팔을 감싸며 양 옆으로 흘러 내렸고 팔목에는
팔찌가 장식되었다.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머리띠의 앞과 양옆을 장식하였고 머리
뒤에는 크게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새겨져 있어 연꽃대좌와 함께 보살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였다.
좌협시보살상(左脇侍菩薩像)
이 보살이 입은 옷이나 팔찌,두광의 표현은 우협시보살상과 같은 모습
이나, 복련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연꽃(寶相蓮花)을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아레로 떨어뜨린 채 천의자락을 살포시 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여 귀엽고 앙증스러운 느낌이다.
흙탕물에서도 때를 타지 않는 연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제도
하겠다는 이 보살이 중생들에게 약속하는 모습이 연꽃을 들고 있는
손가짐에 진하게 나타나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주름 위를 끈으로 동여 매었는데,끈은 배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나머지 자락을 밑으로 드리우고 있다.
사방불 동면(東面) 약사여래상
삼존대불 앞에 솟아있는 네모난 바위의 면마다 부처를 새겨 사방사불을
나타 내었다. 사방사불(四方四佛)의 존명은 경전에 따라 서로 다르다.
조형(造形)으로 나타난 사방불은 반드시 경전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방불에는 동방에 약사여래상, 서방에
아미타여래상이 배치되지만 남면과 북면에 배치되는 부처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그 존명을 알기 어렵다.
동면의 이 불상은 손에 약 그릇을 들었고 동향으로 앉아 있으므로 약사여래
부처임을 쉽게 알 수 있다.밑으로 처진 복련연꽃과 위를 향해 핀 앙련꽃잎
들이 생생하게 피어 있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법의(法衣)는 다소 무겁게 처리된 감이 있으나 육체의 굴곡은 뚜렷이 표현
되었다.
왼손은 약 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집어 가슴에 올려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살결이 부드럽고 풍만하다. 두광은 무늬 없는 보주형으로
크게 나타나 있어 시원스럽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이 부처는 보살 시절에 중생들이 살기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12대원을
세우고 노력 정진하여 유리광세계를 이룩하고 부처가 되었는데, 12대원
중 일곱번째의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치고 편안한 즐거움을 준다는 제병안
락원(除病安樂願)은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 부처님(大醫王佛)으로 숭앙
받았으니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절실한 소원으로 신앙되었다.
남면(南面) 여래상
사실적으로 생기있게 새겨진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을 설법인
으로 표시하며 아래 위로 들고 있는 모습이다.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발은 보이지 않는다
18cm나 되는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풍만한 얼굴에는 육계가 단정히
솟아 있다. 가는 눈은 양가가 약간 치켜올라간 모습이고 목에는 두 겹으로
주름이 잡혀져 있다.동여맨 옷끈은 앞에서 매듭을 지어 남은 자락이 두
줄로 드리워져 있다.
북면(北面) 여래상(좌)과 서면(西面) 아미타여래상(우)
북면은 이 바위에서 가장 좁은 면이다. 불상 조성시 부터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상도 윗면에 조그맣게 새겨 놓았다.
대좌와 수인,두광은 다른 불상과 같은 모습이나 무릎너비에 비해서
키가 작고 얼굴이 풍만하지 못해 홀쭉하게 보인다.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의 정면은 볼 수 없었다.
돌아앉은 불상을 보려면 불단 위를 올라서 삼존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윤경렬선생의 해설을 옮긴다...
이 불상은 몸체만 돋을새김으로 나타내었고 연화대좌는 선각으로 표현
되었다. 수인은 설법인을 하고 있으며 살결이 풍만하여 얼굴은 둥글고
곱게 다문 입에서 대단히 조용한 느낌을 주는 불상이다.
동여맨 옷끈은 부챗꼴이 아니고 우리나라 저고리 옷고름처럼 매듭코를
나타내었다. 다른 불상들보다 높이 앉아 삼존대불을 마주보고 있다.
삼존대불의 뒷면
사방불에도 남북 두 군데에 그 흔적이 있고 삼존대불의 뒷면에도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으니 이 불상들은 원래 목조로 된 건축물 안에 있었던 것
으로 추측이 된다.
삼존대불 뒷면의 사진은 출입통제가 되기 전 촬영된 자료사진이다.
(사진: http://cafe.daum.net/touralone4/8LpW/47)
삼존불에서 남산의 주능선 방향인 서쪽 길을 따라 하늘로 솟아오른 가파른 바위산을 50여m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상으로 가는 길목에 다다른다.
아니면, 고위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고위봉 능선과 봉화대능선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20여m
내려오면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에 신선암 마애불이 있다
바위산의 능선에서 바라본 동남산의 시원하게 펼쳐진 모습이다. 멀리 배반평야의 너른 들판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여장부 선덕여왕의 묘가 있는 낭산(狼山)이 눈에 들어온다.
칠불암의 마당이 손바닥만큼 작게 보이고 마애보살상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절벽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금이 저리듯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칠불암에서 신선암 마애불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진 좁은 암반길이라 매우 위험하다.
특히,눈이나 비가 내려 바닥이 미끄러운 경우에는 이 길의 통행을 금해야 하고, 능선에서 돌아
내려오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암반 위에는 지름 10cm정도의 구멍이 두 걸음 간격으로 몇 군데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곳에 철기둥을 박고 쇠사슬로 안전난간대가 설치되었음이 틀림없다.
요즈음 산행이나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인구나 동호회가 많이 늘었다. 많은 이들이 찾는 위험한
곳을 저대로 방치하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입구는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마애불 위의 신선암 절터에서 마애불로 내려오는 길은 입구가 비교적 넓게 되어 있어 이쪽 보다는
안전하게 답사를 할 수 있다.
신선암 마애보살좌상, 보물 제199호
현기증이 나는 발 아래를 애써 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입구를 돌아서면, 하늘로 솟은 바위에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하강한 관세음보살이 속계를 지그시 내려다 보고 있다.
이 험한 절벽끝에 새겨진 마애불 부근의 넓은 곳은 5m 정도이나 마애불 정면은 사진을 찍기
위험할 정도로 좁다. 촬영도중 자칫 무심코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뒤는 수십길 낭떠러지다...답사자료를 찾으면서 보살의 정면사진이 뜸했던 이유를 와서야 알았다.
지형이 이러하니 이 곳은 땅 위라기보다 허공인 셈이다
마애불에서 눈을 들어 앞을 내다보면 아득한 아래 세상은 송림의 푸른 구름으로 덮여 있고, 멀리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하늘 위에 솟아있는 봉우리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되니, 내몸은 부처와
함께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환경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보통의 일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생명을 다하여 부처의 밝은 세계를 동경하는 소망과 정열이 없이는 이러한 환경을 찾을 수도 없
었을 것이고,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러한 험한 암면에 부처를 새길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남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이 암면(岩面)은 비가 와도 부처가 젖지 않도록 윗쪽면이 조금
앞으로 나오도록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곳에 높이 1,53m, 너비 1.27m의 배광(背光)을 감실
(龕室)모양으로 파면서 돋을새김으로 보살상을 나타내었다.
옷자락으로 덮여있는 의자 위에 걸터 앉아 한 손에 꽃을 들고 한 손으로는
설법인을 표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채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
이다.큰 사랑(대자비:大慈悲)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가지고 우리들 세상
으로 내려오는 모습인 것이다.
몸체 뒤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신광이 나타나 있고 머리 뒤에는 달무리 같
이 둥근 두광이 부드럽게 어려있다. 패어진 얇은 감실은 그대로 주형광배
(舟形光背)이니 어느 것 하나 재치있게 표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광배 위에는 너비 8.2cm 길이127cm 깊이 6cm 되는 홈이 일직선으로 가로
패어져 있는데,이곳은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차양(遮陽)을 달았던 자리로
짐작된다.차양홈 위에 삼각으로 홈이 파져 있는데 바위 위에서 흘러오는
물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불상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극도
의 배려를 한 흔적이다.
머리는 보계(寶髻)를 틀어 크게 올리고 그 둘레에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하였다.장식을 동여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양 귀 언저리로 흘러내려 두 어깨 위에 보기좋게 드리워져 있다.
살결이 풍성한 둥근 얼굴에는 하현달 모양으로 패어진 고운 눈썹에 연결
되어 기름한 코가 알맞는 맵시로 솟아있어 둥글고 풍성한 덕성스러운 얼굴
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도 발그스레하여 핏기가 감도는 입술은 누구에게나 정다움을 느끼게
하는 낯익은 얼굴이다.
두 귀에는 화려한 귀고리가 달려 있고 목에는 구슬 목걸이가 걸려있다.
오른손에는 화려한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었고 왼손은 설법인을 표시
하여 왼쪽 가슴에 들었는데 다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의 표정은 다시 이 손에
반복되고 있다. 손가락들의 변화도 다양하지만 맑은 피가 감도는 듯 따스함
을 느끼게 하는 조각술도 가히 일품이다.
허리에는 치마끈이 매어지고 그 자락이 의자 위로 흘러내렸는데 왼쪽발을 그 자락 위에 편안히
얹어놓고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걸터앉아 있다. 구름 속에서 한 송이의 연꽃이 피어 나와
드려진 오른발을 받들고 있다. 오동통한 발은 돌이 아니라 사람의 살결처럼 선이 부드럽다.
관세음보살이 걸터앉은 자세는 유희좌(遊戱坐)라 칭하는 흔치 않은 앉음자세다.
결가부좌는 반드시 두 발이 모두 양 무릎 위에 얹혀져 있어야 하고,반가상(半跏像)은 어느 한 쪽
발이 반대편 무릎 위에 얹혀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보살의 왼쪽 발은 의자 위에 얹혀 있을 뿐 무릎 위에 얹혀져 있지 않다.
결가(結跏)를 모두 풀어놓은 자세이니 이러한 앉음자세를 유희좌(遊戱坐)라 부른다.
아주 편안한 앉음자세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은 부담없는 자세로 편안히 앉아서 우리 인간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면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신선암 절터
마애불의 바로 윗쪽에는 칠불을 모신 이곳 큰 사찰의 부속암자였을 신선암의 작은 절터가 있다.
축대 위가 절터이고 아래는 작은 앞뜰로 삼았다. 신선암이란 암자가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마애불의 이름도 신선암마애불로 불려지게 된 것인데,절터 어디에도 그에 대한 안내문은
없다. 절은 간 데 없고 무심히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발자욱만 오갈 뿐이다......
높은 곳에 앉아 동쪽을 향한 신선암마애불은 남산의 많은 불상 중 제일 먼저 달빛과 햇빛을 받는다.
보름달이 떠 오르면 수월관음(水月觀音)이 되고, 아침 햇살을 받으면 돌 속에서 살아나 인자한
미소로 오늘도 서라벌을 내려다 본다.......
참고자료: 윤경렬 著 "경주남산/ 겨레의 땅 부처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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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너머님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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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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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늘 가보고 싶던 곳인데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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