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를 천하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진시황은 변방 왕들을 거느리며 그 위세를 펼쳤다.
자신의 호령 한마디에 영웅과 미녀는 무릎을 굽혔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진시황.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장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들을 방방곡곡의 영험한 곳으로 보내어
제를 올리고 자신의 무병장수를 밤낮으로 빌게 했다.
그의 신하 중 서복(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있었다.
정부의 정사를 처리할 뿐만 하니라 의약,
연단술, 점성술, 항해술에도 식견이 있었고,
황제와 귀족들 뿐만 아니라 평민들과 접하며
고충을 헤아리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시황제는 특별히 서복을 총애하고 있었지만
점점 의심이 많아져 가는 시황제가 언제 변덕을
부려 자신을 해할지 서복은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시황제가 서복을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얼마나 살 것인지, 그대는 알 수 있는가?”
“폐하, 온 나라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어찌 하늘이 그 뜻에 무심하겠사옵니까.
그리고 마침 삼신산에 있는 불로초에
대해서 진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불로초가 있단 말이냐!
당장 그것을 대령하도록 하라.”
“폐하, 그 약은 이 대륙에는 없사옵고
저 동해바다 멀리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이렇게 삼신산에 있다고 합니다.
짐승도 꽃도 새도 순백색의 신성한 것들로
불로초도 항상 향기로운 구름과 안개가 둘러싸여
속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해도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서 구해오도록 하라!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옵니다.
불로초는 신선들의 음식으로 속인의 눈에는
불로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동남동녀 오백명과 그들을 태우고
갈 배를 주소서. 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오겠나이다.”
그는 황제가 없는 곳으로 떠나서
살 궁리를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영생불사를 할 수 있다는 욕심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곤륜산의 천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 큰 배를 여러 척 만들고,
몇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품도 준비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각 지에서 뽑은 동남동녀
오백을 태우고 배는 동해로 출발하였다.
서복선단은 발해를 지나
오랜 항해 끝에 영주산을 찾아내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곳은 해중의 섬이면서 산.
.
“이 곳이 영주산(지금의 한라산)임이 분명하구나.
저 산봉우리가 하얗고 하늘에 닿아 있지 않는가.
저기 뛰노는 사슴 중에는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백록도 있으리라.
모두 내려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불로초를 찾아보도록 하여라."
조천읍 조천포(朝天浦)
제주도 해상관문., 조천진성
그들은 제주섬 기슭
조천포에 닻을 내렸다. .
...................조천포.................
조천(朝天)이라는 명칭은 14세기 초
조천관(朝天舘)이 설치된 이후 생긴 것.
조천(朝天)이란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순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뜻 지명.
..............................................................
.
동남동녀들은 절경을 보며
불로초를 구했지만 서복은 중국을 떠날 때
이미 다시는 황제에게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
서복은 제주를 떠나면서 조천포와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서불과차.
(徐市過此), 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귀를
새겨두고 동쪽을 향하여 떠나고, 그들 일행은 동쪽
어느 땅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나라를 이루었다 한다.
전설, 그 장소를 찾아서
- 정방폭포와 서복전시관 -
정방폭포 위에는 서복의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서복전시관이 있다.
또한 오늘날 또한 오늘날 북제주군 조천은
서복이 아침 기운을 헤아려 포구에 조천이라
새겼다는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전설 이야기'.
영주산 시로미
한라산 시로미
.........정방폭포(正房瀑布)......
서귀포시 서귀동에 위치한 폭포
(높이 23m, 너비 8m, 깊이 5m)
폭포 절벽에는 중국 진나라 때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이 한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구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놓은 '서불과차'
각자가 있으며, 서귀포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온다.
해변 따라 서쪽 300m 지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식동굴.
내부에 큰 석불좌상이 있다.
서귀포 동쪽해안에 위치.
동양에서 유일한.,'해안폭포'
폭포수가 바다로 직접 떨어진다.
하늘에 비단을 드리운 것 같아.,'정방하포'.
예로부터 영주12경 가운데 제5경으로 유명.
배 타고 먼 바다에서 보는 모습이 아름다우며
앞바다 숲섬· 문섬· 새섬· 범섬에는 난대림이 울창.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정방폭포 앞바다 풍광.
......................................................................
'정방폭포 인근 동굴속 불상은
언제 누가 조각해 놓은 것일까?'
목호(牧胡)들이 새긴듯 추정된다.
.
목호(牧胡)는 13세기 원(元)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장(아막阿莫)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몽골인(胡)을 말한다.
'고려사'
기록에는
하치(哈赤),
달달목자(達達牧子),
달단목자(韃靼牧子),
탐라목자(耽羅牧子)
로도 등장한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한 후에
원은 제주도의 동서에 목마장을 세웠고,
목마장은 원나라 조정이 관리를 맡아 주재.
목호의 수는 1,400명에서 1,700명
약 1백년 간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목호들은
공민왕 즉위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펴자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이
공민왕의 명에 따라
2만 5천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정벌한.,'목호의 난'.
서귀포 이 일대 마을은
'목호의 난' 최후 격전지.
목호들이 제주도에 100년간
주둔했을때 조각한 불상 같다.
원나라 청동불상-고행석가(苦行釋迦)
바다가 없는 몽골 내륙 민족들이
불교 만큼 신성하게 여기는.,바다.
불심(佛心)과 바다의 합작품 아닐까?
외돌개 황우지해안에서 바라본.,범섬
'목호의 난'때 목호 잔여 패잔 세력들이
범섬으로 피해 최후로 저항했던 격전지.
황우지해안.,황우지 12동굴.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함정들을 기습 공격하기 위한
일제 카이젠(어뢰 자폭특공대) 인공동굴
황우지해안.,'천연수영장' 선녀탕.
서귀포항 앞바다 5 무인도는 그림같다.
저마다 전설과 이야기가 있는 무인도들.
서귀포항 남서쪽 앞바다 해역 5개 섬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바다에 떠 있어
어족이 풍부해 바다낚시 매니아들의 천국.
형형색색 산호초와 물고기떼,
온갖 해초 등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로운 수중 경관을 자랑한다.
문섬 - 서귀동 서귀포항 남쪽 1.3㎞ 해상
서귀포시 삼매봉 아래의 외돌개에서 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떠 있는 섬이 문섬.
해발 73m, 면적 96.833㎡의 무인도이다.
문섬 해저에는 난류가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열대성 어류들이 서식하며
63종의 각종 희귀 산호들이 자라고 있어
국내 최고의 수중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제주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제 45호.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하다가 그만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
이에 진노하여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졌는데
그 조각이 흩어져서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범섬.
그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전하며., 그리고
문섬 동북쪽 바다에는 새끼섬 의탈섬이 자리잡고 있다.
문섬은 참돔, 돌돔, 벵에돔(흑돔),
벤자리 등이 많이 잡히는 5월~7월,
9월~11월 사이에 낚시하기에 좋다.
* 섶섬 - 서귀포시 보목동 남쪽 450m 해상
서귀포시에서 남서쪽으로 3㎞ 떨어진 무인도.
450종 난대식물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울창한 숲.
섬의 면적은 142.612㎡
가장 높은 곳의 해발155m
* 새섬 - 서귀포항 앞 무인도(104,137㎡)
새섬이 있어 천혜의 양항이자 미항.,서귀포.
한라산이 화산 폭발을 하면서 봉우리가 깎여
이곳으로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새섬은 새섬교로 또는 썰물때 걸어 갈 수 있다.
...........정방폭포(正房瀑布).........
서귀포 동쪽해안 서귀동에 있는 폭포.
높이 23m, 너비 8m, 깊이 5m.,해안폭포.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로., 동양 유일.
마치, 하늘에서 하얀 비단을 드리운 것 같다.
옛부터 영주12경 가운데 제5경으로 유명하다.
뭍에서 보다는 배타고 바다에서 보면 더 비경.
정방폭포 앞바다에 떠있는
숲섬· 문섬· 새섬· 범섬에는
난대림이 울창하여 남국 정취.
폭포 절벽에는 중국 진나라 때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이 한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구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놓은 '서불과차'
서귀포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300m를 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해식동굴이 있으며
내부에는 큰 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서귀포항.................
서귀포항은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한라산이 있어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평온한 기상.
관광 잠수정으로 인해 해양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다.
무역 항만이지만 출입하는
선박 대부분 국내 화물선.
서귀포항 안에 새섬이 있다.
1920년대 초, 어항(漁港)이었으나,
현재 외래객을 받아들이는 관광항.
1925년 새섬과 연결한., 216m 방파제.
서귀포항 최초 외곽 방파제 시설이었다.
문섬[蚊島]·새섬[鳥島] 등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한다.
....................................
.
새섬교
새섬 서쪽 맞은편 해안
서귀포층 패류화석지대
(천연기념물 제195호).
서귀포항
서귀포시 법환동.
해안가 벼룩시장.
시원한 바다 바람이 있고
예술혼이 숨쉬는 곳에서의
힐링 여행은 누구에게나 로망.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서귀포., 이중섭 문화의 거리
그 곁에 위치한.,'예술벼룩시장'.
'예술 + 벼룩시장' 이름이 생소하다.
'예술'이라 표현하긴 멋적고
상인이라 표현하긴 어설프다.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못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예술가의 삶이 목적일까?
목구멍 풀칠이 목적일까?
서귀포예술(벼룩)시장
.
.
'이중섭.,누구일까?'
이중섭(1919 ~ 1956)
소와 아이들을 즐겨 그린 화가,
화구를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여
담배를 싼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는 서양화가.
'그는 향년 40세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갔던 것일까?'
...........'서양화가 이중섭' 삶의 여정.................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꼽히는 그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중섭
혹은 ‘소’ 그림이라고 하면 알 만큼 가장 대중적인 화가.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출생
할아버지 때부터 부농, 형도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이 때문에 순수하게 화가로서 생활하기 부족함이 없었다.
8세 때까지 마을 한문 사숙에서
《동몽선습》, 《맹자》, 《논어》
등을 배우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이중섭은 삼남매 중 막내로,
형, 누나와는 나이차이가 많아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림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서도 오직 그림만 그렸다.
그런 그를 형이 나무라면 광에 숨어 그림을 그렸다
덕분에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아
평양 고등보통학교 입시에 실패.
보통학교에서 이중섭은 당시 유화 화가였던
김찬영의 아들로 훗날 서양화가가 된 김병기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서구 미술의 세계에 눈을 떴다.
김병기 집에 들락거리면서 유화 도구.
물감, 각종 서구 화집들을 접한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우며 서양화 입문.
화가 임용련은 후기 인상파 경향의 화가로,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물.
당시 화가나 미술교사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이력의 소유자였다.
이중섭은 색채와 조형의 기초, 구상 등을
중시하는 임용련 아래에서 소묘와 에스키스
(esquisse, 작품 구상이 담긴 초벌 그림) 등의
기본기를 익혔으며, 후기 인상파 화풍도 접했다.
무엇보다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용련은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비하여
한글 자모를 이용한 구상화를 그리게 했다.
1936년,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임용련 권유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
그러나 스케이트 타다 다치는 바람에 입학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림을 반대하는 형 때문에
집에 붙잡혀 있었다고도 전한다.
1년 후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 입학
이곳에서 친구인 김병기를 다시 만났고,
훗날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질 유영국, 북한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릴 문학수, 절친 시인 구상도 이때 만났다.
이중섭은 문화학원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풍미하던 전위 미술에 강하게 끌렸다.
강인하고 굵은 선이 특징인 이중섭 화풍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으며, 그는 학교 내에서
곧 '동방의 조르주 루오'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이중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츠다 세이슈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일본 최초로 추상미술을 표방
자유미술가협회를 결성한 인물이었다.
츠다는 이중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
동양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표현할 사람은 이중섭뿐이라고 격려.
이중섭은 그의 아래에서 문학수,
유영국, 안기풍 등과 함께 자유전에
그림을 출품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
키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 노래, 미술 등에
다재다능했던 이중섭은
여학생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는데, 그중에 후일 부인이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이중섭에게 화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선사했다.
태평양 전쟁 군국주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며
사상과 예술 활동이 억압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때문에 프랑스 유학길도 막혔으며,
일본 내에서 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심해져
그는 1944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마사코와 헤어지고,
화가로서의 길도 막힌
이중섭은 좌절하여 매일
들판에 나가 소를 그렸다.
그러나, 이듬해 마사코가
전쟁의 포화를 뚫고 고향
원산(평원군)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다음 달 혼례를 치렀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고향에서
사랑하는 여인 마사코과 함께 그림 그린
이때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러나, 그에게 그러한 행복과
안정적인 생활은 잠시뿐이였다.
곧, 북한사회가 급속도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그에게 다시 고난이 시작되었다.
1946년, 형이 지주 계급으로 지목받아 처형되고,
그에게는 공산정치 선전용 그림을 그리라는 압력.
예술을 혁명적 도구로 인식하는 공산주의 체제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곧 퇴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당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의 친구 구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갔다.
이 무렵 이중섭은 첫아들 태현을
병으로 잃는 개인적 슬픔도 겪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 두 아들,
조카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섭은
종교 단체 주선으로 제주도
서귀포 한농가에 자리 잡았다.
미쓰이 물산 중역의 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마사코
생업에 종사한 일 없이 화가로
살아온 그에게는 생활력이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활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운 시기라서 피난민에게
나오는 배급을 받고, 마사코가 이삭을 줍고,
이중섭은 게를 잡아 겨우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들과 게, 물고기를 그리는데
열중하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부두에 나가 막일을 하는 한편,
다방에 나가 화가들과 교류하며 단체전 준비.
그에게는
가족과 그림 만
삶의 희망이었다.
1952년 7월,
그는 아내 마사코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기약 없는 피난민 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결정이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허전함으로
그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함을 보다 못한 친구 구상이
이듬해 선원증을 구해 일본행을 주선했다.
그러나, 일주일짜리 임시체류증
이중섭은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패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마사코의 집안 역시 어려웠기에
그까지 받아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화가 전혁림, 작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의 배려로 작품 활동을 계속.
1952년 12월 한묵, 박고석, 손응성,
이봉상과 함께 기조전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4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통영 성림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5년에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
1954년, 서울에 올라와 친구 집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하루에 빵 한쪽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종이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
생활고, 가족을 떠나보낸 좌절감과
고독감은 점차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종종 기이한 행동을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거식증과 영양실조, 몇 차례의 탈출 소동
등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 보다 못한
친구 한묵이 공기 좋은 곳에서 그를 곁에 두고
요양시키기로 결심하고 정릉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런 노력에도 이중섭은 약 반 년 후인
1956년 초여름, 우울증과 폭음, 간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해 9월 6일 41세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나머지 유해 절반은 일본 처가집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반쪽이나마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김병기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의 사인은 간장염이지만
그는 굶어 죽었대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다.
혹은 자살이라 해도 좋다.
이 사회가 예술은 소용없다
해도 그림만은 그린 것이요,
그림으로 세상이 안 먹여 준다면
그는 안먹겠다는 처절한 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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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벼룩예술시장'에는
예술의 혼을 포기하지 못한채
벼룩 장터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가난한 예술가들이.,모여드는 곳.
매일올레시장 옆.,벼룩시장
....이중섭 문화의 거리.......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 거리
시민과 예술인들이 함께 모여
예술 창작을 공유하는 예술 시장.
자신이 만든 물건·쓰던 물건·다른 사람에게
알리고픈 재주 등을 펼쳐놓고 서로 배우고,
함께 나누는 생활 창작을 위한 공간이다.
생활 속의 예술을 추구하고
개인의 예술적 자질을 발견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개최.
2008년부터 지금까지
이승택 문화 도시 공동체
쿠키 대표를 중심으로
이중섭 거리에서 열리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나이·직업·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참여하고 즐기고 있으며
생활 창작의 기쁨을 공유하고 있다
문화 예술인과 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창작품을 팔고 사는
예술 벼룩시장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뽐내는 예술 장터, 버리지 말고 나눠 쓰는
나눔 장터, 예술가가 돼 보는 창작 교실 외
그 밖의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내용의 장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참가비는 없고 장터는 무료 제공.
다양한 분야의
문화 예술 창작인들과
일반인들이 만나 소통하고,
예술가와 전공 학생을 비롯해
아마추어 작가, 일반인 등이 참가해
다양한 수공예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함께 칠보 공예·폼 아트·한지 인형 만들기 등
거리 창작 워크숍 활동으로 예술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쇠퇴해가던
도심 속 거리인 이중섭 거리는
'중섭 공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메이비' 등의 공방과 까페 들이 들어서
서귀포시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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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카페 '유토피아'
제주 올레길 6코스.,'이중섭 문화거리' 카페촌
...........서귀포 몽마르뜨르 언덕.............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에 카페거리가 있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고흐,
미술사상 가장 뛰어난 판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몽마르트르에서 그들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었다.
그들 흔적을 보기 위해 전세계 관광객이 찾는 그곳.
서귀포 "몽마르트르 언덕"이라는 거리.
이중섭 생가 중심으로 150m 남짓한 언덕.
마흔 나이에 요절한 이중섭(1916~1956).
그를 생각하면 연민과 안타까움을 동반한
그리움의 감정 등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전쟁과 광기의 시대,
1951년 1월 이중섭은
원산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을 나와 이곳에서
1년 남짓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화순항을 거쳐 서귀포에 들어온
이중섭은 정방동 솔동산 마을의
반장 송태주에게 방 하나를 빌렸다.
그가 몸을 뉘었을 1.4평 방.
화가의 궁핍한 생활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에., 이슬이 맺힌다.
그는 서귀포에서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같은 그림을 얻었다.
이중섭문화 거리는
이중섭이 산책하거나
스케치를 하러 오간 길.
그가 오갔던 상점과 음식점은 이제 없지만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창작센터를 중심으로
공방, 소규모 갤러리, 창작 공간, 카페, 음식점,
벽화 등 그곳에서 가장 눈길끄는 곳은 단연 카페들.
카페에 예술가와 여행객
시민들이 여유롭게 앉아 있는
풍경은 몽마르트르 언덕 장면이다.
이 거리에는 여러 카페가 있는데
서귀포 토박이 운영 카페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카페 메이비(may飛).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다 고향 서귀포로
내려와 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40년 운영하던
꽃집 옆에 카페를 열었는데 흩으러진채 정리된
책들과 직접 그린 그림으로 카페 공간을 장식했고,
카페 곳곳에 아름다운 꽃내음과 커피향으로 채웠다.
카페
꽃내음은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술가, 도민, 여행객이 모여들면서
메이비 만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작은 연주회, 화가와 사진가들은 전시회,
작가들과 시민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카페란 공간을 넘어 사람들의 소통 공간,
문화와 사람이 연결하는 공간이 되었다.
메이비 건너
‘빌라드 아토
(villa de ato)’도
눈여겨 볼만하다.
산뜻한 파스텔 색조의 분홍빛
보랏빛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 2층 테라스에 활짝핀 장미.
마치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어느 거리에 있을 법한 모습.
이 카페의 주인장 최수현씨는
조소과를 졸업한 서귀포 토박이,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꽃으로 치장
샹들리에까지 주인장이 직접 꾸민 것.
프랑스 어느 카페에 있는 착각마저 든다.
이곳 딱새우 튀김이 들어간
샌드위치는 그 맛이 일품이다.
유동커피 또한 서귀포 출신
바리스타 운영 커피전문점.
고흐와 툴레즈는 담배 연기 자욱한
몽마르트르 카페 그들만의 예술세계.
서귀포 이중섭 문화거리에는
이중섭이 다닌 카페는 없지만,
이중섭의 예술을 사랑한 서귀포
토박이들이 만든 카페들이 있다.
이 카페에서 제2의 반 고흐,
이중섭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
서귀포 몽마르트르,
이중섭 문화의 거리에서
예술과 커피향을 느껴본다.
.......................................
놀멍쉬멍걸으멍
카페 메이비.,창밖 새섬 풍경
책한권 읽으멍 쉬다가게
이중섭 문화의 거리
카페 '빌라도 아토'
카페 '메이비'
이중섭 그림 - 황소
1938년 분카 가쿠앙
미술대학.,재학시절.
생일 : 1916년 4월 10일
데뷔 :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1941년)
학력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매력 : 자유분방하면서 격렬한 화풍
출생 : 평남 평원군 송천리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아들로 출생.
형 12년 위, 누나 6년 위
이중섭은 귀한 막내였으나
1923년 5세 무렵 부친이 작고.
1925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림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이중섭 스승' 임용련
예일대 미대 수석 졸업
북한군에 총살을 당했다.
193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당시 교사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식민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하여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고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했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1934년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졸업 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35년 졸업후 곧 일본 동경으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했다.
1936년 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했는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했다.
이무렵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졸업.
도쿄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 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원산에서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했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도 햇다.
이무렵 시인 오장 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3년 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선택되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큰 아들 태현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 34세 때는
차남 태성이도 태어났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한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소를 든 사람, 1942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되었고.
1950년 35세,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 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는데,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렸는데,. 나중에
군인이 패를 지어 보복으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다..
이중섭이 기거했다는 '서귀포 초가'
이 작은 집의 맨 끝방에 머물렀다.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와서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되고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여.
3. 1절 경축미술전에 작품을 내었다.
그러나
가난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가고
이별하게 되었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친구 김병기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후배가 착복함으로써 처가는
거액의 빚만 지게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중섭은 실망과 괴로움을 안고
8월 시인 구상이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장모의 냉대와 처자식의 어려움을 보고,
일주일 만에 귀국해버렸다.
이중섭이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지나치리 만큼
둔감한 경제적 불감증.
고향후배에게 사기를 당하여
처가가 많은 빚을 지게되었고
일본에서 이중섭의 능력으로는
그 빚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던 점,
당시의 미묘한
한일관계로 인한
출입국의 어려움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얼굴을 맞댄 가족. 1953.
1954년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했다.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
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도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고,
간염이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이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자화상.
이중섭 자화상 1955년.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 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되었다.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
.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 이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여관방을 전전 하면서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였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황달이 극심했다고 한다.
부산 남포동 - 평생지기 화가 한묵과 함께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다.
그러나, 곧 다시 그는
서대문 적십자병원 입원.
.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이중섭의 마지막 유작.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결정,
그러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이중섭 화백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화가가
가톨릭에 귀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2004년 8월 18일
뉴스가 있었다.
화가는 편지에서
“제(第)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사람이 되고 싶다” 고백.
화가가 작고하기 직전인
1955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한장 분량.
그 뒷면에는
’具常兄前 李仲燮製’
(구상형전 이중섭제)
라고., 적혀 있다.
구상 시인과 절친한 친구.,이중섭.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비록 자신보다 나이 어리지만 구상을
’형’으로 높여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시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이중섭(李仲燮 : 1916∼1956.)...........
오직 서양화가로서 삶을 살다간 그의 인생 이력서
서양화가. 호는 대향(大鄕).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李熙周) 둘째 아들로 출생. 오산고등보통학교
(五山高等普通學校)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를 받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
[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
이무렵 일본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원산에서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창작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당국 비판을 받았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자유를 찾아 원산 탈출,
부산 거쳐 제주도 도착.
생활고로 인해
다시,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
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40 나이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
이봉상(李鳳商)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自傳的)인 요소이다.
「싸우는 소」·「흰소」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개인 소장)·
「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이상 개인 소장)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이중섭미술관.,벽화
서귀포시.,'이중섭 문화의 거리'
.
,
'이중섭 부인' 이남덕 여사
비운의 화가.,이중섭
2012.5.22 망우리 묘소 참배
일본에서 망우리 묘소 참배를 위해
귀국한 2013.7.2 마사코 여사(93세)
2013.7.15
제작되는 중에, 이남덕 여사가 15일 제주를 찾는다.
이 영화를 촬영 중이다.
바닷가 등에서 촬영하게 된다.
이 여사의 가슴시린 사랑이야기.
두 자녀와 함께 11개월 간 살았다.
4식구가 함께 살았다.
술회할만큼 힘들게 살다갔다.
걸작을 탄생시켰다.
국내 개봉은 내년 9월로 잡혔다.
제주에서 촬영되고 있다.
전해졌다.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으로 되돌아 왔다.
이중섭 화백은 통영에 2년간 머물렀다.
'황소'를 그리기도 했다.
3년 정도 머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