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약속된 날이다. 가이드 투어비는 성인 35유로로(45,000원 정도) 결코 작지 않은 돈이다. 가이드 도움 없이도 돌아볼 수있다. 그렇지만 크고 복잡한 구조의 박물관을 길 헤메지 않고 돌아볼 자신도 없을뿐더러 준비도 없었고, 지식도 없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우미가 필요했다.
가이드는 시력 잃은 사람의 눈이 되는 일 같다. 눈은 있지만 볼 수 없고, 그래서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 보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박물관 여행을 한 하루가 얼마나 재미있었고, 유익했는지 모른다.
여행은 눈으로 보는 여행이 있고, 머리와 가슴으로 하는 여행 그리고 맛과 멋을 느끼는 여행이 있다고 한다. 몽생미쉘이나 에뜨르타는 눈으로 그냥 보는 여행이었다면 루브르 박물관은 반면에 눈과 머리로 멋을 느끼는 여행이 아닐까 싶다.
호텔에서 나온 시간은 이른 9시, 아무래도 약속시간을 어길 것 같다. 처음부터 욕심을 낸 나는 이미 한 달 여행을 한 사람처럼 탈진한 상태다. 어제 밤 11시 30분쯤 자리에 들어서 오늘 아침 7시 40분까지 단 한차례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숙소인 에탑 호텔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연결되는 9호선 Porte de Montreuil 역은 걸어서 5분 거리, 처음으로 파리에 와서 타 보는 지하철이다. 역사로 들어가는 곳은 M 이라는 입간판이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지하철 승차권은 1.4유로로 구간에 관계없이 파리 시내를 갈 수 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들어가면서 승차권을 넣으면 나올 때는 그냥 나오록 되어 있다.
유럽을 떠나기 전 나는 얼마나 많은 채널을 통해 파리 지하철에 대해 간접 경험하고 학습(훈련)되었는지 모른다. 사전 정보에 충실한 나는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양 미간을 좁히고 눈에 힘을 주어 내가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면서 좌우 경계근무를 선다.
일정 시간(대략1-2분)을 간격으로 좌우로 머리를 돌리고 주위를 살피면서 주머니에 든 지갑과 여권 등을 확인하고 또 다시 확인을 하였다. 나는 내 눈과 몸의 모든 촉수 감각기능을 최대한 살려서 내 주변(사정거리)의 사람은 도둑일 수 있다는 의심으로 주위 사람을 살폈다. 이렇게 나는 내가 그 많은 사람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어 똑 같은 여행기를 적지 않으리라는 집념에 사로잡혀 처음 타는 파리의 지하철 풍경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군인이 여자친구한테 과도한 포장으로 그럴싸하게 군대이야기를 한 것처럼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모두 도둑님들만 이용을 하고, 그래서 그 명성에 맞게 도둑철이라 이름 지었다. 또 하나 파리에서는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개똥을 밟지 않고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다. 조심하라. 개똥을...그러나 5일 동안 나는 재수가 좋아서 그런지 단 한 차례도 개똥은 밟지 않았다.
조심하는 일이야 뭐 그리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모든 파리의 시민을 도둑놈의 무리로 의심을 하는 일은 지나친 일부 피해자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폭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피해의 사례가 있었으면 유럽 여행에 관한 소개가 되었을까 생각을 하면 한편은 이해되기도 한다.
루브르박물관 지하철역 입구
9시35분, 약속된 시간을 5분 넘겨 일행은 마음 바쁘게 루브르박물관 1번 출구를 찾아 나갔다. 그러나 만나기로 한 가이드는 보이지를 않는다. 20분이 지난 9시 55분이 되어서 가이드는 나의 시선과는 다른 반대 방향에서 내게 손짓을 하며 뛰어 온다. 약속된 시간 5분이 늦어서 허겁지겁 마음 바빠하던 나는 잠시 허탈해하며 그래도 더 늦지 않게 도착해준 것을 감사하고, 나타나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했다. 서로 기분 나쁘게 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투정어린 말 한마디 던지는 일로 상한 감정을 삭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루브르박물관, 비 내리는 어제 밤 그렇게 에탑 호텔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이곳 어딘가를 지나친 듯 낯이 익었다. 프랑스 파리 첫 날 밤에 날 깨웠던 코걸이 주인장 아저씨, 푸석푸석한 머리와 아무렇게나 쌓아둔 빨래꺼리와 입다만 옷가지, 너저분하게 이리 저리 정리되지 않은 종이(서류)와 책들이 쌓인 책상, 그러나 오늘 그 아저씨의 모습은 온대간데 없다. 너무나 깔끔하고 산뜻하다. 머리에는 무스도 바르고 정장을 한 아저씨는 변장술에 능한 마술사처럼 보였다.
루브르박물관 앞....
가이드미팅을 한 지하 커피숍...
커피 맛이 참 좋았다. 프랑스 이태리 사람들은 아주 작은 잔에 진하게 커피를 빼서 마신다.
루브르박물관 가이드 투어 일정은 지하1층 커피숍에서 시작 되었다. 7명이 함께 가이드투어를 받았는데, 가이드는 친절하게 직접 커피와 빵을 사 들고 와서 오늘 투어에 대한 개괄 설명에 들어갔다. 역시 프로의 모습은 달랐다. 솔직하게 첫인상 그리 좋지 않아 기대감 없이 대충 삐딱하게 다리 하나 꼬고 앉아 있었다. 평소에 시간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잘 신뢰하지 않는다는 나의 신념 같은 마음의 행동이 표출된 것이다.
잠시 후 레오나르도다빈치와 미캘란젤로, 라파엘, 다비드, 루밴스, 나폴레옹, 모나리자, 1516년 이탈리아 전쟁, 다빈치코드, 세례 요한과 살로매, 배네치아, 모파상, 몽쉘미셀, 낭만주의, 바로크, 프랑스대혁명, 루이9세, 앙리4세, 루이13세, 잔다르크.. 막힘없는 가이드 얘기 속에 나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동안 산다는 일로 비워 두었던 머리에 크나 큰 지식의 꽃으로 가득 채운 것 같다. 그 향기에 나는 만취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는 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림과 조각 들이 서서히 그렇구나 하는 탄성과 함께 새롭게 보인다.
저게 뭐야 했던 그림과 조각들,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의미가 이해되면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무딘 나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루브르에 몰려드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루브르의 상징처럼 된 유리건물이다. 루브르는 원래 궁이었던 것을 프랑스가 대혁명 와중인 1793년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에게 몰수한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던 중 현재의 모습은 1981년 부터 14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던 미테랑대통령 시절 중국계 미국인 아이오밍 페이의 건축설계로 된 것이라 한다.
대 루브르 Le Grand Louvre 계획에 의거 20여년 동안의 공사로 새로 태어난 루브르는 이제 세계최고의 박물관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루브르는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등으로 수집된 거대한 창고였다. 실제 남 얘기가 아니다. 1886년 병인양요 때에 우리의 소중한 많은 문화재가 얼마나 많이 프랑스에 약탈되었는가?
"과연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라는 책을 쓴 어느 저자처럼 나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역사에서 탐욕과 약탈로 채운 문화재 전시장을 둘러 보면서 내가 약탈국에게 값 비싼 입장료까지 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져 든다.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일행과 함께 가까운 곳 식당에서 짬뽕라면을 시켜 먹었다. 방심한 탓일까? 너무나 루브르 얘기에 푹 빠져서 정신을 잃은 탓일까? 점심 식사를 하고 주변을 산책한 뒤 약속된 시간이 되어 약속된 장소에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자그마치 45분이 지나서 한 명이 내게 와 날 찾는다. 또 한 번의 실망감...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되었는지, 이러다가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찾아 갈 것인지, 나 혼자 박물관을 보고 갈 것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잡한 곳에서 손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직접 가이드가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납득이 아니라 용서가 되지 않았다.
루브르박물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삼각형구조물이 문제였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헤어진 장소인 삼각구조물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건물 내 역삼각형의 구조물 앞이었단다. 나는 밖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나와 또 다른 대학생 일행 3명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 하마터면 나 혼자 바보가 될 뻔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분통이 터진다.
분노에 가득찬 마음 억지로 다스리고, 혹여나 일행에게 방해 될 것을 염려해 아무렇지도 않게 속 없는 놈처럼 뒤따르며 오후 일정을 보냈다. 내가 속은 없기는 없는 것 같다. 시간에 흐름은 분노와 격정의 마음을 일순간 봄 날 눈이 녹아내리듯 녹아 내린다. 숨겨진 비밀 찾기처럼 옛 거장들의 발자취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어설픈 헤프닝으로 마음도 상하고 고단했지만, 오늘 하루는 분명 내 인생에 있어 가슴과 머리가 최대로 호강을 한 날은 날이다.
승리의 여신 리케상,
1863년 머리와 양팔이 없는 니케가 사모트라차에서 발견되었다(1950년에 한쪽 팔이 발견되었다). 원래 전쟁과 평화의신 아테네의 하위신으로 아테네 손바닥위에 있곤 했다. 이 승리의 여신상은 드농관 입구 정면에 놓여져 있는데, 가이드 말에 의하면 루브르의 4대 유물의 하나라고 한다.
승리의 여신상은 처음 에게 해 북동쪽 작은 사모트라케에서 발견될 당시에는 여러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석고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2.75미터의 하얀대리석에 조각된 거대하고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등으로 미루어 볼 때에 기원전 190년 경 페르가몬 재단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루브르까지 오는 과정이야 어떻든, 제작 연대와 제작 경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은 얼마 남지 않은 기원전 이전의 고대 그리스 조각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헬레니즘 조소미술의 백미라는 것이다.
루브르에서 가장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조형물,
루브르에서 가장 섹시한 조형물은 세계 제1의 엉덩이란다.
엉덩이가 예쁜 남자를 보면 섹시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그런 남자라고 추천(자칭)이 되어 포즈를 취해 본다. 믿거나 말거나...^^
앙드레아망테냐(1432∼1506) 의 작품인데, 로마 고대양식의 건물과 프랑스 풍경을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
높이 204cm. 밀로의 비너스상이다.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한다. 1820년 4월 8일 에게해에 산재하는 키클라데스제도의 하나인 밀로스섬(밀로섬 또는 멜로스섬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에 거쳐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어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BC 2세기에서 BC 1세기 초(130-120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품위 있는 머리부분이라든지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우아한 몸매의 표현에는 BC 4세기적인 조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두발(頭髮)의 조각과 하반신을 덮는 옷의 표현은 분명히 헬레니즘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 고전적인 자태는 헬레니즘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의 부활이라는 당시의 풍조에서 태어난 걸작이는 평이다
암튼 내가 본 미의 상징물인 밀로의 비너스는 하나의 돌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리요. ^^
나와 상관없이 비너스(Venus)는 미의 여신이다. 흔히 예쁘고 늘씬한 여성들에게 부여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아프로디테(Aphro_dite)>라 부르기도 한다. ‘아프로디테’란 ‘물거품’이라는 뜻의 ‘아프로’와 “물거품에서 반짝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테’의 그리스 합성어이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물거품 위에서 태어난 반짝이는 여신”이다. 미의 여신과 함께 하면 내 눈이 너무 높아지는 것은 아닐찌, 그러나 서울에 가면 이보다 더한 미인은 숱하게 많아 보이니 내가 눈치는 아닐까? 아님 눈치가 없다?? ^^ ㅎㅎ
프랑스엔 개선문이 한 개? 아님 두 개? 그리고 프랑스 개선문은 세계 최고? 모두 아니다. 프랑스에는 개선문이 3개가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개선문은 평양에서 내가 본 개선문이라고 한다.
개선문이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때 세우는 것이다. 전쟁을 한 나라 중 이긴 나라에서는 거의 1개 이상씩 있는데, 전 세계에 한 20여쯤 된다고 한다. 개선문이 이곳에 있네 싶었다. 그랬더니 아니란다..^^ 또 있단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산책을 하는데, 분수대에 평화롭게 잉꼬의 상징인 원앙새(?)가 산책을 한다. 한 참을 지켜봤다. 언제나 함께 20센티를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다녔다.
나도 저 새들처럼 이쁘게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새들을 모델로 사진을 얼마나 찍어댔는지 모른다. 그런데 미안한 것은 한 푼도 모델료를 지불하지 않고 돌아왔다. 다음에 밀린 모델료 한 포대를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미의 여신이다. 이름은 모두 까먹어 모르지만 비너스보다 메끈해서 좋았다. 정말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연락처(핸번)라도 알아올걸 그랬다. ^^ 그런데 핸펀은 갖고 있을까?
함무라비법전,
아주 오래된 학창 시절에 그렇게 연필로 연습장에 적어 외던 그 돌덩이.... 그냥 보면 쓸모없는 큰 돌덩이리(2.25미터, 282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의 눈길로 보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천년 전(기원전 170년 경)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러한 법문이 상세히 기술된 돌덩어리가 발견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함무라비법전에는 "나라의 정의를 규현하고 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않도록 하고 악인이나 베뚤어진 자를 멸하기 위해서" 라는 함무라비의 제정 의도를 보면 실로 대단한 일이다.
내용을 잠시 살펴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쐐기문자로 빼곡하게 쓰여진 내용 중 특히 재미있는 내용은 "제 아비를 때린 자식은 그 때린 손을 부러뜨린다"는 조항이 있다. 아마도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일이 잦아 법률조항을 두었을 것으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모양이다.
또 내게 흥미를 끈 내용이 있었다. 개인의 경제권에 대한 내용이다. 땅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계약을 통해 임대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또한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하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군인과 관리의 의무 규정도 재미를 더 하고, 절도죄와 상해죄인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산모를 유산케 하는사람에게는 그의 딸을 사형시킨다. 아구,,좀 무섭지요?
프랑스가 약탈한 이집트 유물,
한 때 한 시대를 호령했던 그 이름도 유명한 나폴레옹의 접견실, 상들리에와 금도금 장식으로 정말 화려했다.
나폴레옹, 그도 지금은 살아 있지 않다.
나폴레옹의 부인, 왕비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의 한 페이지, 접혀진 종이장 한 귀퉁이에 적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괴짜 화가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1527-1593)
과일·채소·동물·책 등의 사물을 배열하여 인물 초상을 닮은 기괴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런 그의 이중 이미지는 20세기에 와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는데 당시에는 비판으로 무시당하다가 초형실주의가 수위로 떠오르면서 선구자로서 재평가 받기시작한 작가랍니다.
꽃, 과일, 채소, 나무 등 각 계절에 어울리는 재료를 교묘하게 구성해서 사람 얼굴을 만들어낸 작품인데, 봄은 소년, 여름은 청년, 가을은 중년, 겨울은 노년의 얼굴을 표현한 것입니다.
봄의 사진은 모놀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쫒겨 나감의 위험을 무릅서고 몰카에 성공했는데, 여름과 가을, 겨울은 담지 못했답니다. 다음에는 꼭 성공해 올게요. 제 카메라가 워낙 커서 몰카 찍기는 영 어려웠다는 거...^^.
봄 그림이 그 중 가장 아름답고 좋다는 것도...참고로 말씀 드립니다.
모나 리자. <라 지오콘다>
몰카의 백미, 이 그림 앞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선답니다. 그래서 사진도 많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사진은 대단히 잘 찍힌 것이라는 것도 참고 하시고, 잘 감상하시기 바란다.
루브르에 근무하는 직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루브르에서 가장 많은 질문은 모나 리자 그림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한다. 자그마치 70%라 한다. 그 다음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나요? 라는 질문이란다. 그 만큼 루브르에 있어 모나리자의 유명세를 반증하고 있는 것 같고, 루브가 복잡하다는 얘기겠지요?
이 작품은 더 이상의 설명은 군더더기에 불과 할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1452-1519>의 걸작 중 걸작이다. 그런데 왜 이 그림이 그렇게 존귀함을 받아야 하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별도의 공간의 유리관에 모셔져 있는데, 사람 무지 무지 많다.
이 그림을 감상하기에 앞서 레오나르도에 대한 이해가 우선일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이다. 그는 발명가, 건축가, 엔지니어, 도시계획가, 해부학, 식물학, 천문학이 전문가였다.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말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이주하였는데, 앙부아즈 근처의 클로 성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하면 떠오르는 <수태고지> <최후의 만찬> <알굴의 성모> <성 안나와 성 모자>가 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보편적인 초상화 기법(다 빈치 이전의 초상화들은 날카로우면서 명확한 윤곽이 특징)에서 탈피하고자 했는데, 모나 리자의 그림에서 선이 두리뭉실하다는 특징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많은 화가들도 초상화에 생기와 표정을 담고 싶었지만, 다 빈치 만큼의 표정을 표현해 내지 못했다.
온화한 표정의 여성 모나 리자, 이 그림은 바자리에 의하면 젊은 프로랑스의 여성을 그린 것으로 모나리자라 하고 1495년 명사(名士) 프란체스코 델 죠콘드와 결혼했다. 그리하여 "죠콘다"라고도 불린다. 1503년부터 1505년에 이 작품은 그려졌다.
모나 리자의 신비한 미소는 스푸마토(stumato)라는 새로운 화법으로 그려진 것인데, 이것은 이목구비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그림자 처리를 함으로써 보다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차분하고 평온하지만 보는 사람을 동요시키는 알 수 없는 미소, 마치 모든 세포가 생명력으로 고동치는 것 같다.
음, 여러분도 열거된 말에 충분히 동의 되는가? 알고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평범한 한 여인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에서, 그리고 생생한 미소를 담은 초상화라는 점, 두리뭉실하게 선처리를 하여 신비감이 넘치는 그림...분명 명화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 같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얼마나 기겁을 하고 놀랐는지,
숨은 그림 찾기를 잘 하는 사람에게 딱 좋은 사진이다. 가운데 보이는 다리 위에는 몇 명의 사람이 그려졌 있을까? 그 다리에 있는 사람의 성비는 어떻게 될까? 여자 중 바지와 치마 입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요? 정상이네요...^^ 그런데 자세히 사진을 찍고 확대해 보면 67(??)명 정도의 치마 바지 파랑 노랑 빨강의 남녀노소가 있다.
미의 여신 3명,
루브르에 소장된 수 많은 작품의 이름과 내용을 다 알고 이해 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일것이다. 그러나 다만 작은 한 조각(단면)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행복을 느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서글픔도 마음 한 구석 남는 시간이었다.
프랑스 루브르, 역사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큰 감동보다는 작은 억울함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가 문화를 진정 사랑하는 민족이고, 프랑스가 문화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약탈국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루브르의 실체를 보존하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감 혹은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그 많은 역사적 유물이 그들의 소유일런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분명 자신의 역사도 아니고 문화도 아닌 것이다. 생각은 각자의 몫이다. 지나간 역사는 단지 지난 역사에 불과하다고 치부 할 일은 아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내 부질없는 생각일까? 그동안의 사용료와 강제 취득한 것에 대한 사법적인 요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인에게 허락은 커녕 강제로 노획한 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에 대해서는 본래의 주인이 요구하면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아무튼 나는 편안하게 오늘 루브라는 곳에서 그 많은 것을 보아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라 해야 할 일 만은 결코 아닌 것 같다. |
첫댓글 엉덩이가 멋진 건 다 알지 이번 터키서 정확히 확인을 해서 올려야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유,,,^^
루브르관 전시회에 가서 좀 실망했는데 웃는돌님 덕분에 갈증이 좀 채워지네요..일부지만 감상 잘했어요..
감동 받았다니 다행입니다^^ 프랑스와 1세의 로고 사진은 안올렸네요^^ 제가 꼭 부탁했던 사진인데^^ 그리구, 손님들 놓치면 가이드는 더 난리 납니다. 온종일 기다리고 투어 못하고...찾아 헤메고... 그래서 아침 커피마시면서 일부러 정문으로 사용하는 유리피라미드를 사용하지 않고 지하의 역 피라미드를 이용하는 것인데, 점심 먹고 나중에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오전에 들어갈때 보았던 지하의 역피라미드에서 다시 만납니다"라고 확인을 받아두죠.. 사실, 거기서 손님을 놓치는 일은 거의 가이드 2년 동안 두 번 있었던 일입니다.. 확인에 또 확인을 못한 제 불찰이니 느그러이 용서를 비옵니다^^ 투어 후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