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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베잘렐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Vermont) 주 뉴헤이븐(New Haven)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아버지 칼빈 헐버트(Calvin B. Hulbert)와 어머니 메리(Mary E. Woodward) 사이에서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뉴햄프셔주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에 들어가 1884년 졸업하였다. 이어서 뉴욕의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들어가 2년을 공부하고 조선에 오기 위해 1886년 여름 무렵 학교를 중퇴하였다. 1886년 조선정부에서 영어와 신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초빙되어 같은 해 7월 4일 벙커(Dalzell A. Bunker)·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와 함께 내한하였다. 9월 23일 육영공원을 개원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파송된 관리들과 함께 육영공원 절목(節目)을 만들었다. 1888년 9월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여 메이(May Belle Hanna)와 뉴욕에서 결혼하고 함께 다시 내한하였다.
1891년 세계 지리와 문화를 소개하는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하여 순 한글판으로 발행하였다. 1891년 12월 육영공원 교사 고용계약이 만료되어 귀국하였다. 서울에 있던 아펜젤러 등의 주선으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에 임명되어 1893년 9월 다시 내한하여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의 운영책임을 맡고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중단된 최초의 영문 월간잡지 『코리언 레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1895년 1월호부터 다시 간행하였다. 특히 이 잡지 1895년 10월호에서 “한국의 왕비 시해(The Assassination of the Queen of Korea)”라는 제목으로 같은 해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 낭인들이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 무렵 언더우드(H. G. Underwood)·에비슨(O. R. Avison) 등과 함께 암살 공포에 떨고 있던 고종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휴대하고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섰다. 같은 해 11월 28일 경복궁의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이어하려던 ‘춘생문 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나, 중추원의관 안경수(安駉壽)와 친위대장 이진호(李軫鎬)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1897년 5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를 사임하고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맡았다. 1901년 1월 월간 영문 잡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이 잡지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시사적인 문제도 취급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 창립에도 참여하여 10월 28일에 열린 창립총회의 의장을 맡았다. 1903년부터는 『타임스(The Times)』지 객원 특파원을 겸했고, 1904년에는 (AP)통신 객원 특파원도 맡아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꾸준히 연구하여 1905년에 『한국역사(The History of Korea)』 Ⅰ·Ⅱ권과, 1906년에는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지자, 그해 가을 고종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감시하고 있어 친서를 빼앗기거나 암살당할 위험이 있어 서울 주재 미국공사인 모건(Edwin V. Morgan)에게 자신의 미국행을 알리고 고종의 친서를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외교 행낭에 넣어 미국에 보내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모건은 1905년 10월 19일자로 미국 국무장관 루트(Elihu Root)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국정부가 헐버트를 고용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들어있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파송했음을 알리고, 헐버트는 한국에 있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대변자로 알려져 있으므로 ‘편견’과 진술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일본정부도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할 무렵인 11월 17일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늑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다.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백악관에 면담요청을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국무장관의 면담도 거절당하였다. 미국정부는 ‘을사늑약’을 공식 통보받을 때까지 고종의 친서전달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모든 상황이 끝난 11월 25일에야 미 국무장관 루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1905년 12월 11일 고종의 ‘나는 보호조약을 인정하지 못하오. 조약은 총칼의 위협 아래 강압으로 이루어졌소. 나는 이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았으며 윤허하지도 않았소’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아 12월 14일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으나, 단지 파일만 철해 놓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05년 12월 12일자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와 12월 13일자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지에 보도되었다. 특히 『이브닝 스타』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종으로부터 받은 전보 내용을 공개하고, “이것은 일본인들의 배신행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진정한 태도를 천명한, 한국에서 받은 최초의 진심에서 우러난 표현이다. 황제는 수주일 동안 사실상 감금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은 우호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허위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제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고 있다. 그 협정은 무력의 협박으로 체결되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그간 미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워싱턴 당국은 이 탄원서가 이곳에 도착한 즉시 통보를 받고도 일본 측 성명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라 행동을 한 후에도 탄원서의 접수를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미국 정부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고 1906년 6월 초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또 다른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게 될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앞두고, 고종은 특사를 파송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6월 22일자로 헐버트를 ‘특별위원(Special Envoy)’으로 임명하는 특사증을 주었다. 같은 날짜로 작성된 고종의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벨기에 및 중국 정부를 방문하여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앞서 제반 문제를 조율하게 하였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영국 국왕에게 보낸 친서에는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8일 일본의 불의로 맺어진 을사늑약이 사기였음을 선언합니다.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① 대한제국 정부 대신의 서명이 위협과 강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② 대한제국 황제는 내각에 조약문서에 서명할 권한을 준 적이 없습니다. ③ 조약이 서명된 내각회의는 불법입니다. 왜냐하면 대한제국 황제나 총리대신이 소집한 것이 아니고 일본이 소집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을사늑약을 부인하고, 헤이그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 등 제반 문제를 특사와 협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 전 러시아공사관 참사 이위종(李瑋鍾)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비밀리에 파송하였다.
이준이 1907년 4월 22일 먼저 서울을 출발한 후 5월 8일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불(William F. Bull) 가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배로 일본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이때 고종의 친서와 특사증은 불 선교사의 부인에게 맡겼다가 모스크바에서 돌려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자 러시아 외무장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7월 10일이었다. 한국 특사들은 일제의 방해로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장을 맡고 있던 영국 언론인 스테드(William T. Stead)의 도움으로 그날 밤 평화클럽에서 이위종과 함께 한인 특사들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준이 사망한 직후 이상설·이위종과 뉴욕에서 만나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고 7월 19일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등 신문과 회견을 갖고 일본이 한국에서 자행하는 만행을 고발하였다. 1907년 7월 22일자 『뉴욕 타임스』 회견 기사에서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며 일본은 한인들을 말살시켜야만 한반도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다.”라며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그 후에도 런던을 거쳐 8월 1일 뉴욕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위종과 함께 미국 요로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한인청년회에서 낙심하지 말고 독립권을 회복할 마음을 굳게 하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여 그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15일자에 ‘외보(外報)’로 보도되었다.
1907년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 그 동안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지에 실었던 기사들을 발췌 편집하여 『한국에서 일본인(The Japanese in Korea: Extracts from The Korea Review)』을 출판 보급하였다. 이 책의 짤막한 서문에 이어 “이 책에서는 한국에서의 실제 상황을 일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책은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은 사실의 결론을 보여 준다. ① 일본은 그 자신의 약속을 어기고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국제적인 불법행위에 미국을 끌어들였다. ② 한국은 오직 일본의 자본가와 투기꾼들의 이익을 위해서 착취당하고 있다. ③ 한국인들은 스스로 그 나라의 자원을 개발하는 데에 모든 점에서 금지당하고 있다. ④ 서구의 자본과 산업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데 일본은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⑤ 일본 관리들은 아편 판매나 노름 기구 같은 일본에서는 결코 허용하지 않는 사업 형태를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⑥ 교육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지적인 상태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⑦ 일본인들은 정당한 지불을 하지 않고 한국 전역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 ⑧ 한국인들은 일본 민간인들에게 정규 임금의 일부만 지급받고 강제로 용역을 제공한다. ⑨ 한국인들은 그들이 당한 부당함에 대한 법적인 보상을 받을 방법이 전혀 없다. ⑩ 어업과 소금 생산과 다른 산업들을 빼앗기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해고되었다. ⑪ 일본 체제는 너무 부패하여 지난 10년 동안 어느 때보다도 뇌물이 일반화되었다. ⑫ 일본은 한국이 강제로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리게 하고 이 돈을 한국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쓰고 있다. ⑬ 한국은 군인들이 민간인을 누르고 주둔했던 도시들에 창녀들이 우글거리며, 이것은 한국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⑭ 일본 관리들은 그들의 시정의 성공에 대해서 계속해서 특별 성명을 내고 있지만 이 성명들은 사실과는 아주 거리가 멀며, 모든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계가 일본을 비난할 것들을 감추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라는 내용요약을 붙였다.
반일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한국에 있던 재산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1909년 8월 비밀리에 다시 내한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퇴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종은 1909년 10월 조카 조남승(趙南升)을 통해 상하이 덕화은행에 예치한 자신의 예치금을 찾을 수 있는 서류와 10월 20일자로 된 위임장을 비밀리에 보내, 이 예치금을 찾아 우선 미국은행에 예치해 두었다가 후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11월 초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여 상하이 주재 독일영사를 만났으나 일본이 이미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뉴욕에서는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은행가 재콥 쉬프(Jacob Schiff)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1911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성인 교육운동인 셔토쿠어 순회 강좌(Chautauqua Circuit) 강사로서 1922년까지 미국 전국을 순회하며 극동의 정세 및 한국의 역사 등을 강연했다. 언론과 저술활동도 계속하여 1912년 7월 14일자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신문에 장문의 성명을 기고하여 한국에서 일제의 만행과 기독교 탄압 및 당시 재판 중이던 105인 사건 등을 폭로하고, 1905년 을사늑약 때 한국과 맺은 통상조약에 따른 한국 황제의 도움 요청을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절한 것을 비판하였다.
이 기사는 『신한민보』 1912년 7월 29일자에 번역 게재되었다. 같은 신문 1917년 8월 16일자에서도 “헐벗 박사는 한국역사를 저술…한국 옛 문명을 자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그의 문필 활동을 소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미국종군 기독청년회(YMCA) 연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군부대 강연을 하였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 기간 중 그곳에 파송된 김규식과 여운홍의 한국의 독립 청원을 위한 외교활동을 도왔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 각처를 다니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강연을 하며 1919년 8월 15일자로 공증한 “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미주리 주 상원의원 스펜서(Selden Palmer Spencer)를 통해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하여 의사록에 실리게 하였다. 이 진술서에는 을사늑약을 비롯한 일제의 한국침략 자료와 미국정부의 한국 도움 거절에 대한 자료 및 고종의 상하이 덕화은행 예치금에 대한 확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사는 『뉴욕 타임스』 1919년 8월 17일자와 『신한민보』 1919년 8월 19일자에 실렸고,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지 1919년 8월 25일자에도 기고하여 『신한민보』 1919년 9월 9일자에도 “한국사건에 대한 헐벝 교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그 후에도 1919년 9월 28일 시카고 청년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강연을 한 것을 비롯하여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1920년 2월 23일 델라웨어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에서도 한국사정을 강연하여 미국인의 동정과 후원을 요청하였다. 1924년 4월 중순부터 130일간 태평양 연안 110개 처에서 매번 2회씩 한국사정을 소개하는 순회강연을 하였다.
1930년 3월 18일 구미위원부는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인교민단, 대한인동지회, 북미주한인학생연맹의 지원을 받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Korea Must Be Free)』라는 제목의 영문 소책자를 발행하였는데, 이 책도 헐버트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 동안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한미협회가 공동으로 미국 워싱턴의 라파예트호텔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초청을 받고 참석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1905년 가을 자신이 미국정부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에 왔으나, 워싱턴 도착 직후 일제가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음을 증언하였다. 1944년 1월 20일과 21일에도 오하이오 애쉬랜드(Ashland)에서 개최된 한인대회(the Korean Conference)에 참석하여 일제의 압제에서 조속히 해방되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희망에 대해서 강연하고, 미국인들이 도울 방안을 의논하였다. 특히 워싱턴에 기독교인친한회 사무실을 차리고, 1944년 3월 16일자로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인을 돕기 위한 회원 가입을 권고하고,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회원 확보 활동과 기부금을 부탁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하였다. 1948년 8월 광복절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이 초청하였으나, 부인이 투병 중이어서 올 수 없었다. 그해 11월 부인이 죽고, 12월 22일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썼다. 1949년 광복절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다시 초청하자 미 해군 군용선을 타고 7월 29일 내한하였다. 그러나 여독으로 곧 바로 서울 위생병원에 입원하여 가료를 받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8월 11일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