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1 1.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길래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기에 ♣ 요한복음 1장의 이야기 사랑하는 내님 흠모하고 그리는 내님 님께서 내 정원에 오신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얼굴은 상기되었으며 손은 떨려서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날을 이토록 기다리고 준비를 하며 이 정원을 가꾸었건만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엄벙덤벙 무슨 준비를 어찌 해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친구가 온다는 소식은 기쁜 일임에 틁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방문하겠다는 것도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하기조차 두려웠던 그렇게도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 님이 나에게 구혼을 청해온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시작(1장)은 그런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생명이 계시니라"라고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태초에 전지전능이 계시었다" 라고 선포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태초에 진리가 계시었다"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이 께시니라"(1절)라고 말씀하심으로 "내가 너화 대화하겠노라" 하는 당신의 분명한 뜻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도 그리던 그분, 그 분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내게 말씀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구도"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진리를 찾기 위한 여행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떠난 것입니까?! 그런데 실은, 진리 되신 그 분이 우리를 향하여 오시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식은 참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더 이상 좌선이나, 기다림이나, 고달프고 외로운 탐구의 애씀이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찾던 그 분이 여기에 오시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그리던 그 분이 나와 이야기 하시겠다고 자리하시니 이제는 그리도 아팠던 가슴을, 한없이 그리웠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될 일입니다. 찾아오신 분이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또 말씀을 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라 믿는 이는 복이 있을지니 (12절) 그 분께서 당신을 그 분의 품안에 포근한 그 품안에 고이 안으실 것입니다. 실로, 고이 안으실 것입니다. -------------------------------------------------------- No.2 2. 가장 기본적인 자세-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나 ♣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나 ♣ 요한복음 2장 이야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 마다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샘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이 같은 심오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이 기록된 것이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렇기에 이 복음서는 많은 사람이 사랑하여 인용하여 외우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에 대해 뭔가 좀 아는 체를 하고픈 사람도 이 복음서를 인용합니다. 그 만큼 이해가 어려운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 장 마다 예수님의 새롭고 뜻 깊은 가르침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21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21가지 이야기와 가르침으로 기독교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도 21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 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문이나 현관과 같은, 서론으로서의 1장 본론의 중요한 시작, (거실의 문과 같은 중요함)으로서의 2장. 그러나 이 제 2장에는 아무런 심오한 말씀의 가르침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에 오시어서 물로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칫하면 기쁨을 잃고 당황할,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목회(인류 구원의 크신 역사)의 시작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구원의 첫 가르침과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청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웅변의 가르침과 역사를 보고 들을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또 "하나님께 바치라"고 위협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 행하신 기적의 가르침을 통해서 "모든 종교적인 책임이나 행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고 즐겁기를 바란다"는 엄청난 기쁨의 소식을 전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우리가 항시 기쁘기를 원하시는 뜻을 우리가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고, 사랑하는 이에게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거룩한 가르침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강요 섞인 앞의 가르침과 뒤의 자연스러운 현실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랑이다"(요한1서)고 분명히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욕심스런 거짓 지도자들은 자꾸 거꾸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한가지 더!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환갑 잔치를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는 어린아이의 백일잔치를 축복하신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어떤 종교 행사에 참석하시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는 어떤 국가적인 행사에 참석하시어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결합인 혼인 잔치를 축복하시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 하나 됨의 현실이 하나님의 축복의 근본입니다. 그 하나 됨 속에 기쁨의 큰 힘과 기적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 여자와 남자가 하나 될 때에 자식과 부모가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될 때에 동기간이 서로 도움으로 하나가 될 때에 제자와 스승이 서로 존경함으로 하나 될 때(스승이 제자를 존경할 수 있을 때) 부리는 사람과 고용된 사람이 인간으로서 하나가 될 때에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지혜로 하나가 될 때에 기쁨과 기적은 절로 일어나는 것임을 우리가 알면서도 그 기쁨과 기적을 우리가 언제나 진정 알아차리고 경험하게 될 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 그 하나됨을 통해서(예수가 하나됨을 통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 바로 이 만남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시었고 우리가 이 일을 노력하고 이룰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목회의 처음부터 웅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워 박사가 되는 것도 성경을 골백번 베끼는 것도 소위 선교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일도 전 재산을 드려서 교회를 건립하는 일도 영적으로 대 각성을 이루어, 신비를 발휘하는 영적인 슈퍼맨이 되는 일도 이 하나됨의 경험 없이는 아무 뜻이 없으며 이 하나됨의 경험과는 도저히 비교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또 바로 내 이웃과 하나됨의 기쁨과 기적을 우리가 노력하고, 경험하기 전에는 휴거가 아니라(속지 맙시다) 천하에 어떤 일도 축복도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 이 하나됨의 기쁨과 기적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목표(영성의 길)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향하신 뜻이며,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에 오신 이유임을 분명히 하시며 목회를 시작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립보4:4) 그러나 신출귀몰하는 영적인 성취와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엄청나고 존경스러운 성취를 우리는 얼마나 사모하고 우러러보며 목마르게 아직도 애쓰는 것입니까?! ------------------------------------------------------ No.3 2. 가장 기본적인 자세-"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1) ♣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 영원과 연결되는 첫 관문 - 요한 복음 3장 이야기 군인이 되어 보셨어요? 제가 물어보는 것은 "군대에 갔다가 와야 사람된다"는 뭐 그런 뜻에서 물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뚝 떨어져서 살며, 전혀 하고 싶지 않았던 일, 몸에 베이지 않는 일, 힘든 일을 해보고 기합도 받아 보고, 개인의 위생과는 관계없는 현실에서 터무니없는 매도 지독하게 맞아보는 그런 경험을 물어보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군대에 가보니까 별의 별, 갖가지 인생들이 다-모여 왔더라고요. 교육을 엄청 많이도 받은 사람 선생님하던 사람 약삭빠른 장사꾼 주먹깨나 쓰던 어깨 세상물정 모르고 그지없이 착하게만 자랐던 이 그리고 그 정 반대의 씀씀이들이 다 - 모여 왔더라구요. 군대에서 첫 번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모든 잡종들의 머리를 싹깎아 볼품없는 모양으로 똑같이 만든 후에 "니 몸을 군복에 맞추는 거야. 임마!" 몸에 맞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똑같은 누더기 (사실은 새 군복 - 허지만 유행을 따르던 멋쟁이들은 쳐다보도 않을 누더기) 똑같이 걸쳐서 한 줄에 정렬시켜 놓고는 뛰어라. 기어라. 엎드려라. 나가라. 들어와라. 머리 박고 열중 쉬어. 앉아라. 서라. 누어라. 자라. 깨라. 오리걸음 고함과 기합과 위협과 처음 들어보는 총소리 등으로 망신 주고, 두렵게 만들고, 눈물짓고, 오줌싸게 만들고는 놀리고 기죽이고 망신시켜서 제 아무리 자랑스런 일을 하던 녀석도 "여기는 사회가 아니고 군대야. 임마!" 한마디로 과거를 부질없고 쓸데없는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죽는 곳인줄 알면서도 뛰어들라면 일초도 지체없이 용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명령에 절대 맹종하는 (인간이 아닌) 군인, 상관의 명령에 자기를 주저함 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살아있는 기계 바로 그 군인을 탄생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군대인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할 때에는 자신이 만만했습니다.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한 체구와 체력에 잽싸고 날렵한 운동신경과 대학을 다닌 학력에 저격병의 사격 실력 등 정말 자신이 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저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필요없는 것들! 어떤 경우, 무슨 일이 있어도 명령에 절대 복종! 그것 만이 나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력단련과 기술숙련은 시간 문제! 뒤늦게 나마 저는 참 군인이 되는 경험, 인간에서 군인으로 변하는, 새로 나는 경험(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 없이 군복무를 마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일생 동안을 예수를 믿는답시고 교회에 들락날락 하면서도 그걸 모르는 이들이 허다합니다.(:12)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다"(:3)고 "물(지난 것은 씻은 듯이 뒤로)과 성령(하나님의 마음)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 최우선" 삼는 인간이 되기(거듭남)를 도전하는 말씀 그렇지 않고는 군인 같아 보이는 간첩 십자군 같아 보이는 사탄의 끄나풀이라는 말씀 제1장: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통화하시기를 원하시고 찾아오신다. 제3장: 거듭남(=죽기 살기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살기로 결정함)이 있어야 그 말씀이 들리고 찾아오심이 보인다. 제2장: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제3장: 이런 철저한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철저한 최우선"이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맙시다. "다른 것은 다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것은 스님의 길일 뿐) "휴거"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오해한 불승의 제자들! 기독인이 아니올시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제2장이 제3장 앞에 터-억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이라는 말은 다른 것은 다 버리고 이것만을 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집을 지을 때에는 기초가 우선입니다." 먼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기초는 집을 짓기 위함입니다.(성서는 계속 집을 짓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집은 짓지 않고 기초만 붙들고 있는 휴거의 군상들…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은 아님을 어찌 못 불까? 집을 지어 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기쁨의 집을 지어 보라는 것입니다(제2장). 종교적인 초능력자가 되어보려는 허망을 떨쳐 버립시다. 병 고치고, 방언하며, 예언하는 모든 은사를 받은 분(초능력자)들이 기쁨의 집을 짓는 일에 헌신하지 않고 그 능력을 쓰지 않고 기쁨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탄의 심부름꾼임을 분명히 압시다. 절대로, 절대로 초능력이나 휴거는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초능력은 그저 기쁨의 집을 짓기 위한 하나의 선물(은사)인 것 뿐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 집은 세상의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참 기쁨을 창조해보라고 세상에 보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휴거일랑은 아예 기대도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최우선이 될 때 가장 기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를 경험한 사람만이 천국을 보게 됩니다(:3). --------------------------------------------------- No.4 2. 가장 기본적인 자세-"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 영원의 저 끝까지 물어지는 질문 "나를 사랑하느냐?" - 요한복음 3장의 둘째 이야기 1) 인생살이에서 가장 즐겁고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돈을 잘 버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승진을 하게 되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공부를 잘 해주는 일도 감사하고 즐겁지요. 건강해서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좋고 즐거운 일입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참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과 비교될 만한 희열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 올 때에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이 다 나를 위해서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희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역경이라도 사랑을 힘입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솟구치는 것은 사랑이 주는 경이로운 희열의 힘입니다. 결혼은 했는데, 사랑은 한다고 하는데 "널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 희열과 "널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 진실된 희열을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이 희열을 위해서 살진대 우리는 오가는 사랑의 고백 속에 살아야 하고! 처음 순간부터 끝 순간까지 매일 매일, 가능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희열을 위해서 우리는 살고 있고…! 말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눈빛의 닿음과, 손끝의 닿음, 미소와, 격려의 언어, 즐거움의 초청으로, 아픔의 돌봄으로, 들어주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노력으로… 창조의 동참으로 사랑의 고백은 계속 되어야…! 창조는 계속되어야…! 사랑의 고백을 듣는 것은 참으로 삶의 희열 입니다. 군대를 갔다가 와, 대학을 다닐 때, YWCA 어린이 여름캠프를 치르면서 초등학교 1,2학년 어린이들에게서 필자는 몇 번인가, 사랑의 고백을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앞으로 2년만 더 있으면 내가 전선생님과 결혼할 수 있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그 부모님들을 통해서 들었을 때, 아-, 그 말로 형언 못할 기쁨과 희열…! 그 아름다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기쁨, 그 희열! 그런 기쁨과 희열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아름다운 사람이 초등학교 어린이든 동료이든, 친구이든, 부모이든, 자식들이든, 아니 배우자라면 더욱더… 그런 희열의 삶이 없을 때, 불행과 아픔, 절망과 멸망이 그리고 당황과 방황이 빛 없는 곳에 어두움이 임하듯 사랑 없는 곳에 반드시 임하리니… 요한복음 시작인 2장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쁨의 삶 희열의 삶을 목표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의 고백을 1)하고 2)듣는 것 보다 더 큰 희열은 인생사에 없을지니! 2) 종종, 똑똑한 청년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모든 종교가 전부 자기네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하니 기독교가 참 진리인 줄 어떻게 압니까?" 맞는 말씀, 똑똑한 질문입니다. 허나 세상에 아무리 잘난 척을 해 봐도! "진리를 터득한 자나, 도통한 자가 어디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좀 아둔하던 때에는 통할 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과학이 점점 이렇게 발달하여 생명공학과 우주과학, 컴퓨터의 발전이 요즈음에 달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상 없는 천재도 도사연 할 수가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한 작은 인간이 도통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는 이렇게 넓고 넓은 우주가 우리 눈 앞 이곳 저곳에서 펼쳐지고 다가오고 있는 세상에 어떤 종교가 진짜냐고 묻는 이가 바보가 아니면 천치이지요. 지난 세대의 어떤 사람도 도통할 수가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도사연 하는 자들은 극히 모자라는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란 말입니다. 도통할 가능성은 인간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는 세기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1장18절,3장13절) 도사 같은 표정과 차림으로 진리를 찾는답시고 산행을 일삼는 일을 저는 거부합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지는 진리가 인간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 때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되신 이가 저 같은 문제아를 사랑하신다고 내가 찾기 전에 저에게 먼저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3장 16절) 그 분의 엄청난 사랑의 힘에 의지해서 저는 어려운 인생살이를 힘차고 즐겁게 희열 속에서 겁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진짜, 저는 오직 종교가 진짜인지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분께 내 자신을 드리고 그 분을 사랑하면서 희열 속에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사랑의 희열 속에 살고 계십니까? 어떤 진리가 당신을 먼저 찾아 왔다는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신다니 참!!! ------------------------------------------------- No.5 2. 가장 기본적인 자세-어떻게 변화되는 것일까? ♣ 어떻게 변화되는 것을까? ♣ - 변화가 온다. -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이야기(요한복음 4장) 제가 너무나도 철이 없던 시절 한 친구에게 내 집안이 네 집안 보다 얼마나 좋은 집안인가를 멸시 섞인 어조로 떠버리며 자랑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며 지금도 가끔 속죄의 기도를 드립니다. 너는 남자가 아니니까… 너는 키가 나보다 작으니까… 너는 못생겼으니까… 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너는 나보다 재능이 없으니까… 너는 불구로 태어났으니까… 하는 이유로 누가 나를 멸시하고 차별하려 든다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과거를 들먹여 너는 나보다 못났다고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불평등이며 불의이며 큰 죄악입니다. 이런 태도와 풍조는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지향하는 사회입니다. 평등의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꿈이며 노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회 제도적으로 그런 불평등이 제도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병폐이며 죄악인 동시에 많은 사람이 가슴아픔을 경험해야하는 불행입니다. 아직도 왕족, 귀족, 평민과 상놈(영어로 Untouchable)을 엄격히 가르는 사회 제도가 엄연히 살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도의 불행을 상놈 출신 인도 목사를 통해서 들으며 같이 아파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또 제아무리 하늘에 닿는 노력을 해 본들 자기는 영원히 더러운 상놈으로 살아야 하며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기는커녕 아무리 상종하려 들지 않는 추하고 더러운 사회 계급에 속한 자기는 하늘이 무너져도 제도적인 승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불행을 통해 깨닫고 그 인도 목사는 갖은 노력을 기울여 홀홀 단신 영국으로 살 길을 찾아 건너갔다가 거기에도 똑같은 제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죽을 노력을 해서 평등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를 하신 것입니다. 2000년 전 아무리 출중한 인간이라도 헤어날 수가 없는, 인간을 고통 속에 묶어 놓아두는, 이런 죄악스런 제도 속에 유대인 아무도 상종하려 들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 가운데 당시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남자 아닌 한 여인이 그것도 창녀로 떨어졌던 한 여인이 (밑바닥 사회 계층에서도 밑바닥에 속했던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에 왔다가 유대인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막지방인 팔레스타인의 기후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미국의 사막에 있는 교회를 필자가 섬기면서 얻은 지혜 한가지,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던 그 낮 시간은 너무 더워서 아무도 거리에 나오지 않는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낮잠으로 시간을 보내는 때였습니다. 어째서 그 여인은 그 더운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던 가요?! 다른 일로 살아갈 길은 도저히 없어 비록 창녀로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그 여인도 인도 목사와 같은 멸시의 눈총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는 죽기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그 더운 시간에 어쩔 수 없는 물 때문에 나왔던 그 여인이 자기를 찾으면서도 자기를 따돌리고 멸시하려드는 이중 인격의 남정네, 여자라고 멸시하려드는 남정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 종족을 멸시하려드는 유대인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물을 얻어 먹겠다는 초라한 행객 주제에 "내가 누구인 줄을 알았으면 네가 도리어 나에게 물을 청했을 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인의 아픔 가슴을 자연히 뒤틀리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들리지 않는 고함 소리가 그 여인의 가슴을 울렸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다 귀찮고 싫은데… 그저 물이나 한 모금 얻어먹고 꺼지지… 두레박도 없는 주제에 무슨 시건방진 수작이냐?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울어봐도 별의 별 짓을 다 해봐도 오는 것이라고는 멸시밖에 없고 헤어날 길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이고,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그 여인의 아픔 가슴에 예수님의 이해와 사랑의 손길이 닿은 것입니다. 그 순간 그토록 아프게 응어리 졌던 슬픔과 괴로움이 다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목놓아 한없이 울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그 순간 그 사막의 더위를 한번에 없애는 시원한 생명수가 그 여인의 가슴에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둑이 터지듯 끝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여자라고 창녀라고 그렇게도 짓누르던 산 같은 아픔의 밑 바닥에서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사회의 멸시 속에서 자학의 늪 속에서 헤매던 그 여인은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시원하기 이를데없는, 생명의 둑이 터지는 일을 경험하면서 더 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전 까지만해도 싫기만 했던 자기를 그렇게도 멸시하던 그 인간들의 초라함과 초췌함이 보여지고 또 그들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지껏 그늘에만 숨어살던 그는 마을을 뛰어들어가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신데렐라가 왕비가 되는 것보다 더 감격스런 순간이었습니다. 콩쥐가 왕비가 되는 것보다 더 신비스런 순간이었습니다. 사회의 암으로 취급받고 멸시받으며 살던 청녀가 그 마을의 정신적인 선구자, 정신적인 지도가가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천하없어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계급과 지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그여인의 아픔이 그리고 상처가 치료되고 낫게되었는지는 당신이 경험해야 할 일입니다. 제4장에서의 중요한 기사는 2천년이 지난 현대에도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인 차별과 제도가 에수님을 만난 후에 그 여인에게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에게 일어났던 이런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제 친구 인도 목사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사회적인 변화가 당신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 당신의 가정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 우리의 사회가 예수님을 만날 때에 분명히 일어납니다. 당신이(우리가) 기쁘게 살도록 기대하시고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2장) 당신과 통화하시기를 원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1장)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는 새 삶을 시작할 때에(3장) 당신이 극복할 수 없었던 사회적인 변화의 기적을 우선 당신의 삶 속에서 이루신 다는 것이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첫 약속인 것입니다. -------------------------------------------- No.6 2. 가장 기본적인 자세-예수를 만나야 ♣ 예수님을 만나야 ♣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38년 된 병자(요한복음 5장) 오늘날 그렇게 문제가 많은 팔레스타인 땅에 예수님께서 사시던 때에 조그마한 연못이 하나 예루살렘 성문 바로 밖에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끔 이 연못물이 소용돌이를 치곤 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이렇게 연못의 물이 소용돌이를 치고 끓어오를 때에 제일 먼저 물에 뛰어 들어 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서 앓고 있었던지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그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물이 소용돌이를 치고 끓어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 중에 뭔지모를 병으로 38년이나 신음하는 환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네가 났기를 원하는냐?" 하는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원 세상에 낫기를 원치않는 병자가 어디에 있을까? 말씀인 즉슨 "내가 너를 고쳐주려고 왔다"는 말씀, 헌데 말귀를 못 알아들은 이 사람은 원망조의 신세한탄을 시작했습니다. "낫기를 원하면 무엇을 합니까?! 38년이나 이렇게 몸저 않고 있으니 친구들도 다 떠났지요!" 가족들도 다 버리고 떠났지요! 재산도 다 탕진해 버렸으니 간병인 인들 쓸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수족이 말을 들어 먹습니까? 물이 부르르 끓어 올라오면 다른 병자들은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저 한꺼번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환자를 거들어서 덤벙 물에다가 집어넣어 주니 "이번이 아니면 다음 번에…"하는 희망이라도 가지고 기다리지만, 저 같은 놈은 이렇게 멀거니 바라다보기만 하면서 앓고 있는데 "났기를 원하느냐?"가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도 건강한 사람 같으면 분통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처럼 줄 없고, 돈 없고, 능력 없고, 힘 없는 사람은 자학과 함께 슬픔만이 쌓이게 되는 것이며, "에-라 될대로 되라!" 하는 포기와 함께 "이 몹쓸 놈의 세상 확-망해 버리기나 하지…!"하는 저주만이 가슴에서 끓어오를 뿐입니다. 38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 봅시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시절에는 사람이 평균 35년 정도 밖에는 살지 못했다는 것을 생물 시간에 배운 순간, 요한복음 5장의 이 병자가 내 머리 속에 확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속삭였습니다. "아-그 사람은 평생동안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제가 35년 정도세로 미국의 신학교에 입학해서 고민하며 고생을 하던 어떤 날, 요한복음 5장의 이 병자가 앓고 있던 이 병은 원인모를 병이 아니라 누구나 탄생되는 순간부터 앓기 시작하는 "인생"이라 불리는 병이라는 것과 바로 나도 앓고 있는 병이라는 것을 갑자기 예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순간 그렇게도 한가득 가슴이 떨리고 쌓였던 고민과 쓰라림이 눈물이 되어서 그냥 막-쏟아져 내리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셨던 예수님의 손길을 내 고민스럽고 쓰라린 인생이라는 병상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우리 모두가 앓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병. 쓸데없는 것에 모든 능력을 탕진시키는 인생이라는 병, 남보다 빠르게 앞서 뛰어야 하는 인생이라는 병,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고독한 인생이라는 병, 그 병자가 있던 그 연못가는 생존경쟁의 작은 축소판이었던 것입니다. 친구들을 잽싸게 제치고 뛸 강심장이 없는 무능력자에게는, 허탈과 자학과 저주만이 고름처럼 솟아오르는 인생이라는 병상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온 정열을 다 바쳐 살다가 보니 사실은 동료들을 제치고 철면피로 살았다는 허탈함만이 남았고, 착하고, 바르게, 양보하며 산다고 해 봐야 찬구들과 동료들에 의해서 뒤로 밀리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고 사회에선 모자란 사람 취급밖에 받지 못하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뜻대로 당당히 한 인간으로서 뜻깊게 버젓이 살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한심스런 병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제 아무리 잘났다고 으스대 봐야 나도 당신도 그렇게 한없이 한심스런 병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또 제아무리 하늘에 닿는 노력을 해 본들 친구를 제치고 잽싸게 앞장 서 뛸 수 있는 몰염치로도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세상의 무엇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큰 아픔의 병고를 지닌 우리는 그렇게 한심스런 병자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다가오십니다. 아니, 이렇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마음을 열어 만나고 여태까지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인생이라는 병에서 치유되어 나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애쓰던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대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남보다 먼저 뛰어 갈 수가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혼자 뛰다가 망할 뿐 입니다. 수 만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인생이라는 병에서 스스로를 벗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면벽하고 참선과 수도를 통해서 도통해 보겠다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뭔가 도통한 것처럼 우쭐되는 병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인생이라는 병은 둘 중에 하나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시원스레 병을 탁 털고 일어나, 자리를 걷어들고 집을 향해서 가던가, 아니면 그대로 병석에서 우물거리고 있던가 뭔가 도통한 것처럼 우쭐대봐도 아직도 병석에서 우물거리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그대로 환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우쭐대도 그 사람은 환자일 뿐입니다. 인생이라는 병은 사람을 우쭐대도록 만드는 병입니다. 옆의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만 목격하고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쭐대면서 병석에서 우물대고 있는 병자는 또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러나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맥빠진 설명서는 전혀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이 진정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순종할 때에 인생의 근본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둘째 우리를 그렇게 속박하고 괴롭히던 육체적인 병고와 물질적인 구속에서 헤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해졌을 당시 전도 부흥 집회 때마다 많은 병자가 치유의 은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한국 초대교회 목사님들의 경험과 치유의 은사를 경험한 당사자들의 간증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도통하기 위해서 애쓰며 뭔가 깨닫고 나면 거기에서 끝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련에만 집중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다가오시어 통화하시기를 원하시며(1장) 삶의 기쁨을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하시고(2장)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때(3장) 우리에게 경험되는 사회적인 변화(4장) 그리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5장) 통해서 근본적인 인생의 뜻, 삶의 의미를 찾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더 짐작하고 이해하도록 인도하시고 키우시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경륜이 기독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 기쁨, 결심과 순종, 사회적인 변화의 약속, 그리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의 약속, 새로운 세계로의 축복, 이런 여러 요소 중, 그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No.7 2. 가장 기본적인 자세-하나님의 계획 ♣ 하나님의 계획 ♣ 생선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요한복음 6장) 텔레비도, 극장도, 오락실도, 컴퓨터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예수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겠습니까? 텔레비도, 극장도, 오락실도, 컴퓨터가 다 있는 오늘날에도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집회에는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억수로 많이 모입디다. 그 날도 한 5천명이 모였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 때 당시에 습관이 사람 수를 헤아릴 때에 여자와 어린이들은 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허지만 구경거리가 있는 곳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더 많은 법...! 그저 만 명은 족히 모였으리라고 쉽게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 병 고치는 것을 먼발치에서라도 구경하느라, 예수님 하시는 말씀 정신없이 듣느라. 또, 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으니, 먼 한 구석에선, 그저 졸고 앉아 있거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보니 그만, 끼니 때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군중을 언덕에서 내려다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한없이 측은한 생각으로 가슴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광주 사태의 생생한 소식을 텔레비 뉴스로 미국에서 접하면서, 때때로 고국의 정치인들의 망동을 뉴스에서 보면서, 고국의 딱한 경제 사정을 접하면서, 저 같이 모자라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였는데... 끼니때를 넘기면서도 뭔가 갈급한 심정으로 인도자도 없이 이리로 저리로 정처 없이 헤매이는 군중,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고생하며 일을 해야하는지? 열심히 일을 한들 무슨 희망이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겠고... 딱이 바른 일거리도 없었겠고... 흥겨운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딱하기만 한 무산 대중, 하나님께서는 크신 뜻으로 사람을 지으셨건만 이런 딱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내려다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굶는 자식들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뭘 좀 먹이기라도 해야겠다."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제자 한 사람이 얼른, 자기의 계산 빠름과 잽싼 것으로 잘난 체 해보았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들을 조금씩만 요기를 시키려고 하드라도 일당 받는 사람의 일년 번 돈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가까운 마을에서 반나절이나 떨어진 곳인데 돈이 있더라도 어디에서 우리가 음식을 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아픈 심정 도저히 짐작도, 알 길도 없는 모자라는 인간의 좁은 소견, 그저 남을 밀치고 남보다 잽싸고 잘났다는 표시를 하는 데에만 관심이... 아픈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더 아프게... 그래도 그 때에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 선생님의 걱정하시는 말씀을 들은 한 소년이 자기가 싸 가지고 왔던 구운 생선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무리 지어 앉게 하신 후에 그 소년이 자기 먹으려고 싸 가지고 왔던 점심, 생선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덩어리를 들어 감사하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어,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은 후에 남은 것들을 거두어들이게 하셨는데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 거두어들인 것이 12 광주리에 넘쳤다는 것입니다. 앞의 제 5장에서 본대로 별 볼일 없는 삶, 인생이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나와 당신입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나나 당신 같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데에 첫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6장에서는 만 명 식사의 분량을 생각하면 지극히 별 볼일 없는 생선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덩어리처럼 초라한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드릴 때에 예수님 손에 들려 쓰여지는 우리의 삶은 만 명을 배불리 만족스럽게 먹이고도 남은 것이 많은 엄청난 기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만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다더라"는 기적에 "거참 대단하다!" 는 식의 신문 기사 읽는 정도의 감동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셨을까?" 궁금하여 이상하고 유치한 해석을 해보는 사람들도 있습디다. 허지만 성서는 무얼 설명하는 책이 전혀 아니올시다. 성서는 언제나 "그러니 너는 어떤 삶을 살겠느냐?"는 우리를 향한 도전이며 촉구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미국에는 조금 그럴 듯한 동리에서는 꼭 JCPenny 라는 백화점을 보게됩니다. 어느 유능한 기독인 청년 사업가가 백화점사업을 잘 운영하다가 부도가 나서 파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파산인으로 낙인이 찍혀 고생을 하는 중에 자기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요한복음 6장의 말씀으로 격려를 받은 후에 자기의 사업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개인의 사업이 아닌 하나님의 사업으로 재도전하여 전 미국에 웬만한 동리에는 없는 곳이 없는 백화점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많은 양로원과 학교를 세우는 큰 일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빈털터리에서 수만 명을 먹여 살리고 많은 사람에게 힘을 주는 좋은 기적의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드려 기적을 이룬 사람들의 감격스런 이야기를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가 그런 이야기로 꽉 차있고 켄터키 치킨가게의 이야기 스냅플 드링크를 시작해 20년 만에 엄청난 성공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 미국의 월마트의 이야기, 등등 이들은 모두 현실의 같은 본보기이며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저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병이어(떡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의 기적과 같은 예수님의 이런 기적의 이야기가 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우리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중에도 문득 문득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 사는 것이 많이 힘이 들게되면 으레 가슴을 두드리는 질문, 삶의 여정을 거의 마치게 되었다 싶으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못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려고만 하시면 이보다 더 크고 신비스런 기적도 행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수퍼마켓과 같은 큰 가게를 당장 그 옆에 옮겨다가 놓으시던가 사람들은 좀 많지만 그 사람들을 20세기 포항제철의 큰 식당에 잠깐 데려다가 배불리 먹이시고 다시 데려가시던가 또는 현대의 좋은 교통 수단을 잠깐 가져다가 쓰시던가 혹은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냥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도록 하시던가 등등 허구 많은 기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능력과 비밀을 지니신 분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은 지극히 적은 행사이었을 것입니다. 허지만 이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그 많은 기적 중에서 이 기적을 성서에 기록하도록 하신 후에 우리에게 읽도록 하시는 그 뜻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을 지으시고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우리의 하잘 것 없는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고(예수님께서 살라고 하시는 대로 살아봐서) 만명을 먹이는 엄청난 창조와 사랑의 힘을 경험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삶의 방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방법을 내 삶의 길과 방법으로 살게 될 뿐 만이 아니라 드디어 몸에 익혀서 만명이 아니라 억조 창생을 돌볼 수 있기까지 우리 하잘 것 없는 인생을 명실공히 이름과 능력을 갖춘 하나님의 자녀로서 키워가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감히 창조주를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는 종교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허구한 날 죽는 날 까지 열심을 다해 교회를 왔다가 갔다가 열-심-히 정성을 다 드리면서 충성을 다하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도 훌륭한 신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와 충성만을 요구하시어 그 두 종목에 대해서만 포상을 하시려고 하지는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전체 우리의 모든 능력과 의지와 창조력과 성품과 이상과 꿈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손색이 없는 경지에로 까지 키워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식에게 자전거를 생일 선물로 주고 자전거를 스스로 타고 터는 법을 보여주는 부모의 바램은 자기 아이가 자전거 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그 아이가 운동신경이 잘 발달해서 무슨 운동이라도 즐기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자식에게 자동차를 선물로 주는 부모의 바램은 자기 운전 면허증과 운전 기술을 자랑하려고 하거나 그 아이가 운전기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넓은 세상을 경험하여 책임있는 성인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서 아이를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이 덩치가 커져서 일본의 스모 씨름 선수가 되기보다는 이 사회의 큰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사랑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높은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굶주린 배를 한 끼 치워주려고 하신 것도 아닐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너희의 삶을 드리고 내가 가르치는 대로 살아서 내가 베푸는 큰 기쁨의 기적을 경험하고 확신과 기쁨 속에서 계속 자라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으시고 기대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커가거라 하시는 간절한 큰 바램이 이 기적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인생관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끝"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가고 헌금 많이 하는 인내와 충성을 훈련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충성스럽게 교회를 왔다갔다하는 인내심과 끈기를 훈련하는 일 보다는 더 중요한 목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참으로 먼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생겨서(믿음이 탄생되어) 매일 매일 그 믿음이 자라고 쌓여서 한 아이가 성인이 되는 만큼의 햇수를 지나 믿음이 성숙하여 성인의 믿음이 되었을 때에는 기적을 이루게 되는 귀하고 기쁨에 벅찬 삶을 경험하게 될 때에 시작할 때에는 요원했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기대와 기쁨에 찬 나날이 되어 멀리만 보이던 영원의 천국 길이 내일처럼 기대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흥분과 보람이 없어서는 저 같은 보통 인간은 이루기 한없이 힘든 길이 천국의 길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천국길은 저 같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길을 훈련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적으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참으로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런 목표와 기대를 갖는 것이 예수 안에서의 믿음생활입니다. 이런 목표를 갖는 것이 믿음 생활의 첫 발자국이며, 여기까지가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아직도 기적의 경험이 없었다면 JC Penny의 기적과 같은 현대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고 새 믿음생활을 다시 시작하십시다. -------------------------------------------- No.8 3. 정도 높은 진리-누구의 일인가? ♣ 도대체 누구의 일이며, 무슨 일인가? ♣ 1장부터 6장까지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과 우리를 향하신 약속을 밝히고 있습니다. 7장부터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촉구가 시작이 됩니다. 제7장: 도대체 누구의 일이며, 무슨 일인가? 며칠 전 새로 당선 된 미국의 대통령이 저를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바쁜 일정 중에 몇 시간, 잠깐 들르는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를 방문하는 목적이 저를 만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를 당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통령 방문 건은 그저 상상을 해 본 일입니다만, 허나 실지로 이런 경우를 당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국의 대통령이 나를 방문한다는 것은 당황스럽고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오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시원찮은 대통령이 찾아온다고 해도 "내 생활에 하나도 도움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어떻게 환영 해야할지... 또 목사에게 힘든 일 중에 대통령이라면 능히 그리고 수월히 해낼 수 있는 특별한 목회에 대한 도움을 어떻게 요청해야 할 지 등등 준비를 필히 할 것입니다. 실지로 만약에 예수님께서 당신 옆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의 형제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대했는지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는 것이 요한복음 7장의 이야기입니다. 놀라웁게도, "우리 형님 저렇게 하고 다니시는 것, 가난한 사람들과 몰려다니는 것이 정말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는 것이 형제들의 태도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님 큰일을 하시려면 예루살렘 같은 큰 도시에 가서 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큰 도시에는 따르는 사람들도 여기에 비할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면서 은근히 눈치를 주었습니다. 돈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쳐주며, 돌본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 일보다는 목수일을 해서 돈 몇 푼 더 버는 것이 동생들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과 같은 큰 도시에는 앓고 있는 부자들도 있을 터이니 그런 사람들을 고쳐주면 돈이 좀 생기지 않을가? 하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이나 돈버는 일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정말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한 일"일 것입니다. "생존경쟁에 달관된 안목으로서는 실로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위 고상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요즈음 같으면 목사님들)이 생각하기에도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은 자기들이 애쓰며 주력하고있는 경--건한 생활이나 거--룩한 태도나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소위 존경받는 종교인으로서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창녀들과 세리를 반기며 율법에서 멀리하라는 문둥병자들을 가까이 하며 병자를 안식일에도 돌보는 엄청난 죄를 서슴지 않고 범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이해와 납득이 되는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틀림없이 사악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돌팔매질로 죽음을 당해 마땅한 두 가지 중한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간음죄요 다른 하나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이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관광을 갔다가 안식일에 극우파 유대교인들의 동리에 들어가면 어디선지 모르게 돌들이 날라 온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을 범하고 나다니냐?!"는 것이지요!)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안식을 범하는 것이 아니가?! 물질에 얽매인 생활에 급급한 사람들과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구습에 얽매인 종교 지도층 인사들도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구와 아집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처럼 예수님을 멀리하려고 하거나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아예 제거하려고 노력을 했지요! 아무리 예수님과 인간적으로 가까우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겁니까?! 아무리 고상한 종교 생활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 겁니까?!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결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인간관계도 드높이 이룩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한, 아니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심각한 도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친형제처럼 가까이 있는데.... 너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는 네 방법을 버리고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나고 큰 경험을 위해서 나를 받아들이고, 나와 함께 살지 않겠는가? 내가 친구처럼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너의 좁다랗고 알량한 종교적인 단련을 벗어버리고 인간으로서 이룰 수 없었던 영원을 향한 경험을 위해서 나에게 배우지 않겠는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가까이 살고 있는 듯 하면서 또는 제 딴엔 고상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은 밀어내고 자기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종교적인 성취만을 위해서 자기가 여지껏 배워온 세상의 방법대로 고집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스스로도 예수님과 가까이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의례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만 쏟아지리라고 믿고 살지만 요한복음 4장의 사회적인 변화와 요한복음 5장의 육체적인 변화와 요한복음 6장의 엄청난 경험을 맛보지 못하고 상상도 못 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허구헌날 교회나 절을 채바뀌 돌 듯 왔다 갔다..... 죽어서 천당을 가고 극락을 가는 것에만 소망을 걸고 살며 정성을 다해서, 인간적인 도닦는 일과 공을 드리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 당신의 신앙 생활은 아닙니까? 미국의 대통령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대통령의 방문과 같은 기쁨과 흥분은 커녕 거룩하고 심각한 일에 만 집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는 먹고사는 일에만 골몰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하찮은 일 얼른 다- 집어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이 시간부터 세상 누구도 맛보지 못하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 종교생활이 아닌 "기쁨에 넘친 생명의 삶"을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당신의 마음속에 받아드려 보시지요. 엄청난 힘과 기쁨이 같이 하실 것입니다. -------------------------------------------------- No.9 3. 정도 높은 진리-가속도의 이야기 조회 : 3 날짜 : 2003-04-28 ♣ 가속도의 이야기 ♣ 제 8장: 가속도의 이야기 간음하던 여자를 붙잡아가지고 에수님께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지금으로 치면 신학자들과 목사들)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어쩌겠소?"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온 예수님 "용서하라"고 하시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죽어 마땅하고 "돌로 치라"고 하시면 스스로 엉터리 지도자로 증명되니 죽어 마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터이니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잡아 없애자는 흉계이었습니다.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들 중에 한 사람이 들어가서 여자로 하여금 죽을 죄를 범하게 한 다음 여자만을 잡아 끌고 온 종교지도자들의 사악함 틀림없이 오늘은 여자와 예수님을 둘다 돌로 쳐죽여 없앨 수 있겠다고 믿고 의기 양양하게 몰려온 악마구리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거라"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꾸짖으시고는 아무 말씀 없이 앉으셔서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서로의 사악함을 잘들 알고 있는 이 무리들 들고 왔던 돌을 슬며시 놓고는 하나씩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홀로 남아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너를 죽이려는 사람이 아직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서 새 삶을 살거라." 이렇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돌에 맞아 죽을 자리에서 구하셨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다 죄인인 것은 저도 압니다. 이 여자도 종교지도자들도 다 죄인인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 성서의 말씀을 보면 같은 죄인이지만 종교 지도자로서 열심을 다해서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간음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쁜 듯이 묘사가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배운 것을 거짓없이 삶에 적용하고 살아보려는 순수하고 젊은 청년에게는 사실 납득이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품성을 조금만 알고 나면 남에게 보이지 않는 "의도"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고 그 "의도"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철이 나고 성숙한 사람이면 다 아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 숨겨진 "의도"에 따라 사람은 무슨 일이던지 다 합니다.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과 표정과 행동을 남보다 잘하는 사람이 멀리는 못가지만 ("의도"는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남보다 더 빨리 성공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사악한 사람일수록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과 표정과 행동을 잘하지요. 그리고 자기의 "의도"를 오래 숨기고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게 될 때에 그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살 필요가 없는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사악한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사기꾼들에게 쉽게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항상 그 악행에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사람들, 알지도 못하는데, 선거철이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해오는 사람, 안면도 없던 사람이 지나친 친절로 접근해 오는 사람,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를 이용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요.. "의도"라는 것은 자동차의 "엑셀러레이타"와 같은 것입니다. "액셀"은 차를 가게하는 힘(가속도)을 만들어 냅니다. 자동차에는 "액셀"이, 사람에게는 "의도"가 움직이는 힘을 만들어내지요. 언덕을 잘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좋은 차도 액셀을 밟지 않고 있으면 자연히 속도가 떨어지고 결국은 뒷걸음을 치고 말게됩니다. 아이들이 성공적으로 학업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결코 머리가 좋아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는 부모가 돈이나 힘으로 밀어부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동기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부모들은 아이를 학원으로 개인 과외를 끌고 다니기 보다는 "동기의식"을 갖도록 해주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동기의식"이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잘 해보겠다는 "의도"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밥벌이가 괜찮고, 존경을 받을 수 있으니 그저 그일이나 하고 살지 하면서 나약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의미 없이 목사가 되고, 스님이 되며, YWCA직원이 된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러니 엉뚱한 일로 교회와 절 안에 파벌이 만들어지고 큰소리와 싸움질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도"가 "진리나 하늘을 향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한 풍파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악한 사람의 "의도"일수록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 속 깊숙이 잘 감추어진 "의도"라고 할 지라도 예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돌을 들고 살인을 하려고 몰려왔던 무리들은 겉모양은 종교지도자라는 간판으로 치장을 잘 했을 런지는 몰라도 그들의 "의도"가 하늘과 진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생명을 구해받은 여인은 이제는 참으로 진리를 살아야겠다는 "의도",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의도"가 그의 마음을 꽉-채웠을 것입니다. 저라도, 당신이라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 여인의 마음속에 "의도"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임을 8장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과거에 아무리 흠이 없는 깨끗한 삶을 살았어도 성서나 불경을 아무리 달달 외어 잘 알았어도 과거에 남을 돕는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덕이 산처럼 높이 쌓았어도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의도"가 없으면 그런 것들이 다-- 허사란 말씀입니다. 지금 자동차의 엑쎌을 놓은 것처럼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왔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뒷걸음이 시작되는 삶이 지금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죽을 죄를 지었던 여인이라도 그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의도의 삶"이 지금 시작되었으면 그것은 과거에 오랫동안 좋은 삶을 쌓았지만 지금은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삶인 것입니다. 여인의 삶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와 같고 종교지도자들의 삶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와 같은 것이지요., 마음의 방향(의도)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사람일수록 선거에 당첨을 위해서, 사기를 치기 위해서, 미소를 지으며 쌀포대를 들고 빈민가로 양로원으로 굽신굽신 절하고 돌아다니며 덕스런 사람인체 "사랑의 의도"를 가장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보십니다." 라고 하면 자기의 "좁다랗고 얄팍한 흑백논리"를 얼른 적용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눈과 마음에는 "좋은 의도와 나쁜 의도"의 세상 밖에는 보이지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지은 세상은 흑백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흰색과 검은 색 만이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찬란한 색깔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말을 바꾸어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의도"는 우리의 삶이 "창조"로 연결되는 시작점이며 관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갈 수가 있습니다. 좋은 예술품을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YWCA 같은 기관이 미래를 위해서 어려운 중에서도 새 사업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것도, 작가가 좋은 글을 쓰는 것도, 목사가 현대의 삶에 재조명하여 성서의 의미를 새롭게 전하는 것도. 치과 의사가 환자를 위해 새로운 의치를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수학 선생님께서 새로운 개념을 학생들의 마음과 정신에 이룩해 주는 것도, 등등… 창조에는 끝이 없습니다. '나는 십계명을 잘 지켰다", 자만하는 것과는 비료가 될 수 없는 삶이지요! 개인이나 기관이나 창조의 의도는 한없이 , 끝없이 뻗어 나아가는 삶입니다. "창조의 의도"의 엄청난 가능성과 어마어마한 힘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전문직의 일 일수록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적인 일 정도로 전락하는 것이며 그 "창조의 아름다움과 창조의 활력소"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하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을 어떻게 하던지 공평하게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듣기에는 굉장히 이상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열심히 일을 해도 게으른 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받는 제도 속에서는 창조의 의식이 쉬 사라지고 게으름이 자리잡게 되며, 기회주의가 판을 치게 되고 멸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의 근본인 무산 대중을 외면하거나, 올바른 창조의 의도가 결여될 때에 자본주의도 쉽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보십니다. 당신의 경--건한 생활이나 거--룩한 태도나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소위 "믿음 생활" 뒤에 겉에 보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사랑의 의도", "창조의 삶"이 "지금" 있는 것 입니까? 아니면 "창조의 삶"은 지금 다-잃어버리고 그저 사람들의 눈에 잘 보여 보겠다는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하늘로 가는 길은 한없이 오르는 길인데 당신은 지금 "창조의 엑쌜러레이터(생명의 의도)"를 힘껏 밣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이름이 기독인이던 Y이던, 가정이던, 그 무엇이던, 발을 떼는 순간부터 내리막 길을 갈 뿐입니다. ------------------------------------------------ No.10 3. 정도 높은 진리-전혀 볼 수 없었던 것 ♣ 전혀 볼 수 없었던 것 ♣ 제 9 장: 전혀 볼 수 없었던 것 창 밖에는 함박눈이 하얗게, 하얗게 소리 없이 나리는 밤 포근히, 포근히 온 누리를 감싸며 내리는 함박눈 그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경험하신 일이 있습니까? 벛꽃 잎이 눈처럼 바람에 날리고 먼 언덕너머로 아지랑이가 가물대며 올라가던 봄날 하얀 솜덩이 같은 민들레 꽃씨를 후-불어 날리며 신비에 전율하던 어린시절의 경험은 있으신 가요? 고속 버스를 타고 외가댁으로 가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앞자리에 앉는 이유는 앞에서 새롭게 펼쳐지며 정면으로 다가오는 경치와 차창 옆으로 지나가는 정경을 즐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행을 즐기었던 기억, 올라가는 길이 힘들어도 어느 순간엔가 앞이 환하게 확-틔며 눈 아래 펼쳐지는 시원스런 전경 때문에 힘든 것을 무릅썼던 것이지요. 바위 뒤에 털썩 주저앉아서 땀방울을 닦으며 감탄하고 즐기던 그 멋 TV가 생기고 나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앞에서 보냅니까? 그런가하면 영화를 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것입니까? 이 모두가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맹인은 보지는 못하지만 남보다 많이 손끝으로 느끼고 예민하게 듣지요. 그러나 그것은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맹인이 느끼는 것은 빤질빤질한 유리창일 뿐입니다. 창밖에 벌어지는 경치와 아름다움과 진실은 그 유리창에 가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8장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맹인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생전 처음 보게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전 처음 보게되었고 울음소리를 듣기만 하던 양과 소들의 모습을 그리고 온갖 색깔의 꽃과 나무들의 푸르름을 자기가 늘상 더듬어서 다니던 길과 자기가 살던 집의 모양새 그러나 사실 생전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그 맹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 맹인처럼 나면서부터 영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를 못하고 짐작만 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본다고 하지요. 그러나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못 보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보는 척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만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고 나면 놀라웁게도 숨겨있던 사람 마음속의 의도가(8장에서 다루었던)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쳐하고 있는 집이 얼마나 초라한 것도 보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구부러져 있는 것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신 것도 보이게 됩니다.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의 생명의 약동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진짜 보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보입니다. 그뿐입니까? 버스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가 보이게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어떤 일들이 왜 일어나고 진행되고 있는지도 보입니다. 기껏 만져보기만 하던 텔레비전 유리 상자 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이야기와 소식들이 확연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져보아야 빤질빤질 하기만 하던 유리창 너머로 가까웁게 또는 멀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창조와 기적이 눈 내리는 정경처럼 다-보이게 되며 즐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요한8:14)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오랜 세월을 찾아 헤매이던 보물을 당장 해결해 받는 큰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나나 당신이나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시 예수님을 찾아 가십시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님이기 때문에 교수님이기 때문에 장로님이나 목사님이기 때문에 그 알량한 위신 때문에 보이는 척 가장하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신 것도 보이게 됩니다.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의 생명의 약동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진짜 보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가 들리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버스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 지가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기껏 만져보기만 하던 텔레비전 유리 상자 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이야기와 소식들이 확연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져봐야 빤질빤질 하기만 하던 유리창 너머로 가까웁게 또는 멀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창조와 기적이 눈내리는 정경과 같이 다-보이게 되며 즐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도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요한8:14)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오랜 세월을 찾아 헤매이던 보물을 당장 해결해 받는 큰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나나 당신이나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다시 예수님을 찾아 가십시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님이기 때문에 교수님이기 때문에 목사님이기 때문에 그 알량한 위신 때문에 보이는척 가장하면서 답답한 삶을 사실 필요가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눈을 뜨고 나서는 당신은 더 훌륭한 목사님이 되실 것입니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보다는 몇 배 더 훌륭한 교수, 선생님 또는 지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인가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예수님을 찾으십시다.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눈을 띄워 주실 수가 있으신 분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심어주시고 꽃피고 열매맺기를 기다리시는 하늘의 크고 놀라운 가능성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2장) 우리 아이들의 엄청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기다림을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일이지요.(6장) 나를 그렇게도 미워하던 사람의 마음 속에 가득하니 쌓인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야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당신은 아직도 나면서부터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맹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있으십니까? 진실과 진리를 보고 알게되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요한8:32)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릴 때에 비로소 값진 창조의 삶이 당신의 삶 속에서 시작이 될 것입니다. -------------------------------------------- No.11 3. 정도 높은 진리-선한 목자 ♣ 선한 목자 ♣ 제10장 선한 목자 한국 사람의 장점 중에 무엇이든 열심히, 그리고 철저히 배우려고 하는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태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데도 각 과목마다 가장 중요한 요점을 찾아내어서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학습 태도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점수학, 요점화학, 요점국어, 요점영어 등등…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익숙한 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그런 요점식 학습 방법과는 너무 차이가 많이 나는 신앙태도여서 저 자신 매우 의아해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여러 번 소위 "휴거"를 믿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것도 고등교육을 족히 받을 만큼 받고, 요점학습에도 익숙한 사람들, 사회적으로도 성공의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는 교리를 피해를 입고도 버리지 못한 채 천국 가기에만 아직도 연연하고 있는 사람들 기독교가 기본이 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도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해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지식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교육과 신앙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텍사스에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교주 코라쉬와 함께 그동안 사모아 두었던 중무기로(천국운동에 무기는 왜 마련했는지?…) FBI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집단 분신 자살로 끝을 맺은 다비드 종파의 사람들 중에,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전문 법률가가 있었는가 하면 혜성을 타고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결혼하는 것도 극악한 죄라고 주장하던 정신이 이상한 교주를 따라서 캘리포니아의 어떤 별장에서 모두들 새 운동화를 신고(천국에는 새 운동화를 신어야 들어가는지?…) 보라색 보자기들을 쓰고 집단 음독 자살한 "천국문(Heaven's Gate)" 신봉자들 중에, 소위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은 어쩐 일입니까? 요점식 학습을 아무리 많이 하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되어 있으면 열심있는 사람일수록 사이비종교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요점학습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21장에 걸쳐 기독교의 전체적인 면모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요한복음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의 요점학습일 것입니다. 요점학습 제1호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고 물을 변화시켜 질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피로연을 도와주신 예수님의 목회의 시작과 그 축복의 행위에 담긴(2장)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만 한다면 휴거 같은 것은 엄격히 거부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뜻입니까? (시편11-:24) 요점학습 제2호 세상의 마지막 날이나 휴거가 만일 일어난다면 (그 일이 언제 일어날지, 예수님 자신도 모르는 일이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시는 일이라고 명백히 하셨습니다만…) 그 날을 대비해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실 것입니까? "휴거"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한들은 우선 먼저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겁을 줍니다. (성경을 한번 통독도 안하고 천국엘 어떻게 가겠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 다음은 "속죄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라"고 엄포를 놓아서 (사실 생각해 보면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줍지도 않은 우리들의 속죄의 기도 소리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지요. 하나님의 소리는 들을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공갈과 협박으로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해 놓고는 결국은 당신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할 겁니다. 세상이 끝나는데 가정은 무슨 소용이 있고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모두 다-- 포기하기를 강요하지만 자기는 돈과 재산이 왜 필요한 겁니까? 엉겁결에 이것저것 포기하는 사람만 쫄--딱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 세상의 마지막 날은 분명 옵니다. 작게 오든지, 크게 오든지 분명 옵니다. 작게는 내 생명이 끝나서 오기도 하고 크게는 지구의 멸망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를 하실 것입니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워도 사탄은 어떤 목사나 신학박사보다 성경을 더 잘 알지요. 그러니 무엇을 하자는 말씀입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한 절 밖에 몰라도 그 한 절을 열심히 사는 것은 사탄의 무리들이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따라 살면 되지요.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정말 잘 설명하신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양들에게로 와서 양들이 잘먹도록 풀이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양들이 안전하도록 보호하며 양들의 의지가 되어주는 이가 바로 목자입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목자가 되기 위함이요. 기도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볼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과 통화하는 시간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무슨 도가 통해서 도사가 되거나, 슈퍼맨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독교 도사연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까? 그런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구태여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필요가 있을까요?!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얼마든지 대기하고 있는 처지에 말입니다. 언제나 그저 축복해 달라고 죄를 사해 달라고 매달리는 유치한 신앙에서부터 성장해 나와서,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의 삶 속에 심어 놓고 그것이 자라고 열매맺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 사람들을 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