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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기행문을 쓰려고 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쉽지 않다.
가벼운 글 한 편 쓰기에도 마음의 먹이 갈아지지 않는다.
잡문 하나 쓰려고 해도 마치 오래 버려진 폐가의 문짝처럼, 녹슨 경첩이 뻑뻑하여 마음 문이 쉬 열리지 않는다.
그냥 기억을 돕기 위하여 대강의 내용과 사진 몇 장 올린다. 마침 오늘 아침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오대산 월정사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기자의 사진도 신통치 않고 문장도 맘에 들지 않는다(원래 [오마이뉴스]의 기자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개방형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니, 아마추어의 서투름이 풍길 때도 있다.).
이 기사를 쓴 이도 '월정사'까지만 찾아가 본 모양이다. 나도 스물몇살 무렵에 두 번이나 오대산에서 야영을 했었지만 '월정사'까지만 갈 수 있었다.
로또 복권도 자꾸 사다보면 한 번쯤 기회가 오는 것일까? 몇 번 찾아가다보니 결국 한 번의 행운이 주어진다. 운좋게 아무런 제지없이 이번엔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월정사'는 6.25때 소실되었었지만 '상원사'는 "나도 함께 태우라"며 법당 한가운데 앉아 참선하신 스님 덕분에 전소의 화를 면했다. 전쟁의 와중에, 실탄을 장착한 핏발 선 눈의 군인 앞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 일이다. 명령을 수행할 것을 포기한 그 육군 중위는 참 큰 원덕을 쌓은 것이다.
어쨌든 상원사든 월정사든, 지금의 모습이야 별 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은 아니지만 오가는 그 길이 깊고 넉넉하다. 수령 오래된 전나무의 기상이 엄정하고도 과묵하다.
온갖 식생이 무장무장하다.
그 깊은 골을 따라 덜컹거리며 서행할 때, 마음까지 씻어내리는 계곡이 덤으로 받는 선물이다.
우리가 찾아갈 때엔 잦은 비로 수량이 많아졌다.
그러니 물소리 또한 힘차고 맑을 수밖에.
세찬 비 한 번으로도
바위의 찌든 이끼가 씻겨지는 법이다.
사람은 매일 세수하지만
너럭바위는 그렇게 큰 비 올 때마다
말갛게 세수를 하는 셈이다.
이끼가 씻긴 바위는 그렇게 해맑다.
몇 번의 비로 수량도 많고 흙탕물도 없어서 일부러 기후에 맞추려고 해도 그렇게 만날 수 없는 물을 따라 차는 서행했다.
사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천천히 서행하며 덜커덩거려야 비로소 풍경을 볼 수 있는 것. 앞만 보고 달려갈 때엔 볼 수 없었던 소중한 것을 음미할 기회가 오는 것. 그런 생각이 전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쿨처럼 위로 자란다.
참고로 '월정사'는 지금 발굴 공사가 한창이다. 가뜩이나 중창으로 어딘지 튀는 절집 분위가 더 어수선해졌다. 대웅전인 적광전 앞에 나란히 용 모양의 대형 석등이 두 개나 서 있는데 글귀를 읽어보니 이미 작고하신 우리나라 항공사의 전 회장께서 시주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내 눈엔 이게 참 답답하다. 월정사 적광전 앞엔 국보급 팔각구층석탑이 자리해 경내가 허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알맞게 짜임새를 둔 공간적 조형이었는데 대형 석등으로 법당과 석탑 사이의 좁은 공간을 메워버린다. 석탑이 너무 크고 튀어서 분위기가 차분하지 않고 들뜬다.
많은 돈을 들여 시주하였건만 오히려 절집을 버리게 한다. 시주한 이야 오며가며 흐뭇했겠지만 속내가 그렇다.
참고로 아래 기사의 '성보박물관 유료입장'은
우리나라 절집 대부분이 다 그러하다.
수덕사며 선암사며 그 사찰에서 나온 보물급 문화재를 전시해두곤 유료로 개방한다.
단지 건물유지비 차원으로 몇 백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개가 다 이천 원 쯤 된다.
절집도 산업화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꾸자꾸 크고 높게 지어야하니 시주만으론 어려운가보다.
가는 절마다 입구에서 스님께서 직접 나와 기와 한 장 시주하라고 한다. 통상 이만 원이다.
불사도 돈이 필요한 셈이다. 특히 사찰 건축은 처마며 상량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기 그지없어 더 많은 공사비가 들 것이다마는, 어쩐지 마음은 좋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냥 기와를 밖에 놓고 시주하고픈 사람은 알아서 시주하라고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절집은 좀 한가했으면 좋겠다.
말 나온 김에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가야 하니 주지스님께서 자가용을 타고 다니시는 거야 이해하지만서도, 그 차가 거개가 최고급승용차인 옵티마인 걸 보면 좀 기분이 이상하다. 난 성보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작년 남도 답사에서도, 신흥사에서도, 올해 선암사며 수덕사에서도. 내 마음이 이미 박물관처럼 굳었나보다.
아래에 해당 기사를 참고로 옮긴다.
동행했던 이들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사]
오대산에 늦여름의 햇살이 쏟아지다가 간간히 빗줄기를 뿌린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오대산 주변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오대산은 듬직하고 거대한 노년의 산봉우리이다. 주봉인 비로봉(해발 1563m)을 비롯하여,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5개 대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 오대산이다. 특히 비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이어지는 오대산은 부드러운 흙산으로서 경치가 아름답다. 승용차로 한참을 들어가는 이 길을 선인들은 어렵사리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이 오대산에는 월정사와 상원사라는 이름난 명찰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지금의 절터에 풀로 지붕을 지은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중국 산서성 청량산(별칭이 오대산임)으로 유학을 갔던 자장율사는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지혜의 좌표가 되는 보살)을 친견하였다. 그는 지금의 오대산의 형세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는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지는 못했으나, 이 때부터 월정사는 오대천 계곡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월정사의 일주문을 지나 월정사를 향해 걷다 보면, 수천 수백 년 동안 불법을 구하던 길손들을 인도한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좌우에 아름드리 큰 전나무 숲길을 거느린 길이다. 이 길 주변에는 소나무가 거의 없고, 전나무가 유난히 많다. 전나무는 잎이 바늘 모양인 늘 푸른 큰 키 나무이다.
수목군락의 절경을 보여주는 월정사 주변의 울창한 전나무 숲은 우리나라 제일의 숲길이자 자연의 산림지대이다. 원래 전나무숲길은 월정사 진입로였으나, 현재는 아름다운 숲길을 보존하기 위하여 월정사 진입로를 우회시킨 것이다. 지금은 많은 연인들이 찾아오는 여행의 명승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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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전나무 숲길 |
ⓒ2003 노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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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전나무 숲길 |
ⓒ2003 노시경 |
이 곳의 전나무들은 평균수명 2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나무들이며 키가 보통 25m를 넘는다. 이 곳의 전나무들 중에는 수령이 400년∼600년 된 아름드리 전나무들도 많다. 곧고 푸르게 뻗어있는 푸른 전나무뿐만 아니라 수백 년 만에 수명을 다한 거대한 전나무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운치를 더 한다. 늦은 여름임에도 울창한 전나무 숲속은 외부보다 기온이 5℃정도 시원하다.
월정사 일원에는 오대천을 따라서 맑고 아름다운 계곡이 이어진다. 호명골, 중대골, 서대골 등의 계곡 물이 만나 흐르는 오대천은 동대천과 합류하면서 정선을 지나 남한강으로 굽이굽이 흘러든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는 한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오대천 중에서도 월정사 앞의 금강연은 대표적 명소이다. 주차장과 월정사를 이어주는 금강교 인근의 이 금강연에는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연메기)가 서식한다. 수온이 낮고 깨끗한 곳에서만 산다는 열목어는 이 오대천 물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수달과 도마뱀이 이 곳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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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성황당(각) |
ⓒ2003 노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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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금강루 |
ⓒ2003 노시경 |
월정사 대부분의 전각들이 최근에 중건된 것은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가 한국전쟁 중에 전쟁의 참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에 월정사는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렸으며 석조 유물들만 남게 되었다. 이 월정산 전각들을 낱낱이 폭격기가 폭격하였던 것이 아니고, 적군이 숨을 것을 없앤다는 이유로 일부러 불질러 버린 것이다.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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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보장각 |
ⓒ2003 노시경 |
그런데 이 곳에서도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으니,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이 박물관이 절 바깥에 있다면 몰라도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불교 유물들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다행히 아직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문화재들이 적광전(寂光殿) 마당 앞에 남아 있다.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국보 제48호, 8각 9층 석탑. 높이가 15.2m인 이 구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이 탑 남쪽의 석재 앞에서는 여러사람들이 돈을 얹어 놓고 소원을 빌고 있다. 딸, 신영이도 '밥 잘 먹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이 월정사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보물 제139호인 석조 보살좌상(菩薩坐像)이다.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은 주변의 유적지 조사 때문에 어디론가 옮겨지고 없다. 예전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보살의 미소를 볼 수 없음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