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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022>
오수영은 논현동 시장 근처의 한정식 집으로 김명천을
데려갔는데 고급 식당이었다. 궁중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방에 안내되었을 때 오수영은 익숙한 듯 요리를
주문했다.
"몇 번 와봤어요. 임원들하고,"
방석위에 비스듬히 앉은 오수영이 차분한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하지만 한달 후부터는 올수가 없게 되었지요. 당분간 잠수함을
타야 될테니까."
"법을 어기지는 않는 것이라면 도망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습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 전과가 화려해요."
쓴웃음을 지은 오수영이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저도 이번이 세 번째가 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오늘 처음 만난 나한테 털어놓는 이유는
뭡니까?"
"명천씨같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오수영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끝날 때 재빨리 움직여주는 남자가 있어야 돼요."
"날 어떻게 믿고?"
"당장에 일거리도 없는 남자가 이런 일을 맡으면 백퍼센트 다
억셉트한다는걸 알죠. 그러지 않는 남자는 없을걸요?"
"그럴까요?"
"생각해 보세요. 법을 어기지도 않는데다 시키는데로만 해주면
목돈이 들어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때 종업원 둘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상을 들고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말을 그쳤다. 궁중요리는 처음 보게된
김명천이다. 신선로에는 고깃국이 끓고 전에다 갖가지 찬이
놓여 있었지만 김명천의 눈에는 모양만 낸 전시품 같게 보였다.
마치 마네킹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저를 든
오수영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런일은 계속 할 것은 못되죠. 난 몇 번만 더하고
이민이나 갈까봐요."
"어디로 말입니까?"
"호주나 뉴질랜드로."
"그곳은 왜?"
"좋잖아요? 경치가."
그래서 김명천은 오수영이 이민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경치만 좋다고 이민을
갈만큼 오수영이 늘어진 팔자가 아니다. 궁중요리로 점심을
먹고 나왔을때는 오후 1시반이었다. 물론 식비 계산도
오수영이 카드로 했는데 차에 올랐을 때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한시간 반 시간이 남았어요. 우리, 섹스 할래요?"
정색한 오수영은 김명천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했다. 당황한
김명천이 먼저 시선을 내렸고 귀끝이 달아올랐다.
"거, 농담 쎄게 하시네."
"그냥 간단히 몸을 풀자는건데, 싫으면 관두고."
주차장을 나온 오수영이 대로에 차를 진입시키며 말했다.
"난 가끔 스트레스 풀려고 섹스를 해요. 상대는 아무나
근처에서 고르고."
"그럼 진담입니까?"
"아 아저씨는 뻔히 아시면서."
쓴웃음을 지은 오수영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더니 하품을
하고 말했다.
"하긴 내가 하자고 했을 때 예, 그럽시다, 하고 나서는 서울
얌체들 보다는 조금 낫네."
"시효는 지났습니까?"
그러자 오수영이 앞쪽을 본채 깔깔 웃었다.
"지났어요. 다음 기회에 봅시다."
김명천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심호흡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도 드는 것이다.
개척자<023>
그날 밤, 김명천은 사장 윤수길을 대림동 집에까지 태워다
줬다. 물론 오늘은 사장 승용차 기사로써 첫 일을 한 것인데
차를 차고에 넣고 나왔을 때 윤수길이 불렀다.
"야, 나하고 소주 한잔하자."
윤수길이 턱으로 길 아래쪽을 가리켰다.
"내가 옷 갈아입고 나올테니까 넌 모퉁이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어."
"예, 사장님."
오늘밤 윤수길은 회사에서 9시까지 일하다가 곧장 퇴근할
길이었다. 회사에서 야식으로 초밥을 시켜 먹으면서 비서와
임원 셋까지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한 것이다. 모퉁이의
식당은 허름한데다 주방까지 두평이 안돼 보였는데 손님은
한명도 없었다. 김명천이 소주 한병을 시켜놓고 기다린지
10분쯤이 지났을 때 윤수길이 들어섰다. 츄리닝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주인에게 이것저것 안주를 시킨 윤수길이 갈증이
난 듯 앞에다 따라놓은 소주를 훌쩍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대충 이야기 들었지?"
"예, 사장님."
긴장한 김명천이 몸을 굳혔다. 그러자 윤수길이 빈 잔에 술을
채우면서 말했다.
"결국은 사기야, 아래쪽 계단의 회원들은 몽땅 바가지를
쓰게되는 것이라구. 무슨말인지 알겠나?"
"알 것 같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받아먹은 횟수가 많다보니 모두 공모자가
되는거지."
다시 한 모금 소주를 삼킨 윤수길이 김명천을 보았다.
"앞으로 한달간은 피크다. 전성기란 말이다. 매출도 올라가고
마진 분배도 많아져, 회사가 아주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모두가 그렇게 느끼게 되지. "
윤수길의 두눈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절정에 오른 순간에 문을 닫아 버리는거다. 모두
한탕을 노리고 뛰어든 년놈들이니까 난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제가 할 일은 뭔가요?"
"내 심부름만 하면 돼."
낮게 말했던 윤수길이 곧 쓴웃음을 짓고는 김명천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오늘 오수영이하고 옷을 사러 나갔을 때 말이야."
"예, 사장님."
"너한테 오수영이가 한번 하자고 하지 않더냐?"
김명천이 눈만 치켜떴을 때 그것을 본 윤수길이 풀석 웃었다.
"역시 그런 모양이군, 그래서 오수영이한테 뭐라고 했냐?"
"아니, 저는."
"알아, 알아."
윤수길이 손을 저었다.
"네가 안한지 알아. 정확하게 표현하면 못했겠지. 오수영이는
한번 하자고 하는 것이 버릇이니까. 그리고는 빼는거지. 그래서
졸지에 병신을 만드는거지."
탁자위로 상반신을 굽힌 윤수길이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네 평은 좋다. 일단은 성공작이야. 첫째 네 분위기가
어리숙해서 여자들 경계심이 풀어지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비서실의 세 여우들이 너에 대해서 그런 느낌을 받는
모양이더구만."
윤수길이 술잔을 들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임원 셋은 모두 전과자고 경력이 나보다 더 화려한
작자들이야. 그리고 비서 셋은 그자들의 보조원겸 감시역이지."
목소리를 낮춘 윤수길이 말을 이었다.
"네가 여자들을 감시해라. 그것들이 임원들하고 손발을
맞추고는 날라버리면 나는 꽝 된다. 나만 병신이 되는거지."
개척자<024>
김명천도 요즘 세상에서 순수한 호의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겪어왔다.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양복도 사주었을 것이고 궁중요리도
먹였을 것이었다. 정상적인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이용가치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대우를 더 받는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간신히 사기를 당하지 않고 유통회사로 옮겼나 했더니 이곳은
조직적인 사기 회사였다. 늑대 피하고서 범 만난 꼴이 되었다.
그날밤 김명천이 영등포 시장 앞의 커피숍겸 카페에 도착
했을때는 11시반 경이었다. 카페 안에는 이미 임재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표정이 밝았다.
"왠일이야?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건 실례인지 몰라?"
김명천이 앞에 앉자 종알대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재주도 좋아. 벌써 유통회사에 들어가다니."
그리고는 임재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김명천의 옷을
훑어보았다.
"옷 어디서 샀어?"
"압구정동 국제백화점에서."
"어머나."
정색한 임재희가 넥타이를 손끝으로 뒤집어 보더니 눈을
치켜떴다.
"모두 브랜드 제품이군. 백만원 이상 깨졌겠는데."
이미 윤수길과 소주를 세병 나눠 마시고 온 길이었지만
김명천은 종업원에게 맥주를 시켰다.
"그래. 오늘 한턱 쓰신단 말이지?"
임재희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서충만이 도망치기 전날에 임재희는 회사를 그만 두었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연락이 온곳도 없다는 것이다. 맥주가 날라져 왔을
때 김명천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조직사기 회사야. 대리운전 회사 사기쯤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구."
놀란 임재희가 맥주잔을 내려놓았을 때 김명천은 길게 숨을
뱉았다.
"시발, 나는 사장한테 잘보여서 한탕을 할때 심부름만 잘 하면
한몫 챙기게 될 것 같다."
"좋은 일이네."
눈동자를 치켜뜬 임재희가 낮게 말했다.
"넌 멍청한 인상이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나봐. 바로 내가 그랬거든."
"뭐? 멍청해?"
"바보같다고 할까."
"야. 내가 심각해."
정색한 김명천이 임재희를 보았다.
"서울 바닥에 이 문제를 상의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챙피하지만."
"사장한테 잘 보였다면서?"
"오늘밤에도 둘이 술마시고 헤어졌어."
"그럼 잘됐네. 뭐."
맥주를 한모금 삼킨 임재희가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한몫 챙기겠다. 나같으면."
"그래?"
"못챙기는 놈이 병신이지."
"난 회사 내막을 몰라. 사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럼 잡혀도 핑계댈수 있겠다."
그리고는 임재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 만나서 도움이 되셨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말이야."
"너 혹시."
헛기침을 한 김명천이 굳어진 얼굴로 임재희를 보았다.
"오늘 밤 시간있어? 나하고 같이 외박하지 않을래?"
그순간 임재희가 퍼뜩 눈을 치켜 뜨더니 곧 얼굴 근육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리고는 턱을 들고 소리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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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허 큰일이네 이건 어디로 굴러가는 바퀴여 상상 불허로다 ㅎㅎㅎㅎㅎ
잘보고 갑니다...ㅎㅎㅎ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는거 아닌가 ㅎㅎ 다단게 집단을 명쾌하게 헤집고 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