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관직 선생이 해방후
자신의 집에 드나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관직 선생은 대한제국 장교 출신으로, 일제가 군대를 해산한 1907년 청년 장교로
상소를 읽었으며 신흥무관학교에서 제식 사격 등 군사훈련 관련 교본을 쓰고 청산리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 광복군 제3지대장을 하다
해방후 귀국했다.
이 의원은 “어떻게 된 일인지
그분이 살아서 돌아오셨다”며 “그런 경력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신흥무관학교 때부터 할아버지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우리집에 오곤 했는데, 그 때마다 완전히 찌그러지고 남루한 촌노의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적게나마 월급을
받는 직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삼일 묵고 가시면서 아버지에게 노자돈을 받아가셨다”며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다. 전쟁영웅을 그렇게 취급하는 게 어디있느냐. 말도 안된다. 제대로 되지 못한 나라였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