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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여행3 - 리키비토스 언덕에서 파르테논을 바라보며 옛날 여행을 떠올리다!
2024년 5월 8일 그리스 서부에 섬인 코르푸에서 8시 4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09시 40분에
아테네 Athens 공항에 도착하는지라 입국 후에 도착층 Arrival 층 1번 출구
앞에 Store your bag 유인 락커가 에서 6시간 6 유로(미디엄) 에 우리 배낭을 맡깁니다.
5번 Gate 출구로 나와 부스에서 1인당 5.5유로에 버스표를 구입해 신타그마 광장 Sintagma Square 으로
가는 X 95 공항 버스(15분 간격) 를 타는데..... 버스 안에서 티켓을 태그 하고는 리카비토스 언덕
Likavitos Hill 로 가자면 에반겔리모스역 Evangelismos 에 내려야 하지만 종점 신타그마 광장에 내립니다.
버스가 왔던 대로를 되짚어 가다가 리카비토스 언덕 Likavitos Hill 이라는 글귀를 발견하고는 명품숍
이 즐비한 콜로나키 kolonaki 지구 언덕과 계단을 올라가 Teleferik (텔레페릭) 정류소에
도착해 8유로 하는 티켓을 끊어 리카비토스 언덕 Likavitos Hill 으로 올라가는 Cable Car 를 탑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올라가니 카페 Telescopf 가 나오고 계단으로 오르니 언덕 정상부인데 한쪽에 19세기에 지어진
게오르기오스 성당 St. George 과 종탑이 보이는데, 리카비토스 언덕 Likavitos Hill (Λυκαβηττός)
은 해발 277m로, 아테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니 라틴어 Lycabettus 는 늑대가 지나간 언덕이란 뜻이랍니다.
리카비토스 언덕 정상에서 보니 저 멀리 건너편에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그 너머 왼쪽에는
에게해 (피레우스항) 바다가 보이는데... 여기서 파르테논 신전은 손에 잡힐 듯
건너다 보이니 문득 저번 그리스에 처음 왔을 때 저 파르테논에 올랐던 일이 떠오릅니다.
아테네 ΑΘΗΑΝΑ ( Athens ) 문명의 정수 고고학 박물관을 보고 나와 오모니아 광장 ΠΛΑΤΕΙΑ
ΟΜΟΝΟΙΑΣ 으로 나서니 7월이라 그런지 더워서 도로를 걸을 엄두가 나지 않기로
우리 부부와 선배님 부부등 일행 4명은 택시( 5유로 ) 로 아크로폴리스 ΑΚΡΟΠΟΛΙΣ 에 내립니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온통 올리브나무 로 가득하여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주는데,
여기가 아레오파고스 언덕으로 십자가가 서있는 바위산으로 재판소가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사도 바울 이 아고라에 온 시민들에게 기독교 선교연설 을 했던 곳입니다!
15유로에 입장권을 구입하여 언덕 중간에 우뚝 선 뷜레문 을 거쳐 아그리파상 ( 그리스성소에 왠
로마의 장군? ) 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데.... 그리스정교회 전통
사제 복장을 한 분이 보이는데 그런데 선배님이 사진기를 꺼내니 올리브나무 뒤로 숨어버리네요!
사진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선배님은 몇 번이나 사진 찍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부아가
나신 모양인데 아마도 지금 수도중인 데 사진이 찍히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죠, 그럼 여긴 안나와야지! 볼멘 목소리이신 데...... 엄청 화가 나셨나 봅니다!
오르는 길에 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신전 을 보면서, 날개가 없는 사연을 생각해 보는데 아테네인
들이 승리의 여신이 다른 나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날개를 없앴다는데....
믿을거나 말거나? 그리고 프로필레아라고 도리스식과 화려하고 섬세한 이오니아식 기둥이 맞이합니다.
스무날간 러시아 전국을 일주 여행하면서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서 양파 처럼 8개의 탑(교회) 이 있는
아름다운 바실리사원 을 본 적이 있는데.... 엘리자베드여왕이 아름다움을 전해듣고 건축가를
초청하기를 원한다는 전언에 건축가 포스닉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얘기가 생각이 납니다?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도리스식 거대한 돌 기둥이 둘러서 있으니 기둥
과 지붕사이에 90개의 부조가 있었으며 반대편인 동쪽 정면에 아테나여신상이 서 있었다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가로 31미터 세로 70미터에 높이 10미터 규모인데 15년공사 끝에 BC 438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기고 델로스동맹 으로 군자금까지 넉넉히 조달한 아테네가 그 일부를 털어 지었으니
그리스의 맹주를 자처하는 자신감의 산물일지라?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했으니,
넘치는 자신감으로 교만해진 탓에 반발한 스파르타 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 벌어져 쇠퇴하고 말았던 것이니...
파르테논 신전이 보수공사 중이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없어 아쉬운데, 높은 언덕이라 아테네 시내를 보는 전망이
좋으니..... 밤이되면 조명을 하여 휘황찬란한 모습이라는데 문득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가 떠오르니
조대호 연세대 교수는 동아일보에 “청렴-설득의 힘... 30년 흔들림 없었던 페리클레스 정치” 라는 글을 썼습니다.
민주정은 시민 대중의 정치다. 하지만 다수의 역량을 모아 공동선을 이뤄내는 정치가의 능력 없이는 제대로 작동
할수 없다. 아테네 직접 민주정도 다르지않다. 시민 의견 결집에 뛰어나야 훌륭한 정치가였고, 페리클레스는
그런 일을 가장 잘한 정치가였다. 시대의 정치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평가가 증언한다. “이름은 민주정이지만,
실제로는 제일인자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페리클레스가 ‘민주적 권력자’ 였다는 말인데, 형용모순이 아닐까?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신전 재건을 추진했고, 아테나이 정치와
문화는 이곳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했는데 네덜란드 화가 로런스 알마타데마의 1868년에 파르테논 신전
재건을 맡은 아테나이의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페리클레스와 일행들에게 공사 현장을 설명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30대초에 정치에 입문한 페리클레스는 30년넘게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아테나이의 황금기였지만,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기가 아니었다. 아테나이의 세력 팽창은 이웃 나라들과의 갈등, 식민지 개척,
무력 충돌을 낳았다. 이 모든 일에 페리클레스가 직·간접 관여했기에 공과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 정치가로서 페리클레스가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나이의 패권을 추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대외 정책이 ‘간섭하고 돈을 뜯고 자유를 빼앗은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당시 이웃 나라들이 불만을 토로했고, 페리클레스 자신도 그런 속셈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오직 한 가지, 즉 자유가 아닌 예속을 피하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지배력의 상실과 그 지배력에 의해 억제된 위험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의 통치기에는 멜로스섬 학살이나 시켈리아 원정 같은 무모한 도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파르타에 맞서 전쟁을 옹호한 것이 그의 치명적 실수일지 모르겠다.
파국적 결과를 낳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전쟁이 나고 2년 뒤에 병사했다. 그가
더 살았더라도 전쟁이 똑같은 양상을 보였을까? 25년 뒤 패전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옳을까?
페리클레스의 역량을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실천적 지혜’ 를 갖춘 사람으로 여겼다. 영리함과 도덕성
을 함께 가졌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가 발휘되는 영역은 셋이다. 개인사, 가정,
정치. 그렇다면 페리클레스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의 모든 일에서 실천적 지혜를 발휘했을까?
페리클레스는 청렴했고 지식인들과의 교류와 배움을 즐겼지만 그의 엄격한 도덕성이 가족의 불만
이었으니 아버지와 달리 씀씀이가 헤픈 아들은 아버지 이름을 팔아 돈을 빌려 유흥비로
썼다. 나중에 이 친구가 빚 갚기를 요구하자 페리클레스는 함부로 돈을 꿔준 그를
고소했고 부자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지혜로운 아버지에게도 말썽쟁이 아들은 괴로운 존재였다!
정치에서는 어땠을까? 페리클레스는 대외적으로 아테나이의 패권을 확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민주정을 완성시켰다. 그는 재산 유무에 상관없이 공직을 시민들에게 개방했고,
공직자들에게 급료를 지급했다. 생계 때문에 공적인 일에 무관심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 였다.
아테나이인 부모를 가진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허용한 것도 정책이었다. 개방성에서 후퇴한것 같지만 아테나이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한 사람도
페리클레스다. 그 일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가난한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뉴딜 정책’이었다.
결국 페리클레스의 지혜는 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진 셈이다. 엄청난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가 허락된 ‘말 많은’ 시대에 페리클레스는 어떻게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투키디데스의
대답은 이렇다. “그는 공적인 명성과 평판을 갖춘 능력자로서 청렴함이 세상에 알려져 대중을 자유롭게 제어했다.
그는 부적절한 수단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환심을 사는 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높은 명성에 힘입어
대중의 분노를 무릅쓰고 반대 주장을 폈다. 그는 사람들이 때를 모르고 과욕을 부리며 자만하는
것을 보면 두려움을 주는 말로써 진정시켰고, 두려움에 말을 잃고 좌절한 것을 보면 자신감을 북돋웠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시민을 이끈 페리클레스의 힘은 칼의 힘이 아니라 말의 힘이었다. 그는 연설을 통한 설득에
탁월했다. 입을 열면 천둥, 번개 같은 연설이 쏟아져 별명이 ‘올림포스의 주인’, 즉 제우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설이 유창해도 강제적 협박이나 교활한 자의 감언이설이었다면 대중은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과의 불화를 감수하는 의로움이, 가족 보다 공적 책임을 앞세우는 자세가 페리클레스에게 없었다면,
시민 대중의 절대적 신뢰도 없었을 테니까. “똑같은 처지에서 자식들을 빼돌려 위험을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은 국정을 의논하는데 공평할 수도, 공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런 도덕적 신념과 진짜 실력이 없이 어느 누가 30년 동안 대중의 신뢰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권력을 위해 대중에 아첨하지 않는 것, 대중의 분노를 무릅쓰고 옳고 그름을 당당히 따지는 것,
과욕을 제어하고 낙담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 페리클레스를 ‘민주적 권력자’ 로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능력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페리클레스는 후대 정치가들과 달랐다.
“그의 후계자들은 서로 똑같아 저마다 일인자가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대중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고 중대사를
대중의 기분에 내맡겼다.” 시켈리아 원정도 그런 처세에서 비롯된 잘못중 하나였다. “그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적인 음모를 꾸미느라 원정대 업무의 발목을 잡았고 처음으로 국정을 사분오열의 혼란에 빠뜨렸다.”
페리클레스의 사례는 좋은 정치의 길을 보여준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나쁜 정치다. 도덕이 없는
영리함의 정치,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입을 막는 정치는
아주 나쁜 정치다. 페리클레스 이후의 아테나이 민주정은 그런 나쁜 정치 때문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엘긴 마블을 떠올리는데.... 영국의 토마스 엘긴이 반출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부조 조각. 이를 두고 약탈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반론도 존재한다.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이라고도 불린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인 1799년 부터 1803년 사이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엘긴의 제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 (엘긴 백작) 는
오스만 제국의 모호한 허가만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대리석 조각들을 떼어낼 이권을 얻었다.
1801년에서 1812년까지 엘긴의 대리인들은 프로퓔라이아와 에렉테이온의 조각상과 건축 장식과 더불어 파르테논
신전의 현존하던 대리석 조각중 거의 절반을 뜯어내 영국으로 가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순히 위의 설명만 읽으면 엘긴이 영락없는 날강도 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긴 했다.
당시 파르테논은 1687년에 오스만이 화약창고로 쓰다가 베네치아에 공격받아 화약 유폭으로
지붕이 박살났고 주변 잔해들이나 조각상들은 사람들이 갈아서 건물 재료로 쓰려고 하는 등 대접이 엉망이었다.
게다가 엘긴은 파견되어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정부의 고위층에게 "가서 예술 작품들 본뜨고 스케치
좀 하려는데 미술가 몇 명 데려갈 돈을 달라" 며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결국 문화재가
무의미하게 갈려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엘긴은 사비 7만 파운드를 들여
오스만쪽 인사들을 매수하고 상당량의 잔존 조각상들을 뜯어내 적자를 내면서까지 영국에 팔아 버렸다.
거금을 들여 영국에 갖고 왔더니 반응은 시큰둥했다. 자기 딴에는 조국을 위한 일이었는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의 사람들이 영국에 파는 것 보다 더 높은 금액에 사겠다며 들이댔으나 무시했다. 그리고
나중에 통째로 조각물들을 뜯어간게 미안했는지 시계탑을 지어 주었지만 1884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부서졌다.
오스만 쪽은 묵인해 줬기에 별 문제 없었으나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하고 나자 엘긴마블등 과거 영국이
약탈해간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조각의 환수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영국측은 현재의 그리스 국가가 독립
하기 전에 당시의 합법적인 주인인 오스만 측과 합의를 하고 사 왔기 때문에 적법하다는 입장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렇게 점점 잊혀져 가던 도중 1962년 그리스의 영화배우이자 여성 정치가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영국을 방문하던 도중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엘긴 마블들을 발견했고 조각품들의
그리스 반환 운동을 앞장서면서 그리스는 다시금 영국으로부터 엘긴 마블의 환수를 요구하고 있다.
엘긴 마블이 돌아오면 전시해 놓을 박물관도 미리 지어 놓았다. 영국은 문화제국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현재진행형으로 거부 중이다. 결국 메르쿠리는 그리도
간절히 원하던 엘긴 마블 환수를 이루지 못한 채 1994년 74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2011년에 한국에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형식으로 사실상의 반환을 한 프랑스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이 약탈해간 악숨 오벨리스크 등
에티오피아의 고대 유적들을 2005년 에티오피아에 조건 없이 반환한 이탈리아가 있습니다.
차라리 영국도 조각들을 임대형식이든 조건 없는 반환이든 간에 그리스에게 이 유물들을 돌려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영국이 이 조각들을 그리스에게 돌려줄지는 의문. 2018년에도 그리스 총리가
요구했지만 영국의 태도가 변하지는 않았다. 2019년에도 그리스 대통령이 엘긴 마블의 반환을 요구했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엘긴 마블을 돌려주면 지금까지 한 번도 해외에서 전시된 적이 없는
그리스 유물들을 영국 런던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다시 갈등이 생겼다. 그리스가 엘긴 마블을 대여라도 해달라고 하니까 영국이
대여 전에 영국이 엘긴 마블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한 것. 그리스에서는 당연히 반발했다.
중국도 그리스를 지지하고 도우면서 나섰다. 아무래도 둔황이라든지 원명원 약탈로 해외로 반출되어
나간 문화재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를 거절하였다. 2022년 12월에 교황청이 3점을 그리스에 반환하기로 했다.
2023년 들어 엘긴 마블 일부분을 단기로 잠시 빌려주는 형태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르테논 신전과
관련한 조각 중 3분의 1 수준까지만 우선 빌려준 뒤 그리스가 영국에 다시 돌려주면 더 많은 조각을
그리스를 보내는 식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영국 법에 의하면 영국이 소유한 소장품을 영구적
으로 반환할 수 없는 대신 단기 대여 형식으로 그리스에게 잠시 빌려주는 단기 대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의 아내이자 국제법 변호사인 아말 클루니가 그리스로 반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며
이를 국제사법재판소로 이끌어내기 위해 2015년에 150 페이지에 달하는 소송전략
보고서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리스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상황은 현재진행형.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서 부조와 조각상 을 둘러보고는 디오니소스 극장 으로 내려가는데 디오니소스는 술과
연극의 신으로 주로 비극이 상연 되었으며 1만5천 관중을 수용했다는데 지금은 일부가 무너졌지만
아직도 위용을 간직하고 잇는 극장을 내려다 보는데 내부에는 조각상과 디오니소스의 부조가 남아있답니다.
기원전 6세기의 건축이라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기서 비극의 대다수가 상연
되었다니.... 내려오다보니 자연히 고대 아테네의 상업, 정치의 중심지로
시장이었던 고대 아고라 에 이르러 신전을 입장할때 산 표를 보이고 입장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로 시끌벅적했을 아고라의 찬란했던 모습은 과거의 일이요, 지금은 모두 폐허로 변했네요.
후대에 세워진 바실리카 안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고양이 녀석을 늘어지게 잠을 자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나오는 길이 울타리로 막혀 있어서 들어갔던 곳으로 둘러 나오는데 한참을 걸으니
저게 이로데스 아띠꾸스 야외 음악당 일러나? 저 야외 음악당에서는
밤에 그리스 고전극, 연극, 콘서트, 오페라 가 상연되는데 무려 6천석 규모라고 합니다.
건너편의 드라스트라투 Dora Stratou Theater 야외극장에서는 밤 10시부터 그리스 각지의 민속무용 을
볼수 있다고 하며 코끼리 열차가 있어 타려고 했더니 일행들 중에 뒤처진 사람들이 있어 놓치고는
경사진 언덕길을 걸어서...... 19세기의 예쁜 집들과 자그만 골목길이 운치가 있다는 플라카 거리 로 갑니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 아크로폴리스만 입장할 경우는 20유로이고 디오니소스 극장과
제우스 신전 및 모나스티라키 세 유적까지 통합권 가격은 30유로 이며,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극장을 제외한 곳은 모두 오후 3시에 문 닫아버리는데,
바닥이 대리석이라 미끄러우며 바람도 굉장히 세차므로 소지품과 안전 관리에 유의해야 합니다.
아고라는 고대 아테네의 상업, 정치의 중심지로 시장이기도 했는데 복원된 건물은 아탈로스의
회랑 건물밖에 없으며 씨시오(Θησειο) 라고 부르는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고, 이곳에서 자라는 월계수 덕분에 상당히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합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 구석에 자리하던 박물관을 아크로폴리역 부근에 이전하여 지은 곳인데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한 석상이나 유물에 각종 아크로폴리스 건축물들의 재현 모형까지 있으며
이로데스 아띠꾸스 야외 음악당은 그리스 고전극, 연극, 콘서트, 오페라를 공연하며..... 건너편의
드라스트라투 Dora Stratou Theater 야외 극장에서는 밤 10시 부터 그리스의 민속무용을 볼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