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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과 연합국 - 손을 맞잡은 전체주의 국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겨우 20여년 만에 유럽 대륙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추축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든 거다.
전 세계의 땅, 바다, 하늘이 모두 전쟁터로 변하면서 파괴의 정도도 심각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도록 도와주다 가까워진 독일과 이탈리아가 조약을 맺었고,
얼마 후에는 독일과 일본이 협정을 맺었다.
독일의 나치스 정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가 손을 맞잡은 거다.
이들은 모두 전체주의 나라들이고, 이들이 뭉치는 것은 곧 평화를 위협한다는 걸 의미했다.
일본은 1937년에 중국으로 쳐들어가 중·일 전쟁을 일으켰고.
독일의 히틀러는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을 차지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켜 백만 명이 넘는 군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1939년에는 아예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폴란드를 차지하기 위해 소련의 스탈린과 만나 ‘(독쏘)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군이 1939년 폴란드로 진격할 때 소련이 눈감아 주는 대신
폴란드의 서쪽은 독일이, 폴란드의 동쪽은 소련이 나눠 먹기로 한 거다
〈에스파냐 내전이 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1936년 에스파냐에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하고,
세계 각지에서 스스로 무기를 들고 달려온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반대편에 서서 싸웠다.
전쟁에 참여했던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의 작가는
이 경험을 소재로 책을 써서 세계에 에스파냐 내전을 고발했었고.
전쟁의 잔인함을 가장 충격적으로 표현한 것은 에스파냐 출신의 화가 피카소였다.
독일 나치스는 신무기를 시험한다는 목적으로
게르니카 지방의 민간인을 향해 50톤의 폭탄을 퍼부어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화폭에 그대로 표현했았다.
2005년에 독일, 프랑스, 폴란드의 젊은이들이
파리에서 베를린, 바르샤바에 이르는 3천km 길을 따라 역사 바로보기 여행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현장을 찾아 다니며 용서와 화해를 생각하고, 유럽인이라는 공동의 미래를 찾기 위한 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법적으로 배상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독일 정부와 기업은 약 6조 원이라는 기금을 마련해 재단을 만들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이 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정부와 기업에 의해 강제로 일한 사람들에 대한 배상까지도 책임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와 독일은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공동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이 이 나라들처럼 하는 날은 언제가 될 것인가?
제2차 세계 대전 - 전 세계로 번져 나간 전쟁
독일군 폴란드 공격(1939.8)
새벽 6시 독일의 폭격기들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급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거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에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여러 나라가 여기에 합세했다.
이 나라들을 ‘연합국’이라고 하며. 한편 독일, 이탈리아와 그 동맹국은 ‘추축국’이라고 한다.
소련은 폴란드 동부와 발트 3국을 합병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1940.6)과 독일군에 저항한 영국(1940.8)
독일은 서쪽으로 네덜란드, 벨기에를 점령한 후 프랑스로 쳐들어가 프랑스 영토의 2/3를 손에 넣었고
프랑스 정부는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남부의 ‘비시’라는 도시에 정부를 세웠지만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런던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에 맞서 싸우며 ‘자유 프랑스 운동’을 벌였다.
히틀러는 유일하게 남은 적인 영국을 물리치려고
U보트를 이용해 영국으로 향하는 배들을 모조리 가라앉혔지만
영국은 처칠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벌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이겼다.
영국에 패한 독일군은 방향을 바꾸어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아프리카로 진격했다.
독일의 소련 기습 침공(1941.6)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12)
거의 전 유럽을 차지한 독일은 약속을 깨고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이때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어 연합국을 지원하자, 소련도 독일과의 동맹을 깨고 연합국에 가담했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이 만나 〈대서양헌장〉을 발표해 전쟁 후 평화 원칙을 밝혔다.
일본은 중·일 전쟁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그러자 미국이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함께 일본을 둘러싸고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연합군의 총반격과 이탈리아 항복(1941~1943)
여름부터 연합군의 총반격으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을,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독일을 크게 물리쳤다.
또한 연합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면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졌다.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를 중심으로 독일에 대항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6)과 독일과 일본의 항복(1945.8)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총지휘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파리가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연합군은 전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연합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자 일본 역시 항복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1899.7.~1961.7)
《노인과 바다》(1952)로 퓰리처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시카고 출생 소설가.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한 20세기의 대표작가이다
1926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1937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
-密輸入에 종사하는 어선 선장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1938년 《第五列 The Fifth Column》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1936년 에스파냐 내전 참전의 경험으로 쓴 케리쿠퍼와 잉그릿드버그만 주연 영화의 원작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1881.10~ 1973.4]
스페인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
프랑스 미술에 영향을 받아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르누아르, 툴루즈, 뭉크, 고갱, 고흐 등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다.
주요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게르니카》(1937)
예술양식 - 조각가, 판화가, 도예가, 콜라주 화가, 입체주의의 창시자,
반복된 모티프의 사용, 정물화,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헌정화(獻呈畵)
폭격으로 무너진 집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
파블로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고,
상대적으로 20세기의 모든 미술가들은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같은 대선배들의 계보를 잇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피카소는 기교, 독창성, 해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없었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윌렘 데 쿠닝,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일찍이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라코루냐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피카소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놀라운 사실주의 작품인 <첫 영성체>(1896)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카소는 다른 미술가들의 양식을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그의 작품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1896)은 마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처럼 보이고,
<푸른 옷을 입은 여인>(1901)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1904년에 피카소는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피카소가 초기에 제작한 회화와 판화,
그리고 조각 작품들은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피카소는 청색의 색조를 자주 사용했고, 알코올 중독자, 거지, 매춘부, 방랑자, 빈민들이
마치 엘 그레코의 인물들처럼 길쭉하고 수척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의 작품으로는 <비극>(1903)이 있다.
장미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지며,
<곡예사 가족>(1905)에서처럼 어릿광대, 곡예사, 서커스단원들이 등장한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이 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서양 미술사상 일대 전환점이 된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 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 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대가의 작업은 지속되고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조각상처럼 견고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상 작품들을 제작하다가,
192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양식으로 옮겨갔으며,
1930년대에는 뛰어난 기교를 선보인 에칭 작품인 <미노타우로마키>(1935)에서처럼,
신화적인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활동기간 내내, 구성과 공간, 그리고 기법과 색채에 신경을 썼고,
투우, 기타, 어릿광대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채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 중에는 벽화 <게르니카>(1937)를 제작하여 파시즘에 저항했다.
그는 <게르니카> 이후에도 드로잉, 에칭, 회화 연작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는데,
에칭 작품인 <우는 여인>(1937)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피카소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시녀들>(1957)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선배 미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1960년대에는 색채주의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이 중 일부는 신표현주의로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아픔과 고통의 보편적인 상징이 된 <게르니카>
피카소의 개인사는 그의 미술 양식의 변화 과정만큼이나 유동적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여자로부터 네 명의 아이를 가졌다.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항상 독창적이었던 거장 피카소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게르니카>(1937)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는 방탄유리 뒤편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에칭 연작 '전쟁의 참화'(1810~1820경) 이후로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을 가장 잘 요약한 작품일 것이다.
1936년에 스페인 내란이 발생했을 때 피카소는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공화국에 충성하던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1937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작품을 출품해 줄 것을 의뢰받았다.
공화정부에 불복한 파시스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요청으로,
독일의 비행대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을 하여,
사망자가 천육백여명에 달했다.
피카소는 이 참사를 의뢰받은 그림의 주제로 채택하여 파시스트들에게 강력히 항의하고자 했다.
가로 23피트(7.8미터), 세로 11피트(3.5미터)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에
회색과 흰색의 제한적인 색채가 칠해졌다.
단색의 색조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신문 보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
풍부한 이미지들에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왔으나, 피카소는 그들에게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는 여인상의 의미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파리를 시작으로 해서 유럽을 순회하며 전시되었고, 이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을 때 반환해 달라는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프랑코가 죽은 후, 1981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나는 열다섯 살에 벨라스케스처럼 그렸다. 덕분에 나는 80년 동안이나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발트3국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가리킨다.
이 3국은 예로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들어 1918년을 기점으로 발트 3개국은 각각 독립을 성취하여 공화국을 수립하였고
1934년 발트 3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40년 舊蘇聯에 합병되었다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의 영향으로 1991년8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발칸반도
유럽 대륙의 남쪽, 지중해의 동쪽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반도이다.
발칸이라는 지명은 터키어로 '산맥'을 뜻한다.
발칸 반도의 면적은 약 50만5천㎢이고, 동서 길이 1,300km, 남북 길이 1,000km이다.
북쪽에는 도나우 강 하류와 사바 강, 동쪽에는 흑해, 남동쪽에는 에게 해, 남쪽에는 지중해,
남서쪽에는 이오니아 해, 서쪽에는 아드리아 해 등이 둘러싸고 있어 자연스럽게 경계가 이루어진다.
발칸 반도에 속하는 국가들은 그리스ㆍ알바니아ㆍ불가리아ㆍ루마니아ㆍ세르비아ㆍ
몬테네그로ㆍ 슬로베니아ㆍ크로아티아ㆍ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ㆍ마케도니아 등이 속한다.
자연환경
발칸 반도는 주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산맥은 루마니아의 카르파티아산맥, 불가리아의 발칸산맥과 로도페산맥, 그리스의 핀두스산맥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고립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후진적인 위치로 남게 되었다.
가혹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고립된 가운데 독특한 민족적 전통이 발생한 것이다.
평균기온은 여름이 21℃, 겨울이 7℃이다.
강우량은 주로 겨울에 많으나, 북부와 중부의 일부에서는 여름에도 비가 자주 내린다.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이며, 반도의 북부에서는 유럽의 대륙성 기후 현상도 나타난다.
지하자원으로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루마니아ㆍ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 등에서 추출되며,
갈탄이 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ㆍ불가리아ㆍ그리스 등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역사
선사시대부터 발칸 반도에는 여러 종류의 민족들이 이동하고 정착했지만,
역사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본격적으로 각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발칸 반도의 영역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그의 사후 발칸 반도는 로마, 비잔틴 제국, 투르크 등 주변 여러 제국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근대까지도 오스트리아나 영국 등이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9세기에 터키가 러시아에게 패퇴당하면서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형성되었다.
민족국가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들은 서로 분쟁을 일으켰으며,
주변 열강들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불안정이 격화되어,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주도로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사회주의를 기조로 하는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유고슬라비아연방이 축소되는 등 분열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초반 신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ㆍ크로아티아ㆍ마케도니아(91년 독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92년 독립) 등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2006년 6월 신유고슬라비아는 다시 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의 2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인도차이나 반도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를 차지하는 큰 반도로
동쪽은 남중국해, 서쪽은 벵골灣에 면하며, 남쪽은 말레이반도로 수마트라와 접하고
도서부와 함께 동남아시아를 2분한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타이·말레이시아·미얀마 등의 나라를 포함하며,
그 지리적 위치는 태평양과 인도양의 접점, 또 인도와 중국의 2대 문화권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아시아의 2대 古文化圈의 교류점일 뿐만 아니라
말레이반도나 말라카 해협을 통한 동서문명의 교류에도 역사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지형은 히말라야 방면에서 뻗어내린 褶曲山系가 이곳에서 남북방향으로 굴곡해서
여러 갈래의 높은 산지를 이루면서 分岐하므로 매우 복잡하다.
미얀마의 아라칸요마·샨고지, 베트남·라오스 방면의 안남산맥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산지는 지질시대에 침식과 융기를 되풀이하였고,
그 때문에 하천은 回春作用을 받아 웅대한 하곡이 절벽을 이루면서
산체를 깎는 데다가 풍부한 강수량이 더하여 지형은 심한 開析을 받는다.
이 협곡 사이를 이라와디·메남·메콩·송꼬이강 등의 큰 하천이 흘러내리고
하류에는 모두 광대한 삼각주를 형성한다.
더구나 하곡 상호간의 교통은 지형적으로 장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하나의 河系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민족이 거주하고 삼각주에는 가장 많은 인구가 집중 거주하게 되어
각각 그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를 이루었다.
인도차이나반도는 거의 아열대 또는 열대에 속하여 항상 고온을 이룬다.
그러나 적도에 가까운 말레이반도를 제외하고는 몬순의 영향을 받아 건기와 우기의 차가 뚜렷하며,
우기(5∼10월)에 연강수량의 대부분이 집중한다.
이에 대해서 건기(11∼4월)는 비가 적게 내리고
지형적인 조건과 더불어 奧地에는 사바나의 경관을 이루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온다습한 기후로 도처에 밀림을 형성한다.
첫댓글 세계사 공부와 거장들의 그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