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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에 진실한 나는 진실하게 쓰리라.
Oh, let me, true in love, but truly write.
– 셰익스피어 <소네트 21> 중
수화기 너머로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새벽 한중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공연을 위해 전자피아노에 헤드폰을 연결하고, 헤드폰 공명판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으며 연신 건반을 눌러 댔을 모습이 선연했다. 꾹꾹. 바깥으로 소리 내는 방법을 잊은 건반은 가끔 울음 참는 소리를 냈다. 먹먹한 아우성에는 소리 없는 웃음이 동행했다. 창 너머에는 별이 음계처럼 돋아나 있고, 곡은 머릿속 악보를 따라 비밀스레 연주되었다. 부옇게 여명이 밝아왔다. 페이드 인(fade-in)되는 무대 위로 배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근사한 단상에 연인이 나란히 앉았다. 먼 곳에서, 희극의 한 장면을 바라보았다. 피렌체 장미정원에서.
내 어디 그대를 여름날에 견줘 볼까? / 그대가 더 아름답고 더 온화하다네. / 거친 바람 예쁜 오월 꽃망울을 막 흔들고 / 여름에게 주어진 기간은 너무나 짧다네. / 하늘의 저 눈은 때론 너무 뜨겁게 비치고 / 그것의 금빛 또한 자주 흐릿해지며, / 고운 건 언젠가, 우연이든 자연이든, / 모두 다 치장 벗고 그 미색을 잃는다네. / 하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지지 않고 / 그대가 소유한 미색도 잃지 않을 것이며, / 영원한 시 속에서 그대가 시간 따라 자랄 때 / 죽음도 그대가 어둠 속 헤맨다고 못 뻐길 것이네. / 인간이 숨 쉴 수 있거나 눈이 볼 수 있는 한, / 이것이 사는 한, 이것이 그대를 살린다네.
– 셰익스피어 <소네트 18>
사적인 여행 극을 써보기로 했다. 2016년 11월, 카메라 두 대를 챙겨 들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무수히 찍고 미련 없이 지우는 디지털카메라의 사진처럼 유용한 글을 쓰고자 했다. 더불어 서른여섯 번 고민하며 찰나를 기록하고, 며칠 동안 현상을 기다려야 하는 필름카메라의 두근거림도 문장에 담기기를 바랐다. 희곡은 조명이 밝아지며 ‘발단’에 접어든다. 어둠이 꿰맨 박음질이 어스러지며 틈새로 빛이 발했다. 이탈리아의 여느 아침, 이날은 밀라노에 있었다. 일정이 바빴다. 온종일 베로나에 있기로 한 날이었기에 서둘러 밀라노 중앙역(Stazione di Milano Centrale)으로 향했다.
▲자전거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길을 걸었다. 이내 베로나 중심이다. 삶도 이처럼 길을 일러주면 좋겠다 싶다.
약 한 시간 반 뒤, 베로나(Verona Porta Nuova)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북부 레시니 산기슭에 있는 베로나는 중세적 매력을 갖춘 도회지로, 200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럽 역사의 여러 중요한 시기를 거치면서 발달한 ‘요새 도시’의 개념을 독특하게 표현하였고,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차역을 나와 오른쪽으로 걸었다. 커다란 성문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 문이 서 있다. 15세기, 베로나를 점령한 베네치아가 성벽을 새로 쌓아 도시 규모를 키운 흔적이다. 15분가량 걸었을까, 브라 광장(Piazza Bra)에 닿았다.
▲브라 광장. 따뜻한 색깔의 외벽 덕분에 초행길의 긴장이 녹아 흘렀다.
황톳빛의 성벽을 지나자 베로나 특유의 활기가 번진다. 난색의 향연이다. 왼편으로 카페테리아가 늘어섰고, 테라스에는 저마다 독특한 식탁보와 의자가 펼쳐졌다. 언뜻 보면 옆 가게와 줄 맞춰 세운 것 같지만, 실은 보행로에 보다 가깝게 놓으려 꾀를 썼다. 슬그머니 테이블을 끌다 눈이 마주친 소도시 사람이 흐뭇한 미소를 들이민다. 노란색, 주황색, 연분홍색의 외벽 덕에 날 선 마음이 녹아내렸는지, 그마저 반갑다. 베로나 시내를 휘감는 아디제(Adige) 강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갈고리 형태의 강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베로나 스케치, 이진이, 2016.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원형극장/ 카스텔베키오 다리/ 산 피에트로 언덕/ 피에트라 다리
첫 행선지는 브라 광장 앞 원형극장(Verona Arena)이었다. 1세기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원형극장은 12세기 지진으로 인해 외벽 일부가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진다. 베로나 원형극장은 로마의 콜로세움, 카우파의 원형극장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극장으로, 건축 연도는 콜로세움보다 40년 앞선다. ‘아레나’는 모래를 뜻한다. 검투사나 맹수가 흘린 피로 바닥이 붉게 물들고 냄새가 나면, 새로운 모래를 깔아 덮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매년 이곳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오페라 선율이 여름밤을 수놓고 있다. 왼쪽 골목으로 나아갔다. 벌건 카스텔베키오 다리(Ponte di Castelvecchio)를 스쳐 지났다. 이름 모를 새가 물의 숨소리를 따라 유영하고 있다. 검붉은 낙엽도 물결에 붙어 흐른다. 괜스레 사랑이 수북이 담긴 돛단배가 떠내려가는 것도 같다.
▲줄리엣은 창문 너머 달빛의 향을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을까.
한 발자국에 한 단어씩, 20분간의 독백이 이어졌다. 그날의 피아노 곡조를 묘사하는 한 문단이 완성될 즈음 피에트라 다리(Ponte Pietra)에 미쳤다. 베로나의 여느 유적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돌다리다. 이윽고 주황빛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잎새의 향기는 그녀의 코를 타고 들어가 입꼬리를 끌어올린 모양이다. 깨끗한 미소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불멸의 사랑 이야기인 <로미오와 줄리엣>. 죽음마저 막지 못한 이들의 사랑은 소설 속 배경 도시 베로나를 사랑의 성지로 만들었다. 주연 배우를 만날 때였다. ‘전개’다.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으로 방향을 돌렸다.
[로미오]: 베로나 성벽 너머 딴 세상은 없습니다. 연옥과 고문과 지옥 자체 말고는. 그러므로 ‘추방’은 세상에서 추방이고, 세상에서 유배는 죽음이죠. (중략) 줄리엣이 사는 곳 여기가 천국이고 모든 개와 고양이 어린 생쥐까지도, 가치 없는 모든 것도 이 천국에 살면서 그녀를 보건만 로미오만 못 봐요.
▲’줄리엣의 집’ 입구. 동전만 한 작은 여백에 무궁한 소망을 적어놓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시뇨리 광장(Piazza dei Signori)과 에르베 광장(Piazza Delle Erbe)을 비껴갔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광장에 이른 장이 섰다. 소란스러운 즐거움은 잠시 뒤로 미루었다. 왼쪽에 아치 모양의 대문이 펼쳐졌다. ‘줄리엣의 집’이라는 조그만 팻말과 함께다. 사랑하는 이가 이렇게나 많은지, 그녀의 집은 온통 낙서투성이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인 달콤한 밀어는 크기도 색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씹던 껌 위에 사랑의 속삭임을 새겨 넣었고, 또 다른 이는 비죽 나온 턱에 올라 가장 높은 곳에 인연을 새겼다. 연인들이 영원의 사랑을 다짐하는 말일 테다.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을 비는 염원일 수도 있겠다. 혹은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기원하는 애절한 바람일 수도 있겠다. 동전만 한 작은 여백에 무궁한 소망을 적어놓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줄리엣의 동상과 발코니
1905년, 베로나 시는 이곳을 줄리엣의 집으로 선정했다. 13세기에 지어진 여관 건물을 개조하여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양식으로 꾸미고, 근사한 발코니까지 마련한 것이다. 정원에는 순진한 얼굴과 여린 몸의 줄리엣이 세워져 있다. 유독 그녀의 오른쪽 가슴이 반질거린다. 동상의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속설 때문이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연인은 손을 포개어 줄리엣을 감싸 안았다. 난간에는 세 명의 줄리엣이 서 있다. 가장 키가 작은 줄리엣은 겨우 눈만 드러냈다. 줄리엣의 발코니는 동상과 함께 줄리엣의 집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발코니가 나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원문에서 줄리엣은 ‘창문’에 나타나며, 18세기 데이비드 개릭의 극장에서 발코니가 무대 세트의 일부로 도입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 줄리엣의 집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흉상/ 셰익스피어 필체(영국도서관 제공)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대문호라 일컬어지는 작가로, 19세기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표현했다. 셰익스피어는 1594년 영국 중부지방에 있는 소읍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비교적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 문법학교에 다니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문법, 수사학, 문학 등의 고전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성서와 고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열여덟이 된 그는 8세 연상의 연인 해서웨이와 결혼하였다. 1594년, 30세가 된 셰익스피어는 의전 장관극장에 소속되었다. 그 후 20여 년간 전속 극작가 겸 공동경영자로, 때로는 배우로 활동하며 희곡과 시집을 펴냈다. 그는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은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등의 희곡이었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부터 1616년까지 37편의 드라마(10편의 비극,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와 2편의 장시, 시집 <소네트>를 발표하였다. 그의 희곡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세계문학의 고전’인 동시에 현대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왼) <소네트(Sonnets)>, 1609 / 오) <시집(Poems)>, 1640, 출처: http://www.folger.edu
일찍 핀 제비꽃을 난 이렇게 꾸중했지. / “예쁜 도둑, 내 연인의 숨결 말고 넌 어디서 / 그 단내를 훔쳐 왔니? 부드러운 네 뺨을 / 피부처럼 물들이는 그 자랑스러운 자줏빛은 / 명백히 내 연인의 핏줄에서 가져왔어.” / (중략) / 나는 더 많은 꽃을 살폈지만, 그대의 향기나 / 색깔을 훔치지 않은 건 하나도 못 봤다네.
– 셰익스피어 <소네트 99> 중
셰익스피어는 극작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154편의 소네트*를 남겼는데, 상당수는 사랑을 노래하였다. ‘사랑’은 모든 장르의 문학작품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역시 사랑이 두드러진다. 두 주연배우는 서로에게 시적인 노래를 바치며 사랑을 키워갔다. (*소네트: 14행의 서정시. 중세 이탈리아 운문에서 유래된 정형시)
▲줄리엣의 집에는 보름달 모양의 줄리엣 조형물이 있다. 결코 변하지 않을 달(月)이다.
[줄리엣]: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내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진 마세요, 그대의 사랑도 그처럼 바뀌지 않도록.
- 2막 2장 중
16세기 말에 완성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태는 1562년에 발표된 아서 브룩의 서사시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슬픈 이야기>다. 서사시 역시 마테오 반델로의 이탈리아 소설을 번역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는 브룩의 시를 희곡으로 만들면서 그 시의 내용을 소상하게 따랐고, 또 극 중의 인물들에게 더 풍성한 감정과 특별한 성격을 부여했다. 또한, 원작의 전체 시간은 9개월이지만, 셰익스피어는 극의 진행 시간을 압축하여 단 5일 동안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원수 가문인 몬터규 가의 아들 로미오와 캐풀렛 가의 딸 줄리엣이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5일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고 서약을 지킨다. 셰익스피어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십 대 남녀의 대사를 통해 사랑에 대한 갈망이 온 정신을 지배했을 때의 감정을 걸출하게 묘사했다. 연인의 죽음으로 두 집안의 원한은 끝이 났다. 나아가 갈라져 있던 베로나 사회가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년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는 극적인 구성과 아름다운 표현을 담은 강렬한 운명적 낭만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줄리엣에게 전자 편지를 쓰는 모니터 뒤에는 로미오가 타고 올랐을 법한 사다리가 새겨졌다.
*첫 만남
[로미오]: 오,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다! 검은 여인 귓밥 위의 값비싼 보석처럼 밤의 뺨에 그녀가 걸린 것 같구나. – 땅 위에서 쓰기에는 너무 귀한 아름다움! 까마귀 무리 속의 흰 눈 같은 비둘기가 자기 또래 가운데 저 건너 숙녀구나. (중략) 내가 사랑했었던가? 시각이여 부인하라, 진정한 아름다움 이 밤에야 봤으니까.- 1막 5장 중
[줄리엣]: 여기까지 따라와 춤을 안 춘 저 사람은?
[유모]: 몰라요.
[줄리엣]: 가서 이름 물어봐. 그가 만일 기혼이면 무덤이 내 신혼의 침대가 될 것 같아.
[유모]: 이름은 로미오고 몬터규네 사람이며 큰 원수 집안의 외동아들이래요.
[줄리엣]: 유일한 내 미움이 유일한 내 사랑을 낳다니! 모르고 너무 일찍 만났고, 알고 나니 너무 늦다! 혐오스러운 원수를 사랑해야 하다니 나에게 이 사랑은 불길한 탄생이다.- 1막 5장 중
줄리엣의 집은 5층으로 이루어졌다. 나무 계단이 극의 효과음을 더했다. 줄리엣에게 전자 편지를 보내는 4층에 이르렀다. 모니터 옆으로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의 붉은 우체통이 있다. 편지함은 이미 색색의 봉투로 가득 찼다. 속수무책의 감정에 빠진 이들의 서신일 테다. 줄리엣에게는 매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편지가 날아든다. 내용은 주로 애틋한 첫사랑의 고백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이라 전해진다.
▲줄리엣의 집 전경_줄리엣의 방과 당대의 옷을 복원해 놓았다.
[줄리엣]: 오,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대 이름 거부해요. 그렇게 못한다면 애인이란 맹세만 하세요. 그럼 난 더 이상 캐풀렛이 아니에요. (중략)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중략) 오, 다른 이름 가지세요! 이름이 별건가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다른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 날 겁니다.
- 2막 2장 중
▲엄마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아이는 고운 표정을 반짝거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많은 이에게 동경이 된다. 사랑의 실현을 갈망하는 믿음과 영원한 사랑을 지키려는 용기. 이것이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줄리엣의 집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끊임없이 북적이는 줄리엣의 집을 뒤로하고 광장으로 향했다. 시뇨리 광장 중심에 단테의 동상이 서 있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던 단테는 13-14세기 베로나를 지배했던 스칼라 가문의 보호로 베로나에서 3년 동안 머물렀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먹었다. 뱅쇼도 한 잔 걸쳤다. 느슨해져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다. 일순간 막연히 베로나에 머물고 싶었다. ‘위기’ 없이 ‘절정’을 맞았다.
▲줄리엣의 묘
[로미오]: 자, 독이 아닌 치료제여, 줄리엣의 무덤으로 함께 가자. 거기서 널 써야만 하니까.
- 5막 1장 중
금세 어두워졌다. 겨울 해가 짧은 까닭이다. 기차역이 있는 남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내 머쓱한 나무가 에워싼 저택에 이르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식을 치렀다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다. 입구에는 줄리엣의 묘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은 입으로 전해지는 추정지일 뿐이다. 화살표를 따라 뜰 한쪽에 자리한 지하로 내려갔다. 서느런 온도 탓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옷매무새를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중심에 뚜껑이 없는 석관묘가 있고, 관 속에 흰 백합을 연상할 수 있는 하얀 자국이 남아 있다. 백합은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 고요히 ‘결말’을 만났다.
▲베로나 곳곳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이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사랑인가 보다.
[줄리엣]: 너그러운 마음으로 또다시 주려고요. 하지만 가진 것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아낌없는 내 마음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사랑 또한 같이 깊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나요. 둘 다 무한하니까.
- 2막 2장 중
느지막이 일어났더니 단걸음에 저녁이다. 하늘색과 분홍색의 책을 책장 셋째 층으로 옮겼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밤이 짙어진 뒤에는 악보가 된 별빛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았다. 손가락에 매달린 별빛을 간직해, 느린 왈츠를 추는 날 그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악기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이뿐이었다. 암흑은 바느질을 서둘렀다. 페이드 아웃(fade-out)되며 장막이 덮였다.
- 3막 3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