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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1:1-11
승리의 비결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고난 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모여 예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사업과 삶 가운데도 우리 예수님께서 승리자로 입성하시어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해 드립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여 종려 주일이라 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고난의 첫 날이다 하여 고난주일이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을 우리는 승리의 입성이다 라고 말을 하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 예수님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기 보다는 고통과 죽음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의 길을 가시기 위하여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고난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또한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이 승리의 입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승리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은 고된 훈련을 통해 승리를 경험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열심히 노력함을 통해 성공을 경험합니다.
과학자들은 수없는 실패를 통해 하나의 발명품을 이루어 내고,
노래하는 사람은 수백번의 연습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이고,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자매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이었고, 정말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과, 구원 받았다는 감격으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들고 어려웠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자니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살자니 손해보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살자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더니 더 큰 어려움들이 많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매가 한탄 하면서 기도합니다. “주님 너무 힘이 들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러던 어느날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게 됩니다.
자기가 아주 큰 십자가를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 힘이 들어서 고통스럽게 끌고 가고 있는데, 마침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 자매가 예수님께 이렇게 호소 합니다. 예수님 제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요. 그러니 조금만 잘라 주시면 안될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조금 잘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 십자가는 다시 무거워 졌습니다. 또 예수님께 호소 합니다. 예수님 또 조금만 잘라 주세요. 예수님은 또 잘라 줍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였는데, 갑자기 요단강이 앞에 보입니다. 그 때에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뒤에 따라 오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십자가를 강에 뛰우고 그 위에 타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띄워 보려고 하는데, 이미 자기 손에 있는 십자가는 너무나 작아져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토막이 되어 버려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 앉아 엉엉 울다가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길을 돌아가서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요, 고통의 십자가요, 치욕의 십자가이지만 이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주님과 같이 십자가로 승리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승리의 두 가지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하여 오시는데,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에 감람산 벳바게 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 감람산은 감람나무가 많이 있는 해발 800m 정도 되는 산입니다. 이 감람산 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의 이름이 바로 벳바게 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라고 기록하여도 되는데, 특별히 감람산 벳바게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떤 지명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스가랴14:4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는 예언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벳바게만 언급하지 않고, 감람산 벳바게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 벳바게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 오게 하시는데, 나귀 새끼만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고, 나귀도 함께 끌고 오게 합니다.
이제 제자들이 가서 두 마리의 나귀를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으면 어떤 것을 타겠습니까? 보통은 나귀를 타지 나귀 새끼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4절에 기록하기를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기록합니다.
그럼 선지자의 말이 무엇입니까?
5절에 “시온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스가랴 선지자가 스가랴 9:9에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가 겸손하시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더 궁극적인 이유는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삶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끄러운 모습으로 태어난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정혼하지 않은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십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 가시면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신 일들이 마쳐 가는 순간까지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69편에서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를 마시웠사오니” 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심으로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성경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삶을 결론적으로 표현할 때에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3:29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같이 찾아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성경이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시기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 승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리에 태어 나셨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고,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이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겸손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괜히 나는 겸손하다 말하면 교만하게 보일지 모르니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면 아니요 저는 겸손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겸손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비굴함과 약함을 겸손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겸손은,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순종하는 그 순종의 모습과 노력이 참된 겸손이지 아니 나는 못해요, 나는 부족해요 이게 겸손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세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겸손하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으로 보내려고 할 때에 하나님 내가 누군데 거기 가겠습니까? 나는 입이 뻣뻣하여 말을 잘 못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야 너 참 겸손하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못합니다 가 겸손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종려주일 고난의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은 순종하는 겸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나귀의 새끼를 타셨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았기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겸손이 바로 부활의 승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승리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라신다면 내 실력을 열심히 쌓아야지, 그래서 열심히 성경도 알고, 자기의 재능도 보이고, 하는 것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에서 노력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에서 수고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에서 봉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에서 선교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에서 사역할 때에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가 되어 우리에게 놀라운 부활의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줄로 믿으시고, 말씀앞에 순종하는 겸손으로 부활의 승리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두번째 승리의 비결은,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내려 놓음에는 수동적인 내려 놓음이 있고, 능동적인 내려 놓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려 놓음의 두 가지 예를 다 보여 주고 있는데, 하나는 나귀의 주인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과 무리들 입니다.
먼저 나귀의 주인을 보면 이 사람은 주님이 쓰시겠다 하는 말씀에 수동적이지만 내려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셔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가라 하시니 두 제자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감람산 맞은편 마을로 갔습니다.
정말 나귀 두 마리가 매여 있는 보게 됩니다. 이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매여 있는 나귀를 풀기 시작합니다.
자 주인이 있는데, 뻔히 눈을 뜨고 지키고 있는데, 제자들이 이 나귀들을 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귀를 매어두고 편히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두 사람이 와서 나귀를 풀고 있으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못가져 가게 하면서 왜 그 매인 것을 푸느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쓰실 것입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주가 쓰시겠다 하는 이 말씀 한 마디에 나귀 주인은 즉시 나귀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주가 쓰시겠다 하는 말씀에 나의 가진 것을 내어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내려 놓음입니다.
이 주인이 그럼 왜 주가 쓰시겠다 라는 말에 선뜻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귀 한마리도 아니고, 나귀와 새끼를 모두 내어 주었겠습니까?
아마 이 주인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든지,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해서 드렸든지, 예수님을 알고 있어서 드렸던지, 이 나귀의 주인은 자신의 것을 주가 쓰시겠다 할 때에/ 머뭇거리지 않았고,/ 계산해 보지 않았고,/ 두려워 하지 않고,/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내려 놓았더니 주님께서 사용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험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쓰시겠다 하시는 그 말씀이 가장 큰 시험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서 교육부를 위하여 기도 하는데,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희 교회 자녀들 중에서 정치가도 나오게 하시고, 교수도 나오게 하시고, 법관도 나오게 하시고 목회자도 나오게 하시고, 선교사도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때 하나님께서는 즉각 응답하여 주시는데, 그래 그럼 네 아들을 내가 목회자로 그리고 네 딸있지 그 딸을 내가 선교사로 사용하겠다 하였더니 그 분이 깜짝 놀라 이렇게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제 자녀는 머리가 아주 좋습니다. 교수나 의사로 사용하시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 목사님 가정에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목사님 아들이 대를 이어 주를 섬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의 것은 되는데 내것은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 위하여 자녀를 서원하라 하는데 그것 내려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 위하여 물질의 욕심을 내려 놓으라 하는데, 그것을 내려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기 위하여 권력을 내려 놓으라 하는데 그것을 내려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에 순종하여 내려 놓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려 놓은 것을 사용하시어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승리케 하시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주님께서 직접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한 마디 “주가 쓰실 것입니다.” 라는 말에 자신의 것을 내려 놓았기에 주님께 쓰임 받은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여 드리는 내려 놓음도 있지만 능동적인 내려 놓음도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과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나귀를 끌고 온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옷을 좀 사용하자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앉장으로 얹어 놓았고,
8절에서는 무리들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실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능동적인 내려 놓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려 놓아라 하지 않으셔도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내려 놓음입니다.
성경시대의 옷은 3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속옷이 있고, 그 위에 겉옷이 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두 종류의 옷을 입지만, 조금 더 생활의 여유가 있으면 외투를 입었습니다. 이 외투는 겉옷보다 조금 더 화려한 옷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이 옷이 많은 곳에 사용이 됩니다. 특별히 이 겉옷은 담보물이 됩니다.
신24:12-13에 가난한 자의 전집물을 밤 새 가지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옷을 담보물로 삼았을 때 하루밤을 넘기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다.
왜냐하면 전집물로 잡을 수 있는 겉옷은 위에 걸치는 옷으로 사용되지만 이 옷이 이불로도 사용되어 낮에는 입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이 겉옷을 벗어서 덮고 자는 이불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막의 기후는 낮에는 덮고 밤에는 아주 추워서 그냥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밤에 입고 다니던 옷이라도 덮어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옷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도 그렇고 무리들도 모두가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타시는 나귀 새끼 위에, 그리고 길에도 깔아서 예수님이 그 위에 앉게 하시고, 그 위를 걷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섞여 있어서 다시 돌려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이 옷을 다른 사람이 가져 가기라도 하면 나는 아무 것도 덮고 잘 이불이 없어 지는 것인데, 그 옷을 드렸다는 것은 전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하나만 빼어 놓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취미 하나만 제가 사용하게 하여 주세요.
어떤 사람은 골프를 너무 좋아 합니다. 이 남편은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부인의 말이라면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어떤 자리 어떤 순간에도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는 주저 없이 달려 갑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골프를 치는 것만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칠 때에는 아내의 전화도 안받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골프를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공하기를 원하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승리를 가져다 주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전부를 드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좀 이해를 해 주시지요. 제가 무슨 낙이 있습니까? 이거라도 해야 하는데, 이것만 빼고는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려 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주님 앞에 내려 놓을 때에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실패는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남겨 두었다는 것 때문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자녀, 사업, 건강, 재능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려 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실패자가 아니라 부활의 승리자로 일으켜 주실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내려 놓음을 통해 승리자가 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신앙을 지키기에도 참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 삶도 어렵고, 가정의 자녀 교육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승리와 성공을 위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는 겸손을 통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영원한 승리를 주시기 위하여 입성하시는 주님 앞에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질 때에 우리는 부활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으시고 실천하심으로 승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승리자로 입성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