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심
마태복음 9 : 9 – 13
예수님께서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본 이름은 ‘레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셨던 것처럼 ‘마태’(하나님의 선물이란 뜻)도 개명된 이름인 듯합니다.
당시 세관은 로마제국이 지배국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세무서로서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세리들은 자신의 경제적 부를 위하여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동족으로부터 매국노 취급하여 ‘이방인’과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세리로서 충실했습니다.
마태는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무리를 가르치며 행하신 모든 것을 보고 배운 것을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며, 만왕의 왕이심과 우리의 영원한 왕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예수님이 역사적인 분이심을 증명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심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워져 가심과 다시 오실 재림까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드러나지 않게 제자로서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많은 사람을 전도하다가 그곳의 왕 히르키누스에 의하여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마태가 전도한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기독교를 제일 먼저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로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 중에 제일 안전하고 잘 사는 나라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다’는 말씀은 그가 죄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불러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지 않을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도 마태와 같이 예수님을 잘 섬기며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마태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죄인 취급받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비방하며 말했습니다.(11) 그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라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예수님은 죄인들을 치유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3:10) 누구에게나 영혼을 치유하실 의사인 예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인 체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통달한 자들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선지자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에 ‘너희는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율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외면한 채 율법의 외적인 의식에만 전념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이웃 사랑입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말은 제사(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이 있어야 올바른 예배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예배)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긍휼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거짓 예배입니다.
죄인 취급받던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제자 삼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긍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불의와 죄악에 빠진 사람도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십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크게 소리 내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9-14)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라는 긍휼하심이 있는 예배라야 합니다. 긍휼하심이 없는 예배는 무의미한 예배입니다.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부산 동래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식당 하던 집을 매입하여 저희 가족이 예배드림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몇 주일 지난 어느 주일 오후에 알콜 중독자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들렸습니다. 한 번 취하면 7-10일 정도 소주만 마시고 밤낮으로 주변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를 보는 사람들은 다들 외면하고 피합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그분을 서재로 모시고 대화하며 그가 가져온 소주병을 달라고 하여 한 잔을 부어 마시라고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술을 마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 주일 오후 예배시간에 오셔서 뒷자리에 앉으시고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그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등록 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멀지 않은 명륜시장에 횟집을 하는 그의 집을 심방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알콜 중독자로 최악에 빠진 자였습니다. 그의 가족이나 주변에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 집에 심방 하는 것을 본 이웃과 시장 사람들은 매우 놀라며 비웃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삼천포까지 가서 싱싱한 횟고기를 사 오시고 대접하신 것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사정을 듣고 상담했을 때 그가 알콜 중독자가 된 원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교회에 출석하시다가 서울로 이사한 후로 그분이 어떻게 지내셨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를 외면했다면 그는 교회를 비난하며 욕하고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그와 같은 사람을 보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구제불능한 자로 정죄하며 돌보지 않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이 죄인으로 정죄하며 벼려진 자를 긍휼히 여기고 영접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도에게 맞아 거의 죽은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상처에 포도주와 물로 씻어주고 주막에 데리고 와서 돌보아 주고 그를 살려서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거의 죽은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중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피를 흘리고 죽은 사람은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 지내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 긍휼이 없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반가이 맞이하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하며 좋아하는 것을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신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와 친구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고 불평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하며 좋아하는 아버지의 긍휼을 몰랐습니다.(눅15:11-32)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윈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들 불러 구원하시고 천국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눅5:29)고 말했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큰 잔치에 앉았다는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10)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입고 죄사함 받은 자들을 위한 잔치는 주님 오시는 날 천국 혼인 잔치의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와 성도를 ‘신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신부되는 성도들을 천국 혼인 잔치에 데려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말씀을 믿고 주님 오시기를 믿고 기다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려 오실 날은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날이 되기까지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그날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서 함께 기뻐하며 즐겁게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