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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ola fides 원문보기 글쓴이: 김의천
Ottavio Leoni (1578~1630),
Portrait of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about 1621, Colored chalk on paper,
Florence, Biblioteca Marucelliana.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 발표된 그에 관한 비평은 16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앞의 3년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비평은 이렇게 말한다.
"2주간의 작업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 두 달간 칼을 들고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그를 고의로 살해한다.
다음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바로크 양식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사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들로 인해 비난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점차 인정받게 되어 유명해진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
Michelangelo Merisi, called Caravaggio,
was a prolific and important painter of the early Baroque period in Italy.
During his lifetime he was equally well-known for his art, as he was notorious for his violent temper,
which frequently landed him in trouble and forced him to travel (flee, to be specific) constantly.
Few artists in history have exercised as extraordinary an influence as this tempestuous
and short-lived painter. Caravaggio was instrumental in establishing the tenets
of the Baroque movement, moving European art away from the idealized viewpoint
of the Renaissance to a more quotidien aesthetic of beauty.
Rest on Flight to Egypt
1596-97
Oil on canvas, 133,5 x 166,5 cm
Galleria Doria Pamphilj, Rome
The Sacrifice of Isaac
1601-02
Oil on canvas, 104 x 135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03,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이렇듯 배경이 들어간 작품들이 있긴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는 배경을 최대한 날려버리고 인물에 집중을 합니다.
이로 인해 작가의 주제가 인물을 통해 더욱 부각되는 것이겠죠.
그럼 이제 배경이 깜깜한 작품들을 몇 개 감상을 해 볼까요 ^^
먼저 보실 작품은 '나르키소스'입니다.
우리가 '나르시즘'이라고 부르는 의미의 주인공입니다.
배경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에 비친 반영은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일 뿐 모든 배경은 검은 색으로 처리했습니다.
Narcissus
1598-99
Oil on canvas, 110 x 92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나르키소스, Narcissus, 1598~1599, 아르테 안티카 국립미술관>
나르시즘이라 표현되는 자아도취의 장면이죠.
작품 속 주인공의 표정이 보이시나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한껏 취해있는 나르키소스의 모습 말입니다.
요즘 말로 '표정 죽입니다' ^^
그림을 보고 있자면 내가 나르키소스도 아닌데 이 그림에 몰입해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곳이 숲속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 그 어떤 배경이 있어야 이 나르시즘이라는 주제가 더 부각이 될까요?
카라바조는 직선적이었습니다.
모든 주제를 인물을 통해 드러내면서 필요없어 보이면 가차없이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림처럼 뒷 배경은 검은색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작품의 주제가 보는 이의 기억속 깊은 곳에 거대한 이미지로 남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만 그런 걸까요?
그럼 같은 주제로 다른 작가의 그림을 하나 보도록 하죠.
아래의 그림은 '에코와 나르키소스'라는 작품입니다.
연못에 비친 자신과 열애에 빠진 나르키소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예 역시 좋은 그림이죠.
작품의 구성이나 그리스 로마신화의 한 부분을 그림으로 옮겨놓는 능력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그림에 한가지 빠져있는게 있다면
나중에 좀처럼 이 그림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르시즘은 자신의 반영을 보고 자아도취하는 장면인데
나르시즘하면 카라바조의 그림이 떠오르지 위의 그림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거대한 이미지의 잔영. 카라바조가 천재라는 증거가 되겠죠.
참!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연극적 사실주의'를 창조해 냈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감상하신 미술작품들을 생각해 보세요.
언제나 작품속 느낌은 정적(靜的)이었습니다.
운동감이 느껴지기 보다는 고요함이 감도는 평온한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카라바조 이전 시대의 작품속에서 말입니다.
한번 비교해 볼까요?
예수님이 나오는 엠마오의 만찬(이하 만찬)을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티치아노의 만찬을 보시기 바랍니다.
Supper at Emmaus
c. 1530
Oil on canvas, 169 x 244 cm
Mus�e du Louvre, Paris
<엠마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1540경, 루브르 박물관>
뒤로 산이 보이는 식당에서 예수님은 만찬을 시작하려 합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고
분위기는 은총으로 충만해 보입니다. 아름다운 장면이죠.
하지만 이 분위기는 정적입(靜的)니다.
이제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Supper at Emmaus
1601
Oil on canvas, 141 x 196 cm
National Gallery, London
<엠마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1601년, 내셔널 갤러리>
여전히 배경은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허름한 식당에서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 맞은편 인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간적으로 놀란 기색이 역력합니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요?
순간의 포착. 이 순간은 급격한 움직임을 포착해 그 움직임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수염이 없네요.
1600년 경이라면 사람들도 보수적이고 작품을 구입하는 계층도
귀족이나 교회가 대부분일텐데 논란이 일었을 것 같네요.
하여튼 이런 '연극적 사실주의'가 감이 아직 오지 않으시나요?
그럼 다른 작품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도마뱀에 물린 소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Boy Bitten by a Lizard
c. 1594
Oil on canvas, 66 x 49,5 cm
National Gallery, London
<도마뱀에 물린 소년, Boy bitten by a Lizard, 1595년, 내셔널 갤러리>
'아얏!' 이라는 느낌이 오시나요?
소년의 손가락을 도마뱀에 물려 아파하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카라바조는 이런 순간적 포착이 여러 작품에서 보여 주면서
사실적인 느낌이 나게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소년의 귀 위에 꽃힌 꽃과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옷으로 유추해 보면
이 소년은 남창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카라바조가 동성연애를 즐겼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부분이지요.
사실 카라바조의 작품에는 미소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
(특히 작품 속 소년의 손가락을 보시면 새끼 손가락이 예쁘게 갈라져 있습니다.
흔히들 공주병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이죠. ^^;;)
자~ 이제 제가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두번째 이유를 적어 보겠습니다.
바로 주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와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분위기는 근엄함이나
엄숙함 그리고 성스러움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성직자나 귀족이었으니 그럴만도 하겠지요.)
작품 속 주인공들은 성스러움이나 근엄함을 갖추고 진지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카라바조는 작품속 인물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집어 넣습니다.
<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02년, 폭격으로 파손>
이 그림은 교회의 주문을 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보통 예수의 12제자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생각이 나시나요?
깨끗한 옷을 입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선교활동을 하거나 저술을 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나요?
그럼 이제 그림을 살펴 보겠습니다.
성 마태의 팔과 다리는 농부나 어부의 그것처럼 거칠고 투박합니다.
저 손가락으로는 글을 쓰기보다는 밭을 가는게 더 편해 보이네요.
에구 그러고 보니 탈모도...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천사는 왜 이렇게 요염한건지..
그 요염한 천사의 손이 닿은 성 마태의 놀란 표정이 순진해 보이네요.
그럼 이 그림이 교회에 팔렸을까요?
물론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카라바조는 다시 그림을 그려야 했고
이번에는 좀 더 정상적인 이미지의 성 마태를 그리게 됩니다.
Caravaggio. St. Matthew and the Angel. 1603.
Oil on canvas. San Luigi dei Francesi, Rome, Italy.
<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02년, 산루이지 데이프란체시 교회>
이제야 종교화 같고, 성 마태 같고, 천사가 천사같나요?
제가 볼 땐 첫 번째 그림이 더 눈이 가는데요..
예수님의 제자중 학식이 그리 높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엘리트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어 위의 그림처럼 위엄을 갖추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성 마태의 모습이 너무 학자같지 않나요?
아무래도 저는 첫번째 그림이 더 정감이 갑니다.
물론 어느 작품이 사실에 더 가까울지는 저도 알 수 가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 다음 그림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도마의 의심'과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라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도마의 의심'을 좋아해서 자주 올리게 되네요 ^^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도마의 의심>
1601-02
Oil on canvas, 107 x 146 cm
Schloss Sanssouci, Potsdam
'도마의 의심'은 보시는 바와 같이 직설적입니다.
성경에 '보지않고 믿는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예수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 넣는 모습이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예수의 제자도 이럴진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카라바조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사실 저도 어떤 종교 광신도가 자신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면 의심부터 할 겁니다.
어떻게 믿을 수 가 있을까요.
아무리 상처 부위를 보여주며 다시 살아났다고 외친들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그것이 쉽겠습니까.
아마도 '이 그림은 이렇게 믿음이 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라고
냉소적으로 비웃는 카라바조의 블랙유머가 떠오릅니다.
물론 그 댓가는 카라바조 자신이 지불했겠지요.
어느 교회에서 이런 그림을 사갈까요?
아마도 팔기는 다 글러 보입니다.
다음은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c. 1598
Oil on canvas, 145 x 195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Judith and Holophernes, 1599년, 로마, 국립 고대미술관>
역사적으로 주인공 유딧은 유태인 과부로 거짓으로 항복하고 적장과 동침한 후,
그의 목을 베어 유대진영으로 가져 왔습니다.
유태인계의 논개라고 할까요?
유태인에게 이 유딧은 애국자입니다.
그렇다면 애국자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보통의 우리들이 통념상 성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 모습의 그림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닭을 잡는 아낙의 모습으로 유딧을 묘사합니다.
작품 어디에도 성스러운 모습은 없고 칼로 목을 벨 때의 느낌을 잡아내어 그 순간을 묘사합니다.
어떻게 목을 잘랐는지 우리는 알 수는 없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이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아무리 유딧이 애국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목을 벤 후 완성된 이미지일뿐
실제로 살인의 순간에도 성스럽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듯 후세에 우리가 기억하는 성인이나 애국자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 형성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의 순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질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마저 우리의 상상속 이미지와 동일하다면 좋겠지만
살인의 순간에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 순간에 태연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카라바조는 이렇듯 우리가 상상하는 이미지들을 파괴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우리 탁 까놓고 말해보자고~'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천재의 독설일까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가야하는 작가가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맞쳐주어야 하는게 인지상정일텐데
카라바조는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수정을 하며 고객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여자와 남자(^^;;)를 사랑하는 카라바조는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단아였습니다.
천재적 재능에 비해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없었던 남자.
그래도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던 카라바조는 결국 도박과 살인
그리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해 예술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도망쳐 방랑생활을 하다가
다시는 로마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를 혐오하는 무리들에 의해 정당한 평가를 다시 받기까지 3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1920년 경 비평가 로베르토 롱기에 의해 카라바조는 재조명되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덕분에 저도 카라바조를 알게 되었네요.
저에게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숨기고픈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
조롱하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