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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1931년. 오쿠도이 텐가이(奧土居天外) 著)에서 [대신궁, 본파본원사충주포교소, 조동종예성사, 천리교충주선교소, 금광교교회소] 부분을 옮깁니다.
먼저 《충주관찰지, 1931년》원문과 번역문을 싣고(p116 ~ p125.), [충북발전연구원 鄭三哲 編譯, 2012년]에서 펴낸《충주관찰지》번역문(p97 ~ p106.)을 뒤에 실었습니다.
[충북발전연구원]에서 펴낸 《충주관찰지》에는 대신궁(大神宮) 부분은 불편했는지 싣지 않았는데 번역하여 옮겼습니다. 100년이 조금 안된 책인데 원문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원문을 제대로 읽는 작업일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풀이와 설명을 달았습니다.
<원문>
p116
◇大神宮
古來忠州は殷賑を極めた樂園の地であり變じて戰場の巷となり幾多の盛衰を重ねたが一度我日本の國威八紘に輝き東洋の平和と二千萬同胞の幸福を求むべく日韓併合して慈仁の政布かれて後は低迷せる暗雲一掃され森羅萬象、日就月將の感を湧かせ忠州を永住の地として諸事經營を志すもの日を追ふて増加し明治四十五年、氏神奉祀の議盛んに起り忠州市街西方の高地社稷山(昔日山名を社稷壇と呼び中途語言が變化されて社稷山となる)に天照皇大神を奉祀すべく議は直に纏り在住民の淨財を募りて神殿の造營をなし大正元年十月竣工を告げ伊勢大神宮の大麻を拜受して十一月七日盛大なる鎭座祭を行ひ爾來學校組合管理者氏子總代として春秋二季大祭を執行中途宇野佐平氏を總代として永年神事に盡し、大正九年模範農業家大瀨由平氏の獻穀田に使用せる周圍の柵を忠州職工組合員諸氏が作業を奉仕して移轉し神殿の玉垣を築き大正十二年神祠として認可され石垣築造拜殿建築神苑
p117
擴張等の工事を完成し昭和三年十月御卽位式御大典記念事業として廣島縣人會より鐵筋混凝土の大鳥居を奉獻し山内には社稷神、稻荷大明神等の祠あり、明治、大正の年間に於ける軍人の忠魂碑、警察官の招魂碑等あり參道の右側に六角堂を設け眺望絕佳を極め東に忠州市街西に虎岩堤二十九町步の水面明鏡の如く南には雄大なる南山の高峯雲に聳へ西南東一帶の大平野は本道第一富源の寶庫たるを俯瞰す、大神宮に奉仕する神職は數年間天理敎忠州宣敎所長中西啓治郞氏が祭事を司りしが權中敎正工家松藏氏を招聘せるに及んで同氏を專屬神職とし中西啓治郞氏と金光敎敎師立石德次郞氏の祭事に奉仕する事とせり。昭和三年十月近鄕八區に亙り十二名の總代を設け其他若干名の顧問を置き神事に關する諸般の協議事項を決議せしが昭和五年八月十六日忠州神祠崇敬會を組織し忠州邑長秋山文雄氏を氏子總代長として内鮮人十三名の氏子總代と十一名の顧問を設け本會規約を作成し神社に昇格すべく準備に著手し一面敬神思想の普及に努め神靈の加護普天下の下至らざるはなし。
忠州神祠奉仕關係者
神職 工家松藏
p118
氏子總代長 秋山文雄
副總代長 長山重治
氏子總代
〔東區〕
長山重治
朴徹奎
〔西區〕
奧土居種一郞
劉秉萬
〔南區〕
松本傳右衛門
韓義錫
〔北區〕
田中源太郞
劉錫斗
〔達川里〕
渡邊利惣太
張奎星
〔龍山里〕
洪炳純
〔校峴洞〕
李秉雲
〔鳳方里〕
孫海達
顧問
崔志煥
原口一二
鹽田禎介
鈴木政一
李春雄
尹政求
星野竹治
宇田亮太郞
水野彌吉
未永傳
宇野佐平
p119
◇本派本願寺忠州布敎所
佛陀の慈光普天下の下至らざるはなく大正四年本派の僧侶佐藤淨信氏が忠州に入り單獨布敎をなし他力本願の敎を說き念佛弘通に專念す。
同年九月總督府令に依り開敎本部の認可を得て公認せられ本派本願寺忠州布敎所の開設を見たるも信者少數にして開敎當時の布敎所は維持經營の困難容易ならず淨信氏は布敎の餘暇農事を營み半農半僧の苦行を續け一意宗敎の普及思想善導に盡す事三年八箇月大正七年の晩秋病床に臥し人生の無常を明らかに示し年齢三十九才を一期とし念佛の聲共は大往生を遂げて佛籍に入る大正八年三月本願寺布敎師小田賢順氏が後任として赴任し大手町の布敎所朝鮮家屋の殿堂に入り。
親鸞在世の稻田草庵を偲ぶ、寺有物も御本尊一體と二三の佛具を備ふるに過ぎず著任早々信徒有志の集合を求め信徒總代の選舉をなし宇野佐平、原口一二、宮地幸吉、中野次郞、
p120
星野竹治。稻田四馬治六名の總代と各區二名の世話係を設け幹部の決定を見るに至り布敎方針の樹立護寺會の創立等を謀り全會一致の賛同を得て敎線の擴張を專らにし以て忠州布敎所の維持と經營は安定を得たり。
同年五月忠州佛敎婦人會を創立し本山内佛敎婦人會聯合本部に加盟して公認せられ今や百六十餘名の會員を得て春秋二季總會を開き毎月十五日例會を催す。昭和三年十一月曠古の御大典を記念すべき敬老會を起こし毎年十一月三日明治節を以て年中行事として之を行ふ布敎所内に通俗修養文庫を設け國譯一切經を藏しその他の修養書籍六百餘種を備へ文書傳導の意味に於て地方人士の修養の資に供す大正九年四月布敎所新築の議を起こし信徒總代各町世話係を中心に協議をなし宇野佐平氏は敷地を寄附し宮地幸吉氏は別製瓦一切を寄附し工事費用を寄附に俟つ事とせしが地方信者の淨財喜捨は望外な成績を擧げて本堂庫裡の設計をなし本部由三郞氏が工事を請負紫宸殿造りの本堂と平屋建の庫裡は大正十年落成を告げ本派本願寺朝鮮開敎總長松原含藏師の臨場を得て四十餘名の天童子を加へ莊嚴なる慶讚大法會の入佛式が擧行された、大正十二年立敎開宗七百年の記念法會は第二代の開敎總長斯
p121
波隨牲師の巡視布敎あり忠州布敎所は小田布敎師の努力と信者の熱心なる信仰が殿堂の内容を充實せしめ、昭和三年郡廳構内に在りし去今一千二百年前の大金佛釋伽像を境内に奉安し毎年四月八日釋尊降誕法會を修し(寫眞參照)内鮮の善男善女參拜織るが如し、忠州職工組合員は聖德太子の御繪像を安置し、忠州佛敎婦人會員は宗祖親鸞聖人の御眞影を奉安し基本財產八百餘圓を蓄積して宗敎普及の基礎確立せり。
◇曹洞宗 蘂城寺
忠州市街の北端校峴川の河岸櫻樹鬱蒼たる中に一伽藍を見る曹洞宗蘂城寺となり一宇建立の起因を辿れば明治四十四年長野縣人淸水機雄師が朝鮮佛敎の硏究を志し偶々忠州に入つて滯在月餘に及ぶ道を說き法を授く、佛弟子機雄師は在住民の懇請を入れて錦町裏通りに布敎所を設け佛敎弘通の端を拓き傍ら茶花の作法を傳授し信望日に厚く德月に加はり師に歸依して信仰の門に入る者日を追ふて盛なりしが故在て忠州を去る内藤義山瀧澤の兩師其後を受けて敎義を勸め大正五年十月現在の伽藍を建立し神奈川縣鶴見總持寺越前の永平
p122
寺兩本山の末寺として忠州の舊地名を執つて大雄山蘂城寺と號す大正十年十月十日第四代の住職として廣田春岳師が赴任し專ら宗敎の隆盛に努め法を弘め德を授け忠州の生佛と謳はれて寺運日就月將の感あるを觀る昭和四年信創を中心とする觀音講と佛敎婦人會が飛躍して同志を募り寺内に西國三十三所の靈場に安置する各本尊の石像を安置し信徒總代熊谷團藏氏を中心に十四名の氏は本寺基本の造成に全力を捧げて活動し寺領年と共に増加し蘂城寺の基礎既の確立せるは編に佛光照護の賜物であり生佛春岳禪師の高德才器の現はであると共に之に歸依する信者の有する信仰の偉大たるを凝はず佛光遍照の高德忠州の平和圖り五濁惡世人類を救ふに本敎の繁昌を祈つて止まず。
春岳禪師の 法を聰きて
春岳の手の持つ如意は世の中の
惡鬼を拂ふ如意とこそ知れ
◇天理敎忠州宣敎所
一宗一派の祖たるや凡人に非ず何れを見るも權家の再來にして仁に厚く慈に深く法を說
p123
き道を授けて普汎に其德を布き命壽盡きて身終ると難も德は死せず法は朽ちず何れの世何れの時か名現はれて神と崇め佛と敬ふて光輝普天之下照らざるはなし、天理敎々祖の德昭和の御代を照らし六百五拾萬の信者を得て旭日昇天の繁榮をなせるは敎祖の威德にして遙に九十三年の古へ敎祖の在世を景仰して讚嘆するに辭なし。忠州宣敎所の盛んなる事敎祖の偉德なりと雖も宣敎所長中西啓治郞氏の至誠心より湧き出ずる熱と力加ふるに信者各位の厚き信仰の賜として玆に忠州天理敎宣敎所の沿革を誦ひ以て後參考の一端に資せむ。
大正五年の早春大阪府人中西敬治郞氏が忠州錦町倉重氏の門に訪れて理を說き道を敎へ附近の人々合議を重ねて錦町に集談所を設けたのが天理敎を忠州に布敎せる濫觴にして時將に陽春の花蕾まむとする三月十六日であつた中西氏の熱心なる信仰は漸く認られ日々神德に浴し本敎に歸依する者踵を接して氏の膝下に集ひ大正八年十一月集談所を大手町に移して信者の勸めに依り中西氏は本部の經營せる天理敎校に入學して大正十年六月二十五日本校の行程を卒業して權訓導を拜命し大正十一年二月四日本部の認可を得て河原町大敎會所屬の忠州宣敎所を創立し超へて大正十二年二月二十三日忠州社稷山麓に淨地を求め宏
p124
莊なる建築物は其工に著手し神殿拜殿附屬家屋合して大正十三年五月二十四日竣工を告げ大手町より移轉して今日に至る。宣敎所の維持經營信者の助力に依ると雖も布敎の基礎確立し日を重ね年を追ふて隆盛の域に達し人生と信仰の意義に醒めて神前は日夜參拜するもの絶へず天理敎々祖の威德全く玆に煌くを觀る。
毎月一日月次祭を行ひ一月三日、十月一日大祭を行ふ。
◇金光敎々會所
金光敎々會所は兵庫縣有馬郡名均村の人二軒谷市松氏の夫人某が忠州在住中病に罹り仁川に於て靜養中金光敎仁川敎會所主任生沼萬壽吉氏の勸めにより同敎の信者となり天地金神の加護を得て病忽ちにして治す遂に神靈の分額を受けて自宅の一室に安置し夫妻寸時も天地金神の威德を腦裡より放さず一家健康にして業日を追ふて築へ家運益々繁昌す數年にして巨萬の富を築き人皆其威德を崇拜して二軒谷氏の門に集ふ大正十一年二軒谷氏を中心
p125
に市内有志の淨財を得て仲町通りの一角に川本角市氏の所有地を借り受け神殿の造營を完成したが十二年末川本氏病沒するに當つて整理上借地返還を要求され忠州の富豪宇野佐平氏は社稷山麓現在の位置を寄附し神恩講を組織して參百餘圓の基金造成と本部由三郞氏小島政六氏を始め有志の喜捨を得て大正十五年三月現在の地に移轉を完成し本部由三郞加藤二郞兩氏の瞻煎にて第二第三囘と神恩講を連續して同志と謀り社殿の莊嚴と客殿の新築を完成し昭和三年三月七日敎師立石德次郞氏の赴任以來漸次敬神思想の普及を念として富貴不淫貧賤にして樂み法を說き道を敎へ至誠人を感動せしめ日夜參拜する者多く昭和六年四月境内の一角に用水井戶の堀鑿をなすや十數尺の地底岩盤の湧出口に突き當て淸淨なる用水手を用ひずして數尺の地上に噴水す井水斯の如きは全く奇蹟にして神德の高大無邊なるを讚嘆す仰ひで信すべきは遠く人智の及ばざる神靈の威德なり記して忠州金光敎の沿革を語る筆外に本敎維持の爲め盡率せる人々枚舉に違あらずと雖も茲に略し諸氏の陰德に感謝して止まざる者多し。
<번역문>
p.116
◇대신궁 (大神宮)
예로부터 충주는 풍요롭고 번화함이 극에 달했던 낙원의 땅이었으나, 변하여 전쟁터의 거리가 되어 수많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우리 일본의 국위가 세계에 빛나고(國威八紘, 팔굉(八紘)은 온 세계, 팔굉일우(八紘一宇)는 온 세계가 한 집안이란 뜻으로 일제가 태평양 전쟁때 국시(國是)로 쓴 말이다. 원문에는 八絃으로 써있는데 誤記다. 고친다.) 동양의 평화와 2천만 동포의 행복을 구하고자 일한병합이 이루어져 자애롭고 인자한 정치가 베풀어진 후에는, 먹구름이 일소(暗雲一掃)되고 삼라만상이 나날이 발전하는 느낌을 솟구치게 하였다.
충주를 영주지(永住の地)로 삼아 여러 사업의 경영을 뜻하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명치 45년(1912년) 우지신을 봉안(氏神奉祀, 우지신은 지역 수호신)하자는 논의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충주 시가지 서쪽의 고지(高地)인 사직산(옛 산이름은 사직단(社稷壇)이라 불렀으나 중간에 언어가 변화하여 사직산(社稷山)이 됨)에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皇大神)를 봉안하기로 논의가 즉시 합의되었다.
거주민(在住民)의 헌금(淨財)을 모아 신전 조성을 추진하여 대정 원년(1912년, 대정 원년은 1912년 7월 30부터 시작된다.) 10월 준공을 알렸으며, 이세신궁(伊勢大神宮, 이세다이징구)의 부적(大麻, 오오마)을 받아 11월 7일 성대한 봉안식(鎭座祭, 친자사이)을 거행하였다.
이후 학교조합 관리자가 씨자총대(氏子總代,우지코 소다이, 지역주민대표. 총대(總代)는 대표자의 뜻이지만 책임자의 뜻도 된다. 각 지역 엽연초 생산자 대표를 총대(總代)라 했는데 지금 작목반 반장에 해당되나 권한은 더 셌다. 보통 마을이장이 겸했다.)로서 봄·가을 두 차례의 대제(大祭)를 집행하였으며, 중간에 우노 사헤이(宇野佐平)씨를 총대(總代, 대표)로 삼아 오랜 세월 신사(神事)에 힘썼다.
대정 9년(1920년) 모범 농업가 오세 요시헤이(大瀨由平)씨의 헌곡전(献穀田, 献은 獻의 이체자.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황실이나 신사(神社)에 바칠 벼를 재배하기 위해 지역별로 선정해 지정했던 논을 말한다고 한다.)에 사용했던 울타리를 충주 직공조합원 여러분이 작업 봉사(奉仕)를 통해 이전을 도왔다.
이를 통해 신전의 담장(玉垣, 타마가키)을 쌓고, 대정 12년(1923년) 신사(神祠, 원문엔 神詞로 써있는데 誤記다. 神祠는 규모가 작은 사당을 말한다. 神社보다 급이 낮은 神殿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인가받아 돌담 축조, 배전 건축, 신원(石垣築造拜殿建築神苑, 神苑은 정원을 말한다. 한때 여원(女苑)이란 여성잡지가 있었다.)
p.117
확장 등의 공사를 완성하였다. 소화 3년(1928년) 10월 어즉위식 어대전(御卽位式 御大典, 어즉위식은 소쿠이노레이, 卽位の禮로 새로운 천황이 왕위에 올랐음을 내외에 공식선언하는 즉위식을 말한다. 어대전(고타이텐)은 새로운 천황의 즉위와 관련된 일련의 대규모 국가적 의례 및 축하 행사 전체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기념사업으로 히로시마현인회(廣島縣人會)로부터 철근 콘크리트 오도리이(大鳥居, 神社 정문에 서있는 걸 오도리라 한다.)를 봉납 받았으며, 산내(山內, 사직산내)에는 사직신, 이나리대명신(稻荷大明神, 이나리 다이묘진은 일본에서 풍요, 농업, 상업, 사업 번창을 관장하는 가장 대중적인 신(神)이라 한다.)의 사당이 있다.
명치· 대정 연간의 군인 충혼비(忠魂碑), 경찰관 초혼비(招魂碑)등이 있으며, 참도(參道, 참도(산도)는 신사(神社)나 사찰(寺刹)에서 참배객이 정문을 지나 본전이나 불전까지 걸어가는 진입로를 의미한다.) 오른쪽에는 육각정(六角堂, 육각정은 충주 군청내에 있던 天雲亭을 옮겨온 것이다.)을 설치하여 절경의 조망을 자랑한다.
동쪽으로는 충주 시가지, 서쪽으로는 29정보(町步, 8만 7천평) 규모의 호암제(虎岩堤) 수면이 거울처럼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웅장한 남산의 고봉(高峰)이 구름에 솟아 있으며, 서남동(西南東) 일대의 대평야(大平野)는 본 도(本 道) 제1의 부원(富源)의 보물창고임을 내려다볼 수 있다.
대신궁(大神宮)에 봉사하는 신직(神職)은 수년간 천리교 충주선교소장 나카시니 케이지로(中西啓治郞)씨가 제사(祭事)를 맡아왔으나, 부(副)중교정(權中敎正, 권(權): 관직이나 직급명 앞에 붙어 ‘임시’, ‘차석(부-)’, 또는 ‘권한을 대행함’을 뜻한다. 중교정(中敎正)은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신도나 교파에서 사용하던 교관/성직자 계급 중 중간 등급의 관등이다. (대교정 > 중교정 > 소교정 순) 다쿠미야 마츠조(工家松藏)씨를 초빙함에 이르러 그를 전속 신직(神職)으로 삼고, 나카니시 케이지로(中西啓治郞)씨와 금광교(金光敎) 교사 다테이시 토구지로(立石德次郞) 씨가 제사(祭事)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소화 3년(1928년) 10월 인근 8개 구(近鄕八區)에 걸쳐 12명의 총대(總代, 대표자)를 두고 기타 약간 명의 고문(顧問)을 두어 신사(神事)에 관한 제반 협의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소화 5년(1930년) 8월 16일 충주신사숭경회(忠州神祠崇敬會)를 조직하였다.
충주읍장 아키야마 후미오(秋山文雄)씨를 우지코총대장(氏子總代長)으로 삼고 내선인(內鮮人, 일본인과 조선인) 13명의 우지코총대(氏子總代, 우지코 소다이)와 11명의 고문(顧問)을 두어 본회 규약을 작성하고, 신사(神社)로 승격하고자 준비에 착수하는 한편 경신사상(敬神思想)의 보급(普及)에 노력하니, 신령의 가호(加護)가 온 천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충주신사(神祠) 봉사 관계자
*신직(神職): 다쿠미야 마츠조 (工家松藏)
p.118
*우지코총대장: 아키야마 후미오(秋山文雄)
*부총대장: 나가야마 시게하루(長山重治)
*우지코총대 (氏子總代, 우지코 소다이)
[동구(東區)]
나가야마 시게하루(長山重治)
박철규 (朴徹奎)
[서구(西區)]
오쿠도이 타네이치로(奧土居種一郞)
유병만(劉秉萬)
[남구(南區)]
마츠모토 덴에몬(松本傳右衛門)
한의석(韓義錫)
[북구(北區)]
다나카 겐타로(田中源太郞)
유석두(劉錫斗)
[달천리(達川里)]
와타나베 리소타(渡邊利惣太)
장규성(張奎星)
[용산리(龍山里)]
홍병순(洪炳純)
[교현동(校峴洞)]
이병운(李秉雲)
[봉방리(鳳方里)]
손해달(孫海達)
*고문 (顧問)
최지환(崔志煥)
하라구치 이치지(原口一二)
시오타 테이스케(鹽田禎介)
스즈키 마사이치(鈴木政一)
이춘웅(李春雄)
윤정구(尹政求)
호시노 타케지(星野竹治)
우다 료타로(宇田亮太郞)
미즈노 야키치(水野彌吉)
미에나가 덴(未永傳)
우노 사헤이(宇野佐平)
p.119
◇본파본원사 충주포교소 (本派本願寺忠州布敎所)
--->이해를 돕기 위해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를 간략히 설명한다.
[본파본원사는 일본 불교 최대 종파 중 하나인 정토진종(浄土眞宗) 본원사파(本願寺派)의 대본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서본원사)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창시자: 정토진종의 개조(開祖)인 친란(親鸞, 1173~1262)
※위치: 일본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
※역사적 배경: 본래 하나였던 본원사는 16세기 말~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책에 의해 니시혼간지(본파본원사)와 히가시혼간지(동본원사, 大谷派)로 분열되었다. 이때 조정과 막부로부터 '본통(正統)'으로 인정받으며 본파(本派)라는 명칭을 얻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빛은 온 천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나니, 대정 4년(1915년) 본파의 승려(僧侶) 사토 키요노부(佐藤淨信)씨가 충주에 들어와 단독 포교를 시작하고 타력본원(他力本願, 본원(本願)은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운 근본적인 서원(특히 제18원: "누구든 내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극락왕생하게 하겠다")을 뜻한다.)의 가르침을 설하며 염불포교(念佛弘通, 부처님의 이름을 암송하는 염불수행법이나 敎法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뜻이다.)에 전념하였다.
동년(1915년) 9월 총독부령에 따라 개교본부의 인가를 얻어 공인받고 《본파본원사 충주포교소》의 개설을 보았으나, 신자가 소수여서 개교 당시 포교소의 유지·경영은 용이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공포하고, 같은 해 1915년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법령명: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布敎規則)」
공포일: 1915년(대정 4년) 8월 16일
시행일: 1915년(대정 4년) 10월 1일]
따라서 9월이라 적은 것은 잘못 쓴 것이다.)
키요노부(淨信) 씨는 포교의 여가에 농사를 지으며 반농반승(半農半僧)의 고행을 계속하여 오직 종교의 보급(普及)과 사상선도(思想先導)에 힘쓰기를 3년 8개월, 대정 7년(1918년) 늦가을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인생의 무상을 분명히 보여주고 향년 39세를 일기(一期)로 염불 소리와 함께 왕생을 이루어 불적(佛籍, 일본에서 入寂하는 걸 佛籍이라 쓴다 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圓寂, 涅槃이라 한다.)에 들었다.
대정 8년(1919년) 3월 본원사 포교사 오다 켄순(小田賢順)씨가 후임으로 부임(赴任)하여 대수정(大手町) 포교소의 조선 가옥 전당(殿堂)에 들어왔다.
신란(親鸞, 정토진종 창시자) 성인 재세 시절의 이나다 초암(稻田草庵)을 아련히 떠올리게 하듯
(親鸞在世の稻田草庵を偲ぶ), 사찰 소유물도 본존 한 분과 두셋의 불구(佛具)를 갖추었을 뿐이었다. 부임 직후 신도 유지(有志)들의 집회를 요청하여 신도총대 선거를 실시하고, 우노 사헤이(宇野佐平), 하라구치 이치지(原口一二), 미야치 코키치(宮地幸吉), 나카노 지로(中野次郞),
p.120
호시노 타케지(星野竹治), 이나다 시마지(稻田四馬治) 6명의 총대(總代)와 각 구(區) 2명의 간사(世話係)를 두어 간부(幹部) 결정을 보기에 이르렀다. 포교 방침의 확립, 호사회(護寺會) 창립 등을 도모하여 전원 일치의 찬성을 얻어 포교선(敎線)의 확장을 전념함으로써 충주포교소의 유지와 경영은 안정을 얻었다.
동년(1919년) 5월 《충주불교부인회》를 창립하고 본산내(本山內) 불교부인회 연합본부에 가맹하여 공인받았으며, 현재 160여 명의 회원을 얻어 봄·가을 두 차례 총회를 열고 매월 15일 월례회(例會)를 개최한다.
소화 3년(1928년) 11월 전대미문(曠古)의 어대전(御大典, 曠古の 御大典. 원문의 嚝古는 曠古의 誤記다.)을 기념할 경로회(敬老會)를 열어 매년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연중행사로 거행하고 있다.
포교소 내에 통속수양문고(通俗修養文庫)를 설치하여 국역 일체경(國譯 一切經)을 소장하고 기타 수양 고적(修養古籍) 600여 종을 갖추어 문서 전도의 의미에서 지역 인사들의 수양에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대정 9년(1920년) 4월 포교소 신축 논의를 일으켜 신도총대 및 각 동(各 町) 간사를 중심으로 협의를 진행하였으며, 우노 사헤이(宇野佐平)씨는 부지(敷地)를 기부하고 미야치 코키치(宮地幸吉)씨는 특제 기와 일체(別製瓦一切)를 기부하여 공사 비용을 기부(寄附)에 의존하기로 하였다.
지역 신자들의 성금 기부(淨財喜捨)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본당 및 요사채(本堂庫裡, 庫裡를 한자 그대로 안에 있는 창고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식 한자다. 요사채나 공양간에 해당한다. 지금 다루는 것은 본파본원사충주포교소이다. 살림집이 있어야 사람이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다.)의 설계를 마치고, 모토부 요사부로 (本部由三郞) 씨가 공사를 수급받아 자신전(원문의 紫震殿은 자신전(紫宸殿, 시신덴)의 오기(誤字)다. 자신전은 일본 교토 어소(京都御所, 일왕의 옛 궁전)의 가장 핵심이자 중심이 되는 정전(正殿)을 말한다. )양식의 본당과 단층 요사(本堂と平屋建の庫裡)는 대정 10년(1921년) 낙성(落成)을 알렸다.
본파본원사 조선개교총장 마츠바라 완조(松原含藏) 스님의 임석(臨場) 하에 40여 명의 천동자(天童子, 여기서 천동자는 치고(稚児, 치아)"라 불리는 일본 전통 불교 의식에 참여하는 화려한 옷차림의 어린이들을 말한다.)를 더하여 장엄한 경찬 대법회(慶讚大法會)의 입불식이 거행되었다. 대정 12년(1923년) 입교개종 700년 기념법회는 제2대 개교총장 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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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이코(斯波隨牲) 스님의 순시포교(巡視布敎)가 있었다. 충주포교소는 오다(小田) 포교사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성적인 신앙(信仰)이 전당의 내용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소화 3년(1928년) 군청 구내(郡廳構內)에 있던 옛 1,200년 전의 대금불 석가상(去今一千二百年前の大金佛釋伽像, 충주 철조여래좌상을 말한다.)을 경내에 봉안하고, 매년 4월 8일 석가탄신법회(釋尊降誕法會)를 거행하니(사진 참조) 내선인(內鮮人)의 선남선녀 참배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上. 유리원판.
下. 좌우를 바꾼 사진으로 아래에 첨부한 사진들과 철불의 모습이 일치한다. 손모양에 주목.
지금 충주 공고 인근에서 찍은 것이라 한다.
멀리 보이는 오른쪽 산모습은 팽고리산을 닮았다. 하지만 왼쪽 멀리 보이는 산능선은 너무 크게 보여 어디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의 왜곡현상이다. 뒤로 논이 보이고 멀리 하얀칠을 한 건물이 보이는데 모양을 보아 담배 건조실이 분명하다.
그래서 좌우를 바꾸었다. 아래 사진이다. 멀리 보이는 산능선이 계명산 줄기를 닮았는데 뒤에 보이는 작은 능선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관아공원 청녕헌 앞에 놓여 있는 모습.
충주불교부인회라는 간판이 보인다.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지만 本願이란 글씨가 보인다.
왼쪽 현판에 眞宗本派 本願寺布敎所라 써있다.
지금 충주 지현동 대원사에 모셔져 있는
《충주 철조여래좌상》 일제시대 모습.
전해오는 민담에 의해 광불(狂佛)이라고도 불렸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원판
충주직공조합원은 쇼토쿠 태자의 영정(聖德太子
の御繪像)을 안치하였고, 충주불교부인회원은 종조 친란성인의 영정을 봉안(宗祖親鸞聖人の御眞影を奉安)하였으며, 기본 자산 800여 원(엔)을 축적하여 종교 보급(普及)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조동종 예성사 (曹洞宗 蘂城寺)
충주 시가지 북쪽 끝 교현천 물언덕(河岸)의 벚나무(櫻樹는 벚나무를 말한다. 앵두나무는 櫻桃로 쓴다. 원문엔 櫻樹鬱蒼이다. 앵두나무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가 울창한 가운데 한 가람을 볼 수 있으니, 조동종 예성사이다. (忠州市街の北端校峴川の河岸櫻樹鬱蒼たる中に一伽藍を見る 曹洞宗蘂城寺となり)
이 절이 창건된 계기를 되짚어보면, 명치 44년(1911년) 나가노현 사람 시미즈 키오(淸水機雄) 스님이 조선 불교 연구를 뜻하고 우연히 충주에 들어와 한 달 남짓 체류하며 도를 설하고 법을 전하였다.
불제자 키오(機雄) 스님은 거주민(在住民)들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금정(錦町) 뒷골목에 포교소를 마련하고 불교 포교(弘通)의 물꼬를 트는 한편, 다도와 화도의 작법(茶花의 作法, 花道는 꽃과 식물을 매개로 자연의 이치를 담아내고 마음을 닦는 동양의 전통 꽃예술 수행(道)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이케바나(生け花)'로 부르며 다도(茶道) 공간에 꽃을 꽂는 것을 다화(茶花)라고 부른다. )을 전수하여 신망이 날로 두터워지고 덕이 달이 갈수록 더해졌다. 스님에게 귀의하여 신앙(信仰)의 문에 들어서는 자가 날로 성황을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충주를 떠나게 되었고, 나이토 기잔(内藤義山), 타키자와(瀧澤) 두 스님(兩師)이 그 뒤를 이어 교리를 권유하였다.
대정 5년(1916년) 10월 현재의 가람을 건립하고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츠루미(鶴見)
총지사(總持寺), 에치젠(越前) 영평사(永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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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본산(本山)의 말사(末寺)로서, 충주(忠州)의 옛 지명(舊地名)을 따서 대웅산 예성사(大雄山 蘂城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정 10년(1921년) 10월 10일 제4대 주지로 히로타 슌가쿠 (廣田春岳) 스님이 부임하여 오로지 종교의 융성에 힘쓰고 법을 넓히며 덕을 전하여 충주의 '살아있는 부처(生佛)'라 일컬어지며 사운(寺運)이 날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화 4년(1929년) 신도를 중심으로 한 관음강(觀音講, 관음강은 '관세음보살(觀音菩薩)의 자비와 은혜'를 기리고 기원하기 위해 신자들이 모이는 정기적인 모임을 말한다. )과 불교부인회가 도약하여 동지를 모으고, 사찰 내에 서국(西國) 33소 영장(靈場)에 안치된 각 본존의 석상을 안치하였다.
[서국 33소 영장(西國 三十三年靈場)'은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 위치한 33곳의 유명한 관음보살 성지(사찰)를 뜻한다. 靈場은 聖地를 의미한다.
일본어로 '사이코쿠 산주산쇼 령조(さいこくさんじゅうさんしょ れいじょう)'라고 읽는데
일본 간사이 지역까지 직접 건너가지 않더라도, 충주 예성사 경내를 한 바퀴 돌며 33체(體)의 관음 석상에 기도하면 일본의 서국 33소 성지를 모두 순례한 것과 똑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昭和四年信創を中心とする觀音講と佛敎婦人會が飛躍して同志を募り寺内に西國三十三所の靈場に安置する各本尊の石像を安置し)
신도총대 쿠마가이 단조(熊谷團藏)씨를 중심으로 14명의 유지가 본 사찰의 기본 조성을 위해 전력을 다해 활동하여 사찰 소유지가 해마다 증가하였으며, 예성사의 기초가 이미 확립된 것은 오롯이 불광의 가호(佛光照護) 덕분이다.
이는 생불(生佛) 춘악 선사의 높은 덕과 재기의 발현임과 동시에, 그에게 귀의하는 신자들이 가진 신앙의 위대함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광이 널리 비추는 높은 덕으로 충주의 평화를 도모하고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인류를 구함에 본 교의 번창을 기원 마지않는다.
[춘악 선사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春岳禪師の 法を聰きて)
춘악 선사의 손에 쥔 여의(如意)는 세상의 악귀를 쫓는 여의임을 알라
(春岳の手の持つ如意は世の中の
惡鬼を拂ふ如意とこ) ]
◇천리교 충주선교소 (天理敎忠州宣敎所)
한 종파의 조사(祖師)라는 것은 범인(凡人)이 아니니, 누구를 보아도 권세와 덕망을 갖춘 유력 가문의 인물이 다시 태어난(權家の再來)것처럼 인정이 두텁고 자애가 깊으며 법을 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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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전하여 널리 그 덕을 펴니, 수명이 다해 목숨이 끝난다 해도 덕은 죽지 않고 법은 썩지 않아 어느 세상 어느 때에 이름이 나타나 신으로 숭배받고 부처로 경배받아 그 빛이 온 천하를 비추지 않음이 없다.
천리교 교조의 덕이 소화의 시대(昭和の御代)를 비추어 650만 명의 신자를 얻어 국경을 넘어 번영을 이룬 것은 교조의 위덕이며, 멀리 93년 전 교조의 재세(在世) 시절을 높이 우러러 보고(景仰) 찬탄(讚嘆)함에 말이 필요 없다.
충주선교소가 번창한 것은 교조의 위대한 덕이기도 하지만, 선교소장 나카니시 케이지로(中西啓治郞)씨의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힘, 여기에 신자 각위(各位)의 두터운 신앙이 더해진 덕분이다. 이에 충주 천리교선교소의 내력을 읊어(謳) 후일 참고의 한 자락으로 삼고자 한다.
대정 5년(1916년) 이른 봄, 오사카(大坂府) 출신 나카니시 케이지로(中西啓治郞) 씨가 충주 금정의 쿠라시게(倉重)씨 문전(門前)을 찾아와 이치를 설하고 도를 가르쳤다. 인근 사람들이 합의를 거듭하여 금정에 집담소(集談所)를 마련한 것이 충주 천리교 포교의 시초였으며, 때는 바야흐로 봄꽃 봉오리가 피어나려던 3월 16일이었다.
나카니시(中西)씨의 열성적인 신앙은 점점 인정받아 날마다 신덕(神德)을 입고 본 교에 귀의(歸依)하는 자가 잇달아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대정 8년(1919년) 11월 집담소를 대수정(大手町)으로 옮기고 신자들의 권유에 따라 나카니시(中西) 씨는 본부에서 경영하는 천리교교(天理敎校)에 입학하여 대정 10년(1921년) 6월 25일 본교(日本校) 과정을 졸업하고 권훈도(權訓導, 임시 포교사)를 배명(拜命)받았다.
대정 11년(1922년) 2월 4일 본부의 인가를 받아 카와라마치 대교회(河原町 大敎會) 소속의 충주선교소를 창립하고, 이어 대정 12년(1923년) 2월 23일 충주 사직산 기슭에 정결한 땅(淨地)을 구하여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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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 건축물 공사에 착수하였다. 신전, 배전(拜殿), 부속 가옥을 합쳐 대정 13년(1924년) 5월 24일 준공을 알리고 대수정(大手町)으로부터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교소의 유지와 경영은 신자들의 조력(助力)에 의존하지만, 포교의 기초가 확립되어 날이 거듭되고 해를 거듭할수록 융성한 경지에 이르렀다. 인생과 신앙의 의의에 깨달아 신전 앞은 주야로 참배하는 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천리교 교조의 위덕(威德)이 참으로 이곳에 빛남을 본다.
매월 1일 월차제(月次祭)를 거행하고 1월 3일, 10월 1일 대제(大祭)를 거행한다.
◇금광교 교회소 (金光敎敎會所)
금광교 교회소는 효고현 아리마군 메이킨촌 사람
(兵庫縣 有馬郡 名均村の人)
니켄야 이치마츠(二軒谷市松) 씨의 부인이 충주 재주 중(在住中) 병에 걸려 인천에서 요양(靜養)하던 중, 금광교 인천교회소 주임 오이누마 마스키치(生沼萬壽吉)씨의 권유로 동 교의 신자가 되어 텐치콘진(天地金神)의 가호로 병이 즉시 완치되면서 시작되었다.
마침내 신령의 분액(分額, 본래의 신당에서 신령의 위패를 받는 일)을 받아 자택의 한 방에 안치하고, 부부가 단 한 순간도 텐치콘진(天地金神)의 위덕을 잊지 않으니 온 가족이 건강하고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가운이 더욱 흥성해졌다. 수년 만에 거만(巨萬)의 부를 축적하자 사람들이 모두 그 위덕을 숭배하여 니켄야(二軒谷)씨의 문전으로 모여들었다. 대정 11년(1922년) 니켄야(二軒谷)씨를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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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시내 유자들의 성금을 모아 나카초 도리(仲町通)의 한 모퉁이에 카와모토 카구이치(川本角市)씨 소유지를 빌려 신전 조성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12년(1923년)말 카와모토(川本)씨가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정리상(整理上) 차용지 반환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충주의 부호 우노 사헤이(宇野佐平)씨가 사직산 기슭의 현 위치를 기부하였고, 신온코(神恩講, 신(神)의 은혜와 덕에 감사하며 올리는 종교적 의식 또는 신자들의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말한다.)을 조직하여 300여 원(엔)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혼부 요시자부로(本部由三郞) 씨, 코지마 마사로쿠(小島政六)씨를 비롯한 유지(有志)들의 기부를 얻어 대정 15년(1926년) 3월 현 위치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이후 혼부 요시자부로(本部由三郞)
, 카토지로(加藤二郞) 두 씨의 진두지휘 하에 제2회, 제3회 신온코(神恩講)을 연속으로 열어 동지들과 도모하였고, 사전(社殿)의 장엄함과 객전(客殿) 신축을 완성하였다.
소화 3년(1928년) 3월 7일 교사(敎師) 타테이시 토쿠지로 (立石德次郞)씨가 부임한 이래, 점차 경신사상(敬神思想)의 보급(普及)을 염원하며 '부귀해도 음란하지 않고 가난해도 즐거워하는'법
(富貴不淫貧賤にして樂み法)을 설하고 도를 가르쳐 지성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니 주야로 참배하는 자가 많았다.
소화 6년(1931년) 4월 경내 한 모퉁이에 용수 우물을 굴착하자, 십수 척 지하 암반의 샘구멍에 다다라 청정한 용수가 동력 없이 수 척 높이의 지상으로 솟구쳤다. 우물이 이와 같은 것은 참으로 기적이며 신덕의 고대무변(神德の高大無邊)함을 찬탄하게 한다.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은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신령의 위덕(威德)이다.
충주 금광교의 내력을 적음에 있어, 본 교 유지(維持)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여기서 생략하며, 여러 분들의 음덕(陰德)에 감사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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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발전연구원 번역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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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신궁(大神宮)
대신궁에 관한 연혁과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나 일본신전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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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본파 본원사 충주포교소
불타(佛陀)의 자비로운 광명은 널리 하늘 아래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15년 본파(本派)의 승려 좌등정신(佐藤淨信)이 충주에 와서 홀로 포교를 하며 다른 이들에게 본원(本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염불을 널리 미치도록 하는데 전념하였다.
1915년(대정 4년은 1915년이다. 1920년은 잘못 쓴 것이다.) 9월에는 총독부령에 따라 개교(開敎)하고 본부의 인가를 얻어 공인되어 본파 본원사 충주포교소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신자(信者)가 적었던 개교 당시의 포교소는 유지와 경영의 곤란을 느끼게 되어 정신(淨信)은 포교 후 남는 시간에 농사를 지어 반 농민이자 반 스님의 고행을 계속하면서 한결 같이 종교의 보급 및 사상선도(思想善導)에 정열을 기울인지 3년 8개월인 1918년 늦가을 병상에 누워 인생의 무상을 느끼다가 나이 39세를 일기로 염불소리와 함께 생을 마치고 불적(佛籍)에 들었다.
1919년 3월에 본원사 포교사 소전현순(小田賢順)이 후임으로 부임하여 대수정(大手町)의 포교소인 조선가옥의 전당(殿堂)으로 들어갔다.
친란재세(親鸞在世)의 도전(稻田)은 초가암자(草庵)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으나 사찰유물도 어본존일체(御本尊一體)와 2~3가지 불교용품(佛具)을 갖추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부임 초부터 신도와 유지들을 집합하도록 하여 신도대표 선거를 하여 우야좌평(宇野佐平)·원구일이(原口一二)·궁지행길(宮地幸吉)·중야차랑(中野次郞)·성야죽치(星野竹治)·도전사마치(稻田四馬治) 등 6명의 대표와 각 구역별로 2명씩 포교하는 사람을 두도록 간부(幹部)의 결정을 보았다. 포교방침의 수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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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회(護寺會)의 창립 등을 통하여 모든 모임에서 한결같은 찬동을 얻어 교선(敎線)의 확장에 주력하여 충주포교소의 유지와 경영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1919년 5월 충주불교부인회(忠州佛敎婦人會)를 창립하여 본산에 속해있는 불교부인회연합본부에 가입하여 공인되었으며, 지금은 16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고, 봄과 가을 두 계절에 총회(總會)를 열고 매월 15일에 월례회를 개최한다.
1928년(소화 3년, 이 부분도 잘못 적어서 고쳤다.) 11월에 광고(曠古, 횡고로 쓴 것은 잘못이다. 원문이 잘못된 것인데 曠古가 맞다.)의 어대전(御大典)을 기념하고자 경로회(敬老會)를 만들고 매년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에 연중행사로 모임을 갖고 있다. 포교소 내에 통속수양문고(通俗修養文庫)를 설치하여 국역화된 일체의 경전을 보관하였고 기타 수양에 필요한 옛 서적(古籍) 600여종을 갖추어 문서를 통한 전도의 의미로 지방인사(地方人士)의 수양에 노력하였다.
1920년(大正 9년) 4월에는 포교소 신축을 발의하여 신도대표와 각 정(町)의 포교사를 중심으로 협의를 하여 우야좌평(宇野佐平)은 부지를 기부하고, 궁지행길(宮地幸吉)은 특별히 제작한 기와 일체를 기부하였다. 공사비용을 기부 받는 일이 남았었으나 지방신자(地方信者)의 깨끗한 재물의 희사(喜捨)는 기대 밖의 성과를 거두어 본당(本堂) 창고 내부(庫裡, 한자 그대로 풀이했는데 요사채(寮舍綵)나 공양간이다. 잘못 번역한 것이다.)의 설계를 하여 본부유삼랑(本部由三郞)이 공사를 청부하여 자진전(紫震殿, 자신전(紫宸殿)이 맞는 말이다. 원문이 잘못된 것이다.)
을 만들어 본당(本堂)과 평옥건(平屋建)의 창고 내부(이 부분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는 대정 10년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본파의 본원사 조선개교총장(本願寺 朝鮮開敎總長) 송원함장사(松原舍藏師)의 참석으로 40여명의 천동자(天童子)와 함께 장엄한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의 입불식(入佛式)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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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大正 12年)에 입교개종(立敎開宗) 700년 기념법회(記念法會)는 제2대 개교총장(開敎總長) 사파수생사(斯波隨牲師)의 순시포교(巡視布敎)가 있었다.
충주포교소는 소전(小田) 포교사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성적인 신앙으로 전당(殿堂) 내용을 충실하게 하였다.
소화 3년(1928년, 이 부분도 잘못 적어서 고쳤다.)엔 군청 구내에 있었던 당시로부터 1,200년 전의(2,200년이라 써났다. 고쳤다.) 대금불석가상(大金佛釋迦像)을 경내에 봉안하여 매년 4월 8일 석가탄신법회(釋尊降誕法會)를 열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선남선녀의 참배객들이 많았다.
충주직장조합원들은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어회상(御繪像)을 안치하고, 충주불교부인회원은 종조친난성인(宗祖親鸞聖人)의 어진영(御眞影)을 봉안하였으며, 기본재산 800여원(圓, 엔)을 축적하여 종교보급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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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조동종 예성사
충주 시가지의 북쪽 끝 교현천(校峴川) 하천 기슭에 벚나무(櫻樹, 앵두나무라 번역했는데 잘못이다. 처음 이 구절을 보았을 때 시골풍경을 연상했는데 앵두나무가 아니다. 앵두나무는 울창할 수 없다. 벚나무는 櫻樹, 앵도나무는 櫻桃로 쓴다 한다. 그리고 울창하다는 표현은 키큰 나무를 가리킨다. 앵도(桜桃)는 유스라우메(ユスラウメ)라고 부른다. 벚나무는 사쿠라(サクラ). 이 책 《충주관찰지》를 쓴 것은 1930년경이고 1931년에 출판했다. 이 때에는 전국 각지에 이미 벚나무가 심어졌다. 청주시의 경우 무심천 일대에 많이 심었고 신작로 가로수로 벚나무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창한 곳에 하나의 가람(伽藍)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조동종 예성사(曹洞宗 蘂城寺)이다.
이에 대한 건립기원을 추적해 보면, 1911년(明治 44年) 장야현(長野縣) 사람인 청수기웅사(淸水機能師)가 조선불교에 대한 연구에 뜻을 두고 틈틈이 충주에 와서 한 달여씩 머물면서 도(道)를 설교하고, 법(法)을 가르쳤다. 불제자인 기웅사(機能師)는 지역주민들의 간청으로 금정(錦町) 안쪽 통로에 포교소(布敎所)를 두고 불교보급의 단초를 확장하는 한편, 꽃차(茶花, 원문에는 茶花の
作法이다.) 만드는 법을 전수하여 신망이 날로 두터워지고 덕이 높아지자 선사에게 귀의(歸依)하여 신앙의 문으로 들어서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으나 오래 머물렀던 충주를 떠나고 내등 의산농택(內藤 義山瀧澤) 두 선사가 그 뒤를 이어받아 교의(敎義)를 권하였다.
1916년(大正 5年) 10월에는 현재의 가람(伽藍)을 건립하여 신내천현(神奈川縣) 학견(鶴見) 총지사(總持寺) 부임에 앞서 영평사(永平寺) 두 본산의 말사(末寺)로 충주의 옛 지명을 따서 대웅산 예성사(大雄山 蘂城寺)라고 불렀다.
1921년(大正 10年) 10월 10일에는 제4대 주지로 광전춘악(廣田春岳) 선사가 부임하여 전적으로 종교의 융성에 노력하며 법을 널리 편고 덕을 가르치자 충주의 생불(生佛)로 이름이 나서 절의 기운이 일취월장하였다.
1929년(昭和 4年)에는 신자를 중심으로 관음강(觀音講)과 불교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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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婦人會)가 비약(飛躍)하여 동지(同志)들을 모아 사찰 내에 서국(西國) 33소(33所)의 영장(靈場)에 안치하고, 각 본존(本尊)의 석상(石像)을 안치하였다. (이 부분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신도 대표(信徒 總代)인 웅곡단장(熊谷團藏)을 중심으로 14명의 사람들은 본사(本寺)의 기본을 조성하는데 전력을 다하여 활동하였다. 사찰의 영역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여 예성사(蘂城寺)의 기초가 일찍이 확립되도록 하였음은 부처의 광명이 널리 비치는 선물이자 생불(生佛)인 춘악선사(春岳禪師)의 높은 덕과 재기(才器)의 덕이었다.
이에 따라 여기로 귀의(歸依)하려는 신자가 많았다. 이것은 신앙의 위력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부처의 광명이 두루 비치는 높은 덕과 평화로운 충주를 도모하고, 오탁악세(五濁惡世)17)의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본교의 번창을 기원해 본다.
춘악선사(春岳禪師)의 법문을 들으며, 춘악(春岳)의 손에 가지고 있는 여의(餘意)는 세상의 악귀를 내 쫓는 여의가 되기를 빌어 본다.
※註) 이는 불가에서 이야기 하는 오욕(五慾)의 대상,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색욕(色慾)·성욕(聲慾)·향욕(香慾)·미욕(味慾)·촉욕(觸慾)으로 악해진 세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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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천리교 충주선교소
하나의 종교, 하나의 종파에 있어 그 시조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권세가에 다시 와서 인자함(仁)을 두텁게 하고, 자비로움(慈)이 깊도록 법(法)을 가르치고 도를 깨우치도록 하여 넓은 세상에 그 덕을 펼치고, 생명을 다하여 죽는다 해도 덕은 죽지 않고, 법은 썩지 않으며, 어떤 세상 어느 때나 이름 있는 신(神)으로 추앙 받으면서 부처로 공경되어 빛나는 광채가 널리 세상에 두루 비치게 될 것이다.
천리교 교조(敎祖)의 덕이 당대(昭和御代)를 비추고, 650만의 신자를 얻어 번영하고 있음은 교조의 위대한 덕이며, 93년 전에 교조가 세상에 있었을 때를 믿고 따르며(景仰) 찬탄을 바치게 한다.
충주선교소의 번성은 교조의 위엄스러운 덕(威德) 때문이라고 하지만 선교소장(宣敎所長) 중서계치랑(中西啓治郎)의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열정과 신자들 모두의 두터운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충주천리교선교소의 연혁을 적어 후에 참고자료로 하고자 한다.
1916년(大正 5年) 이른 봄 대판부(大阪府) 사람인 중서경치랑(中西敬治郞)이 충주 금정(錦町)에 살고 있는 창중(倉重)의 집을 찾아 교리를 일러주고 도(道)를 가르쳐 부근사람과 사람들의 뜻을 모으고 합의를 거듭하여 금정(錦町)에 집담소(集談所)를 둔 것이 천리교가 충주에서 포교하기 시작한 것이며, 3월 16일 이었다.
중서(中西)의 열성과 신앙은 점차 인정되어 날마다 신덕(神德)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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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자 본교(本敎)에 귀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그의 슬하(膝下)로 모여들었다.
1919년(大正 8年) 11월에는 집담소를 대수정(大手町)으로 옮기고 신자들의 권유에 따라 중서(中西)는 본부(本部)가 경영하는 천리교교(天理敎校)에 입학하여 1921년(대정 10년) 6월 25일 본교의 과정을 졸업하고 권훈도(權訓導)를 배명(拜命) 받았다.
1922년(대정 11년) 2월 4일에는 본부의 인가를 얻어 하원정(河原町) 대교회(大敎會) 소속의 충주선교소를 창립하였고, 1923년(대정 12년) 2월 23일에 충주 사직산(社稷山) 언덕에 깨끗한 땅을 구하여 굉장한 건축물이 그 공사에 착수되고 신전(神殿), 배전(拜殿), 부속가옥(附屬家屋)과 함께 1924년(대정 13년) 5월 24일에 준공, 대수정(大手町)에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교 있다.
선교소의 유지와 경영은 신자들의 도움에 의지하였으나 포교의 기초가 확립되자 날과 해를 거듭할수록 융성하게 되었고, 인생과 신앙의 의의에 따라 신전 앞에는 밤낮 없이 참배하는 사람들로 끊이지 않았는데 천리교 교조(敎祖)의 위엄한 덕이 모두 여기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월 1일에는 월차 제사를 올리고, 1월 3일과 10월 1일에는 큰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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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금광교 교회소
금광교교회소(金光敎敎會所)는 병고현 유마군 명군촌(兵庫縣 有馬郡 名均村)의 사람 이헌곡시송(李軒谷市松)의 부인이 충주에 있는 동안에 병에 걸려 인천에서 휴양(靜養)을 하던 중에 금광교 인천교회소 주임 생소만수길(生沼萬壽吉)의 권유에 따라 동교의 신자가 되었다.
천지금신(天地金神)의 가호(加護)를 얻어 병을 고치고, 신령(神靈)의 분액(分額)을 받아 자택의 한 방에 안치하고, 부처촌시(夫妻寸時)도 천지금신의 위덕(威德)을 뇌리에서 놓지 않아 한 집안이 건강하게 날마다 일을 추구하면서도 번영하여 가운(家運)이 점점 더 번창하였다.
수년 만에 크고 많은 부를 이루자 사람들은 그의 위덕을 숭배하여 이헌곡(二軒谷)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1922년에는 이헌곡(二軒谷)을 중심으로 시내 유지(有志)들의 깨끗한 재물((淨財)을 얻어 중정통(仲町通)의 한쪽에 있는 천본각시(千本角市) 소유지를 차용 받아 신전(神殿)을 꾸며 완성하였다. 그러나 1923년 말에 천본(千本)이 병으로 죽자 정리를 위해 빌렸었던 땅의 반환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충주의 부호(富豪) 우야좌평(宇野佐平)은 사직산(社稷山) 중턱 현재 위치를 기부하고 신은강(神恩講)을 조직하여 300여원(300餘圓)의 기금조성과 본부유삼랑(本部由三郞), 소도정육(小島政六) 등이 처음으로 유지의 희사(喜捨)를 얻어 1926년 3월에 현지로 이전하여 완성하였다. 그리고 본부유삼랑(本部由三郞)과 가등이랑(加藤二郞) 두 사람의 부담으로 제2, 제3회에 걸쳐 신은강(神恩講)을 연속적으로 개최하고 동지들과 상의하여 사전(社殿)을 장엄(莊嚴)하게 하고, 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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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殿)의 신축을 완성하였다.
1928년 3월 7일 교사 입석덕차랑(立石德次郞)이 부임한 이래 점차 경신사상(敬神思想)의 보급을 목적으로 부귀(富貴), 부음(不淫), 빈전(貧錢)으로부터 벗어나 즐거운 법(法)을 열고, 도(道)를 가르쳐 지성인을 감동케 하여 밤낮 없이 참배하는 자가 많아졌다.
1931년 4월에는 경내(境內) 한쪽 편에 용수정호(用水井戶)를 굴착(掘鑿)하여 수십 척(數十 尺)의 땅 아래 암반(巖盤) 용출구(湧出口)에 구멍을 뚫어 깨끗한(淸淨)한 용수를 손을 쓰지 않고 수척(數尺)의 지상으로 분수(噴水)하는 우물물(井水)과 같은 기적이 생기자 신덕(神德)의 높고 크며 한량없음을 찬탄하게 되었다. 이것이 멀리 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신령의 위덕(威德)으로 기억되고 있다.
충주 금광교(忠州 金光敎)의 연혁으로 기록한 것들 외에도 본교의 유지에 따른 진솔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들의 음덕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