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음식 재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됩니다.
특히 상극의 음식에 대한 공부는
쉐프의 기본 자질일 것입니다.
상극인 음식에 대한 상식은
인테넷 정보의 바다에 넘칩니다.
맥주와 땅콩은 상극의 음식은 아니지만
맥주를 마시면서 땅콩을 안주삼아 먹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땅콩은 껍질을 벗겨서 공기에 노출시키면
지방이 산화되어 유해한 과산화 지질이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고온 다습한 환경속에서는 배아 근처에 검은 곰팡이가 피는데
그 때 아플라톡신이라는 성분이 만들어지고 이 아플라톡신은 간암을 유발하는 발암성 물질입니다.
예전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깐음식의 백반처리는 색의 변질을 막기 위함이지만
매염제로 쓰이는 백반을 식재료에 사용하는 것은 살인행위와 같습니다.
수입 채소뿐만 아니라 산지의 채소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화학약품처리는
먹거리 X파일의 시사 고발이었습니다.
인스탄트 식품의 변질을 막기 위한 방부제는
결과적으로 인스탄트 식품과 건강의 반비례 곡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오이와 무우는 각각 좋은 식재료이지만
오이의 비타민 C는 무우를 썪으면 비타민 C가 파괴됩니다.
오이는 무우뿐만 아니라
당근과도 상극의 음식입니다.
예전에 시금치 된장찌게를 많이 해먹었는데
거기에 두부를 넣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즘 시금치 한 단에 만원이라
애용하는 마트에 시금치가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상극의 음식에 시금치와 두부가 있어
깜짝 놀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시금치는 두부 뿐만 아니라 멸치와도 상극의 음식이라
된장찌게를 끊일 때 시금치와 멸치를 넣으면 건강 상식에 벗어납니다.
상극의 음식 가운데 미역과 파가 있는데
미역국을 끊일 때 파를 넣으면 좋지 않습니다.
맥주와 치킨은 상극의 음식인데
치맥 페스티벌을 하는 우리 나라의 국민 건강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맥주와 치킨의 상극은
치명적인 통풍 유발의 심각성을 "몸신"에서도 긴급 다루었습니다.
얼마전 보았던 사극 천명에서는 임금이 복통을 앓고 쓰러졌는데
의녀들이 찾은 그 원인은 돼지고기와 도라지, 그 상극의 음식을 같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돼지고기와 도라지는 상극의 음식이며
돼지고기와 상치도 상극의 음식입니다.
상치에 돼지고기를 쌈사 먹는 것은
음식의 궁합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 외에고 굴과 게를 같이 먹으면 종기가 생기고
고구마와 석류를 같이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킵니다.
닭고기와 미나리를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고
붕어와 꿀, 장어와 식초를 같이 먹어도 식중독 증세가 나타납니다.
개고기와 마늘을 같이 먹으면 혈액병이 생기는데
마늘을 듬뿍 넣은 보신탕을 많이 먹은 사람이 중풍에 걸린다는 속설은 이때문인 것 같습니다.
조개와 우렁이, 국수와 우렁이도 같이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고
돼지 고기와 우렁이를 같이 먹으면 눈썹이 빠진다고 합니다.
우유에 시금치를 갈아 머시면 식중독에 걸리고
돼지 고기와 감을 같이 먹어도 식중독에 걸립니다.
이렇게 함께 먹으면 오히려 건강을 잃게 하는 음식의 상극, 상극인 음식에 대한 이해는
건강과 의학의 상식으로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
의원과 돌팔이의 차이점은
처방하면 상극인 약재에 대한 약방문의 이해일 것입니다.
건강 식품의 대중화로 건강의 상식이 전문가 수준을 뛰어넘고 있는 가운데
산약초를 비롯한 건강 식품을 잘 못 먹고 간독성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상극인 약재와 음식, 그리고 체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가운데
TV의 건강 프로그램으로 건강을 의지하다가 스스로 자신에게 돌팔이 처방을 하게 되고 몸 상하기 일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병에 대한 전문의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 잘 먹은 약도 면역성을 떨어뜨리고 간 수치가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음식과 약재의 상극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병원을 의지하다가 병원에서 병을 얻고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잃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음식과 약재의 상극 뿐만 아니라
성서지대는 상극인 말씀으로 상극의 무풍지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짝 풀이 비유의 말씀은 이단의 전유물인데
이현령비현령식의 알레고리와 메타포에 함몰되었습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상극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생명의 꼴을 먹이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상극의 말씀을 섞어 독풀을 먹이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실한 성도의 대부분은
상극의 말씀으로 인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미신과 무속의 광신, 그 늪에 빠졌습니다.
성서에 대한 연구, 그 신학도 상극의 말씀으로 중독되어
사신 신학은 물론 알미니안과 세대주의와 시한부 종말론과 실존신학과 구속사적 알레고리와
메타포에 함몰되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가장 우습게 여기는 작자들이
성서팔이 크리스챤이요, 그 사역자며, 또한 신학자들입니다.
참으로 진리의 말씀에 깨어있다면
기념 예배, 추도 예배, 개업 예배, 칠순 예배 등 예배의 우상화, 그 중독증세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 그 자체가 구약적 제사 개념이어서
예배의 우상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말보다 전도 집회라는 말이 더 적합하며
예배의 중요성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에 국한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혼잡한 말씀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며
불행하게도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혼잡한 말씀의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5-17)
☞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1)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32)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1-6)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의 말씀도 성서의 갈등 구조로 점철된 것은
생명과 사망, 구원과 심판에 대한 성서지대, 그 말씀의 지형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유기적인 지형도에 대한 독법은
성서의 갈등구조, 그 상극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였던 이사야는 메시야의 지형도를 그렸으며
하나님의 신탁에 깨어 있었던 예레미야는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의 지형도를 그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는 성서지대의 지형도를 그렸으며
계시의 말씀으로 충만한 다니엘은 중간기 시대와 종말론적인 메시야의 지형도를 그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장성한 믿음의 분령으로 충만하였던 사도 바울은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을 믿어 성령의 인치는 구원의 역사를 온전히 증거하여
복음의 지형도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성서의 지형도, 그 갈등 구조는 상극의 말씀으로 풀어야 하며
상극의 말씀에 대한 법제는 영혼을 구원한 말씀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세상의 가득한 지식으로 말씀을 응용하는 혼잡한 말씀의 비전 설교로 도배되었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인본주의 교회 성장학에 영향을 미쳤고
심리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죄에 대한 심리치료를 접목하여 치유사역에 집중하였습니다.
상담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상담 목회와 가정 사역을 활성화시켰으며
사회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사회학적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여 사회주의 좌파신앙에 매진하였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이념과 신념의 실존 신앙을 강조하였고
법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율법주의적 복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사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민중신학의 굴레를 만들었고
문학을 전공한 사역자는 성서 연구의 문서설과 양식 비평에 주력하였습니다.
어학 및 원어를 전공한 사역자는 사본과 원문 비평으로 글자의 이데올로기에 빠졌고
음악을 전공한 사역자는 복음성가의 세속화를 이루며 뉴에이지 음악과 락을 접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영성주의자들 곧 적극적 사고방식의 로버트 술러,
신사도 운동의 피터 와그너,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 관상 기도의 리차드 포스트, 목적이 이끄는 삶의 릭 워렌,
긍정의 힘의 조엘 오스틴 등 대형 교회에서 앞다투어 도입하여 대형 교회 성장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대형 교회는 사역의 성공 모델이 되이
중.소 교회를 비롯하여 도시 개척교회와 농어촌 교회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꼴로 먹지 못한 한국의 교회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소질을 따라
혼잡한 말씀을 전하는 양식을 먹고 기형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상극의 말씀을 혼잡하여 미신과 실존 신앙의 무속화를 이룬 한국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권위는 잃어 버리고 광신적 좀비의 추태로
세상의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갖 혼잡한 말씀을 짜집기한 강단의 설교를 듣는 성도는
참된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 곧 순전한 복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가장 믿음 좋은 사람이
지옥가는 크리스챤의 선봉에 선 끊어진 철로를 달리는 기차가 되었습니다.
성서지대의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의 심판을 지켜 보면서
예레미야에게는 모세와 사무엘, 에스겔에게는 노아, 다니엘, 욥의 신앙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의 신탁을 받았습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렘15:1)
☞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14:20)
이제는 예레미야 시대처럼
단 한 사람의 구원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카페의 글을 읽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