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끝까지 꼭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노예제도와 한반도 수난에 대한 역사적 고찰♦️
1800년대 말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벨기에 식민지 시작 전에
2천만 명이었던 콩고 인구가
식민지가 끝날 때 8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인 1,250만 명의 인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벨기에 사람들이
콩고 사람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을까요?
콩고에서 고무가 많이 났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무에 흠집을 내고 고무 채취를 시켰습니다.
고무 채취량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채찍에 맞기 싫어서 콩고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서 목표했던 고무 채취량을 쉽게 늘렸습니다.
그런데, 고무 채취량이 늘어서 좋기는 한데
벨기에 사람 눈에 숲 속의 고무 나무가 마구 잘라 없어져 버려서
조만간 고무 채취량이 대폭 쪼그라들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무 나무를 자르는 콩고인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리면서
그 아이들의 손목까지 다 잘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식민지가 가장 많았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인도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전 세계에 제일 많이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목화를 재배했고,
방적기로 실을 짜고 베틀로 면제품을 만들었지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할 때
베를 짜던 기계는 다 부수고
인도 사람들의 양 손목을 다 잘랐습니다.
식민지 때 노예 생활하면서
영국인에게 배운 기술로 면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버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 당시에 실크와 양모 외에 저렴하고 착용감이 좋은 천은 없었습니다.
면제품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최신기술이고 첨단산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 밀수했겠습니까.
1,250만 명을 죽인 벨기에 보다는 너그럽지만
인도인 면직공의 양 손목을 자른 영국도 잔혹하기는 그지 없습니다.
식민지 착취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착취라고 부를 수 있고,
식민지 사람들을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식민지 착취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벨기에와 영국이 보여줍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착취해 갈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석유도 안 나고, 고무도 없고,
식량은 모자라서 굶어 죽는 조센진이 널려 있었습니다.
도박에 알콜 중독에 딸자식을 팔아먹는 일은 다반사였지요.
산이란 산의 나무는 다 패서 난방용 땔깜과 밥 할 때의 불쏘시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100여년 전 사진에 조선의 산은 벌건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기에 비가 오면 나무 뿌리가 물을 머금지 못해 홍수가 나고,
산과 언덕의 황토가 하천에 쓸려 와서 강 바닥이 올라갔습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넘쳐서 홍수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굶어 죽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큰 비가 와도 굶어야 했고, 가뭄이 와도 굶어 죽었습니다.
치산치수는 간 곳 없고
오로지 농사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에서
무식하고, 못나고, 못되 처먹은 조선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수 억 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센진(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버렸기에 여름이 오면 파리가 들끓고 썩은 냄새가 온 마을에 퍼졌고,
태풍과 장마가 들면
썩은 음식물 국물이 우물로 흘러 들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미개한 한방(한의학)에서는 치료약도 없었고 병들어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냥 "역병이 돌았다!"입니다.
도로는 좁고 포장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비만 오면 뻘로 변해 신발이 푹푹 빠져서 마차도 못 다니고,
가마에는 바퀴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가마에 바퀴 달려 있는 모습 보셨나요?
착취를 통해 잘 먹어서 무거운 양반을 나르면서
두 명 내지 네 명이 손으로 들고 날랐습니다.
바퀴가 있으면 편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과 일본에도
손수레에 바퀴를 달고 사람을 날랐습니다.
양반 6-10%, 중인 20%, 상놈과 노비가 70%의 인구 구성이었던 조센진(조선인)은
일자 무식이 전 인구의 70%가 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시한 위대한 세종대왕은 어디로 갔나요?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상놈과 노비에게 가르쳤던 적이 없기에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양반가의 아녀자가 배운 정도였지요.
양반은 죽어도 천박한 언문(훈민정음)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이 무식한 조센진(조선인)에게 한글을 보급했습니다.
양반은 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웠지 한글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상놈과 노비는 서당 근처도 가본 적이 없구요.
조선반도(한반도) 전역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만든 일본인이
안 가겠다는 조센진의 손목을 이끌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보내서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벨기에나 영국과는 달리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사람의 손목을 전혀 자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 초등학교만 지었나요?
저수지를 만들고, 상하수도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에게 물도 떠주고 밥도 지어주며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족과 양반의 가렴주구(착취)에 진절머리를 냈던 상놈과 노비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왜군에게 친절했던 조센진(조선인)의 기록이 남아 있겠지요.
1910년 한일합방이 되기 전 150년 간
조선의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5년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저수지와 상하수도의 보급, 잘 치료해주는 의료와
양반의 착취가 없었기에
잘 먹고 잘 살았고,
아이 낳고 키우면 죽지도 않아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요.
저절로 조선인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조선인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주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이렇게 투자한 것은 나중에 식민지에서 착취하기 위한 선투자라구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사람 수준으로 올리고,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지금의 일본이 된 것처럼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계 5대 부국이었던 일본과
세계에서 가장 못살았고 무식했던 조선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의 수준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리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벨기에나 영국처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35년 간 일본의 지배에 거부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부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한일합방은 인구 70%인
조선 상놈과 종놈, 노비에게는 축복 중에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센진(조선인) 거의 대부분은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구요.
그러니,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후
기쁨에 겨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서울 시청에 걸렸던 일장기를 한 달 동안 아무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독립자금을 댔던 저의 조상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양반이 지배하여
상놈과 노비를 착취하는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일본 때문에 빼앗긴 그 많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요.
이씨 왕족과 양반은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상놈, 종놈, 노비를 착취하고
조선을 말아 처먹은 당사자입니다.
일본 사람이 착취한 것 보다 양반이 착취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사책에서 이런 내용은 단 한 줄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살기 좋은 조선을 나쁜 일본놈이 마구 침략하고 빼앗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