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여 년 만에 서울시청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졸저 《나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를 출간하였습니다. 많은 응원과 관심, 그리고 예매를 부탁드립니다. - 왕눈이소장 김홍기
와~ 이 선배님이 책을 냈다고 정말 대단하다.
나도 우리 열린부동산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면서 가끔 일상생활에 대한 글 하나를 쓰려면 수없는 퇴고를 거쳐야 하는데 책을 냈다니....
항상 책을 주문하는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책 표지에 왕눈이 개구리가 보이고 뒷면으로 아파트가 보입니다.
부제로 '전직 공무원, 현직 관리소장의 인생 2막'. "70세 왕눈이소장의 인생을 말해보렵니다. 그리고 내 일(my job)이 있어야 내일(tomorrow)이 있습니다.
책 표지만 보아도 현재 선배님이 아파트 관리소장님을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이신 김홍기 선배님과는 2003년 이명박 시장님이 서울시장일 때 경영기획실 심사평가담당관 주무 팀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시청 가까이에 있는 구청에서 시청으로 왔고, 선배님은 모 구청 총무과 총무팀장을 하다 시청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구청에서 총무팀장이면 구청장 직속으로 과장은 세상 말로 따놓은 당상이고 국장도 당연한 것인데, 아마도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구청장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의 경영기획실은 서로 얘기할 여유가 전혀 없었고, 자기 일하느라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옆 사무실 과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퇴근 시간은 10시가 넘어서이고 어쩌다 9시 정도에 퇴근하려면 눈치가 보여 책상에 서류를 펴놓고 컴퓨터를 켜놓은 상태에서 옆 직원에게 치워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경영기획실은 구청에서 일할 때와 비교하면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가 3~4배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청계천, 버스 환승제, 서울숲을 추진할 때 수없이 평가를 다녔던 것들이...
나는 그후 국제협력과 갔다가 오세훈 시장님 첫 해외출장 두바이,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일정 수행을 마치고 다시 구청으로 내려왔고 선배님은 서울시에 남았지만 서로의 연락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보문고에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이면 도착하는데 이번에는 5일이 지나도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19일 수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니 사무실 문 앞에 책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뜯어 선배님에게 '며칠 전 주문한 책 오늘에야 받았습니다'는 문자와 책을 사진 찍어 보냈더니 답장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졸저를 읽고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실에서 틈틈이, 점심 먹으러 가면서 들고 가서 보기도 하고, 퇴근해서 12시까지 이틀 동안에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표시해 놓은 부분들을 포스팅합니다.
공무원 퇴직을 앞두고 있는 후배님들과 아파트 관리소장님들에게는 꼭 읽어 보시라고 추천드립니다.
(들어가는 말)
아파트 관리소장의 직무는 전직 공무원에게 매력적이다. 그것도 종합행정을 경험한 행정공무원에게 안성맞춤이다.
산전. 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어봤기에 지상전쯤이야 감당할 만하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생활 주변의 이야기와 평소의 생각들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잘난 척하지 않고,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행복한 노년 생활을 하려면 '일'이 있어야 한다. 그 결론은 내 일(my job)이 있어야 내일(tomorrow)이 있다는 말이다.
겨울을 나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죽음도 준비가 필요한데 인생 2막을 아무 준비도 없이 맞는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당신이 나보다 하루만 더 살아야 해요!"라던 부탁도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까짓것 내가 100살까지 살면 되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보내야겠다. '박은희 여사, 난 영원한 당신 편이야!"
제1장. 인생 1막을 공무원으로 시작하다
눈을 세모로도 뜨나요?
아니 눈을 동그랗게 뜨지, 세모로 뜹니까? 네모로 뜹니까? 내가 맞섰다.
그 일이 있고부터 별 존재감 없던 난 여러 직원의 관심과 환대를 받았고, 짓궂은 직원들은 가끔 내게 다가와 "김oo 씨! 눈 한번 세모로 떠봐!, "아니면 네모로 떠보던가!라며 놀려댔다. 그러나 그게 싫지 않았다. 험악한 집단민원을 한 방에 제압한 내 멘트,
"앞으로 지켜볼 거요." 내가 법대로, 규정대로 제대로 하는지 지켜볼 테니 일 똑바로 하라는 일종의 엄포였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그에게 '나는 맥주를 한잔 마시면 잠이 달아나더라.'라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더니 진짜로 맥주를 사 왔었다. 그걸 마시고 정말로 졸지 않고 책을 보는 나를 향해 참 '별종'이라고 했었다.
택시 타고 면접 보러 갈 형편이 안 되어 그냥 무시했는데 차 문을 열고 기사가 내리더니 "어이!" 하며 부르는 것이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사촌 형이었다.
그 후 좀 더 공부하여 상위 직급에 응시하고 싶었으나 그럴 여건이 안 된 게 아쉽긴 하지만 당시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 없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날이 1.12사태(79.1.12)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날)가 발생한 날이다.
내 공무원 출반 전후는 10.26, 12.12, 5.18 등 그야말로 정치적 격동의 시기였다.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한 2016년 12월에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시기라 황교안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했는데, 그래서 내 훈장증(녹조근조훈장)에는 교부자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적혀 있다.
요즘도 만나는 군대 전우 중 서무병 출신 김 교수는 말했다. 내가 신병으로 전입했을 때 신상명세서에 장래 목표를 '4급 을류 공무원'이라 썼는데 사병 중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고, 그때 목표했던 직급에는 비록 못 미쳤으나,
본부석 앞에 이르러 선수 대표의 '우로 봐!'하는 구령에 맞춰 풍선을 일제히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운동장은 각종 체육행사로 관람객이 많았고, 아이들 관객을 상대로 솜사탕이나 풍선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장 하사 쪽에서는 군대에서 계급은 자기보다 낮은 '병(兵)'이었지만, 본부 근무한다고 무게 잡던 사람이 제대하고 나서 겨우 하는 일이 서울운동장에서 풍선 장사하는 것 같았으니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공무원 생활에서 승진을 빼면 뭐가 남을까.
'서포사'란 말이 있었다. 서기관(4급) 되기를 포기한 사무관(5급)을 서포사라 했으니 그 말은 장애인 중에 제일 무서운 '시각장애인'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군(軍)에서는 같은 의미로 '장포대'가 있다고 한다. 즉 장군 되기를 포기한 대령처럼, 더는 승진의 욕심이 없다면 얼마나 거침없는 직급이겠는가.
이미 연금 납입기인 33년을 꽉 채운 상태이기에 영향이 거의 없는 것이다.
담당자가 알려준 바로는 그날 오후 3시에 고양시 소재 노고산 예비군훈련장에서 헬기로 행사 물품을 운반할지 그걸 활용해 보라고 했다.
조금 있으니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초등학생 4~50명이 올라왔고 뒤이어 시장님 일행과 기자들이 올라왔다. 땀을 흘리고 올라와 산중에서 먹는 수박 맛은 굳이 묘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움이 머물던 자리
유년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중학생 시절 통학버스의 '여차장 종숙이'가 생각난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약 8킬로 남짓이었으나 비포장에 꾸불꾸불하고 높은 언덕도 있어 버스를 30여 분, 걸어서는 1시간 반쯤 걸렸던 것 같다.
걷기에 어린 중학생에게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차비를 아껴야 했기에 수업이 일찍 끝나는 하교 때에는 걷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모두가 보릿고개 넘듯이 힘겹게 살아온 세월이니 가끔 추억이야 하겠지, 가을 단풍처럼 곱게 나이 들었을 종숙이, 오늘따라 '여차장 종숙이'가 보고 싶다.
당시 학생 차비가 15~20원 정도였는데 달걀 1개 값과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 대신에 달걀 1개를 가져와 차표를 끊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도시 애들처럼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다는 건 언감생심이고, 용돈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던 시절이다.
아마 예비 소집에 온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장남이 맘에 걸리고 눈에 밟혀서 원기소 한 통으로 안쓰러운 부정(父情)을 표현하셨던 듯하다.
난 받아먹으면서 베풀지는 못한 미안함이 지금도 가슴을 짓누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난 치사랑은커령 내리사랑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오로지 받기만 했을 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한다.'라는 속담처럼 '맹감 일흔이 고욤 하나만 못할' 수밖에 없다. 맹감나무는 땔감으로 쓸 순 있지만, 가시가 있어 베기도 쉽지 않아 그저 별 볼 일 없는 잡목의 하나일 뿐이다.
그 정선이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이제 겨우 60대 중반의 나이에.... 지방 어디 장례식장이라던데, 서로 만나본 지 20년도 더 지났고 근황을 아는 사람도 주변에 거의 없어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생활한 것도 모르고 살았다.
옛날처럼 땔감으로 나무를 베지도 않고 소를 방목하지도 않으니 전에 있던 작은 산길들은 짐승들조차 이용하지 않고 사람은 더더욱 다닐 수가 없었다.
가끔 지방 여행을 하다 고속도로변에 잘 가꿔진 묘지를 보면 무척이나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는 우리 선조들을 저렇게 모셔야겠다는 효심(?)을 불태우곤 했었다.
돌이켜보면/우리 형제자매와 자손들은/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간난산고도도 겪었고/혈육을 먼저 보내는/아픔도 겼었습니다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걸/한탄하거나/누굴 원망해 본 바 없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동생 중의 한 명이 나서서 "바꾼 이름을 적으면 조상님들이 누군지 몰라보잖아요. 그래서 원래 이름을 적는 게 맞아요."라고 한마디 거들어서 겨우 수습한 일이 있었다.
추억을 추억하며
"그런데 여기 이놈은 다리가 1개밖에 없네요. 지리산 전투에 참여했던 놈인가." "...."
"솥에 다리 하나가 빠져 있더라고요."라고 했다.
단체 손님 중 하나가 떠든 객쩍은 소리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재치 있게 대거리해 준 여주인의 푸근한 마음 씀씀이가 아직도 정겨운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닭 다리 1개를 더 베풀어 준 아주머니에게 악수를 청하며 만 원짜리 1장을 찔러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 말이다.
그 엄마가 늘 "우리 인숙이는 젖이 작아서 걱정"이라던 말처럼 몸매랄 것도 없었지만 군인들 눈에는 드물게 보는 치마 입은 여자였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모든 사람을 너그러이 관조할 여유가 생기니 앞으로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진다.
남자에게 퇴직은 거세와 같다지만
그때부터 한동안 매 별명은 '이문동 칸트'가 됐었다. 다 지나간 옛 얘기다.
특에 박힌 듯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는 일을 숨이 막힌다지만, 실제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걸 해본 사람은 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결혼생활과 사회생활도 모든 아버지만큼만 하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육 남매 이야기
부모님이 계셨다면 육 남매가 이리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대견해 했을까 하는 생각과 맏이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괴감이 교차하면서 코끝이 찡해왔다.
다들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헤쳐 나와 비뚤어지거나 소원(疏遠)해진 사람 하나 없이 아직은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어 튼튼한 DNA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제발! 그 액자가 재운을 가져와 아들의 카페가 번창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어 세상 소풍이 끝나고 원래의 그곳으로 돌아가 조상님들을 뵙더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그런 자신감 말이다.
이번에 우리 육 남매가 함께한 모처럼의 여행은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신 날들'이었다.
그러다 더는 미루기 힘들다고 판단한 시기에 어렵게 말문을 열었는데 돌아온 답이 "올해는 누구 환갑인데?" 였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이 있다는 데 같은 사실을 봤다고 해서 모두의 기억이 일치하는 건 더욱 아니다. 부모님에 대한, 어린 시절 우리들의 기억이 그랬다. 다름이 아닌 같음을 확인하는 그런 과정이 이번 여행의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어느 이모가 나중에 그러시더란다. "너희 남매들은 어떻게 이모들을 전부 불러 음식 대접하고 용돈까지 줄 기특한 생각을 했냐!"라며 대견해 하셨다고,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 대신....
제2장. 내 일(my job)이 있어야 내일(tomorrow)이 있다
어제까지는 공무원, 오늘은 아파트 관리소장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지금의 일터에 처음 출근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찹니다.
서울시 북부기술교육원 에너지 관리과정(6개월 과정)에 입학하여 4개의 기술 분야 자격증(에너지 관리 기능사, 온수 온돌 기능사, 소방안전관리자, 위험물안전과라자 자격 등)을 취득했어요.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지요. 공무원의 박봉으로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내 집을 마련했으며, 없는 집 장남 며느리로서 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내느라 맘고생도 많았거든요.
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인생 100세 시대에는 꼭 돈 버는 일이 아니라도 뭔가를 배우거나 주변의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극장의 2막이 오르다
그래서 100세 시대에는 내 일(my job)이 있어야 내일(tomorrow)이 있다고 나는 주장했었다.
여러 부서를 거치다 보니 비록 전문성은 없을지라도 넓은 경험이 축적된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관리사무소의 일은 주차관리, 시설물 유지보수, 층간소음 민원 해결 등 갈등을 관리할 일이 많아 내 경우 공직에서의 다양한 부서 근무 경험은 큰 도움이 된다.
인생 2막에 들어보니 공무원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서 마치 SKY 대학 출신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명절 때면 양말 세트를 가져오시는 어르신이 계신다. 제발 그러지 마리라고 해도 기어이 놓고 가신다. 관리소장이 어르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평소 신세졌다고 생각하기에 고마움을 그렇게 표하는 것이다.
2017.7.19자 연합뉴스가 보도한 "작은 에어컨 한 대로 아파트 전체가 시원해요!"라는 기사는 우리 단지를 일약 유명한 단지로 만들어줬다.
관리비 부담을 줄일 방법, 즉 잡수입을 올릴 방법을 궁리하다 모 TV 방송국 드라마 촬영을 유치하여 임대료(1천여만 원)를 받은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우리 같은 작은 단지(368세대)가 전국의 쟁쟁한 단지와 어깨를 겨뤄 우수 단지라는 쾌거를 이뤘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겨우 5명의 인력으로 입주 5년 만에 이룩한 성과임을 내세우고 싶고, 입주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욕인 듯 욕 아닌, '이 양반아'
2020년 말부터 LH 공공임대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명칭이 주거행복지원센터로 바뀌었다.
"한 달 후에 낸다잖아, 이 양반아!" 이런 경우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하던가.
'이 양반이 욕은 아닌 게 분명한데 왜 그 순간에는 욕설처럼 들렸을까.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렀다. 거의 2년간 관리비를 안 내고 연락도 안 되다가 어느 날 갑자가 나타나 이삿짐 옮긴 현장을 들킨 주제에...
나도 전화로라도 위로를 드리기 위해 통화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했다. 폐암 말기라면 사형선고를 받은 셈인데 어찌 저리 초연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위로의 말을 찾기가 어려워 어물거리다가 전화를 끊고 말았다.
"오진이었대요. 폐암이 아니래요." 무슨 병원이 사람 목숨 갖고 장난을 쳤나.
돈만 담아 봉투에 넣어 돌려드리려면 구구하게 설명해야 하니 말 대신 글로 취지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러 오신 거였다.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했고, 기꺼이 써드렸다.
홀로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리신은 낮에도 TV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인 것 같았다고 직원들은 말했다.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 시작되고 비교를 줄이면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다. 하루 세끼 먹는 식사라도 부자가 먹는 식사의 질과 비교하다 보면 내 식사가 초라해 보일 수 있다.
아파트값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는 원흉이 아닐까. 시멘트, 모래, 철근을 넣어 쌓아 올린 콘크리트 덩어리가 강남에 있느냐 강북에 있느냐에 따라 그 값이 천양지차(天壤之差)니 그게 정상적인 사회인가 말이다.
어느 날 우리 단지에 사시는 아버지가 무료관광에 따라가 88만 원어치의 건강보조식품을 구매했다며 딸이라는 분이 전화를 해왔다. 약사라는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얘기를 듣고 판매처에 전화하여 재료비가 5만여 원에 불과한 물건을 고가에 판매했으니 사기 아니냐며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환불을 받기로 했다면서 도대체 그 과정에서 관리사무소는 뭐 했냐고 따져 물었다. (관리소장이 무료관광 따라간 것도 아닌데....)
어르신은 그 강을 건넜을까
"저는 다음 달에 이사 갑니다. 그동안 잘해 주신 직원분들께 감사의 의미로 저녁을 대접하는 것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무슨 일로 저녁을 사는 거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내 속내를 알아차리기다도 한 듯, 가까운 신규 입주 단지로 이사 가기 때문에 그동안의 정리(精理)에 감사하다는 뜻에서...
박 할머니 또한 '암 수술을 7번이나 받은 어르신이 테니스를 한다.'라는 내용으로 매스컴을 탄 일이 있고, 최근 방영된 건강 프로그램에서는 최 할머니 인터뷰 장면에 잠깐 얼굴이 노출된 적도 있다.
첫째는 '고독사 없는 아파트 만들기'이다.
둘째, '층간소음 없는 아파트 만들기'이다.
셋째, '외로운 노인 없는 아파트 만들기'이다.
마지막으로 '이웃 간 벽 없는 아파트 만들기'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우리는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할 줄 모른다. 천만년 사는 것도 아니고 겨우 100년 남짓 사는 인생임에도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세금이고 둘째는 죽음이다.
그렇게 여러 기관에서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후 8일째 되는 날 아침, 어르신이 요양병원에서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가족과 떨어져 살다 죽어서도 가족에게 외면당한 영혼은 어디서 구원받을까 생각해 봤다.
기독교의 요단강과 불교의 삼도천(三途川)은 사람이 죽어서 건너가는 강(江)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 어르신은 그 강을 다 건넜을까. 주검이 장례식장의 차가운 안치실에 머무는 동안 영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었을까.
죽음도 준비가 필요하다
아까의 그 여경이 알려줬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112에 전화하세요. 관리사무소에서 고민하지 마시고..."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가망 없는 환자를 단지 가족애라는 핑계로 버려두며 연명하게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권을 짓밟는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미리 신청했더라도 꼭 써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더니 주민등록증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나가신 후 끝내 안 돌아오셨다. 어느 분이 킥킥대며 말했다. "저 노인네 줄행랑치네!"
그 숫자에는 나와 아내도 포함돼 있다. 나 또한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질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연명을 위한 치료는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평소에 다져왔고 아내와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명에 대해 공감했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가 마치 '안락사 의향서 등록증'을 받은 듯한 행동을 보이니 의향서 쓰려다가 '줄행랑'친 어르신, '함흥차사' 되신 어르신의 심경이 이해됐다.
전체 보기 클릭!!! 1장~5장
https://blog.naver.com/seeforjesus/224083114393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