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사람
로마서 7:24-25
로마서 7: 24 절의 ‘곤고한 사람’ 의 ‘곤고’라는 단어 miserable- 헬라어 ‘비참하다. 불쌍하다, 불우하다’ ‘가난하다’ 인데 최근 프랑스의 뮤직 칼 영화의 빅톨 휴고의 Les miserable’ ‘불우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는 신자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두 가지의 것을 느끼는 고통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그는 절망의 깊은 갈등에서 발견한 것은 가슴을 찢는 부르짖음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는 누구냐라는 성경학자들의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주인공이 바울 자신의 이야기냐 아니면 제 3자의 이야기냐? 두 번째 논쟁은 시간입니다.
중생 전 즉 예수 믿기 이전이냐 아니면 예수 믿고 난 이 후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의 해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의 중생전이냐 아니면 중생 이후냐 하는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도 한번 자신을 대입시키면서 해답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19 절) 탄식은 바울은 이미 생생하게 주님을 만난 후 죄의 문제를 해결한 중생을 경험했지만 지금도 자신의 부족한 것 때문에 끊임없이 울며 무릎을 꿇고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함께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1.자신의 무능력의 고백이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한 나의 모습을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miserable 이란 단어는 계3: 17 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이런 상태를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하며 위선자라고 합니다. 겉은 화려한 것 같이 보이나 영적 상태는 피패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봅시다.
구약의 시편에서 이런 탄식의 부르짖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데 대부분 다윗의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86:1 ‘여호와여 나는 가난(곤고) 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시편 34: 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 왕은 어렸을 때부터 성령의 감동이 되어 위대한 신앙인으로 그를 하나님께서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은 구약에서만 6 백번 정도 신약에서도 60번 정도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밤을 지세우기도 하고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요 군인이요 왕의 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죄인이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에 나가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은 무능력하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들도 솔직하게 ‘하나님 나는 외롭고 곤고하고 비참한 인간임을 고백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두 본성의 싸움을 내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거듭난 교인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고민 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모순입니다. 이율 배반적이며 자신의 갈등, 철저한 패배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내랴?’ 의 탄식은
2. 하나님께 도와주십시오 라는 고백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 고 체념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나밖에 없다’ 라고 자신 만만하게 말하며 자신을 믿고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발 버둥을 칩니다. 그런 사람은 의지가 강한듯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이며 얼마 가지 못해서 실패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나를 구원할 자가 누구입니까? 자신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식이 철학과 학문이 해답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어떠한 위대한 사상가도 종교도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세상의 학문, 문화, 지위, 재물이 나를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찬송 544 ♬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입었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지금 우리 나라는 새 정부가 들어 오면서 사회 여러 분야야 부정과 부패의 온상들을 하나씩 파 헤치고 있습니다. 대 부 부분의 사람들은 검찰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범죄의 사실이 드러나면 어떻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는 듯 합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해 줄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 탄식하고 회개의 눈물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인들도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면 내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 1)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을 인용 하시면서 울부짖으셨습니다. (마 27장)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윗이 밧세바와 음행의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 회개의 눈물이 많이 흐르며 비통해 하면서 그가 가장 두두려 한 것이 무엇 인줄 아십니까?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는 두려움 입니다. 그래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 기도 합니다. (시51: 13)
그가 평생 지켜 본 사울 왕은 맨 처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왕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니 사울은 비참한 사람으로 전략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력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이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체의 정욕에 끌려 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속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의 비명은 ‘하나님께 도와주십시오’ 라고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속죄하는 기도가 있기 바랍니다.
3. 오호라 탄식은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는 성결 생활의 엎그레이드 입니다.
성도들은 죄를 범해서만이 비참한 자신을 탄식하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성결한 생활이 성숙해가면서 터지는 함성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흐르는 눈물도 있지만, 너무 감격하고 기뻐서 흐르는 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호라 의 탄식은 은혜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자마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사 6:5) 소리치며 탄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격한 자의 탄식이며 고통이며 슬픔입니다.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 큰 범죄를 해서 그런 탄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이런 탄식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탄식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사야 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오호라 탄식은 성결한 기독교인의 성숙을 향한 탄식입니다.
시편 22편은 매우 어두운 면을 기록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런데 23편은 전혀 반대의 은혜와 축복의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2편의 고뇌와 경험이 없는 자에게 23편의 축복의 말씀이 없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탄식하고 회개를 했으나 범죄의 행위에서 난 아들은 하나님께서 데려가 셨습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시게 하신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탄식과 그 회개를 받으시고 저 유명한 지혜의 왕 솔로몬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고민의 호소가 아니라 - 승리의 개가입니다.
25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울처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뇌와 비참한 심정을 고백하며 엉엉 울면서 내뱉는 다면 주님은 우리의 입으로 가슴으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탄식은 자기 고민을 호소 하는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승리의 개가입니다. 실망과 좌절을 맛보는 자기 모순을 발견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을 말하고 신음하면서, 고민하면서, 괴로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 높여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강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입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범이 되고 멘토가 되는 영적 은사입니다. 로마서 7장의 고민과 비참함은 이제 8장의 영광스러움의 깊은 집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심각한 갈등과 고민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결한 그리고 성숙한 모습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