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39/벌초伐草]이 미풍양속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사흘간 아침마다 1시간반씩 벌초를 했다. 아버지는 당신 필생의 사업 중 하나로 우리집 바로 뒷산에 가족묘지를 조성하고, 아무도 어찌할 수 없게‘가족묘지’명의로 등기를 했다. 봉분封墳이라야 나로서 증조부모(합장묘), 조부모 두 분, 어머니와 숙부, 5기이다. 그 선대로 고조부모, 현조부모는 돌비를 세웠으니, 아담하다면 아담한 가족산소이다. 명당인 줄은 모르지만, 전망 하나는 끝내 준다. 제법 너른 들판과 할머니가 평생 사신 당신의 친정마을이 손에 잡힐 듯 내다보인다.
3년째 혼자 하는 벌초작업이다. 예초기로 봉분을 깎을 때에는 혼잣말로 ‘할머니, 어머니 이발해 드릴께요’하며 험한 기계를 들이댄다. 해놓고나면 고인들이야 어찌 알겠냐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 효도한 기분이 든다. 1년에 한식과 추석 명절 전 두 번은 해야 ‘원칙’이다. 숙부 기일이 7월인지라 벌초를 한 지 달포쯤 됐는데, 어느새 또 풀이 무성하다. 참 지독한 식물종자들이라니, 어찌 미웁지 않겠는가.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있지만, 혼자 하는 작업은 무엇이든 팍팍하고 진도도 나가지 않는다. 갈퀴질만 누가 해줘도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여, 1시간여씩 세 번 나눠 한 후 풀이 마르면 갈퀴질을 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산자락 묘소에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어느 집은 육촌까지 모여 함께한 후 가족단합대회를 하거나, 어느 집은 아예 산림조합에 벌초 용역을 주기도 한다. 우리집은 고향 지킴이를 자청하여 고향에 사는 ‘죄’로 올락낼락할 필요없이 내가 맡기로 하니, 번거롭지 않고 속은 편한다. 대신 몸은 고달파도 스트레스 받지 않으니 괜, 찮, 다. 늙은 아버지는 그런 내가 못내 안쓰럽고 안타까운 모양이지만, ‘즐겁고 보람된 마음으로 하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매라’고 해도 안절부절못하시는 듯하다. 어쩌겠는가.
아무튼, 벌초를 하면서 드는 생각 두 가지. 하나는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이라 할 ‘벌초문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이고, 또 하나는 ‘처삼촌 벌초하듯’이라는 속담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아버지는 “500년 내려온 유교문화와 유교정신이 끝장난 지 오래”라며 “제사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시제時祭는 어떻게 할 거냐?”며 스트레스를 팍팍 주어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유교문화는 끝났다면서요?”볼멘 소리로 투정을 해도 그때뿐이다. 하여간, 노인네들의 옹고집을 누가 말기랴.
‘보본추원報本追遠’이라는 말은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지만, 오늘날처럼 바쁜 현대인들이 이런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있나 싶다. 어디 제사뿐이랴. 벌초야말로 보본추원의 으뜸이랄 수 있겠다. 우리집만 해도 아들들이 나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지 모르지만, 벌초하는 작업을 한번도 보지 않은 지라 “벌초가 뭐예요?” 물을까 겁이 나 물어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알려줄 것은 알려줘야 한다는 심정으로 엊그제 작업현장을 동영상으로 보내주었다.
제사나 성묘를 중시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뿌리’를 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한국인이라면 최소한 자기 성姓의 본관(本貫.관향)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글로벌시대에 족보族譜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고 안타깝다. 할아버지들은 우리 본관이 무엇이고 무슨 공파이냐고 물어오는 손자들이 혹시 있다면 얼마나 예쁠 것인가. 용돈도 만 원 줄 것을 ‘신사임당’으로 대체하지 않겠는가.
하여간, 나는 내가 가족산소 아래에서 사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벌초만큼은 전담할 생각이다. 힘이 달려서 못한다면 모르지만, 앞으로 15년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벌초야말로 앞으로 10여년 사이에 틀림없이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으로도 가족적으로도 암묵적인 합의는 이미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그러거나 어쩌거나 나는 나대로 묵묵히,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벌초를 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최소한 나의 도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