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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7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이신 성자뿐만 아니라 인성도 성부의 영원한 독생자이시다.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신채로 성부께로부터 독생하셨다.
#낮아지심 #지옥강하
예수님의 영혼은 죽으신 기간동안 낙원에 계셨어도 육신이 분리되어 주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아무일도 못하고 수천년 만큼이나 갑갑한 시간을 참고 견디셔야 하셨던것이 예수님의 지옥강하에 대한 가장 타당한 설명이 아닐까.
#부활 #높아지심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인성으로의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성육신전 영원전부터 지니셨던 영광의 인성으로의 회복이신것이다.
#성령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것은,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시고 나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은,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신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혼의 영에 완전충만하게 거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그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혼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행하신다.
#20191207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6장.
#노아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패역한 세대에서 홀로 의인이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노아는 자기 스스로 무슨 선한 일을 하기 이전,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구원받기로 택정함을 입은 덕분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은혜를 베푸신 자들을 강압적으로나 억지로나 끌고가지 않으신다. 도리어 그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신자의 돌과 같은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하셔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순종하게끔 그들의 의지를 감동시키시는 것이다. 노아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모든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신자의 성화(선행과 순종과 견고한 인내)는 마치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공을 돌리시려는 듯이 은근하고 은밀하게 역사하신다. 그래서 신자의 거룩한 삶은 100% 성령 하나님의 의지이자 100% 신자 자신의 의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성자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인간인 두 본성의 연합체이신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므로 노아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 전에 택정함을 입고 삶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의롭다 하셨으며 이후 성령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의를 완전하게 추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노아는 자기 증조부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속세의 아웅다웅하는 것에서 벗어나 신선과 같이 깊은 산골에 파묻혀 명상이나 하고 도나 닦았다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좀 더 도덕적으로 살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뜻만 살짝 얹은 것도 아니며 매사에 성경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속세라고 하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상에서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수많은 상황들을 접하면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이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이 땅의 좋은 것들을 부당하게 누리며 떵떵거리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 된 것이면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믿음으로 감수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 노아 또한 그렇게 패역한 자기 시대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그들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증조부 에녹과 조부 므두셀라와 부친 라멕을 이어 내려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붙들어 구별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알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가시밭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적으로 고백하는 대다수의 교인들조차 복음으로 인한 시련이 닥칠 때는 그 위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여 햇빛을 받지 못하고 얕은 땅에 뿌려져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타들어 가는 씨앗과 같이 그 믿음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복음을 지키다가 사방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욱여쌈을 당하더라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굳건하게 참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사업장 등 신자가 머무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해당된다.
당시에 노아 혼자만 유일무이한 의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수 전까지는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아버지 라멕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뿐만 아니라 극소수이긴 해도 노아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경건했던 사람들이 얼마간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므로 의인들이 부당하게 홍수로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멕은 홍수 5년 전에, 므두셀라는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그들의 삶을 거두셨다. 아마도 당대에 노아와 더불어 경건했던 사람들은 라멕과 므두셀라처럼 홍수 전에 삶을 마쳤을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과 패역함으로 말미암아 40년 동안 떠돌다가 전부 광야에서 죽었으나, 노아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은 멸망의 홍수가 오기 전에 이 땅의 괴로운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그 때까지 살아있는 자들 중에 하나님의 경건한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영화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어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될 것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 삶으로는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은 가짜 교인들은 주께서 물 대신 이 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불로써 천하 만물이 풀어질 정도로 불사름을 당할 때 같이 하나님의 불에 고통스럽게 타죽는 육체의 죽음을 당하고 이후에는 영원한 불못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추악한 형상으로 부활되어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들의 악행대로 심판을 받아 불못에 떨어져 타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영원히 울부짖게 될 것이다.
고대인들의 1천 년에 육박하는 기나긴 수명과 왕성한 생명력을 고려한다면 노아에게 평생 동안 단 세 명의 아들만 있었다는 것은 거의 대가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괴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이 땅을 살아가는 육신들에게는 1차적으로 집단의 규모와 무리의 수가 절대적인 지위를 결정하므로 다른 패역한 자들이 수 백 수 천 명의 대가족을 이루며 위세를 떨칠 때 노아의 가족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라는 8명의 초라한 가족 규모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초라한 가족 규모에 눌리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패역한 세대에 심판이 가까우니 회개하라 선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초라한 가족 규모는 도리어 심판의 날에 방주에 다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된다. 아울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노아의 가족 8명으로 다시 모든 인류를 번성시키신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몇몇 의인들에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신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땅에서 형통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미숙한 신앙을 가진 백성들에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맛보고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의인들의 사례를 보고서 그 너머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것을 바라보아야지, 이 땅의 것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성경에는 그런 부귀영화보다는 참으로 마음 같아서는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았던 의인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단 세 명의 아들만 있었던 노아와 같이 남들보다 이 땅의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가운데 처해 있더라도 각자가 받은 것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소망하며 사모해야 할 것이다. 비록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열매가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더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즐거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평생 추구해야 할 것이다.
#20221207
#바울
바울사도는 회심전에는 주님의 성만찬에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참여한적도 없었고,회심후에는 사도들을 만나지않고 바로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었기 때문에 그가 성만찬에 대해서 기존의 사도들에게서나 성도들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그럼에도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세운교회에서 성만찬을 가르치고 행할수 있었던것은,아마도 환상과 같은 모종의 신비한 방식으로 주님께로부터 직접 전수받았을 것이라 보는것이 타당하다.
#벨기에신앙고백서 Article 5: The Authority of Scripture / #성경의권위
We receive all these books and these only as holy and canonical, for the regulating, founding, and establishing of our faith.
우리는 이 모든 기록물들을 유일하고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여 우리 신앙을 규정하고 기초로 다지며 세워나갑니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신앙과 관련된 우리의 지식과 행위가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성경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무리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왜곡하기가 쉬우므로, 우리의 해석이 과연 성경에 보편적으로 부합하는지를 다른 탁월한 해석가들의 해석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보혜사로서 우리에게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은, 다른 해석가들의 저서들은 아예 무시하고 오로지 성경만 파고들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령께서는 탁월한 성경교사들을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교사들의 성경해석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And we believe without a doubt all things contained in them-- not so much because the church receives and approves them as such but above all because the Holy Spirit testifies in our hearts that they are from God, and also because they prove themselves to be from God.
또한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신앙을 위한 모든 것이 성경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는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우리의 심령에 증거하시고, 또한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신앙을 위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모든 상황에 대한 세세한 해법이 들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핵심되는 지식과 원리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불분명해보이고 모호해보이는 상황을 만나게 되더라도 성경에 제시된 원리를 따름으로써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를 때에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타당하다. ‘오직 성경’을 추구한다 하면서 어떤 목사의 가르침도, 어떤 신앙서적도, 어떤 탁월한 성도의 조언도 거부하고 그야말로 성경만 읽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겨버린 엘리 제사장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같은 우상숭배를 저지르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성경이 66권의 목록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교회와 성경교사들의 역할이 중추적이고 핵심적이며 지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신앙을 가진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을 막론하고 마땅히 모두 성도라 칭함받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과 가르침은 통상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경교사들을 통해서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신앙인들의 가르침들과 글들 중에서도 과연 어떤 기록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한 성경교사들의 합의를 통해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나 섭리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성경의 목록들이 확정되기까지는 주님의 성령께서 오랜 기간동안 기록자들과 보존자들과 번역자들과 이후 성경교사들을 감동시키심으로써 역사해오신 것이기 때문에 이야말로 가장 크고 절대적인 원인이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의 목록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지대한 역할을 맡아왔다고 해서 성경을 정하는 권세가 교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에 대한 권세를 원래부터 자기 소유였던 것처럼 도둑질하는 것과도 같다. 받은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 은사들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께서 부여하신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그래서 성경의 목록들이 확정되기까지 참된 교회와 성경교사들은 자신들의 권세나 공로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셨다고 참되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칼빈 선생을 비롯한 신앙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통일성있게 보존하기 위해서 여러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을 작성하였고 그 탁월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고백서나 교리문답들을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고 필요시 개선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기록물로 인정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의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자체를 성경보다 위에 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며, 그것들을 함부로 가볍게 다뤄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서도 안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For even the blind themselves are able to see that the things predicted in them do happen.
심지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자신들 안에 선포된 말씀들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백서 기록자가 언급한 ‘보지 못하는 자들’이란 교회와 성도에 속해 있으나 아직 여러모로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일수도 있고, 교회와 성도에 속하지 않은 세속인들 또는 교회와 복음의 원수들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연약한 신앙인들은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세속인들은 복음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교회의 원수들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주님과 교회를 대적하기 때문에 이 모든 현상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사람만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과 복음을 들으라 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신앙이 연약한 성도는 점점 신앙이 자라고 견고해감에 따라서 성경을 더 풍부히 알게 되고 성경대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된다. 복음에 무관심한 세속인들은 자기들의 인생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던 성경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대로 이뤄져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되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그 모든 책임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가하고 하늘의 주님을 저주하고 비방하게 된다. 교회의 원수들은 마귀와 귀신들이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면서도 주님께 대적하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면서도 교회를 대적하다가 결국에는 성경대로 스스로 멸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20201207
#민수기 #Numbefs 14:1-25
백성의 원망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백성들은 애초에 애굽을 빠져나온 시점부터 이 때까지 가나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고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모세를 대적해 왔다. 그런 그들에게 열 명의 정탐꾼들의 악평이 들리자 백성들은 드디어 모세의 손을 벗어날 절호의 기회로 여겨 밤새도록 통곡하는 쇼를 하고 모세와 아론으로서는 차마 저지할 수 없는 온갖 원망의 넋두리를 늘어놓고 만다. 더욱이 백성들은 단순히 신세한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술 더떠서 진심으로 애굽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모세가 아닌 자기들만의 지도자를 세우려 한다. 이는 백성들의 반역이 행진하는 내내 이어져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결국 자기들이 경솔하게 내뱉은대로, 광야에서 죽기를 바란만큼 40년 동안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게 된다. 반대로 가나안 족속에게 사로잡힐 것이라는 백성들의 어린 자녀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광야의 백성들이 매순간 여호와와 모세를 거역하면서 끝없는 불평불만을 내뱉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저럴수가 있느냐며 자기가 저 무리에 있었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거라 하고 어떠한 경우에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불평과 원망을 해서는 안된다고 설교하고 듣지만, 실상 저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손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국가 지도자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백성이 모세를 거스르듯이 사사건건 시시때때로 거스른다. 정부가 아무리 코로나 방역에 최선을 다해도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방역정책을 우습게 여기며 꼬투리를 잡기에 여념이 없다. 지원금을 주면 준다고 욕하고 안주먼 왜 안주냐고 욕한다. 다른 나라는 백신 수급이 완료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대체 뭐하고 있느냐면서 다그치기만 한다. 확진자 폭증에 방역 단계를 올리면 경제를 망치는거냐며 비방한다. 이런 기독교의 모습은 광야의 백성들의 모습이자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쌍욕을 해대는 저주받은 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걸핏하면 굶어죽게 생겼다, 망하게 생겼다 하는데, 광야 백성들이 당한 심판대로 그들도 자기들이 경솔하게 내뱉은 그 말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온 백성의 반역은 모세와 아론으로서는 어떻게 물리적으로 해결하거나 저지할 수 있는 절체절명이어서 그들은 그저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이 때 모세와 아론의 심정은 여호와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십사 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차라리 여기서 그냥 자기들을 거두어달라는 자포자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모세와 아론을 편드는 사람은 그 수백만 명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모세를 도우려고 새운 70명의 장로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대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뽑은 천부장 등의 지휘관들도 이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도리어 뽑지 아니함만 못하게 될 뿐이었다. 장로들과 지휘관들은 모세보다는 백성들에 치우쳐 있었던 것이다. 불평과 원망에 오염되어 흥분한 백성들은 급기야 모세와 아론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였다. 여호와의 선하심은 백성들의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들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른 말 하는 선지자들은 언제나 당대 왕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아왔고 대부분 처형을 당하기 일쑤였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의 증오를 받으셔야 했고 스데반 집사는 진리를 전하다가 양심에 찔린 악한 백성들에게 돌로 맞아죽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두 선지자들이 1,260일 동안 예언을 하자 견디다 못한 땅의 백성들은 그들을 죽여 시체를 방치하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인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 지도쟈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면서 사회에서도 성실히 의무를 수행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국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순종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와 정부는 성경을 핑계로 반역하고 거스르며 심지어 선동을 일삼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선을 행하는 지도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선한 국가 지도자를 비방하고 저주하며 돌을 던지려는 모습만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교회를 위해 그들을 세우셨건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세움받지 아니함만 못한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이다.
모세가 백성을 두고 기도하다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13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14 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15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7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9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여호와의 진노의 음성이 모든 백성에게 들린 것인지 모세와만 말씀하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쨌건 급하게 나타나신 그 영광으로 인해 백성들은 돌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고 심판의 말씀이 모세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반역하고 쳐죽이려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멸하시려 하셨으나 모세의 간구로 그들을 바로 멸하지는 않으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예정을 논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변에 그치게 된다. 단지 여호와께서 백성을 진멸하시려 했다는 것이 허언이 아니라 진정한 것이어서 만약 모세의 간구가 아니었다면 단 네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을 것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모세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여호와께 여러 차례 협상하는 간구를 한 아브라함처럼,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모든 영광을 보이시면서 외치게 하신 그 말씀으로 여호와께 진노를 거두시기를 간구한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있어서 단지 혈통만 같은 외인에 불과한데도, 모세는 성령께서 주신 자원하는 심령으로 그들을 향해 아비와 같은 사랑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패악을 저질러도 그저 자기가 낳은 패륜아처럼 품어주는 것이다. 선지자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땅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를 여호와께 간구하였는데, 이는 아합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가뭄의 재앙으로 백성들이 여호와께 회개하며 돌이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패역한 기독교의 모습에 아무런 소망을 갖지 못하고 환멸을 느낀다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기독교가 진멸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징벌을 받되 회개하고 돌이켜서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야 함이 마땅하다.
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간구대로 백성들을 즉시 멸하시지는 않으시나 끝없이 불평한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모두 광야에서 쓰러져 죽는 징벌을 내리신다. 그러나 네피림의 후손인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먹잇감 취급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다는 언약을 주신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허락받을 성도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은 백성들처럼 불평불만만 하다가 이 땅에서 쓰러져버릴 뿐이다.
#20211207
#여호수아 #Joshua 10:16-43
아모리의 모든 왕과 땅을 취하다
16 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
18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
19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20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크게 살륙하여 거의 멸하였고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들로 들어간 고로
여호수아는 동굴에 숨은 아모리 다섯 왕을 바로 잡아다 죽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다만 굴을 막고 보초를 세워서 잠시 유예한 다음에 아모리 연합군 잔당들을 퇴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는 아모리 다섯 왕의 연합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아직 잔당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런 안일함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지체하지 말고 잔당들을 없애라 하고 그것이 여호와의 언약이자 명령임을 자각하게 한다.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은 자기도 모르게 젖어있는 안일함을 벗어버리고 도망하는 아모리 다섯 연합군 잔당들을 뒤쫓아서 할 수 있는만큼 처치하였으나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진멸하지는 못해서 살아남은 몇몇 아모리 잔당들은 주변의 가까운 견고한 성들로 피신하게 되었다. 여리고와 아이 성에서는 성읍 주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히 진멸했었는데 아모리 다섯 왕의 연합군과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무리 소수이지만 살아남은 잔당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실책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교회와 성도는 가시적이고 크게 두드러지는 죄악들만 몰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작고 미미해보이는 죄악들의 잔당들이 살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진멸해 나가야 한다.
21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더니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아모리 연합군을 무찌른 이스라엘 군대가 여호수아에게 복귀한 후에 가나안 족속들 중에는 감히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로도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서는 한편으로는 간담이 녹아내릴 정도로 두려워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여느 적군들에게 하던 것처럼 온갖 조롱과 비방과 독한 악담을 퍼부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모리 다섯 연합군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우박에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우박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이삭줍기 하듯이 진멸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다른 족속들은 행여나 자기들이 입이라도 잘못 놀려서 이스라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아모리 다섯 족속처럼 망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차라리 가난과 유리함과 배고픔과 착취를 기꺼이 당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세상조차도 성도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비방과 조롱과 차별과 악담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능력은 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충만합을 입어 성령의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것 밖에 없다.
22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들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매
23 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들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내니라
24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2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26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죽여 다섯 나무에 매달고 저녁까지 나무에 달린 채로 두었다가
27 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령하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들이 숨었던 굴 안에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까지 그대로 있더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가 복귀한 이후에야 굴 안에 가뒀던 아모리 다섯 왕을 끌어내게 하고 자신의 지휘관들에게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으라 한 다음에 처형하고 하루동안 나무에 달아놓는다. 고대의 전투에서 적국의 수장들을 잡아다 욕보이는 것은 자기의 권세를 드높여 보이기 위해 시행되는 것이긴 하지만, 여호수아는 자신을 높이려고 아모리 왕들을 욕보인 것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럴 요량이었다면 굳이 지휘관들에게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으라 하지 않고 여호수아 자신이 직접 저들의 목을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지휘관들에게 그 일을 행하게 함으로써 아모리 족속을 무찌른 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과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며 앞으로도 무찌르게 될 가나안 족속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승리를 얻게 될 것임을 각인시키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은 지휘관들은 한 두 명 정도가 아니라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 참가한 모든 지휘관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휘관 한 명 한 명 각자의 육적인 능력은 아모리 왕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였을 것이나 이제 그 우월한 아모리 왕들의 목을 자신들의 발로 직접 밟음으로써 여호와의 언약과 명령과 함께라면 능히 자신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목을 밟을 수 있으리라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 상하게 하시리라고 권면하였는데 이는 우리 자신의 육적인 능력으로는 공중권세 잡은 마귀를 이길 수 없으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면 사탄의 목을 밟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에게 목이 밟히고 쳐죽임을 당한 아모리 다섯 왕들은 나무에 달림으로써 여호와께 저주 받은 자들임이 명백해졌고, 자기들이 숨었던 동굴에 자기들의 시체들이 던져짐으로써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주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는 사탄도 천년의 결박에서 풀려나 온 세상의 군대를 끌어모아 교회와 성도들과 전면전을 벌이지만 결국 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양날 검에 진멸을 당하고 영원히 타는 불못에 내던져지게 될 뿐이므로 우리는 그런 사탄을 전혀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28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29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와 싸우매
30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31 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립나에서 라기스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우더니
32 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3 그 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의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34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라기스에서 에글론으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워
35 그 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을 쳐서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당일에 진멸하여 바쳤으니 라기스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6 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에글론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가서 싸워
37 그 성읍을 점령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
38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돌아와서 드빌에 이르러 싸워
39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같았으며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40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41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4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43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아모리 다섯 왕을 무찌른 여호수아는 계속 가나안 땅을 진격하면서 가나안 족속들을 맞닥뜨리는 족족 진멸하여 여호와께 바쳐드렸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마치 갑작스런 돌풍과 폭풍과도 같아서 질질 끌지 않고 순식간에 단번에 속전속결로 결판이 나곤 하였다. 죄악과 대적으로 판명된 것들과는 어떤 일말의 타협이나 시간끌기를 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성경과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단시간 내에 몰아내고 제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여호수아 이후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는데 미적미적 거리다가 스스로 저들의 죄에 물들어버리게 된 것처럼, 처단하지 않은 죄악과 대적들이 슬며시 힘을 발휘해서 교회와 신자들을 죄로 물들게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