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현대 그리스어 :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또는
비잔티움 제국(현대 그리스어 :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부터 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로 존속한 로마제국의 연속체이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제국의 공식 국호는 이전과 같은
로마제국 (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바실리아 로메온)이었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자국을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중세그리스어: Ῥωμανία)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 ( 중세 그리스어 : 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어난 일련의들로 로마 제국의 영역이 줄어들게 되었다.
324년부터 337년까지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재조직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요지인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지어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크리스토교를 공인하였다.
테오도시1세가 집권한 시기에 크리스토토교는 제국의 국교 되었고
여러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헤라클리우스 시기에 제국의 행정과 군사가 재조직되고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는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국가는 존속하고 있었고 그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는 점과
그 문화가 라틴 문화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방정교회라는 종교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고대로마 와 동로마 제국을 구별하고 있다.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을 되풀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제국은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때 제국은 북아프리카,이탈리아, 안달루시아,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아누스 1세 사후 사산 제국과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은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7세기의 초기
이슬람 정복전쟁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잃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 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제국의 영토는
발칸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시작된 내란과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
그 정점인 마누일 1세의 치세에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도 절대 오래가지 못했다. 앙겔로스 왕조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동로마 제국의 남발칸계 국가들과 라틴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내전으로 국가의 여력을 손실시켜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도 동로마 제국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 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완전히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트라페스주스 포위전으로 멸망했다.
국호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부르게 된 ‘비잔티움’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로 개명된
비잔티온 (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캉주 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
그이후 이 표현은 서방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
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인의 제국(라틴어 :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라틴어 : Romania,그리스어 : Ῥωμανία),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 그리스인의 제국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 제국에서 점차 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의미로
해당 국가를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늘마뉴를 서로마제국의 황제 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이리니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기존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로마교황이나 서방 군주들이 동방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제국을
여전히 로마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제국을 주로 룸( روم , ‘로마’)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大秦)을 문맥에 따라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정교회로 부르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1081년)에 대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加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로마 제국으로 추정되며, 또는 불림으로도 불렸다.
《송사(宋史)》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림(拂菻)〉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림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체제 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불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물러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AD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로 삼아
수도를 옮겼서 천도를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크리스토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티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레반토, 이집트,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 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써 서로마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 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타당한 것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오도아케르 와 동고트의 테오드리크 를 형식적이나마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봤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멸망할때까지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적의 영향력하에 들어온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제논은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의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여
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논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의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했으며,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32만 파운드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개혁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엄청난 대프로젝트인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