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돈'과 '행복'의 상관성, '운'과 '노력' 그리고 '취업'에 관한 윤리적 고찰 및 철학이 필요한 이유
한 전공 수업을 듣던 중 교수님께서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며 돈이 많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부동산을 이용해 자산을 증식시키는 사회적 현상들이 부조리하다고 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친숙하고 많이 접하는 "돈이 많은 자"는 거의 연예인이다. 특히 예쁘고 잘생긴 아이돌들을 알고 있다. 갑자기 연예인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그들의 윤리적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성과를 거두었고 자신의 노력 덕분에 지금의 이 자리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신체가 일반인과는 달리 타고났고 한국이라는 문화강국에 태어난 덕분에, 즉 이러한 선천적이고 외부 환경적인 요인 다시 말해, 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이 노력했고 그들의 기량을 갈고닦았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은 일반인들도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연예인들은 그들이 노력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들은 명품 협찬을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리고 일반인들에게 그것들을 사고 그들을 따라 하게끔 부추긴다. 그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의 소위 `자랑 및 전시를 위한 게시물`을 통해 일반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예전에 팔로우하던 연예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팔로우를 취소한 상태이다. 인스타그램을 들어갈 때마다 나와는 상관없는 명품 자랑 및 협찬 게시물을 보게 되니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고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팔로우를 취소했다.
연예인들이 10대와 20대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고 연예인들을 우상처럼 여겨 연예인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예쁜 것들을 살 수 있으며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인과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연예인들은 예쁘다. 돈이 많다. 명품이나 예쁜 것들을 많이 사 입는다. -> 부럽다 -> 나도 연예인이 되면 부러워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다. ->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과연 돈을 많이 버는 게 좋은 걸까.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이돌인 지드래곤도 그렇게 많은 경력과 명예, 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좋은 차가 있으면 뭐 하고 좋은 집이 있으면 뭐 해요."라는 말을 통해 연예인의 환상을 깸과 동시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료 출처]
https://youtu.be/RiLUXffEw0Q? t=387
6분 27초
[ YouTube ] - [ 모두가 봐줬으면 하는 지드래곤 영상 ]
다시 운과 노력에 관한 얘기로 돌아와서 이번엔 우리에게 당면한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엮어보려고 한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취업 또한 운이 많이 작용한다고 본다. 노력보다 운이 더 많이 작용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취업에서도 선천적이고 외부적인 환경 요인들을 무시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강남의 8학군만 봐도 거의 SKY로 진학에 성공하는 이러한 사태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시작부터 출발선이 다르다. 돈 많은 집은 자식을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1년에 몇천만 원에서 몇억까지 학비가 드는 국제학교로 보낸다. 결국 부는 대물림되고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가난도 대물림된다. 내가 이렇게 암울한 얘기만을 하려고 이 주제를 꺼낸 것은 아니다.
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에서 나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중세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잘나가던 한 인간의 삶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그러고도 자신에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뼈와 살을 파고드는 물음에 답을 찾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상황이 송두리째 바뀌어도 변함없이 남아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참고문헌 :하루에 떠나는 철학 여행 156p
이 물음에 개인적인 답을 하자면 그것은 자아 주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주체성은 자신의 신념, 즉 철학에서 온다고 본다.
우리가 철학과에 들어와서 철학을 배우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중 난 가장 중요한 것이 철학자들의 치열한 내적 투쟁을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내 안이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굳건해진 자아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러한 내부적인 것들이 가능해지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난 생각한다.
첫댓글 실존철학에서 부조리는 실존적 결단을 재촉하는 장치로 이해됩니다.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아요. 너무 우울해서요. 왜 항상 신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린 다음에 건져내는 것일까 하는 반발심 때문에요. 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에 공감하고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격렬하다는 건, 치열하다는 건,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노자와 장자가 소요유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열렬히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남는 건 그렇게 하고 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나의 "고요"니까요.
교수님 말씀이 이해는 되지만 아직 공감은 되지 않습니다. 전 열렬히 꿈을 갈망합니다. 그로인해 절망하고 절규하며 우울해하죠. 하지만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듯이 제 마음을 다잡고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성숙해질수있는지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전 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성장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전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새 드는 생각을 적으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라고 전 생각합니다. 제가 좀더 단단해져야겠죠. 그래서 전 보에티우스의 "변함없이 나를 지켜줄수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참 좋습니다.
@박재민 긍정적인 것에 대한 종교적 우려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거 같아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대한 엄숙주의적 접근이 살인을 불러온 장미의 이름으로도 이 점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지만 말이죠.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보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가 훨씬 영향력이 큰 데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에서는 아파테이아가 훨씬 더 강조되지요. 성서만 하더라도 본래 그 말뜻은 복음, 곧 기쁜 소식(에반겔리온)이예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어떤 고난으로도 중단될 수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쁜 소식보다는 수난에 더 주목하고 있는 듯해요. 아픔을 겪어서 마음이 단단해져야 하겠다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인 걸로 보여요. "변함없는 것,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 그 바로 나인 것"은 어쩌면 단단해진 뒤에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단하지 않아서 작은 상처에도 움찔 움찔 놀라는 지금 바로 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밀밭파수꾼™ 교수님의 마지막 문장이 저에게는 스스로를 인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다가옵니다.
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제가 힘들어하는 저 자신을 안아주고 다독여 줄 수 있겠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