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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물 게시판! 철학과전공 제주대학교/아시아철학의기초/철학과/2020101238/박재민
박재민 추천 0 조회 238 21.10.31 23:58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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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1.11.27 17:08

    첫댓글 실존철학에서 부조리는 실존적 결단을 재촉하는 장치로 이해됩니다.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아요. 너무 우울해서요. 왜 항상 신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린 다음에 건져내는 것일까 하는 반발심 때문에요. 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에 공감하고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격렬하다는 건, 치열하다는 건,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노자와 장자가 소요유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열렬히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남는 건 그렇게 하고 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나의 "고요"니까요.

  • 작성자 21.11.28 10:43

    교수님 말씀이 이해는 되지만 아직 공감은 되지 않습니다. 전 열렬히 꿈을 갈망합니다. 그로인해 절망하고 절규하며 우울해하죠. 하지만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듯이 제 마음을 다잡고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긍정적인 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성숙해질수있는지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전 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성장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전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새 드는 생각을 적으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붙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라고 전 생각합니다. 제가 좀더 단단해져야겠죠. 그래서 전 보에티우스의 "변함없이 나를 지켜줄수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참 좋습니다.

  • 21.11.29 15:03

    @박재민 긍정적인 것에 대한 종교적 우려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거 같아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대한 엄숙주의적 접근이 살인을 불러온 장미의 이름으로도 이 점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지만 말이죠.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보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가 훨씬 영향력이 큰 데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에서는 아파테이아가 훨씬 더 강조되지요. 성서만 하더라도 본래 그 말뜻은 복음, 곧 기쁜 소식(에반겔리온)이예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어떤 고난으로도 중단될 수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쁜 소식보다는 수난에 더 주목하고 있는 듯해요. 아픔을 겪어서 마음이 단단해져야 하겠다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인 걸로 보여요. "변함없는 것,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 그 바로 나인 것"은 어쩌면 단단해진 뒤에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단하지 않아서 작은 상처에도 움찔 움찔 놀라는 지금 바로 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작성자 21.12.05 08:57

    @호밀밭파수꾼™ 교수님의 마지막 문장이 저에게는 스스로를 인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다가옵니다.
    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제가 힘들어하는 저 자신을 안아주고 다독여 줄 수 있겠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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