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를 걷다 축대 아래로 내려간다.
횟집에 갈 때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며 살펴둔 조개 껍데기들을 확인해보고 싶어서이다.
밝았을 때엔 모란갈파래와 잎파래와 다시마, 그리고 잘피류가 바위 주변에 붙어 사는 것을 확인
했고, 엄청난 수의 별불가사리와 드문드문 보이는 아펠불가사리를 관찰했었다.
전형적인 바위해변의 모습이다.
아까 살펴 둘 때보다 세시간 정도 지났는데 물 높이의 변화가 거의 없다. 동해이긴 동해인가보다.
찾았다. 횟집에서 상에 올라온 조개들의 무덤이다.
모래에서 주로 사는 민들조개라고 하는 것들인데 이 쪽에서는 뭐라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안내원 동무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조개지 뭡네까?" 하며 대답하던 일이 생각난다.
역시 살육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가로등에 비춰보니 거의 대부분의 조개껍질에 구멍이 뚫려있다.
어랍쇼.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조개 껍질에 뚫린 구멍의 위치가 제 멋대로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조개 껍질에 구멍을 뚫은 것들은 육식성 고둥으로, 우리가 흔히 '골뱅이'라
부르는 [큰구슬우렁]이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모래 속을 기어다니다가 조개가 걸려들면 발(? 배?)
로 조개를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고둥은 따로 이가 없으므로 이를
대신할 까끌까끌한 혀(치설-齒舌)로 한 곳을 집중적으로 핥아 구멍을 뚫는다. 구멍 하나를 뚫는
데 12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비교적 조개의 껍질 두께가 가장 얇은 곳을 골라 구멍을 내는데,
그 위치는 대개 아래와 같은 곳을 뚫는 것이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사는 녀석들은 닥치는대로 뚫었다.

고둥들도 [우리 식대로 살자]는 구호에 익숙한 것인가.
포식자의 잔해를 찾아보자.
역시 [구슬우렁]이다.

처음 보는 일이다.
동해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지, 이 쪽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인지 알아볼 일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같은 종의 조개와 고둥인데도 패각이 검은 것들이 자주 눈에 뜨인다.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후 오염된 모래 속에서 변색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난제다.
살펴볼만한 껍질들을 줍다보니 주머니에 가득 찬다.
숙소로 가져가 사진을 찍고 배낭에 넣어가서 공부해봐야겠다.
숙소로 돌아왔다.
해금강호텔은 꽤나 고급스러운 호텔 축에 속한다. 내가 다녀본 호텔 중에 가장 비싼 곳이
1995년에 이틀 밤 묵었던 소공동 롯데호텔인데 그 당시 하룻밤 숙박료가 130,000원이었
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호텔의 수준에 비해 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화장실은 폭압식 화장실이다. 이것도 처음 경험해본다.
대부분의 수세식 화장실과 같이 생겼는데, 용변을 보고 난 후 물을 쏟아부어 밀어내는 게
아니라 용변을 빨아들인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단추를 누르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1초 정도면 깨끗하게 사라져버린다. 적은 양의 물로
수세식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 환경적으로 가치있는 시스템이랄 수 있겠다.
T.V를 켠다.
MBC,KBS,SBS,YTN이 나온다.
그런데 희한하게 CBS도 나온다.
크리스찬들의 힘이 크기는 큰가보다.
북한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반입 금지 물품이 많은데, 그 중에 남한에서 발간한 잡지,
신문,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나비도감과 읽다 만 책 한 권을 배낭에 넣어 왔다.
엑스레이 검색대에서 걸리면 빼놓고 올 생각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그냥 통과 되었던 덕에
나비도감을 꺼내 볼 수 있다.
[상제나비].
이 번 금강산행의 목적은 이 나비 때문이다.
남녘에서는 보기 어려운 나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비.
다음에 죽어서 저 세상에 올라갔는데, 누군가가 "너 상제나비는 보고 죽어온거냐?"라고 물어
볼것만 같은 예쁜 나비.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금강산 산행이 기대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열시가 가까워 오는데 갑자기 식구들이 그립다.
로비로 나와 전화 통화 신청을 한다.
이름과 전화번호, 통화의 종류, 주소, 국적 등을 적어주니 안내원이 직접 전화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내게 수화기를 건네 준다.
지수엄마가 전화를 받는다.
눈물나게 반갑다.
한 달 넘도록 맑은샘 안에서 건재한 감기는 오늘도 안녕하신지, 푸른이는 똥 잘 싸는지, 젖은
아직 나오는지, 지수는 학교에서 별 일 없이 돌아왔는지를 묻고 끊는다.
6달러란다.
젠장......
상대방에서 수화기를 받아 든 순간 부터 시간을 재는 게 아니라, 내가 신청한 번호를 눌러 신호
가 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요금이 부과된다는 해괴한 계산법.
일행들이 로비에 있는 카페에 앉아있다.
나를 부르길래 가 앉았더니 웨이터가 커피부터 가져다 준다.
난 시키지 않았다.
4달러란다.
젠장.......
이 곳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처리 방법이 궁금하다.
웨이터를 불러 물었더니 '잘 모르갔습네다'한다.
누가 아느냐고 물었더니 좀 나이 많고 점잖을 것 같은 사람을 데려온다.
같은 질문을 했더니, '무슨 일 하느냐'고 되물어온다. 이 사람은 남한 사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고, 그저 내 강산 사랑하는 사람인데 궁금해 묻노라 대답한다.
쓰레기는 현대아산에서 소각시설을 따로 만들어 소각한다고 한다.
나는 금강산에서 남측 관광객들로 인해 발생한 쓰레기를 남측으로 가져가 처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대답이 나오기를 바랬는데, 생각 밖에도 북측에서 바로 처리한다고 한다.
왜 우리가 만든 쓰레기를 북녘 땅에서 태워 연기 피울까.
낮에 만났던 무표정한 북한 주민들의 얼굴이 떠올라 또 기분이 가라앉는다.
숙소에 돌아왔다.
주머니에서 조개껍질들을 꺼내 모래를 털어내고 사진을 찍는다. 전날 밤에 잠을 설친 탓에 몹시
피곤하다.
내일 산행 준비를 위해 갈아입을 옷들을 정리해두고 잠자리에 든다.
이미 두 시가 다 되어간다.
몇 명의 사람들이 우리 숙소로 들어온다.
그 사람들 속에 나와 한 방을 써야하는 이가 술에 취한 채 섞여 있다.
남한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끓이고 참치가 들어있는 깡통을 따고 종이팩에 들어있는 소주를 마
신다.
이미 많이 취해있는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옆 방 사람들의 숙면에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
이 사람들의 방은 몇 호지?
거기에 가서 자면 좋겠는데......
한 사람 씩 지쳐 쓰러지기 시작한다.
젠장......
어젯밤에 내 잠을 설치게 만든 코고는 소리는 월드컵 지역 예선이었다.
이 사람은 이러다 아침에 송장 치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게 어마어마한 코를 곤다.
숨을 잠깐 들이마시다 6~7초 쯤 숨을 멈춘다.
그러다 숨통이 트이면 '아음아음'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쉰다.
대단하다.
살다살다 이렇게 코고는 사람은 또 처음 본다.
그런데 그것 뿐이 아니다.
이 사람은 코골다 목에 가래가 걸리면 눈도 뜨지 않고 그대로 내뱉는다.
아, 정말 더럽다.
이 사람 코골기 월드컵에 나가면 결승은 문제 없겠다.
첫댓글 윽~~주무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ㅜ.ㅡ 쪼오기 위에 구멍뚫린 조개..넘 귀여워요 ^^*
바닷물에 시달려 구멍 난줄 알았는데 살았을때 고동이 뚫는군요.. 시리즈 기다립니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어떻게 그런걸 다 알아요?
흐흐..저는 여기에서 명함도 내밀기 어렵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조개이름이 틀린 것 같은데.. 민들조개는 절대 아니고, 개량조개 같기도 하다는...^^;;
상제나비 보고 오셨는지 아주~ 아주.. 궁금합네다... ^^
제가 한발한발 뒤에 따라간느낌입니다... 조개에 구멍이 뚤린거... 사람이 목걸이 만들려고 만든건줄 알았었는데.. 지금껏... 골뱅이가 그랬다니...그리고 그 접대원동무한테 안들키고 사진을 찍으셨나봐요~~ 그런 위함한일은 하시지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이야기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