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 장은 옛날부터 ‘입 아픈 장’이자 ‘허망한 장’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완도의 들머리에 위치한 남창 장은 인근 바다의 해산물과 들판의 곡식들이 몰려드는 집산지였다.
장날마다 많은 장꾼들이 밀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괴기(고기) 이름이 뭐여.” “어찌게 묵냐.” “내장과 껍데기는 어쩌냐.” 일일이 대답할라치면 입이 아파 “워따, 지지고 볶아 멋대로 묵어.”해버린다.
남창 장은 손님이 워낙 많아 ‘골장’(해 지도록 보는 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한때는 아침나절 반짝하고는 오전 11시에 철시했다. 그래서 일찍 문 닫는 ‘허망한 장’이라 했다. 1985년 연륙교가 생긴 이래 완도의 모든 물산이 13번 국도를 타고 전국으로 나가는 바람에 남창 장은 한갓진 곳에서 울고 있는 의붓자식 신세로 밀려났다. 상인들은 타개책으로 손님이 없어도 오후 2시까진 자리를 지키기로 결의한 후 면모는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인근 신흥마을, 안평마을, 북평 땅끝 영전리, 북일면 만수리, 완도 군외면 사람들, 그리고 밤섬 남섬을 비롯하여 모세의 기적이 하루 두 번 일어나는 토도의 사람들까지 이고 들고 끌고 이곳 장으로 모여든다. 어물전에는 전어 병어 숭어 방어 문어 장대 꽃게 낙지 줄서대 등 바닷고기 백화점으로 손색이 없다. 고기 종류는 철 따라 달라진다. 여름철 낙지가 모습을 감추면 오도리가 팔딱거리며 뛰쳐나온다. 뻘떡 게와 화랑 게가 보이는가 하면 몸에 누런 반점이 여러 개 찍혀 있는 ‘목떼기’라 불리는 목탁가오리의 인물도 준수하다.
장바닥에 해물이 풍성하면 상인들의 입도 부지런해진다. “간재미는 신문지로 쓱쓱 문질러 곱(등에 붙어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을 떼어내고 썰면 되지만 목떼기는 펄펄 끓는 물로 튀겨 내야 혀.” 일장 연설이 시작된다.
그러면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갯것전(조개 굴 등을 파는 곳)에서도 할머니 연사가 열을 올린다. “바지락은 그믐사리 때 것이 좋아. 보름사리 바지락은 달빛 아래서 술 한 잔씩 먹었는가 살이 허물허물 혀. 그라고 물 밑에 사는 물 바지락보다야 갯가 뻘에서 사는 참 바지락이 알 색깔이 노랗고 맛이 좋지.” 잠시 돌아 다녔는데도 얻어 들은 상식이 한두 개가 아니다.
남도 여행길에 올라 어젯밤은 진도에서 보내고 서둘러 남창 장에 도착했다. 이곳 시장 사람들의 인심과 입심 구경 좀 하려고 어물전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취재 수첩을 꺼냈다.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 정겨워 아무리 혀를 돌려도 경상도 입은 따라 가지를 못한다. “워따 도시 사람들은 낙자(낙지)와 문애(문어)도 모른당께, 낙자는 그래도 오래 사는디 문애는 금방 디져(죽어)버려.” 해산물의 생김새에 따라 산지를 구별하는 방법과 생선들의 수명까지 훤히 꿰고 있다.
그뿐 아니다. 소라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통이 가늘면서 꽁무니가 긴 비틀이는 외지 사람에게는 쉽게 팔지를 못한다. 회로 먹거나 죽을 끓여 먹어도 맛은 일품인데 살 안에 들어 있는 골(먹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복통이 생기는 노란색 덩이)을 빼내지 않으면 식중독에 걸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취재를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어딧 사람이 뭔 생선을 좋아하는 그건 모르지” 한다. “보성 벌교 쪽은 장대를 알아주고 여수는 민어, 영암은 껄떡(농어), 해남은 숭어, 완도 사람은 돔과 문애를 좋아하지라.” 한 번 풀어내 놓으니 밑도 끝도 없다.
낚시로 잡은 굵직한 감생이(감성돔) 세 마리를 4만원에 샀다. 목을 끊어 피를 뺀 다음 아이스박스에 넣고 강진 방면으로 달리다 보니 도로 변 저수지 옆에 푸른 쉼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날선 칼로 회를 친 다음 술 잔 들고 푸른 하늘을 향해 “건배!”라고 외쳤다. 외박하고 돌아온 누이 얼굴 같은 희멀건 낮달이 빙긋 웃으며 “난 잔이 없어.” 한다.
프랑스 화가 마네가 블론뉴 숲에서 그린 ‘풀밭 위의 식사’가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았다. 그림 속의 벌거벗은 여인은 어딜 가고 없었지만 말이야.
수필가 9hwal@hanmail.net
첫댓글 사진이 읍써서 아쉽네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