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白頭山
한민족의 발상지 백두산은 중, 조 량국의 국경선에 위치한 명산으로써 200만년전에 형성되였다. 수차례 화산 폭발된 력사를 가진 나젊은 휴화산이다.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산.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두만강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조국경선으로 흘러 나중에 일본해로 흘러들어 간다.
총길이는 500.4Km, 연변에서 제일 큰 수계이다.
주요지류는 해란강, 구수하, 가야하가 있다. 민족의 비애를 가득 담은 두만강은 눈물겨운 민족의 고난의 력사를 말해주느라 흙탕물로 변해 버렸는지 모르지만 해해년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용정(龍井)
룡정은 조선민족의 배움의 집이다.
전설에 룡이 우물에서 솟구쳐 하늘로 날아 올랐다하여 그 지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룡정은 연변의 개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룡정땅이 개척되기 시작한 년대는 19세기 후반기인 동치(同治), 광서(光緖)년간이였다. 한때는 룡정은 연변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반제반봉건투쟁의 책원지로 이름이 났었다. 더우기 우리 민족의 문화와 교육의 요람으로 "간도의 서울"로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룡정은 슬기로운 겨례의 & #45332;이 슴배인 자랑스러운 땅이라고 일컸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곳에 전이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개 세 부류로 나뉠수 있는바 북쪽으로 목단강, 녕안 등 지에서 온 녀진인, 서쪽으로 산동, 하북성, 료녕성, 길림성 등지에서 온 한인들, 남쪽으로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이 였다.
력사적 및 지리적인 인소로하여 룡정땅에 조선인들이 제일 일찍이 전이해왔고 또한 인수가 제일 많다.
룡정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의 마을이 이루어진 때는 1877년 봄, 이때로부터 이곳을 륙도구로 불리웠다.
청산리 전투
반일무장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구에서 일본침략군에게 타격을 준 전투이다.
일제의 경신년토벌이 시작되자 반일무장부대는 침략군의 예봉을 파하면서 전이하다가 1920년 10월 21일~26일에 청산리지구에서 적과 대결하였다. 반일무장부대는 영활한 전술로 백운평, 천수평, 완류구, 어랑촌 등 지방의 싸움에서 적들에게 무리죽을 안겼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의 침략 기염을 크게 꺽어 놓았고 인민들의 반일 투쟁을 더욱 고무하였다. 이전투의 주요령도자는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다.
봉오동전투
조선족반일무장부대가 연변에 쳐들어 온 일본침갹군을 본때잇게 소멸한 첫번째 큰 전투, 일제는 1920년 6월 7일에 반일무장을 소멸하기 위하여 라님 19사단의 야스가와 안천소좌를 우두머리로 한 한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일 무장부대의 근거지의 하나인 봉오동(지금의 도문시 신농공사)를 진공하게 하였다.
유리한 지령에 매복하여 적ㅇ르 대기하고 있던 반일부대는 적의 적후병과 전초병을 지나게 한 다음 적 주력이 매복권내에 들어왔을 때 일시에 사격하여 900여명을 소멸하엿다. 이 전투의 승리는 연변지구의 반일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주요 영도자는 최진동, 홍범도, 안무 등 장군이다.
정각사
정각사 정문
정각사는 돈화에 있다.
중국에서 최대의 불교사원이자 세계최대의 니중도장(尼& #20247;導場). 현임 정각사 주지는 석불성대사(釋佛性大師).
여승으로서 본명은 관숙민(& #20851;淑民), 만족, 본관은 돈화시 관지, 1925년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출생. 1945년에 집을 떠나 불교에 입문.
1975년에 미국 뉴옥에 정착, 돈화시 인민정부의 물심량면의 협력과 지지하에 정각사를 지었다.
선경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화룡시덕화진 경내 도문강 상유에 위치해있다.선경대는 산,수목,샘,소수민족풍속의 융합로서 면적은 32㎢ 이고 해발은 920m이며 일찍부터 "천하제일선경"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선경대는"웅,기,험,수,미"의 특색으로 기봉,괴석,고송,산꽃,운해,해돋이를 묘사한 한폭의 시흥을 담은 단청화와 같다.
선경대는 화강암지경관을 위주로 "가로 보면 령이 봉우리로 보이고 먼것과 가까운것의 높낮이가 서로 같지않다"는 기묘하고 아름답고 웅위로운 기상을 부각하고 있다.
그중에 선경대, 고려봉, 낙타봉, 미경봉, 금거부기봉, 독수봉, 북두칠성불교유적, 장사동 등이 있다.
방천
러시아 하산과 북한을 연결하는 두만강 철교,저 멀리 지평선 넘어에 동해가 보인다.
방천은 3국의 국경이 만나는 3각 지점이다.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중국,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으로 두만강의 하류지점이고 이곳에서는 저 멀리 동해가 바라 보인다.방천에서 북한의 청진, 라진, 웅기, 그리고 부산까지 매우 가까우며, 일본의 니이가다항구까지도 800km밖에 안된다.
방천은 중국에서 러시아, 북한동해안, 일본 서해안 및 북아메리카, 북구라파까지 가는 제일 가까운 곳이다.
만천성
만천성은 연변 왕청현경 내의 가야하중류에 위치해있으 며 왕청진과 30km, 연길시와 48km 떨어져있다. 만천성은 만태성수력발전소의 땜을 건설하면서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였다.
이 관광명소는 동서길이가 10.5킬로미터, 남북길이가 5.4키로미터, 총면적은 56.7평방키로미터에 달한다. 그중 굴곡이 심한 호수의 길이는 18.7킬로미터에 달하고 호수면의 면적은10.49평방키로미터에 달한다.
호수면의 가장 넓은 곳은 2.118미터이고 가장 좁은 곳은 100미터이다. 평균수심은 16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37미터에 달하며 뽀트놀이에 유리하다. 2001년에 국가에서는 를 국가 만천성을 AA급관광명소로 지정하였다.
비암산 정자에 오르면 동서로 이어진 해란강과 용정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정자 옆에는 일송정(一松亭) 작은 소나무가 있다.
룡정에서 서쪽방향으로 약 3㎞쯤되는 산등성이에 올라 다시 남쪽으로 굽어 들면 우뚝 솟은 비암산이 있다. 이 비암산 코숭이에는 10여m되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억세게 자란 소나무가 있다.
1938년 전에 자란 그 소나무는 흡사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불렀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북간도 출생. 1941년 연희전문 졸업 및 1943년 일본 동지사대 영문과 수학. 중학 재학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 한 적은 없음. 초기시에서는 화해로운 유년세계에서 자족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습작기 동시에서 드러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이후 자기자신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자아 응시가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순수 동경의 세계와 현실의 갈등관계로 분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