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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장영봉대표님제공]
*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쁜 이유*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대한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의 전설적인
실화이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미군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 역 건너편 산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 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 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면서는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 달라."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쑤근댔다. 하지만 개의치않았고 온 맘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 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세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
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 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장군을 기리는 동상
하나가 없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 아니 부산대학교에도 메리놀병원에도 물론 없다.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고.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 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
그리고 정부는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기쁜 날이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 박선영 교수의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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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12월 말이면 떠오르는 명작 단편소설.
어느 同友가 보낸 따스한 이야기, 최청평 옮김
「우동 한그릇」(一杯のかけそば)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1988년 발표한 단편소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일본의 우동집들은 일년중 가장 바쁩니다.
삿포로에 있는 우동집 <북해정>도
이 날은 아침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 날은 일 년중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밤이 깊어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습니다.
그러더니 10시가 지나자 손님도 뜸해졌습니다.
무뚝뚝한 성격의
우동집 주인 아저씨는 입을 꾹 다문채
주방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는 달리
상냥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인여자는,
"이제 두 시간도 안되어 새해가 시작되겠구나,
정말 바쁜 한 해였어."하고
혼잣말을 하며 밖에 세워둔 간판을 거두기 위해
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출입문이 드르륵~,하고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습니다.
여섯 살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애들은
새로 산 듯한 옷을 입고 있었고,
여자는 낡고 오래 된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주인 여자는 늘 그런 것처럼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 머뭇 말했습니다.
"저…우동…
1인분만 시켜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 늦은 저녁에 우동 한 그릇 때문에
주인 내외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주인 아주머니는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네... 자~, 이 쪽으로..."
난로 바로 옆의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주방 안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갑작스런 주문을 받은 주인 아저씨는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놀라서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곧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우동 1인분!"
그는 아내 모르게 1인분에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서 삶았습니다.
그는 세 사람의 행색을 보고
우동을 한 그릇밖에 시킬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 우동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가득 담긴 우동을 식탁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며 오순도순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계산대 있는 곳까지 들려왔습니다.
"국물이 따뜻하고 맛있네요."
형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습니다.
"엄마도 잡수세요."
동생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 가닥 집어서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비록 한 그릇의 우동이지만
세 식구는 맛있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윽고 다 먹고 난 뒤
150엔(한화 약 1,500원)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사사람에게
주인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를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후,
새해를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날들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시
12월 31일 섣달 그믐날을 맞이했습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10시가 지나
가게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주인 여자는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 무늬의 반코트를 본 순간,
일년 전 섣달 그믐날
문 닫기 직전에 와서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갔던
그 손님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여자는 그 날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말했습니다.
"저…우동…1인분입니다만…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주인 여자는
작년과 같이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주방 안에서,
역시 세 사람을 알아 본 주인 아저씨는
"네엣! 우동 1인분!"
그러고 나서
막 꺼버린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주인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저 여보,
그냥 공짜로 3인분의 우동을 만들어 줍시다."
그 말에 남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돼요.
그렇게 하면 도리어 부담스러워서
다신 우리 집에 오지 못할 거요."
그러면서 남편은
지난해처럼 둥근 우동 하나 반을 더 넣어 삶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매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인정도 없으려니 했는데
이렇게 좋은 면이 있었구려."
남편은 들은 척도 않고 입을 다문 채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아
세 사람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싸고
도란도란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주방 안의 두 부부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맛있어요…"
동생이
우동 가락을 우물거리고 씹으며 말했습니다.
"올해에도 이 가게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동생의 먹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형이 말했습니다.
"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주인 내외는
순식간에 비워진 우동 그릇과
대견스러운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번에도,
우동값을 내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주인 내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말은,
그날 내내 되풀이한 인사였지만
주인 내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크고
따뜻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북해정>의 주인 내외는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밤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0시가 지나자
벽에 붙어 있던 메뉴를
차례차례 뒤집었습니다.
금년 여름부터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가
150엔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번 식탁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졌습니다.
이윽고 10시 반이 되자,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두 아들,
그 세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습니다.
두 형제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아이들의 엄마는 여전히 색이 바랜
체크 무늬 반코트 차림이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저…우동…2인분인데도…괜찮겠죠?"
"넷!…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
세 사람을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주인 여자는
거기에 놓여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주방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2인분이요!"
그 말을 받아
주방 안에서 이미 국물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우동 2인분, 금방 나갑니다!".
그는 끓는 국물에
이번에는 우동 세 덩어리를 던져 넣었습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어느 해보다도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방해될까봐
조용히 주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인 내외는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서로에게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세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시로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들에게
엄마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킨 사고로
여덟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일부는 보험금으로 보상해 줄 수 있었지만
보상비가 모자라 그만큼 빚을 얻어 지불하고
매월 그 빚을 나누어 갚아왔단다."
"네…알고 있어요."
"그 빚은
내년 3월이 되어야 다 갚을 수 있는데,
실은 오늘 전부 갚았단다"
"네? 정말이에요 엄마?"
두 형제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래, 그 동안 형 시로도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 배달을 열심히 해 주었고,
동생 쥰이는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 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단다.
그것으로 나머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형!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제가 계속할 거예요."
"저도 신문 배달을 계속할래요!
쥰아, 우리 힘을 내자!"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걸 보며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지금 비로소 얘긴데요,
쥰이하고 제가 엄마한테 숨긴 게 있어요.
그 것은요… 지난 11월에,
학교에서 쥰이 수업을 참관하러 오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리고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작문대회에 나가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에 그 작문을 쥰이 읽기로 했다고요,"
"그래…그랬었구나…그래서?…"
"선생님께서 작문 시간에,
'나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쓰게 했는데
쥰은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냈대요.
지금 그 작문을 읽어 드리려고 해요.
사실 전 처음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는,
여기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쥰이의 작문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자, 지금부터 읽어드릴게요."
시로도는 교복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 두었던
종이 두 장을 꺼내어 펼쳤습니다.
쥰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시로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낭랑하게 우동 가게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아빠는
운전사고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위해
보험금으로도 부족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고,
형은 날마다 조간과 석간 신문을 배달해서
돈을 벌었다.
아직 어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엄마와 형은 나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나는
저녁이면 시장을 봐서
밥을 해놓는 일을 했다.
내가 해 놓은 밥을
엄마와 형이 맛있게 먹는 걸 볼 때
나는 행복하다.
나도 우리 식구를 위해 작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엄마의 겨울 코트는 낡고 해어졌지만
해마다 꿰매어 입으셔야 했다.
그러던 중에
재작년 12월 31일 밤에
우연히 한 우동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우동 국물의 냄새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의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우리에게 우동을 사 주시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이 반갑고 고마웠지만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가게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망설이다가
딱 한 그릇만 시켜서
셋이서 같이 먹자고 엄마한테 말했다.
한 그릇이라도
우리에게 우동을 먹이고 싶었던 엄마와,
우동 국물 냄새에 마음이 끌린 우리 형제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을 시간에 들어와
우동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는
우리가 귀찮을 텐 데도
주인 내외분은
친절하고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주인 내외는
양도 많고 따뜻한 우동을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러고나서는 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하며
큰소리로 말해주는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그 후 작년 섣달 그믐날에도 그
우동 가게를 찾아갔다.
여전히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우동은 한 그릇밖에 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날도 마찬가지로
주인 내외분은 친절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인사도 여전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힘들어 보이는 손님에게
"힘내세요! 행복하세요!" 하는 말 대신
그 마음을 진심으로 담고 있는
"고맙습니다!"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일본 최고의 우동 가게 주인이 되겠다고..."
주방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인내외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이 동생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사이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 장의 수건을 서로 잡아당기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해마다 12월 31일 섣달 그믐날이면 밤마다 이들 모자가
우동을 먹으려고 올 것이라는 기다림 속에
<북해정>은 입소문까지 널리 퍼져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해
12월 31일 밤 10시 30분이 지났을 무렵에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습니다.
코트를 손에 든
양복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의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공교롭게 만원이라 빈자리가 없어서~"라며
여주인이 거절하려고 했을 때...
기모노 차림의 부인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
두 청년 사이에 섰습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십 수년간 기다림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 젖히고,
그 옛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금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내년 4월부터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토의 은행에 다니고 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삶 가운데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 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뜨거운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손님 중에 한 사람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큰 소리로,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뭐하고 있어요?
10여 년 넘게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밤의 2번 <예약석>이잖아요,
빨리 안내해요~, 안내를!"
손님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잘 오셨어요... 자 어서요...
여보! 2번 테이블 우동 3인분!"
늘 무뚝뚝한 얼굴로
주방에서 눈물을 적시던 주인은,
"네엣! 우동 3인분!"하며
더욱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10여 년을 기다렸던 손님을,
예기치 않게 맞았기에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거센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에 비친
<북해정> 이라고 쓰인 옥호막(屋呼幕)이
한 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칼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1988년 구리 료헤이(栗良平/1954년 북해도 출생)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은
당시 일본열도를 눈물로 강타하며
국회회의장에서까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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