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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정사 석굴법당의 본존불(아미타불) 정토종 근본 경전의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ῑ-vyūha-sūtra〉에 따르면, 오랜 옛날 법장이라는 비구가 48개의 서원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18번째 서원에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건설한 정토에 태어나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지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법장은 자신의 서원을 모두 이룬 뒤 아미타불로서 '극락'(極樂 Sukhāvatῑ)이라는 서방 정토를 주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조하는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서암정사의 느와집
함양 마천면에서 오도재를 넘어가는 산 중턱에다 무얼 만드는지? 어찌보면 불상 같기도 하고.자연을 인간이 망치면 고스란히 돌려 받는데... 우짜던지 세계최고라꼬 칼라꼬..ㅎㅎ 내 생각에는 불두가 맞는것 같아요.만약에 저것이 불두라면 세계에서 단일 화강암에 선 최고의 불상이 될깁미더~
노래하는 스님 심진 스님의 고담사가 있는곳이다. 비바람에 너무나 많이 망가져 버렸다.
다음날 보면 쑤~욱 나왔다고 쑥이라 카던데, 맞나?...ㅎㅎ
달마대사 달마(達磨) 달마는 중국 선종(禪宗)의 개조로 일컬어지는.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28 년경 사망)를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달마는 남인도 지방 출신의 승려로 6 세기 초에 중국으로 건너와 각지에서 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에 대한 전설은 무척 많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달마가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펼치자 당시 중국의 지배자 양무제가 두려워한 나머지 달마를 처형했다. 그 무렵 양나라 사신이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느 고개를 넘다가 달마를 만났다.사신은 놀라며 물었다."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 달마가 답하기를,"나는 이제 서천(서방극락)으로 가노라"고 했다. 그리고 작대기에 짚신 하나 메고 고개를 계속 넘는 것이었다. 사신은 양무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양무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형해서 묻어 버린 달마가 다시 살아나다니! 그래서 무덤을 파보니 거기에는 작대기 하나와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두고 삶과 죽음이 본래 없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달마의 생애는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이 많다.유명한 전설로 그가 낙양 동쪽 숭산(崇山)의 소림사에서 벽을 보고 9 년 동안 좌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이른바 면벽구년(面壁九年)의 전설인데, 그 동안에 달마의 손발이 썩어 버리기도 했다는 전설도 있다. 한편 그의 이름, 그러니까 보리달마에서 보리는 범어 보디(bodhi)를 음역한 것이다. 미혹을 끊어버리고 얻은 지혜 또는 열반을 뜻하는 말이다.한편 달마는 범어의 달마 (또는 다르마dharma) 를 음역한 것인데, 보통 법(法)이라는 말로 번역하곤 한다.이 번역이 달마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번역인지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마는 인간의 행위를 보전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행위 규범, 사회적 의무, 종교적 의무, 사물의 도리, 진리, 속성, 사건, 사태 등 무척 다양한 함축을 지니는 말이다. 그것을 모두 법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그러나 한역 불경에서는 달마가 예외없이 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불경 내용의 문맥에 따라서 무척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인 것이 분명하다.여하튼, 다양한 전설과 함께 신비에 싸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탓에, 달마의 각별한 법력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일종의 기복 신앙마저 유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달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어두면 운이 좋아진다는 '믿거나말거나'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달마도를 걸어 놓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아주 그럴 듯한 사례까지 그런 믿음을 거들고 나선다. 달마도가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하는 셈이고, 달마가 수호신 역할을 하는 셈이다.그런 믿음 자체를 놓고 타박할 생각은 없다. 달마 또는 달마도가 아니더라도 그런 종류의 믿음은 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굳게 믿지는 않더라도 집에 달마도 한 폭 걸어두어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느냐는 가벼운 마음에서 걸어두는 분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그런 종류의 믿음과 보리달마 또는 그냥 불교 일반과는 '사실상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들이 점복(占卜)을 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 역시 불교와는 상관이 없음은 물론이다.
바람처럼 물처럼 그렇게 살자.걸림없이...
산수유 열매가 달려 있는데 벌써 꽃이 피고 있다네. 뭔 조화람? 가을에 완전히 익은 열매를 채취하여 씨를 빼고 건조시킨다. 성분은 주로 타르타르산·말산·당분·수지 등 여러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간과 신장의 경락에 작용하며, 성질은 약간 따뜻하며 독이 없다. 산수유는 보익간신(補益肝腎)·삽정(澁精)·염한(斂汗) 등의 효능이 있어 간신부족(肝腎不足)으로 정액이 저절로 나오는 증상에 쓴다. 간신허(肝腎虛)로서 빈뇨(頻尿)·야뇨·어지럼증·이명(耳鳴)·요슬산통(腰膝酸痛:허리와 무릎이 시리고 아픈 증상)이 있는 경우에 쓰며 신양허(腎陽虛)로 인한 음위(陰痿:발기불능)나 조루 등에도 사용한다. 또 간신부족(肝腎不足)으로 인한 고혈압에도 쓴다. 기혈(氣血)이 모두 허(虛)하여 생기는 자궁출혈, 월경과다에도 쓰이는데 이때는 지혈약(止血藥)을 배합해야 효과가 있다. 망양(亡陽:급성·만성의 허탈상태)으로 땀이 멎지 않을 때도 효과가 있다. 자한(自汗:수면·노동·기후 등에 관계없이 낮에 나는 땀으로 대개 기허에 기인함)에는 황기(黃芪·인삼 등의 익기약(益氣藥)을 배합한다. 도한(盜汗:수면중에 나는 땀으로 대개 陰虛에 기인함)에는 당귀(當歸)·숙지황(熟地黃)·목단피(牧丹皮)·백작약(白芍藥) 등의 자양보혈약이 배합된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피어 오르는 한 줄기 연기가 우리가 살던 옛날의 추억을 새삼스럽게 떠 올리게 하네...ㅎㅎ
반가사유상
원래 이 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조각에 나타나며, 불좌상의 양협시상에서 점차단독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는 5세기 후반 윈강[雲岡] 석굴에서 이미 나타나지만 6세기 후반 북제시대에 가장 성행했으며, 명문을 통해 주로 태자사유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하고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나타날 미륵불이 지금 미륵보살로서 태자사유형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상이며, 신라에서는 화랑을 미륵과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彌勒菩薩半跏像)이라고 불렀다.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당시의 신앙경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비롯하여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아스카[飛鳥] 시대와 하쿠호[白鳳] 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고우류 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이나 당시 삼국과 일본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의 오리지널 포대화상님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이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었다. 또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렸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라는 게송을 남기고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대화상이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임을 알아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는 포대화상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메고 다녔던 그의 행적 때문인 듯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과 함께 기복적인 이유에 의해 포대화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이 많이 제작되고 있는데 중국적인 영향이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몇 점의 포대화상도가 전하는데 본래 선종화의 하나로 그려졌던 것이며 현대에 만들어지는 중국적인 포대화상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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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고담사를 한 번 가 본다는 것이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如如하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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