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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이야기 - 우이동 인수봉 귀바위.
우이동(牛耳洞) 지명은
인수봉 귀바위에서 유래.
'소의 귀' = 인수봉 귀바위.
도선사 광장에서부터
30/40분 도보거리.,하루재
'인수봉 귀바위' 전망대이다.
우이동에서 이 고개를 넘어
땔감을 해서 마을로 돌아오면
'하루가 걸린다.'고 하여.,"하루재"
한성백제
초기 도읍지
'우이동' 일대.
'신설동~우이역' 경전철을 탑승 후
우이역 ~ 도선사 광장~ 하루재 정상.
백운대길 관문이자 인수봉 귀바위 전망대.
'우이동 인수봉 귀바위'는
북한산국립공원의 상징이자
북한산 국립공원 중심에 위치.
우이령(牛耳嶺)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잇는 고개마루.
소의 귀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소귀고개[쇠귀고개],
우이령(牛耳嶺) 지명이 생겼다.
우이동은 초기 백제 궁궐 옛터가
기원 전부터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
즉, 한성백제 초기 역사는 이곳에서부터 시작.
.
원래, 우이(牛耳)는
‘천하(天下)의 패권'
요새지라는 뜻말이다.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겨룰 때
월 구천을 누른 오 부차는 황지 모임(黃池會)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물로 '소의 귀'를 잘라 올렸다.
.
하늘에 제를 올라고나서
전쟁터로 출정하기에 앞서
용사들 사기를 돋는 음식이
곧, 오늘날 '소머리국밥'이다.
전쟁터에서 적의 수급을 베어오는 것을 대신해
적의 귀를 베어온 숫자만큼 공로로 인정해., 포상.
승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무덤을 만들기도 한다.
.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우이(牛耳 : 소의 귀)
우이령 북쪽은 도봉산, 우이령 남쪽은 북한산.
우이령은 삼국시대부터 전술 전략적 군사요충지.
우이동에서 바라본.,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현재,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5%를 찾이한 면적.
북한산 주봉 3봉이 삼각을 이루고 있어.,삼각산.
그외 95% 면적 대부분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
조선시대부터 군사보호지역.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삼각산 지역 만.,사대부 출입을 허용.
하여, 옛 성현들의 문헌 속에서는.,삼각산.
고려 성종(재위 : 981~997) 이후
1900년대까지는.,"삼각산(三角山)".
한산은 삼국시대로 접어들며
그 입지적인 중요성이 부각되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장.
백제가 약 500년간 점령했고
고구려가 약 100년간 점령했고.
그후, 신라 25대 진흥왕이 점령했다.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
.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이 침략을 하자
태조 왕건의 관을 북한산성으로 옮긴뒤 성을 증축.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 격전장이었던 북한산성.
1388년(우왕5년) 고려 말에 최영장군이
중흥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
그후, '고려 말~ 조선 중기' 지명.,중흥성(中興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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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 대대적으로 축성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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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 "북한"은 대외비 북한산성 성안 지명.
남한산성을 축조한 성안 "남한"에 대칭해 명명된 지명.
숙종 때 "북한"은 산성으로 애워싼 피난도성 개념의 지명.
산의 개념이 아닌
산성의 개념으로
불리운 지명.,북한.'
숙종은 북한산성 12성문 요소마다
143 상량(초소)에 승병을 배치했다.
북한산성 내 승병수비대.,13개 사찰.
....산성 내 13 승영사찰...
태고사 : 화약, 경판 보관소.
중흥사 : 조선 8도 승병 지휘소.
노적사 : 중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서암사 : 수구산성 일대 수비 및 관리
국녕사 : 가사당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원각사 : 승병 모집, 양성 및 훈련소,
부왕사 : 부왕동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광사 : 소동문(대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국사 : 보국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용암사 : 승병 모집, 양성 및 훈련소
상운사 : 북문 일대 수비 및 산성 관리.
원효암 : 북한산성에서 '북 &서' 파수대
봉성암 : 북한산성에서 '남 & 동' 파수대
두 암자는 산성 밖까지 멀리 보이는 위치.
원효암에서는 구파발까지 한눈에 보이고
봉성암 천해대에서는 도성 안이 한눈에 보인다.
구파발 파발대, 도성 수비대와 연계된 파수대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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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영조' 때
북한지 기준으로.,복원.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소나무숲길
20구간 조선왕실 묘역길
'1~20' 조선왕조.,'역사의 길'
회룡사(回龍寺)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북쪽
도봉산.사패산 연봉(蓮峰)에 위치.
.
회룡사 석굴암
.........회룡사(回龍寺)............
1384년(우왕 10) 무학(無學) 중창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하는 곳.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해 기도하였다.
이때 태조는 이곳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
그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절을 짓고 이성계의 영달을 축원하였다.
그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가
이곳 무학을 찾아와 명명한.,회룡사
1403년(태종 3) 태조가 끈질긴
함흥차사 노력으로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곳 무학을 찾아왔기에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이곳 사찰 아름을 회룡사라 하였다 전한다.
........................................................
회룡사
도봉산 회룡골
도봉산 연봉 아래.,망월사
...............망월사(望月寺)...............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에 위치.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말사.
639년(선덕여왕 8)에 해호(海浩)가 창건하였다.
선덕여왕은 해호를 존경하여
측근에 머물게 하고자 하였으나,
해호는 사양하고 이 산중 암자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일과였다.
당시 해호가 머물렀던 동대(東臺)
옛 산성 이름이 망월성(望月城)이라
산성 이름을 따서 망월사라고 하였다.
신라 말 경순왕의 태자가
이곳에 은거했다고 전한다.
....................................
방학동., 왕실묘역길.
조선 개국과 밀접한 동네.
.....방학동(放鶴洞 ) 유래....
도봉산과 북한산 사이에 위치.
조선왕실 초기의 묘역이 있는 동네
조선 개국과 밀접한 역사가 담긴 곳
..............................................
.
방학동 동네 지명에는
몇 가지 유래가 전한다.
조선시대 어느 왕이 도봉 서원 터를
정하려고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이 노는 모습을 보고 ‘방학’이라 명명.
학이 알을 품는 것 같다 하여.,‘방학’
곡식을 찧는 방아가 있는 곳.,‘방아골’
우리 말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방학리(放鶴里)로 고쳤다."고 전한다.
풍수지리 상으로는
도봉산의 산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서
내려오다 다시 되돌아
암회리(岩回里)라 했다.
일제 강점기
학이 날아가는
지세로 본 풍수가.
그의 조언에 따라
‘방학’이라고.,작명.
.
도봉서원
도봉산 선인봉.,바위길(41 루트).
도봉산 우이암 아래.,원통사.
“원통(圓通)”이란 말은
‘관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 없다’ 뜻말.
'원통' 이름 사찰 대개
부처님보다는 관음보살을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있다.
.............우이암 원통사...............
조선 영조 때 영의정 조현명, 서명균.
태조 이성계 기도처였던 석굴이 있으며,
약사전 아래 큰 바위에는 태조가 기도를
마치던 날 천상의 상공(相公)[정승]이 되어
옥항상제 배알 꿈을 꾼후 남긴.,'상공암' 각자.
절뒤 우이암은 관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형상.
원래 "관음봉" 이라 불리웠다.
......................................
주변 산세를 살펴보면 호랑이·
코끼리·학 등 동물 모습 바위들이
우이암을 향해 머리 조아리는 형상.
불자들은 우이암 일대를
'관음 성지'로.,믿고 있다.
우이암.,티롤리안 브릿지
우이동에 위치한 우이암.
우이암에서 본.,마들평야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방학로에서 본.,북한산 인수봉 귀바위.
인수봉 의대길 정상.,귀바위
인수봉 의대길 정상에서 본.,노원구(옛 마들평야)
인수봉 귀바위 등반
우이동 인수봉 귀바위.,정상
......노원구......
북한산. 도봉산과
수락산·불암산 사이에
한강 연안 중랑천변 위치
고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
이 일대에서 토기 등의 유물 발견
인근 양주 일대에서도 고인돌 발견
기원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 병합
삼국 중 하나 백제국으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처음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도읍 후에
송파구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남위례성은 송파구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대
하북위례성은 노원구 일대.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후
475년 고구려 남하로 수도를
공주 이전 전까지 한성을 지배
한성백제의 역사는 약 480년 간.
전략적으로 중요한 한강 유역.
삼국시대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 한성을 공격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이곳을 장악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
고구려는 노원구 일대를
약 80여 년 동안 다스렸다.
수락산 서남쪽 상계동 보루(堡壘)
불암산 성터 등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
...............................................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
노원구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
(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
.............북한산주.............
신라는 551년(진흥왕 12) 백제와
공동 작전으로 고구려 10군을 탈취
553년(진흥왕 14) 연합 작전을 통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완전히 점령
신라는 ‘새로운 주’
의미의 신주를 설치
4년후 557년(진흥왕 18)
신주 폐하고 북한산주 설치.
.....................................
지금 구로구 지역은
한주(漢州)의 장제군(長堤郡)
장제군은 고구려 주부토군(主夫吐郡)
......필자 주,,,,,
백제 초기 인천은
현재 구로구 일대 포함.
현재 인천광역시 북구
율진군 곡양현(穀壤縣)은
1995년 구로구에서 금천구 신설
이속한 시흥동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구로구 오류동 동부제강 서울제강소
서쪽 120번지 일대.,옛날 주막거리 마을
경인선 철도 개통 전까지 '서울~인천' 왕래
그 중간지점 오류동은 숙박 여행객 주막거리.
일제 때 주막거리와
옛 오류역인 오류동
87번지 일대 부근이
서울시 남서부 지역
생활권 중심지였다.
..........................
568년(진흥왕 29) 10월
북한산주 폐하고 남천주 설치
604년(진평왕 26)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신라 신문왕 때 지방 행정 체제를
재편하면서 한산주로 바뀌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는 한주로 변경.
삼국시대 북한산주는
오늘날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유역의 북쪽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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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 - 왕실묘역길
방학동 은행나무(수령 830년)
...........조선왕실 묘역길.........
북한산 둘레길 20코스 왕실묘역길.
성종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왕된
'연산군의 묘역과 세종대왕의 둘째딸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정의공주 묘역.
'문종'의 여동생이고
수양대군(세조) 누나.
도봉산 자락 방학동은
조선 개국초 역사자료인
'조선왕실 묘역'이 있는 곳.
아울러, 조선 개국 초
약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 원당샘이 있는 곳이다.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30년.,방학동 은행나무은
'파평윤씨 집장촌'의 역사를 대변,
연산군묘재실 등이 있는 왕실묘역길
짧지만, 조선시대 역사문화가 담긴 길.
조선 개국 초 비화가 많은., 왕실묘역길
.....................................................
도봉구 방학동
복원된 '원당샘'.
...........원당(元堂)샘..............
원당샘은 ‘피양 우물’이라 불리었다.
6·25 전쟁 이후 물이 잘 나오지 않자
1979년 주민들이 우물을 가꾸고 관리
약 600여 년 전부터
파평윤씨 집단거주지
............................
.
이곳 방학동 왕실묘역 조성 시기는
대략 15세기 중반 이후로 파악되며,
조성 배경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당시
도봉산의 풍수지리설이.,중요한 요인.
도성의 내맥이라는
도봉산에 대한 인식
조성 과정에서 보이는
왕실 구성원 간의 관계
의정궁주 조씨나
성비 원주원씨 경우
후사가 없었음에도 각각
임영대군과 오산군이 제사.
또한 연산군 경우에도
부인 신씨가 임영대군의
외손녀였기에.,묘가 이장.
...........임영대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네째 아들
둘째 형 수양대군 처럼 무술이 능했다.
궁녀와 대궐의 하녀들과의 성추문으로
물의, 그러나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 지지.
예종 때 정승 귀성군
이준의 아버지이며
영의정 신승선의 장인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
단경왕후 아버지 신수근은
임영대군의 외손자이었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즉위.
황보인, 김종서 등이
국정을 장악하려 할 때
크게 불만을 나타내었다.
이후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둘째형 수양대군을 편들었다.
수양대군 세조 즉위에 일조하였다.
세조 반정을 지지한 덕에 임영대군은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더불어 왕실 수장.
예종 원년 1469년 1월 21일
향년 50세에 유훈을남겼다..
첫째 왕자 간 분쟁하지 말 것
둘째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슬하에 9남 2녀가 있는데
그중 임영대군 아들 구성군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며 승승장구
도리어 정희왕후에게 숙청당하여 유배
......................................,,,,,,,,,,,
패주 연산군은
조선왕실 수장이던
임영대군의 음덕으로
처가 묘역에 묻히었다.
외손녀 사위 연산군과
외증손녀 사위 중종은
임영대군의 종증손으로,
둘째 형 세조의 증손이자
의경세자 손자이기도 하다.
연산군 폐비 신씨는
중모현주 친손녀이자
그 증외손녀 단경왕후는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단경왕후는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처가라는
이유로 폐출 당한다.
..........
..........
조선왕실 대부분 묘역이
친가나 처가묘역 인근에 위치
가문 중시 전통시대 모습을 반영
특히, 죽산안씨와 연관된 회산군 묘역과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이 이를 대변한다.
죽산 안씨 가문은 회산군 처가
안맹담의 가문으로, 각 묘역이
서로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것.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역산(曆算)에 능하였다.
..............정의공주..............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주면서
민간에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려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공주(∼1477)는 세종 즉위전 출생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빠 문종(文宗)이 1414년(태종 14) 출생
동생 세조(世祖)가 1417년(태종 17)에 출생.
'1415년(태종 15)~1416년(태종 16)' 출생한듯.
정의공주는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후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안맹담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협조
성록대부(成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 1등에 책록.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정의공주는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또한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년(성종 8)에 사망했다.
....................................................
조선 태종의.,'마지막 후궁'.
'의정궁주' 본관은 한양(漢陽).
한양 조씨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하였으며, 그 아들
조휘(趙暉)는 몽고에 투항한 뒤에
쌍성총관(雙城摠管)에 임명되었다.
손자 조돈은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을 도우면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조돈 아들 조인옥(趙仁沃)은
의정궁주 조씨의 할아버지로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개국
공신 1등이며 시호는 충정(忠靖).
아버지 조뢰(趙賚)는
경기 감사, 평안도 관찰출척사,
지돈녕부사 등 역임.,시호 절효(節孝).
선조들이 대대로 함경도 지역에
살면서 이성계 가문과 밀접한 관계
조휘 딸은 도조 이춘(李椿)의 둘째 부인
조인옥의 형 조인벽(趙仁璧)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사위., 이성계와는 인척 관계.
..........의정궁주(義貞宮主).............
공민왕 때 판도판서 조돈(趙暾) 증손녀
조선건국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趙仁沃)
손녀로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뇌(趙賚)의 딸.
1422년(세종 4년) 2월 28일 소헌왕후가
가례색(간택)을 통해 '조뇌, 장수, 신기'의
여식들을 태상왕 후궁으로 들이길 청했는데,
태상왕이 "내가 늙었으니 하고싶지 않다." 거부.
하지만 재차 간택하길 청하여
조뇌(趙賚) 딸을 들이기로 결정
이내 주저하며 맞아들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던 태종은
1422년 5월에 승하한다.
상중에 조뇌가
세종에게 고하길,
"여식이 혼례를 올리진 않았지만
택일하여 입궁 명이 내려져 있었으니
도리상 당연히 성복해야 합니다" 상고
이에 태종을 모시지도 않은 조씨를
궁에 들여 궁주의 태종의 빈소에 성복
궁주의 예를 들여 궁에 들이지만 세종은
조씨가 정식 가례색을 통해 입궁하였지만
빈보다 아래인 잉첩으로 궁주 작위를 내린다.
그후 의정궁주는
남편없는 혼인 후
홀로 지내다 1454년
단종 2년 2월 7일 운명.
..............................
우이령길 등산로는
1968년 '1. 21.사태' 당시에
"청와대 까부시러 왔수다." - 김신조 -
북한 무장간첩 31명 침투 이후.
민간인 출입금지 작전도로 지정.
그후, 2009년 7월에 41년만에 개방.
군부대가 요소마다
지금도 철통같이 감시.
............우이령길...................
북한산 둘레길 21코스., 우이령길.
우이령에 붙은 '령'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넘어갈 때 산능성 고갯길
중에서 격이 높은 고갯길에 붙는 이름.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과 같이
백두대간에서나 볼 수 있는 고개 이름.
'경기도 양주 ~서울' 우이령(거리 6.8km)
숱한 역사가 지나간 우이령.
조선 중기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공물을 바쳐야 했던.,통한의 길.
승유억불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드나들 수 없었던
승려들이 몰래 지나가던 길.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일명 김신조 사건' 이후부터
41년간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
우이령길의 생태계가
자연 그대로 보전되면서
일명 '서울의 비무장지대'
2009년 시민에게 개방하면서
명품 생태 탐방로로 거듭났다.
........................................
본디 송추유원지는
도봉산 오봉산 자락
기암괴석 휘돌아 내리는
계곡 맑고 시원한 물이 일품.
송추유원지
.
주변 일영유원지,
장흥관광지, 행원도예,
송암사, 석굴암이 있다.
파라다이스수영장,
로얄수영장, 송추낚시터
및 인근 농원에서 딸기, 배,
복숭아, 포도 등을 맛볼 수 있어
주말에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
704번 버스 송추 입구 하차.
.................
.................
포천~이동~동두천~
의정부~송추~장흥~벽제.
국내 최대 갈비 음식접 거리
.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소 갈비
음식점들이 즐비.
소 한마리를 百여 부위로
정밀하게 탈골 분해하는데
약, '1시간 ~1 시간 반'.,소요.
.....고려시대 백정......
백정(白丁)은 국가에서
역을 부과하는 대신 토지 지급.
이들은 주·부·군·현의 일반지역이나
향·부곡·진(津)·역 등 특수지역 거주 .
국가에 대해 조세·공부·역역을 부담.
백정은 과거급제 예(例)는 거의 없다.
다만 선군제에 의해서 특별히 선발될 때
무관 중에서 상층으로 상승하는 것이 가능.
군인에 결원이 생겼을 때
보충하는 제도가 선군으로
주대상이 백정(白丁)이었다.
.....................................
옛부터
힘 쓰고
칼 잘쓰는
용맹스러운
무사들의 고장.
우이동
(牛耳洞).
우이령길
'신설동 ~ 우이' 경전철 노선도
일제강점기
우이동., 국회의원 김두한 & 우미관 사단
어린이 김두한
하야시
종로경찰서 마루오카 경부
신마적 엄동욱
동대문사단 임화수
시라소니 이성순
시라소니 가족사진
시라소니 아들.
1919, 3.1 독립운동 집회
우이동 봉황각鳳凰閣)
...............봉황각..................
대한제국시대 서울시 유형문화재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것
국권을 찾기 위한 천도교 지도자 훈련소.
'의창수도원' 봉황각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 시에 ‘봉황’
낱말을 딴것, 현판 필체 오세창 작.
손병희 선생은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
지도자들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봉황각을 건축했다.
1919년 3·1운동 구상도 이곳에서 했으며,
이곳을 거쳐간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
봉황각과 부속 건물에 당시 유물이 남아있고
이곳 앞 50m 지점에 손병희 선생 묘소가 있다.
...............................................................
우이동 솔밭공원
백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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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壽峰의 雲海.
한성백제(漢城百濟)
'초기 도읍지'의.,聖地.
한산 부아악(漢山 負兒岳).
우이동
(牛耳洞)은
삼국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이자
전술 전략적 요충지.
삼국시대 한강유역 마들평야와
남양주 별내 불암산성(佛巖山城),
불암산성은 고구려가 축조하였고
신라의 한강유역 소규모 전초기지.
.......불암산성(佛巖山城)..........
서울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있는 불암산 남쪽에 있는 산성.
성이 위치는 불암산 주봉(507m)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상 제2봉(420.3m)
정상부에서는 중랑구 일대가 조망되지만
북쪽방향은 불암산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다.
성(城)은 평탄한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자연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평면 형태는
부등변(不等邊)의 5각형이나 원형(圓形)
성둘레 236m, 면적 5321.8m2.
성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졌고
서벽과 동벽 일부 구간에서는
10단 이상이 잔존한 양호한 모습
인근 아차산 보루군과는
축성기법에서 차이가 있다.
벽석은 세로가 긴 편이고,
면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후
줄을 맞춰 수직에 가깝게 축성.
뒷채움 돌은 길쭉한 돌을
길이 방향으로 놓아 면석이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하였다.
문 터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등산로가 형성된 부분
정상부 북동쪽 아랫단에는
원형 석축구조물 우물이 있다.
성내 헬기장 북동쪽에는
집수시설(集水施設)로 추정
직경 8m 원형 함몰부가 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곳과
경사면 일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류(無紋土器類)와
삼국시대~통일신라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암산성은 아직 시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 성격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이나 입지(立地)나
축성기법(築城技法), 성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신라가 한강방어를 위해 축성한듯.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불암산성' 축성 이전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주거유적이나
간단한 방어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암산성은 비록 규모는 작고
성벽 중 훼손된 범위가 적지 않으나
삼국시대 석축(石築) 산성(山城)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고대 교통로와 삼국의 영역 확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
이므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한다.
...............................................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북한강 뱃길 방어를 위해서
초기 한성백제에서 축성한듯.
그 이전까지는
마한(馬韓) 영역.
단군조선.,삼한
삼한시대.,변천 과정
.............마한(馬韓).........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한강(漢江) 유역으로부터 충청·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의 통칭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54 소국(小國) 명칭이 열기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 하였다.
3세기 전반 마한 맹주는 목지국(目支國)
《삼국지》에는 月支國)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집단.,견해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란 주장도 있다.
실제 마한 소국 중에는 백제처럼
북방계 유이민 정착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갖춘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
마한 경상도 초기 철기시대
(세형동검문화) 유물에 비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볼 때,
마한 소국 대부분은 기원전 3, 2세기
이래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
다수 정치집단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
기원전 2세기 이미 대외적으로 통일
한(漢)과 원거리 통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결속 기반은 아직까지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복속 관계나
마한 연맹체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듯.
다만, 충남지역 중심으로
정치 집단들이 결속되어
마한 주도세력으로 역활
마한 소국 연맹체의 토대.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
이는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삼국지》 동이전 진한조(辰韓條)에서,
진(秦)의 유망민에게 동쪽 영역을 분할해
주었다는 기록에 나오는 마한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마한왕의 실체는 이 단계
세력 구심체와 직접적인 계승 관계에 있었던듯.
.
세형동검문화단계에서된
마한 소국 간 결속 관계는
기원전 1세기 이후 전개되는
정치·문화적 변동 속에서
그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위씨조선(衛氏朝鮮) 유민의
남주와 한군현(漢郡縣) 설치로
철기문화의 본격적인 확산,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역 중심체의 대두
등으로 인해 마한 중심의
청동기 교역권은 약화되고,
마한지역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위축된 듯.
이후 3세기 전반,
위(魏)나라가 낙랑·
대방군을 접수하고
한족(韓族)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전개
목지국진왕 중심의
마한 소국 연맹체는
대군현 교섭에서 가장
우세한 세력 집단 기능.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
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목지국의
진왕(辰王)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는
삼국지 기록으로 볼 때,
진왕의 지위는 무력으로 획득,
유지된 것이 아니라 소국 신지들의
선출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인듯 싶다.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 기록,
진왕이 진·변한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중국 군현에 가까운 소국들이
보다 먼 남부 소국 집단들에 대하여
행사한 영도권으로도 해석이 된다.
한편, 목지국 진왕을
백제의 왕으로 해석하여,
목지국 위치를 인천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온조집단의 한강 유역
이주를 계기로 마한 소국
연맹체 내부의 세력 판도 변화
백제국은 초기에는
마한 연맹체 구성원
마한왕에게 신록(神鹿)을 보내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는 등 맹주국에
대한 우대의 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위 소국들을 병합
3세기 중반 이후에는 세력 범위를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남까지 확대
목지국진왕 조직체를 약화시키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백제국 중심의
소국 연맹체는 마한 주도세력
3세기 중반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여
태수(太守) 궁준(弓遵)을 죽이고
3세기 후반 진(晉) 본국에
마한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
대외적으로 전개되는 정치·경제
교섭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 세력권에
포함되지 않은 남부 지역의
마한 소국들도 비록 세력권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4세기 후반
백제근초고왕에 의하여 병합되기까지,
종래 기반을 토대로 독자 세력권을 유지.
.
3세기 말, 신미국(新彌國)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 20개의
마한 소국들이 독자적 조직체 형성
중국 진(晉)나라와 통교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백제가 마한 전역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지역은
한강 유역 백제국과 더불어 각 지역별,
시대 별로 몇몇 토착세력권이 병존한듯.
......................................................
'마한왕조의 별궁이자 피난도성'
달궁의 영역은 어디까지 였을까?
달궁은 인월에 위치한 '달의 궁전'월궁(月宮).
달궁은 도로 개설 전까지.,긴 협곡 속 첩첩산중.
인월은 '달을 잡아당기는 곳'이란 뜻말 지명이다.
...서산대사 황령암기..
"월궁(月宮)의 좌우에는
황령(黃嶺)치, 정령(鄭嶺)치
두 고개에는 성곽이 쌓여 있다."
"옛날 한나라 소제(BC 87~74년) 즉위 3년에,
마한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리를 피해 쌓은 도성.
두 장수를 시켜 공사를 감독했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고개 이름을 짓고,
72년간 도성을 보호했던.,황령치, 정령치.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당나라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황령치 고개마루 지명을 따서 황령암이라 했다."
............................중략..............................
달궁은 BC 350년 마한이 별궁을 짓고
왕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용성지』에 의하면 진한의 내습을 막고자
정령치와 황령재에 성을 쌓아 71년간 지킨 기록.
연합군에 쫓긴 마한의 효왕.
지리산 월궁에서의 마지막 항전.
월궁을 애워싼 능선에 성벽을 쌓는다.
마한은 피란 도성인 월궁 궁전에서 패망.
원래 달궁은 달의 궁전이라는 의미였으나
지금은 궁이 나온다는 의미로., 달궁(達宮)
.....................
.....................
서울 노원구 곡창 마들평야는
해마다 100섬의 볍씨를 뿌리던 곳.
오늘날,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일대
상계동은 조선시대 2 역참이 있던 곳
말을 들판에 풀어 놓아 길러.,마들평야.
삼국시대 이전부터의 지명이 '마들평야'.
이곳 마들평야로 흐르는 중량천은
일년 4게절 내내 가뭄을 모르는 곳.
중량천 상류에 해당되는 곳이.,우이동.
..........중랑천............
양주시 산북동에서 발원
의정부 지나 서울 도봉구·
성북구·동대문구와 노원구·
중랑구·광진구·성동구., 경계.
발원지에서부터 합류 지점까지
대체로 협곡부를 관통하는 형상
노원구에서는 마들평야를 이루었고,
중랑구· 동대문구 일대에서는.,장안평.
이들 지역은 모두 중랑천 충적지
한성 동교의 채소 재배지로 중요.
성수동 뚝섬은 전체가 자연 제방.
장안평과 뚝섬은 중랑천 충적지
홍수때 한강이 중랑천 따라 역류
이때 발생한 범람도 이들 지형의
형성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
수락산~불암산~용마산~아차산
산줄기는 중랑천의 동쪽 분수계
오늘날,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
서쪽으로 청계천이 중랑천의 지류
한성 동쪽은 모두 중랑천의 유역권.
................... 필자 주................
'불암산성~용마산성 ~아차산성'은
초기 한성백제가 축성한듯 여겨진다.
북한산성과 연게한., 강북 한성 방어진.
아울러, 한성백제의 한강유역 방어진지.
한성백제가 고구려에게 쫓길때까지 사용.
북한산성은 한성백제 이전엔., 마한 영역.
북한산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패한
근초고왕은 아차산성까지 도주하다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한강변에서 전사.
그로부터, 한성백제 480년 역사는 마감.
고구려의 장수왕
재위 때 고구려 영역.
아차산성은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역을
탈환하기 위해 590년(영양왕 1년)
출정했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
삼국시대 3국 간
한강유역 장악을 위한
치열한 격전장.,아차산성.
..........아차산성(아단성)............
사적 제234호. 테뫼식.,말굽형 산성
규모가 크며 성 안에 작은 계곡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침략에 대비
축조된 백제의 '아단성'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기능은 백제 왕성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방어하는 시설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한강 북안 지형조건을 이용
한강 상류와 하류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여
왕성으로 연락해주는 진성이었다.
475년 고구려군에게
백제 왕성이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잡혀죽은 이 산성 밑.
그리고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실지회복을 위해 출정해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한 곳이다.
하여, 아차산성은
삼국 항쟁기에 각별한
방어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
'용마산 ~아차산' 등산코스
화랑대역~중랑캠핑숲~구릉산~
망우산~용마산~아차산~광나루역.
.............아차산............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295.7m)은 야트막한 산
고구려 유적 보고(寶庫)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 전망이 일품.
조선시대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
망우리 공동묘지, 용마봉 등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백제도읍이
한강 유역에 있을 때
우뚝 솟은 지형특성으로
아차산에 흙을 깎고 다시
돌과 흙으로 산성을 축조해
고구려 남하를 막은 한성백제
아차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남쪽 풍납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운명을 좌우하던 곳.
아차산은
아단성(阿旦城),
아차성(蛾嵯城),
장하성, 광장성
등으로 불리웠고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장기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
..........
삼국시대
중랑천 상류
우이동 지역을
점령하는 나라가
한산(漢山)의 주인.
한성백제가 그랬고
고구려 장수왕 이후에
신라 진흥왕이 그러했다.
곡창지대 마들평야가
비축 군량미를 제공하고
군마 및 역마를 제공한 때문.
조선시대 최대 영역.
조선시대
우이동에는
역참이 두 곳.
또한 '송추~ 우이동'우이령길
일대는 군사주둔지로서 최적지
송추 장흥 일대는., '소 가축' 산지.
예나 지금이나 소갈비 음식점 즐비.
조선시대 우이동 및 장흥 일대는
무관 명장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장흥은 임진왜란 명장 권율장군을 배출.
권율장군은 이항복의 장인.
이항복 역시 장흥 출신이며
병조판서 5차례 역임한 명재상
우이동., 인수봉 '귀바위'
(투구를 쓴.,勇士의 形相).
우이동 인수봉 귀바위
BC 18년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함께 올랐다는 한산 부아악.
당시 한산(漢山 : 서울)을
'한성백제'의 도읍지로서
장악한 것으로 해석이 된다.
만약, 한산 부아악일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3인은 인수봉 최초 등정자.
과연, 그 아득한 옛날 옛적에
인수봉을 오를 수가 있었을까?
고려 예종 원년(1106) 삼각산에.,두 차례 지진
조선 선조 30년(1597) 삼각산에.,한 차례 지진.
그후 현재 모습으로 유지하게 되었다는 삼각산.
북한산 석양 운무
인수봉 일출 운무
북한산 석양
BC 18년 ~1106년 사이에도
몇 차례 지진이 있었을듯 싶다.
전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에는
오를 수 있었을듯 추정된다.
'인수봉 둘레길 설교벽능선 아래
'좌측 사기막골 & 우측 설교벽 계곡'.
집채만한 바위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
지진이 발생할때마다 그 소산물일까?
오랜 세월 풍화작용이 빚은 흔적일까?
인수봉 둘레길을 돌다보면 으시시하다.
'언제 어디서
낙석이 발생할까?'
암릉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바위덩어리들은
언제 굴러 떨어질지 모른다.
가파른 벽에 부딪쳐
산사조각 난 낙석들이
파편처럼 깔려있는 곳은
낙석이 진행중인 위험구역.
헬멧을 항상 쓰고 다니지만
가파른 벽을 올려다 보게된다.
인수봉 둘레길 경관은 환타스틱.
인수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민둥한 화강암덩어리 같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서면 千의 얼굴.
기상천외한 형상의
바위벽마다 독특한
암릉미를 뽐내는듯..
인수릿지
만약, 소서노가
인수봉을 올랐다면
인수릿지로 올랐을듯..
인수봉에서 가장 오르기 쉬운 루트.
그러나, 악천후에서는 가장 힘든 길,
Z기류 출몰땐 한여름에도 눈보라 우박.
눈이 오면 발걸음마다 빙판길
바위길이 빙벽 폭포수로 돌변.
중도 탈출이 가장 어려운 루트.
설교벽능선 야영장.
'인수릿지 &설교벽'에서
악천후에 중도 탈출로는
이곳 10평 남짓 야영장 뿐.
이곳에서 자일을 걸고
비상 탈출을 해야 한다.
1993년 진달래꽃 필 무렵
필자는 이곳에서 우박과
눈보라를 만나.,비상탈출.
진달래꽃이 흰눈이 뒤덮이자
설교벽능선은 온통 백색 세계
사방 바위벽은 온통 빙벽 폭포.
서묵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온 후
불과, 30분 만에 천둥 번개 우박 눈보라
Z기류가 빚어낸 악천후 속 기상이변이었다.
진달래꽃이 필 만큼
따듯하던 봄의 날씨가
순식간에 혹한으로 돌변.
.
바위벽마다 빙벽으로 돌변
눈얼음 폭포수 속을 헤메며
온몸이 흠뻑 젖은채 겨우 탈출.
비상탈출 하강할때
아래서 위로 소용돌이
돌풍이 무섭게 몰아쳤다.
마침, 등반대장이 배낭에 넣어둔
트램폰(12발 아이젠 빙벽용)이 있어
설교벽 비상탈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비상탈출 직후
속옷까지 흠뻑 젖어버린
처녀 클라이머들은 기진맥진.
극적으로 탈출한 후
긴장이 풀린 탓일까?
온몸 동상이 염려될 정도여서
인수야영장으로 달려가 텐트에서
젖은 속옷부터 벗어 말려야만 했다.
인수봉 둘레길에서의
기상이변은 변화무쌍.
특히, 해뜰 무렵 '운해 운무'와
해질무렵 석양 운해는 장관이다.
아울러, 인수봉 둘레길 설경은 비경.
북한산.,일몰 & 운해
일출
인수봉.,의대길 궁형길
인수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밋밋 하지만, 막상 올라보면
울퉁불퉁한 곳이 의외로 많다.
.
인수봉 하늘길.
인수봉 새벽길
인수봉 새벽길
'약 1천년 전 흔적일까?'
'약 2천년 전의 흔적일까?'
'그보다 오래 전 흔적일까?'
"小西奴(소서노)는
韓山(한산)에 이르러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에 올랐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
BC 18년, 비류는 미추홀에
거점을 두고 비류백제 창건.
같은 해,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 거점.,'온조백제' 창건.
.
인천 앞바다 대이작도.,부아산(負兒岳 :159m)
이곳 봉수대는 연변봉수(해안가 및 도서)이며
봉수가 5개일 만큼 한반도 최고 요충지 중 한곳.
봉수는 조선시대(한양 ~ 조정).,군사용 신호체계
인천광역시 중앙에 위치한 미추홀구(彌鄒忽區)
미추홀은 현재 인천광역시 일부를 일컫는 지명.
'부아산', '미추홀'은 한성백제 시대 유래된 지명.
기원전 소서노 일행은
고구려에서 남하할 때
어떤 경로를 이용한걸까?
한성백제 흔적을 찾아서
한성백제에 관련된 묻혀진 역사는
무려 2천년 넘는 세월이 지나간 후에야
그 실체를 땅속에서부터 드러내보이고 있다.
구슬이 3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닐까?
몽촌토성
풍납토성
방이고분군
석촌고분군
한성백제 역사는
아직 정확한 사실이
다 밝혀진 건 아니지만.,
.....위례성........
백제 첫 도읍지는
한강 이북.,위례성.
이후 백제는 한강 이남까지
도읍을 확장해서 이전하면서
이때 한강 이북은.,'하북 위례성',
한강 이남은 '하남위례성'으로 명명
백제의 최초 왕성인 하북위례성
위치는 삼각산 동쪽, 세검정 일대,
또는 중량천 일대 등으로 추정한다.
그중에 중량천 일대가 가장 유력.
이는 대구 달성, 경주 반월성 같은
초기 왕성들이 하천을 낀 구릉지에
축조된 입지조건과 부합되기 때문.
한편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강동구 몽촌토성으로 추정.
그 이유는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의 중심거점인
구릉지 토성이라는 점과
인근에 고분군이 있기 때문.
몽촌토성은 한성 말기의
백제 왕성이 토축성이라는
기록과 부합되는 면이 있다.
몽촌토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축조
8,000~만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성 안은 남북도로와 동서도로 도로망이
바둑판 모양의 직교식 형태를 띠고 있다.
몽촌토성은 도로설계에 의해
조직적인 배열을 가지고 축조.
성안에 궁실·누각·대사도 있었고
집회소로 이용되었던 광장도 존재.
.
아울러 남당(南堂)과 같은
정청도 있었을듯 추정된다.
한편 위례성 안에
종묘와 사직도 설치
했다는 견해가 있지만,
고구려 경우에 비춰볼 때
왕성 밖에 있었으리라 추정.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집단이
남으로 내려와 건국한 근거지 위례성.
“하남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이전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는
북한산 동쪽 산기슭이나, 세검동·
평창동 또는 상계동· 중랑천 방면
.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천도한
도읍지가 하남위례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BC 6년(온조왕 13)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일.
몽촌토성은
남북 길이 750m,
동서 길이 500m,
전체 둘레 2,285m,
넓이 약 44만㎡.
몽촌토성은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역사서인 《주서(周書)》에서는
“백제는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하여
오곡·잡과와 채소 및 술·약품 등이 많이 난다.”
《수서(隋書)》에서도
“백제는 오곡과 소·돼지·닭
등이 많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중국 사서 기록을 보면
토양이 척박하고 산이 험했던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가
농경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는 농경 사회였으므로
백제도 토지가 경제 중심을 차지
신분층으로는 '지배층 평민층 천인'
지배층은 정복 지역의 토지를 수여받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여 점차 대토지를 소유
농민들도 개별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4~5세기 무렵 철제 농기구 사용
우경(牛耕) 실시, 저수지 제방 축조.
이는 농업생산력 증대를 가져왔으나
농민계층 사이에서는 분화로 이어졌다.
일부는 자영농민으로 성장,
경전 없는 농민, 남의 밑에서
농사짓는 용작(傭作) 농민 발생.
.
당시 농민은 조세의 원천이었다.
백제 세제는 조(租)·조(調)·역역(力役)
농민은 농사짓고 세금내고 역역에 동원.
역역은 군역과 부역으로 나눠진다.
국가 수호를 위해 징집되는 군역은
3년 원칙으로 잦은 삼국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군역 부역은 괴로운 일이었다.
부역은 국가나 지방에서
노동력이 필요할 때 동원.
백제의 수취 체제 기록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도미열전〉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피난한 도미 부부를 가리켜 백제에서
‘편호소민(編戶小民, 호적에 소민으로 편제되었다는
것으로 경제력이 열약한 백성이라는 의미)’이었다 기록.
《일본서기》〈계체기〉 3년조에는
백제의 왕이 가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백제인에게 “유랑해서 관(貫)에서 끊어진지
3·4세대 되는 자들을 모두 옮겨서 백제의 관에
붙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관(貫)’이라는 호구를 기록한 대장
백제에서 편호제(編戶制, 호구를 편제
국가에서 가구(家口) 규모를 파악한 제도.
무령왕 10년 정월 유식자(游食者)들을
귀농(歸農)시키는 조처를 취하고 있다.
또한 정림사지 5층석탑 명문에 있는 기록.
당이 백제땅에 무릇 5도독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과 구(口)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이는 당나라에 의해 편호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처럼 보이나,
앞서의 사료들을 참고해 본다면,
당에 의해 처음 만들어 진게 아니라
백제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던 방식을
당나라에서 개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백제에서 성을 쌓는 등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은
‘국내인으로 나이 15세 이상’
이들은 2월과 7월의 농한기에 주로 동원.
이와 같이 백제는 국정의 원활한 운영과
삼국 간 전쟁을 위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농업생산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조세와
부역의 부과 및 농업 노동력의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3등호제(고구려에서
가구의 경제적 능력을 상·중·하의 세 단계로
파악했던 것처럼, 사료를 통해 백제에서도
3등호제가 시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편제방식을 통해
백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
그러나 재난을 당하거나 땅을 잃게 되면
백성들은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서 그들은 자연스레
삶의 수단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유망(流亡)이란 농민들이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생존기반을 상실하여
현 주거지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거주지를 이탈하여 옮겨가는 행위이다.
따라서 유민들은
생계수단의 변화를
겪게 될수 밖에 없었다.
이전에 그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면,
유망 후에는 노비나 구걸·도적질 등을 통해
생계수단을 마련하기 십상이었으며, 천인이나
마찬가지로 신분의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국가 간
이동도 빈번하였다.
특히 백제에서 고구려와
신라로 이동한 예가 많았다.
이에 통치자들은 국가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거나, 그해 세금 면제
등의 방법으로 백성의 이탈을 예방했다.
또한 왕은 순무(巡撫)를 통해
백성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농민은 조세와 역역 원천으로
국가의 주요한 재원이었으므로
이들을 파악하고 효율적인 통제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천재지변 등
예기치 않은 이변과 재난을 예방
환란에 대비하는 지방통치 제도정비
등 대민 통제를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
유망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농민들은
전쟁의 공포와 조세와의 전쟁으로
삶이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백제의 도시가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도성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도성은 왕이 사는 궁궐을 포함
제반 시설을 말하는 것으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삼국시대 도성 중심에는
왕궁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관청과 사찰
민가 등이 들어서 있었다.
삼국은 국경요충지 곳곳에 성곽을 쌓았다.
국경뿐 아니라 삼국도읍에도 제각기 축성.
고구려 도읍 집안., 산성자산성,
한성백제의 송파에 있는 남한산성,
신라의 경주 남산성·명활산성·선도산성
등 삼국시대 왕도 주변에 여러 산성 구축
이들은 모두 도읍을 지키는 산성으로서
위급할 때 왕이 피신을 가서 항전하는 곳
삼국시대 성곽은 촌락을 포함한 일정 공간
따라서 성은 삼국 시대 지방 통치의 중심지.
.
먼저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리토성은
타원형 둘레 4km, 토축은 약 8m 정도.
초기 백제시대 성인데 제방처럼 보인다.
................풍납토성................
송파구 풍납동 초기 백제시대 성곽.
북벽과 동벽 700~800m는 1974년에 복원
동벽과 남벽 1km는 토성 형태만 남아 있다.
한강따라 서벽 1.7km는 1925년 대홍수로 붕괴.
현재 4km 가량 전체 성벽 중 2.3km만 남아 있다.
1966년의 발굴 조사로 백제주거지였음이 확인
1997년에도 아파트 신축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
3~4세기경의 초기 백제 시대의 수혈거주지 6~7기
다양한 유구와 다량의 실생활 용품 토기유물이 출토
왕도에는 정치를 하는 지배자뿐만 아니라
노비처럼 노역을 하는 사람, 생필품 수공업자
이를 거래하는 상인을 비롯, 실로 다양한 계층들이
왕도에서 더불어 살며 여러 편의시설이 조성되었다.
....................................................................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현재 2.3㎞ 만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4㎞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나지금이나 한강은 중요한 접경지.
한강을 지배하는 자 천하를 지배한다며
삼국이 치열한 공방전을 하였던 곳이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한강 유역을 발판으로
삼국시대 세력을 확대한다.
한성백제는
온조왕 재위때
한산 도읍지 곳곳에
한강을 끼고 토성 축성.
하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은
백제의 도읍지.
한강 아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쌓아
376년간 한성백제의
한성도읍지를 이어간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3만군이 북한산성 침공,
.
그당시 백제 개로왕은
신라 구원군과 연합해
싸웠으니 불과 7일 만에
연합군 방어전선이 무너져
탈출하다가 붙잡혀 참수당했다.
이때 아차산성 밑에서
붙잡혀 참수당한 개로왕.
그당시 광진구 아차산성은
백제의 한강을 지키는.,요새.
개로왕은 한강 뱃길로
탈출하려다가 실패한듯.
고구려 장수왕 침입때
한성백제는 웅진도읍지와
사비도읍지로 금강 따라 천도.
...남한산성...
신라 문무왕때
남한산 정상에서
햇빛이 가장 길어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이라 했다.
이 산에 성을 쌓으니
남한산성 주장성이다.
산 깊고 물 많은 철옹성.
통일신라시대에
남한산성은 주장성
옛터를 활용하여 축성.
고려시대 한강 아래 하남(河南)은
광주(廣州)로 불리는 넓고 큰 고을.
몽골 침입때도 강화도와 광주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거점이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광주부로 승격
경기도 이름 전에는 양광도라 하였다.
한양도성 밖 양주와 한강 아래 광주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며 중심지였다.
광주부는 광주 유수부(留守府)라 하여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직할시 같은 곳
북쪽에 개성,서쪽에 강화,동쪽에 광주,
남쪽에 수원에 유수부를 각각 두었다.
.................................................
본디,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온조왕 재위
(BC18~28)때 축성한 산성.
온조(溫祚)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에 토대를 둔
한성백제 왕실의 시조.
한성백제 석촌동 고분군
한성백제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한성백제 고분군
석촌동 백제고분군
석촌동 백제고분군
석촌동 백제고분군
방이동 백제고분군
방이동 백제고분군
............백제...........
BC18년 ~ 660년 존속.
백제 역사 678년 동안에
한성은 493년 간 도읍지.
.
백제 건국 중심세력은
북에서 내려온 부여계·
고구려계 이주민집단들.
건국신화에 따르면
BC 18년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자신의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에 백제 건국.
백제는 북방 낙랑·말갈 세력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남쪽 마한지역 진출로 세력팽창.
4세기 중반에는
전라남도 해안 일대와
황해도 지역 등을 영역으로
삼으며 백제 전성기를 누렸다.
4세기말부터
대외팽창은 침체
무령왕 때 국력 회복
성왕 때 사비로 천도
부흥을 모색했다.
그러나 나당연합군
공격을 받고 660년 멸망
그후 3년간 치열한 저항운동
663년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
서산.,마애 삼존불상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친
일본 아스카 시대의 문화를 말한다.
.......아스카 문화............
지금의 나라 현에 해당되는
아스카에 도읍을 둔 데에서
아스카 시대란 명칭이 유래.
쇼토쿠(聖德) 태자 섭정 정치로 대변되는
이 시대는 조정의 중앙집권성이 강화되고,
관료제 확립과 관위제 제정, 유교사상 영향
하에 성립된 헌법 17조 등., 정치사적인 전개.
천황 칭호가 쓰이기 시작한 때.
아스카 문화는 중앙집권에 대한
지향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외척
소가 씨(蘇我氏)의 비호 아래 추진된
불교 도입 등 대륙문화 기반으로 구축.
한반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강하며,
이전 고분 대신 새 권력의 상징으로
불교사원 건축에 그 결과가 담겨 있다.
아스카의 법륭사(法隆寺) 및 그 본존,
나니와(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 등
이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물과 미술품이다.
한편 고구려를 경유해서
중국 북위의 조각 양식이,
신라와 백제를 경유해서
남조의 조각 양식이 전래.
미술품에 그치지 않고
백제 승려 관륵(觀勒)에
의한 천문지리서 보급,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의
종이와 먹의 제조법 전수 등
여러 방면에서 한반도 및 중국
대륙문화를 흡수한 점이 특징이다.
..............................................
대륙백제설 영역
백제시대에서 전성기는
제13대 왕(재위 346~375년).
근초고왕(비류왕의 둘째 아들)
4세기 중반 백제 부흥을 이끌었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
아직기, 왕인 등을 왜에 보내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했다.
4세기 중반 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
책계왕과 분서왕이 갑자기 피살된 이후
비류왕 즉위 후에도 내분은 계속되었다.
당시 백제의 지배층은
개루-고이-책계-분서 세력과
초구-구수-비류 세력 간 알력다툼
비류왕이 죽은뒤 개루-고이계
계왕이 즉위했지만 2년 후 운명
비류왕 차남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의 계승은
평화적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근초고왕은 즉위 후, 왕권 강화
...........근초고왕..........
‘초고왕계’를 계승한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근(近)’ 자를
덧붙여 왕명에서부터 밝힘으로써
왕권의 계통을 확실히 하려고 했다.
이는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집권화를 꾀한 것이다.
왕권이 미치지 못했던 지방을
직접통치를 위해 구역을 나누고,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근초고왕은
내부조직 정비후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남쪽 영산강 유역 중심으로
백제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전라도 지역 전체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했다.
하지만 당시의 통합은
공납을 받는 수준이었다.
현지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
그대신에 공납을 받은 것이다.
5세기 들어 이 지역에
대형 옹관묘가 조성되고,
그 안에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을 부장할 만한 지배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 유추.
근초고왕은
소백산맥 너머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백제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한 까닭은
왜와의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364년(근초고왕 19) 백제 사신 3명이
왜와의 통교를 위해 파견됐지만
해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2년 뒤
왜에서 사신이 찾아오자
근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 보물창고를 열어
진귀한 물건을 보여 줬다.
왜 사신들의
교역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결국 근초고왕은
왜와 독점 교역권 확보.
백제는
남으로는 왜국과의 무역을,
북으로는 북진 정책을 통한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따라서
남하정책 고구려와 충돌이 불가피.
369년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에서
처음 맞붙은 백제와 고구려와의 갈등은
371년 평양성 전투로 최고조에 이른다.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 공격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했다.
이제 역사상 최대 영역을 확보한 백제.
낙랑군과 대방군 옛땅에서 주도권 장악
그들이 독점한 동아시아 국제교역도 제패.
........................................................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을 올라
첫 도읍을 정했다는
'韓山(한산) 부아악.'
소서노(召西奴)
(BC 66 ~ BC 6)
소서노는 대대로 동북아
해상무역상 가문에서 성장.
그녀 역시 압록강 수계를
오가면서 낙랑 옥계와 무역.
낙랑군과 마한의 절충지대
황해도 남단에 터전을 마련.
그곳을 근거로 서해연안과
내륙 수로를 오가며 한반도
중남부 지역까지 해상무역
범위를 확대하여.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미추홀에 비류백제 창건.
남편 주몽이 동명왕으로 등극 후
前부인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자
48세에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한성백제 창업
그 이후 소서노는
왜(현재:일본)까지
3국을 창업했다는
야사도 전해온다.
"서로는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 건너 고구려에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 건너 왜(일본)에 접한다."
- 구당서 백제전 백제 영역 기록 -
.
본디, 인간이 접근 어려운 聖域..부아악
한산(韓山)은 백제 최초의 도읍지.,서울.
부아악(負兒岳)은 인수봉의 옛 지명이다.
BC 57년 10월 주몽(22세)은
고구려 동명성왕으로., 등극.
만약 주몽에게 왕후 소서노가
없었다면 고구려도 없었던 것.
주몽은 황후 소서노의 두 아들을
자식처럼 대했으나 길지는 않았다.
소서노 나이가 44세에 이르렀을 때
주몽은 활기찬 36세였기 때문이었다.
그후 4년이 지나 주몽은 40세 장년이나
소서노는 48세 노령 문턱을 넘고 있었다.
왕후 소서노가 큰아들
비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주몽에게 수차례 간청했으나
주몽은 쾌히 승낙하질 않았다.
그러던 차에
주몽의 전처 예씨와
친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은 동부여로부터 전처와 아들 유리가 오자
이미 작정한듯 그들을 왕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서노를 소후(제2부인)으로 강등한 것.
이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날 결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새 천하 개척을 결심한다.
....신채호 作.,조선 상고사....
소서노 나이 48세로 두 아들,
10여 명 심복과 그들의 가솔들.
소서노 보족 계루부 백성이 따랐다.
BC19년 9월
장남 비류가 30세,
차남 온조가 25세였다.
정든 고향 졸본을 등지고
남하하여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러 옛 대방의 땅에
궁궐 터를 잡고 백제를 건국.
백제는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制海)’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마한 변한 진한 등
지역을 합한 나라'라는 뜻으로
비류와 온조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으로., 분립하여 건국.
통설로., 비류는
건국에 실패하고,
온조의 한성백제 번성.
농학자 김성호 박사의 저서
‘비류백제’설에 따르면 비류는
국가경영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서해를 지배, 남쪽 마한 땅을 점거.
온조백제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성백제는 소서노가
실권을 쥐고 여왕으로 군림.
이것은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도
소서노가 죽은 해라는 온조왕 13년이
그녀 왕권이 비로서 온조에게 계승된 해.
.....................................................
해뜰 무렵, 하루재 넘어
파도치듯 밀려오는.,雲霧.
구름 바다 속에 반쯤 잠긴
북한산은 多島海 같이 변모.
이때 인수봉은
'두 아이를 등에 업은
'어머니의 모습'.,負兒岳.
인수봉이 어머니 산세라면
백운대는., '두 아들의 산세'
1145년 삼국사기 옛 문헌 속
북한산의 명칭.,漢山 負兒岳
북한산은 '한강 북쪽에 위치한
큰 산'이란 뜻이 담겨있는 이름.
조선 숙종 때
'남한산성'과
대칭되는 곳에
축성했던 산성이
오늘날 북한(산성).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유래된 지명.,北漢(山城)
北漢산성은 하남 위례성
수호를 위한.,北方 토성.
백제 개루왕 5년(132)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한편
북방 진출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한성백제'가 최초로 쌓았던.,토성.
'정릉 보국문 ~ 대동문' 구간을 걷다보면
아직도 백제시대의 토성 흔적을 볼 수 있다.
우마차도 다닐만큼 넓은., 漢城百濟 토성 흔적.
한성백제.,토성 흔적
용암사지
그 중간에 북한산대피소(용암사지)
조선 숙종때 절터였다는.,'용암사지'
본디,'통일신라 ~ 고려'시대 사찰 터.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한성백제 최초의 행궁 터.
이곳에서부터 축성했으리라.
.......조선시대 용암사.....
현재 북한산대피소 위치가
조선시대 숙종때 용암사 터.
'병풍암능선 날머리' 용암봉
그곳 용머리바위 아래에 위치.
용암봉 옆에 위치한.,일출봉(日出峰)
일출봉 옆에 위치한., 월출봉(月出峰)
월출봉 위에 위치한.,기룡봉(起龍峰)
기룡봉 곁에 위치한.,반룡봉(盤龍峰)
조선시대 숙종 때
용암사는 승병 훈련장.
신라 화랑을 길러내듯
강도 높은 체력단련과
조선시대 정예군을 뛰어
넘을 만큼 무공 단련을 통해
엄선된 8도 승병들을 북한산성
내 13사찰에 산성 수비대로 배치.
그후, 조선시대 북한산성
내 13사찰에 상주한.,승병.
조선 '숙종~영조'때 정예군은
십팔기로 단련된 무예 고수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자주국방 필요성을 깨달은 조선.
북한산성 축성 후
북한산성 행궁에서
죽음을 무릎쓸 각오로
결사항전을 각오한 숙종.
................................
서울은 조선 개국 초, 한양천도 후.
조선시대 도읍지로는 잘 알려졌지만
본디, 한양은 한성백제 480년 도읍지.
漢江 河南의 漢城百濟 흔적은 몽산토성.
현재, 올림픽공원 몽산토성은 백제유물.
한성백제 漢江 河南은.,오늘날, "강남"이고
한성백제 漢江 河北은.,오늘날, "강북"에 해당.
'강북 수도권'의 중심부.,북한산국립공원.
수도권 시민들에게 북한산은.,마음의 고향.
북한산국립공원 면적은 78.54㎢
1984년 4월 2일 국립공원으로 지정.
북한산(백운대 : 836m)은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서울., 도봉구,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 지역에 걸쳐있어
수도권 시민들의 심신수련장으로 각광 받는 국립공원.
북한산에서는 108과 692종류 관속식물이 조사되고,
북한산의 자연식생은 온대낙엽활열수림대에 속하고
식물구계지리적 분포에 의하면 온대아구계에 속한다.
주요 식물상은 목본식물로
신갈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 당단풍·
단풍나무 등이 있으며 초본식물로는
노랑제피꽃· 금붓꽃· 애기붓꽃· 복수초·
고란초·꽃창포· 쥐방울덩굴 등이 분포,
조류는 13목 38과 110종이 관찰된다.
텃새가 38종, 여름철새가 38종,
나그네새 14종, 겨울철새가 20종.
북한산은 참새가 우점종,
그 다음으로 붉은머리오목눈이,
까치, 박새, 멧비둘기, 직박구리,
쇠박새 순으로 우점하고 있다.
그외에 천연기념물
원앙· 참매· 붉은배새매·
새매· 독수리 황조롱이·
수리부엉이·소쩍새·솔부엉이·
올빼미·까막딱다구리.,자생지
백운대(白雲臺) 중심으로
그 북쪽에 인수봉(仁壽峯),
남쪽에 만경대(萬景臺)가 있어
3봉이 삼각을 이뤄 .,삼각산(三角山).
우이동 선운각
인수봉 귀바위가 보이는
동네 지명.,우이동(牛耳洞).
인수봉 귀바위 잘 보이는 소귀천
소귀천계곡
도선사
.........소귀천 등산코스..........
소귀천공원지킴터~소귀천계곡~
대동문~동장대~용암문~도선사
(편도 5.1km, 3시간 10분 도보거리)
...................................................
북한산 ~도봉산 사이에.,
'군사요충지'가.,우이령길.
예나 지금이나.,군부대 주둔지.
역사적으로 민가가 전혀 없는 지역.
'송추 ~ 우이동'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도권 방위사령부
역사적인 군사주둔지.
.
원래, 牛耳(우이)는
‘천하의 패권' 요새란
뜻이 담겨있는 한자명.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 전쟁때
월 구천을 누른 오 부차는
'황지 모임(黃池會)'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물로
'소의 귀'를 잘라 올렸다.
.
예나 지금이나
승전 용사 음식이
오늘날.,소머리국밥.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
'牛耳( 소의 귀)'
우이동.,인수봉 귀바위.
'우이동'은 도봉산과 북한산 사이의 계곡
우이동 입구 왼쪽은 백운대 오르는 등산로.
도선사 경유해 인수봉 정상을 오를 수 있다.
우이동 입구 오른쪽으로 관광호텔, 놀이공원,
웨딩홀을 갖춘 그린파크호텔 기점으로 유원지
계곡의 맑고 시원한 냇물 끼고 각종 음식점 등.
민박 가능하며 3,4월에는 대학생들의 MT장소.
이렇게 20분 가량 올라가면
원불교 수도원, 성불사, 용덕사,
선운사, 광명사 등 사찰들이 있으며
우이동 입구에서의 들뜬 분위기는 이내
차분해지며 또 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산 정상으로는 현재 군부대 상주
생태계가 잘 보존되고있는 우이령,
'우이동~우이암' 등산로는 꽤 험로.
우이암~ 도봉산 주릉으로 이어진다.
우이암
이곳에서 북으로 뻗은 주릉을 타거나
성황당, 도봉유원지로 하산하면 된다.
인수봉 귀바위.
삼국시대 격전지였던.,북한산(삼각산)
인수봉 귀바위는 투구를 쓴.,勇士의 形相.
즉, 勇猛한 승전국 용사를 상징하는.,귀바위.
'백제 신라 고구려' 三國時代 격전장.,삼각산.
그당시, 패권다툼 승전 용사들의 상징.,귀바위.
인수봉 귀바위 등반., 클라이머.
인수봉 귀바위.,클라이밍.
인수봉 귀바위를 하강하면.,'孤獨의 길'.
옛부터 북한산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서울시민들의 휴식처.
또한, 우리나라
'Rock climer'산실.
.
인수봉은 선인봉과 더불어
우리나라 클라이머들의 요람.
'우리나라 산악사' 모태.,인수봉.
인수봉 허리에 위치한 '오아시스'.
인수봉 오아시스.
인수봉 '고독의 길' 들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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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길'.,들머리 ^
귀바위 천정깅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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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귀바위
인수봉은 기후변화가 무쌍하다.
일기예보에 없는 돌발적인 악천후.
하루에도 4계절이 공존하는 것 같다.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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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은 등반후,
하강할때 까지도
긴장을 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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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0 '고독의 길' 등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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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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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정상.,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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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 후배의.,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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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 차례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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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클라이머 요람
인수봉에는.,'89' 바위길.
인수봉의 바위길은
5 구간으로구분한다.
인수동면,
인수남동면,
인수남면,
인수남서면,
인수서면.
국내 클라이머 대개 자신의 명성보다
자신이 개척한 '바위길의 루트 이름을
훨씬 더 명예롭고 자랑스럽게.,여긴다.
그러나, 개척된 후에
바위길의 루트 이름은
개척자의 소유가 아니라
산악인 모두의 것이 된다.
하여, 향후 개척될
바위길의 루트 명은
개척자가 보다 신중하게
명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척자 사후에라도
바위길의 루트 명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수봉 바위길................
70년 전 꽃피며 개척된 바윗길.,인수 A
아직도 그날 망치소리가 들리는듯 한 루트
그 루트를 열어준 선배에 대한 예의.,인수 B
그해 가을에 찬란했던 취나드 B.
남들이 설 수 없던.,인수봉 에코길.
하강 코스에서 찾은 비상구.,인수봉 비둘기길.
만남을 위해 무대에 다시 오르다.,인수봉 우정 B.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조각배 같은.,인수봉 하늘길.
벽에 울린 알피니즘 메아리.,인수봉 서면벽.
그 메아리 인생의 8할은 바위.,인수 크로니길.
한 여인을 그리며
十字 검법으로 개척
루트., 인수봉 검악길.
인생은 허무하고
꽃은 시들지 않네.,
인수 알핀로제스 B.
그곳에 서면
너의 웃음소리가
떠오른다.,의대길.
크로니들의 놀이터,
눈 내린 한적한 성밖
눈으로 뒤덮힌 설교벽.
용(龍)의 등줄기에
인수봉에 묻어둔 추억
인수봉.,거룡(巨龍) 루트.
스무살 청춘들이
인수봉에 만든 우정
자유의 공간이.,'벗길'.
위를 봐도 달달달
밑을 봐도 달달달
손발 떨리는.,여명길.
바람처럼 꽃처럼
사라져간 정다리 형
'아미(아카데미)동길.'
밖을 향한 바위길 동경보다는
안으로 다져진 내공.,산천지길.
인수봉 페이스에
그림같은 빌라를 짓고
'거벽을 꿈꾸다.'.,빌라길.
활처럼 부풀어오르는 그곳
팽팽한 긴장감이여., 궁형길.
그건 영락없는
시시포스 몸짓
귀바위(천정)길.
우리는
빛나는 벽을
오르리라.,북벽
'창가방' 가는 길.
'아처~' 이전에는
어디로 올랐을까?
인수봉 '고독의 길'.
....................도봉산 & 선인봉.....................
온몸을 비벼 오른 반세기 이정표.,선인봉 측면길.
늙지 않았다. 다만 올라갈 뿐이다.,선인봉 박쥐길.
40여년이 흘러도 에코의 열창.,선인봉 남측 오버행.
유효 기간이 없는 열정.,선인봉 양지길.
큰바위 얼굴로 남은 젊은날의 우정.,표범길.
지금도 오버행 너머에서 손짓을 하는.,배첼러길
내 생활의 미래는 산과 함께 살거나.,선인 어센트길.
행복 메모장에 우정을 새기다.,거미길.
술잔을 높이 우정은 더 높이.,요델 버트레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서울의 소나무.,경송길.
눈 속으로 사라진 세 악우의 염원.,선인봉 청암길.
보문산장과 첫바위에 얽힌 기억.,우이암 전면 침니.
작지만 매운 '1960년대 클라이머들의 등용문'.,주봉 K크랙.
양복에 스타킹 신고 처음처럼 오르다.,만장봉 초등 재현 등반.
바위열전 목차
지은이 : 손재식
......................
2010.4.17.
<월간 山> 편집실
창간 40주년을 맞이하여
김영도씨 비롯한 16위원이
한국의 산악인 40인을.,선정.
..........고산/벽.,등반(30人)..........
엄홍길·지현옥·박영석·고상돈·장봉완·
오은선·김재수·한왕용·김창선·허영호·
고미영·구은수·이현조·김홍빈·오희준·
강연룡·박무택·김미곤·홍성택·나관주·
강성규·김영미·모상현/김세준·박정헌·
김창호·유학재·정승권·유한규·왕준호.
'아이거 북벽 등반기, 영광의 북벽' 저자.,정광식.
샤모니에 거주하며 활발한 등반을 펼치는.,허긍렬.
히말라야 고봉 등반 경력은 거의 없지만
대암벽 등반 등., 주영· 김용기· 이명희 등.
39명 중 여성은 고 지현옥씨를 비롯해
오은선·고미영·김영미·이명희 씨까지 5명.
원로 산악인 중 故 김정태씨가 유일하게 선정.
금강산 집선봉 등반 등., 해방 전후로 등반활동.
40인 중에서 39인은 선정하고 1인은 비워둔 상태.
..................................................................
인수봉 .,귀바위 '천정길'.
인수봉 귀바위는 암벽등반 테크닉을 닦는 곳.
천정바위 루트를 오르는 즐거움 가득한.,루트.
줄에 매달려 잠자고
커피도 끓여 마시며
해외원정 훈련을 연습.
'천정에 매달려 올라간다.'하여 명명된.,천정길.
등반력보다는 장비 의존 비중이 높은,,인공등반.
천정에 밖힌 볼트에 퀵드로를 걸고., 한발씩 전진.
인수봉.,비둘기길
비둘기길(5.7)은 산비둘기산우회가 1967년 개척.
고독길과 함께 인수봉에 가장 오르기 쉬운 길이다.
그러나, 난이도와 상관없이 인수봉 클라이밍의 역사.
비둘기샘
인수산장 곁 비둘기샘과
그 뿌리가 같은.,비둘기길.
비둘기길은.,인수봉 바위 선을
가장 잘 살려낸 아름다운 바윗길.
인수21야영장.,시산제
인수봉.,설교벽(雪郊壁)능선.
눈 雪
들 郊
바람벽 壁
1970년 10월 ~11월에
'크로니 산악회'에서 개척했다.
'눈 내리는 한적한 교외(郊外)의 바람벽.'
'인수봉의 약 80여 바위길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루트 명이 아닐까?'
설악산.,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바위길은 루트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이름이 많다.
설악산 노적봉에 개척된 루트 명.,'한편의 詩를 위한 길'
에델바이스 전설을 비롯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토왕성폭포 상단과 하단이
시야에 꽉 차며 완성되는 詩.'
토왕골.,토왕성폭포.
토왕골 선녀봉에서 흘러내리는
암릉 세줄기 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설악산 선녀봉 루트.,'별을 따는 소년들.'
1997년 경원대 산악부에 의해 개척.
길이 400m, 평균 5.6급 크럭스 5.9급.
'솜다리꽃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바위길.
'솜다리꽃의 전설'은
'별을 따는 소년들' 개척한
'김기섭 산악인'이 쓴 글이다.
......김기섭 산악인...............
1982년 경원대학교산악부 창립
경원대학교 OB산악부 회원으로 활동
1989년 설악산 노적봉 - '한편의 시를 위한 길'
1993년 북한산 백운대 - '시인 신동엽길'
1994년 북한산 백운대 -'녹두장군길' '김개남장군길'
1996년 설악산 토왕골 - '경원대 리지'
1996년 북한산 노적봉 - '경원대길'
1997년 설악산 토왕골 - '별을 따는 소년들'
1998년 도봉산 자운봉 - '배추흰나비의 추억'
1999년 중문암장 - '어느 모델의 하루' '푸른 물결의 선율'
1999년 설악산 만경대 - '별길'
2001년 설악산 석황사골 - '몽유도원도'
2003년 태국 라일 리 해벽 등반
2003년 설악산 석황사골- "체 게바라"길
2004년 북한산 노적봉 - ‘즐거운 편지’
2005년 홍천강 리지-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
2005년 영월 서강 강변리지 - '봄날은 간다.'( 미완성)
.............................................................................
암벽등반을 하거나 또는
등반을 경험해 본 사람이면
한번쯤, 김기섭 산악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7 루트
바윗길 개척 산악인.
그 어느 곳보다 멋진 바윗길을 개척하고
또 그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아름다운 시인’으로 불리는 산악시인 김기섭.
신이 그의 재주를 시기하여
등반 중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로 투병하고 있는.,시인.
운명의 날.,2006년 11월 19일 오전.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였던 김기섭 씨는
등반을 부탁한 일행들과 인수봉을 올랐다.
그리고, 인수B 코스.,항아리 크랙.
약 5m 아래 지점인 레이백 크랙에서
날개를 뜯다가.,10여m 추락하고 만 것.
김기섭 산악인
그가 붙인 서정적인 이름의 바윗길들은 그후
수많은 사람에게 산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산악인의 정서를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듣는다.
오늘날에 등반하는 암벽등반가들은
그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셈.
'2010. 9 ~ 2011. 10' 블랙 야크에서 주최.
‘오은선 대장과 함께 하는.,한국 명산 14좌’
참가자 약8000명이 참가비 일정 부분을 성금.
천불동계곡 오련폭포 왼쪽에., 별길.
설악산 천불동계곡 오련폭포 왼쪽., '별길',
설악산 비선산장 옆 장군봉., '나의 소중한 사랑'.
소토왕 암장.,'낙화유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옛날에는 바위길을 개척한 산악회 이름으로.,루트 명.
인수봉 크로니길. 선인봉 요델버트레스. 선인봉 경송길.
'크로니 산악회, 요델산악회, 경송산악회'에서 개척한 루트.
개척사고가 많아.,사랑과 우정,
죽음이 담긴 바위길 이름도 있다.
바위길을 개척한 산악인의
고유 권한 관례에 따라.,명명.
엄홍석과 연인 신현주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딴, 석주길.
1969.10.7 송준호가 이름 지었고 3년 3개월 후., 숨진 송준호
그는 토왕빙폭 초등 도전 중 자일 파트너가 미끄러면서.,추락사.
선배를 추모하며 그 후배가 개척한.,천화대 흑범길.
故 송준호 선배를 따르던 늑대 '홍경의'가 개척한 루트.
故 송준호 산악인의 영전에 받친, 선인봉 요델버트레스.
요델산악회에서 개척 후.,'준호 버트레스'라 명명했던 루트.
그후, 요델버트레스는 '요델산악회 버팀목' 의미가 담긴 루트 명.
선인봉.,요델버트레스
설악산 비선산장 곁 적벽에 위치한 바윗길.,'트랑고의 꿈'
정승권 씨가 트랑고 홍성암 씨를 추모하기 위해 개척했다.
설악산 적벽., '트랑고의 꿈.'
간현암장
간현역 인근의 간현 유원지 강벽에 위치한.,간현 암장.
여름에 시원해 클라이머들이 피서를 겸해 즐겨 찾는 곳.
스포츠 클라이밍 꿈나무들에게 훈련장으로 각광 받는 곳.
'YS' '허니문' '깍쟁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
'비몽사몽'.
'비오는 날에.'
'슬롯 머신.'
;어제보다 좋은 날'
'물결' '돌맹이 하나.'
'그린' '1004' '신토불이'.
'목련이 피는 봄날.'
북한산 뜀바위 아래 여우골 처녀샘 곁에는
백운대 아래 '마등'에서 1969년 5월 31일에
추락사 한 백명순 씨 '추모시' 시비가 있었다.
검악산악회에서 그녀를 보내고 추모비를 세웠지만
북한산 추모비 정비때 그녀 추모비(追慕碑)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추모비에 새겨져 있던 시 한편은 아직도 전한다.
1969.5.31. 고 백명순 추모비.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 4년.
.............
山이 좋아
..............
山에 잠든 너 사슴아.
순하디 순한 눈으로
고독의 등불을 켜들고.
봄에는 꽃술을 따물며
여름엔 녹음에 쉬고
가을은 마알간 하늘을 배우고
겨울엔 그토록 좋아하던
하야얀 눈밭을 뛰어다니며
오래 오래 山에서 살아가렴
-1969년 6월 친우 일동- .
故 백명순은 생전에 열십자로
그어진 인수봉 남면을 가리키며
"저곳에 길을 내면 얼마나 멋질까?"
그래서, 그녀 사후
꼭 일년 만에 개척된
인수봉 바위길.,검악길.
김정명 씨가 그해 9월에
'검악길'을 만들기 시작
그녀가 사라져버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업과 다름없던 일.
하지만, 김정명은 그곳 십자로 인근에
바위길을 개척하다가 중도에 그만둔다.
그녀의 빈자리를 끝내 이겨낼 수 없던 탓.
1970년 5월 말에 원준길,
이인희 등이.,검악길 마무리.
백명순 그녀가 고인이 되어
떠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
인수봉의 수많은 바위길
중에서 하나인 검악길은
이렇게 열리지만, 김정명은
1971년 산을 떠나 미국 이민.
.
'김정명과 백명순의
비련(悲戀)'이 새겨진
인수봉 바위길., 검악길.
"소설과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고 탐미한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랑은
그러나 바람이나 파도 같은 것."
.
"사랑은 보이지 않으며 흔적도 없다.
아무리 열병을 앓아도.,가질 수 없는
사랑은 다만 가슴에 깊이 남을 뿐이다°
검악길 십자로를 횡단 중인 클라이머들.
그녀의 애인 김정명씨와 검악산악회에서
그녀를 추모하며 개척한 바위길이기도 하다.
그랬던 김정명 그가 20년도 훌쩍 넘은 어느 날., 귀국.
그는 자신의 젊은 날 사랑이 아로 새겨진 검악길을 등반.
아직도 십자로 위에 새겨져 있는 글귀.,'12월 열린 검악길'
검악(劍岳)은
한 여인의 꿈을
인수봉 '十字路' 위에
검법(劍法)으로 새긴듯.,
인수봉.,검악길
인수봉에서 가장 남성적인 바위길.,십자로.
피투성이 손과 깨진 손으로 개척했던.,검악길.
1935년 3월, 약관 20세 김정태는 등반을 목적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인수봉(인수 B)을 오른 인물.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 등반사 초석이 된., 인수봉 첫등반.
백운대.,신동엽길.
'신동엽길' 9마디 루트 끝.,여우골에 위치한 처녀샘
처녀샘은 그 처녀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 아닐까?
백운대 뜀바위와 신동엽길 정상 사이.,추모비 인근의 샘.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처녀샘
건기에는 샘이 마르지만, 북한산 개울의 발원지.
우기에는 신동엽길 등반 후 갈증을 달래주던.,처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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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소용돌이가 휘몰아갔던 선운산
그곳에는 속살바위와 투구바위 암장이 있다.
그곳 속살바위 바윗길 이름이 약간 감성적이다.
선운산., 속살바위
여인의 속살처럼
희고 부드럽고 매끄러워
'"속살바위"라고 부르는걸까?'
'어딘가 너머 무지개가..'
'더러운 세상을 떨쳐 버리고',
'자유를 찾아서' '진달래 탈춤'
선운산 속살바위.,진달래탈춤( 5.13b)
' 백팔번뇌'
'마지막 여인.'
'그대 떠나가도..'
'그 여자의 이야기',
'언제나 너의 곁에서'
'때로는 힘들지만.'
'잊지 않을께'
'소중한 너의 기억'.
'변태'. ' 슬픈 고백.'
'내가 사랑한 여자를 위한 길.'
'수많은 밤을 지새웠지만.,'
'너의 기억은 그대로.,'
선운산., '투구바위 암장'
선운산 '투구바위 암장'의 바위길 이름들은
선운산 '속살바위 암장' 못지 않게 야릇하다 .
'개 같은 날의 오후.'
'더러운 세상을 떨쳐버리고..'
'한여름밤.' '그냥 걸었어.' '월세방.'
'물빛나라.'
'비경의 침니.'
'상바위골의 슬픔.'
'아름다운 여인의 비밀.'
아름다운 여인의 비밀.
'립스틱 짖게 바르고'.
'꽃바람 속에 피어난 꽃.'
'워밍엎.' '쉬운길.' '더쉬운길.'
울산암.,비너스길.
설악산 울산암 정상 인근에 위치한.,'비너스길'
아름다운 여인의 허리와 엉덩이처럼 매끈하다.
오름짓 안간 힘을 다하는 소리가 색다른.,바위길.
매월대 암장
북계산., '매월대 암장' 바위길들.
'아!~ 살떨려'. '이쁜이', '순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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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암장.
대둔산 바윗길 이름들은 더욱 더 감성적이다.
'미녀와 야수', '청춘', '가시네', '데이트', '첫경험',
'뽀뽀', 'Y골', '부부길', '위문공연'. '고추 말리기',
'손장난',
'엉뎅이', '방뎅이',
'궁뎅이', '성감대, '꼭지'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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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수리봉 암장
북한산 수리봉에 있는 암장..<가족길>
아이길, 형길, 누나길, 엄마길, 아빠길. 등.
그리고, 아빠길 아래에는.,첩길.
엄마길 맞은편에 있는 바위길이다.
첩 인양 매달려 올라가야 하는.,바위길.
'첩길'에서 약간 떨어진.,'늦동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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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남서면에 있는 바윗길.. '해우길'.
클라이머기 힘쓰는 소리가 마치, 용변 무드.
그래서, 해우소 같다하여 명명된 바윗길 이름.
해우길.
여정(女情)길.
그곳 해우길에서 불과 몇걸음 위에.,'여정길'.
첫번째 피치 모양.,아름다운 여인의 하반신 누드.
클라이머 오름짓 힘쓰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곳.
해우길 바로 아래 있는 바위길도
"오르기 짜다."고 소문 나.,'소금길'.
인수봉.,소금길(오이지길)
"끙!~~"
"음!~~"
"아!~~"
'해우길' 사운드 일까?
'여정길' 사운드 일까?
'소금길' 사운드 일까?
사운드 오브 뮤직.
1992.9.6 여성산악인 '차선영'이 숨진.,'해우길' 하단.
약혼자와 함께 볼더링 도중에 낙석에 맞아 운명한 곳.
그후 몇년간 약혼자 안강영씨 꽃다발이 시들지 않던 곳.
"꽃을 좋아하고 詩를 좋아하며
산을 사랑한 선영이가 있는 곳"
1992.9.6 . -고 차선영 추모 명판 -.
작은 거인.,박희영 산악인.
인수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개척자 박희영은 2003년 트랑고스포츠 퇴사.
2004년 부천에서 알펜그로우 제품을 선보였다.
중국에서 수입한 제품들을
국내에 공급하는 일을 한.,그.
“산은 내 인생의 활력소입니다.
여러 해동안 일에 쫓겨 지내다보니
하고 싶은 등반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남들이 생각할 땐 바위를 실컷 했다고 하겠죠.
하지만 예전에 오르던 길에서 자세가 안나올 때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들면서 자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생각이
다시는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다짐.
바윗길은 다양한 이름 만큼 숨은 사연도 많다.
클라이머들 한과 애환들이
짙게 느껴지는 바윗길 이름.
엄홍길 산악인 & 故 박무택 동상.
故 박영석 산악인.
故.,고미영 산악인
오은선 산악인
정승권 산악인
산악전문가
박미숙 박사.
2018.04.30.
지난 2월, ‘우리나라 등산산업
2013.10.28
K2 아웃도어 소속
등산학교 교장.,김종곤
5.13클럽 창설.,꿈나무 육성.
전직 목사 특이한 경력.
스포츠 지도자 꿈을 안고
생계를 위해서 택시운전 등.
일산 마두동 올림필스포츠 센터
'스포츠클라이밍 센터' 강사 10년.
이곳에서 재직하면서 5.13 클럽 창설.
'5.13 클럽 꿈나무 육성'지도자로 발돋움.
'김자하 김자비 김자인'
송한나래, 박지환, 도은나
등 5.13클럽 많은 꿈나무 배출.
2016.02.01 송한나래
5.13클럽., 꿈나무 출신.
세계 여성 빙벽 참피언
송한나래가 아빠 등에 업혀
산에 가본 후 처음 자신의 힘으로
등반을 시작한 것은 11세 때부터였다.
12세가 되던 2004년 6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7개주 횡단 등반여행.
송한나래 꿈나무는 당시 국내 최연소로
5.12c 난이도를 등반하며 주목을 받았다.
함께 등반투어 한 도은나, 김대엽, 박지환 등.
“미국 로스앤젤레스 ‘윌리암슨 록’ 첫 등반
사막 볼더 지역 ‘조슈아트리’까지 이어졌다.
말로만 듣던 요세미티는 상상도 못한 웅장함.
미국 클라이머의 영웅.,
크리스 샤마 고향., ‘비숍’
고난도 볼더링 지역으로 유명
다음날 간 ‘레드 록(Red Rock)’
30여 년 전부터 등반루트가 개척
픽스 클립, 갤러리(Gallery) 등 10여개
등반지역에 수백 스포츠 클라이밍 루트.
전 세계 클라이머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야크 크랙(Yak Crack, 5.11d),
글리치(Glitch, 5.12c), 더 다운 보이즈 고
(The Down Boys Go, 5.12d) 등의 루트들.
"해가 저물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유타 주에서는 ‘인디언 크랙’을 등반.
당시 어린 5.13 꿈나무 송한나래 선수는
손이 작아 직접 등반을 할 순 없었지만
아버지 등반모습을 지켜보며 훗날 기약.
켄터키주 특별한 등반지 ‘마더로드’
‘켄터키 영웅’ 케이티 브라운 훈련장.
케이티 브라운은 13세 등반 시작
16세에 월드컵 챔피언에 오르고
5.14 루트를 오른 송한나래의 우상.
이렇게 매일 새로운 도전과 성공,
실패를 맛본 45일간 미국 등반투어
뉴욕의 ‘샤왕컹크’에서 끝으로 귀국.
“그때의 등반투어는 제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경험
다양한 바위를 등반한 것 말고도
우리나라와는 다른 문화, 그리고
자연을 즐기는 사고방식까지 배웠죠.
그때의 경험을 통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등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등반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12세 어린 나이에 접한 미국 등반투어
현재까지 클라이밍을 하고있는 송 선수
‘인생 등반’과 같은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준 중요한 경험이었어요. 그때를 회상
“조금 성숙해진 나를 발견했어요” - 송 선수.
2017.1.19
2017.1.30
'아시아 참피온' 박지환
스포츠 클라이머 선수
5.13 클럽., 꿈나무 출신
2014.04.28 아이더 소속 프로
2018.10.04 도은나
5.13 꿈나무 클럽.,출신
전 국가대표선수.,도은나.
일산 올림픽 스포츠센터 강사.
스포츠 생리학.,박사과정 수료.
'탈렌트'가 된다 해도
손색이 전혀 없는.,미모.
잘 성장해줘서 참 대견하다.
2018.03.29
한국여성산악회
신임회장.,'이승형'
김자인 스포츠 클라이머를
길러낸 어머니이자 여성 산악인.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남성 중심 산악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여전히 유리천장에 가로 막혀있는 현실.
여성 산악인 만을 위한 단체,
한국여성산악회가 중요한 이유.
2018년 3월 초, 한국여성산악회
정기총회를 통해 신임회장으로
'김자인 어머니' 이승형 씨 선출.
이승형씨는 스포츠클라이밍 국제심판
김자하, 김자비, 김자인 3 남매의 어머니
20대 초반, 몸이 약하고 체력이 턱 없이
부족한 탓에 등산을 시작한 것이 지금껏
산과 인연으로 이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결혼 후 아이를 키우면서
없는 시간을 쪼개 남편과
스포츠클라이밍을 배웠다.
세 자녀 역시
부모의 영향으로
스포츠클라이머의
길로 접어들어 활동.
2012.10.26
필자에게는
자인이는 물론
자인이 아빠도
자인이 엄마까지
"선배님"이라 호칭.
일산 마두동 올림픽 스포츠센터
7층 스포츠 클라이밍 센터에서
몇년간 함께 운동을 한 사이.
.
2013.11.22
.....3남매 이름........
첫쩨 자하.,자일 & 하네스.
둘째 자비.,자일 & (카라)비나.
막내딸 자인.,자일 & 인수봉 귀바위.
.................................................
특히, 인수야영장에서
인수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이가.,김자인.
.............필자 주.............
자인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와 함께 지리산 종주 도중에
세석산장에서 필자와 우연히 만났다.
"왜 한겨울에 어린애를 산에 데려왔어?"
"형님~ 아무리 말려도 가겠다는 거예요."
"..............."
"형님~ 제 형편 상으로는
지리산에 올 수가 없는데
자인이가 하도 울면서 졸라
할 수 없이 데리고 온거예요."
"아! 운동화가 눈에 젖었네
,옷이라도 따듯하게 입히지."
.................
.................
막내딸이라 제일 늦게 클라이밍 입문.
어릴 때부터 포기를 아예 모르는 아이.
너무 가난해 라면 주식으로 성장한 아이.
두 오빠를 따라다니며
클라이밍 센터에 다녔다.
아빠 엄마가 일하러 다니기에
집에서 혼자 놀 수 없어 온.,센터.
한번은 기브스한 다리로
클라이밍 센터에 놀러와서
오빠들이 하는 고난도 루트에
매달렸는데 수없이 떨어졌는데
엉엉 울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해 끝끝내 오르고야 말았다.
어려서 근성이 남달랐던.,"악바리~"
라면 만 주로 먹어 깡말랐던.,어린애
그후, 잘 커 세계 스포츠클라이밍 제패.
김자인은.,인간 승리의 표본.
세계 참피온까지 될줄 몰랐는데
김자인 선수 모습은 장하기만 하다.
................................................
2013.07.27 김자인 & 오빠 김자하 코치
2009.08.31
운동하는 3 자녀를 둔
엄마의 삶은 힘들었다.
당시 세 아이들은 번갈아
국내 및 세계 대회를 출전.
지금처럼 기업이나
단체의 후원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어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서 맞벌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밥하고 집안일을 하면
새벽 3시를 넘기기 일쑤
출근을 위해 오전 6시 기상.
매일 매일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와 가정일을 병행하는 삶.
개인적인 시간은 꿈꿀 수 없는 삶.
막내(김자인 선수)가 대학에
들어가자 숨 쉴 여유가 생겼다.
이미 프로 선수라 4년 전액 장학금
성인이 된 아이들은 예전처럼
엄마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는 시간을
허툴게 쓸 순 없었다.
매해 바뀌는 스포츠클라이밍 규정
규칙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국제심판 공부를 했다.
쉽지 않은 시험이었지만
국제심판 자격증을 획득.
2003년부터 심판 활동 시작
엄마가 아닌 심판 이승형의 삶
그렇게 삶의 여유가 생길 무렵
'한국여성산악회'에 가입 했다.
여성 산악인 동료들과
워킹도 하고 등반도 하며
동지애를 느끼고 싶어서다.
한국여성산악회는
회원이 100여명 단체
매년 나눔음악회를 열며
의미 있는 활동을 게속한다.
8년 전부터 시작한 나눔음악회는
매년 콘서트를 열고 생기는 수익금을
어려운 산악인들에게 후원하는 행사다.
처음 음악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호황기라
등산용품 브랜드 후원들이 활발.
몇 년 전부터는 이마저 뜸해져서
티켓 판매 수익과 에코백을 제작해
판매한 수익금을 모아 후원을 진행.
한국여성산악회는 주로 50/60대 회원들.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야하는 세대인 만큼
자주 모일 순 없지만 번개모임을 꾸준히 한다.
정기모임은 한 달에 한번
워킹 산행을 주로 진행한다.
반면 수시로 등반 번개모임.
일 년에 두 번,
하계와 동계에
강도 높은 등반
올겨울에는 5박6일간
한라산에서 야영하며
설산훈련을 하기도 했다.
올 가을 히말라야 6000m급
피크 등반에 도전할 예정이다.
이승형 회장은 몇년간 미미했던
한국여성산악회 활동을 늘릴 계획
그동안 흩어졌던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화합하고 소통
그 다음이 새로운 회원들을 모집
산과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이 모여 자연을
사랑하는 일들이 곧.
한국여성산악회의 갈길
이승형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삶에서 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그녀에게 산의 의미를 물었다.
김자인 선수를
낳고 잘 길러냈던
장한 어머니.,이승형.
엄마 외모를
빼닮은 김자인
2019년 현재 31살
'스포츠 클라이머'에겐
황금기를 지난 나이지만
지도자로서는 적당한 나이.
'우리나라 산악계' 역사 상
전세계 최초 제패는 전무후무.
153cm키, 42kg 체중.,작은 거인.
2014.9.26
국제 클라이밍
연맹.,선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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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들의 사랑 속에
우리나라 산악계의 역사를
선도 할 위인으로 성장하길~'
'위대한 여성 산악인으로서
전세계 산악사에 길이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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