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나리오의 차이
문희봉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들 중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되는 것은 약 10% 정도다. 나머지 90%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이웃들도 그렇다. 예외가 없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사심은 과욕은 낳고, 과욕은 패배를 낳는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10%는 통제불능인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우치기까지 육십 년 넘는 세월이 소요됐다. 자동차가 고장 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장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KTX가 달리는 도중에 고장이 나 멈추는 바람에 중요한 회의장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도, 내 차 앞에 다른 차가 끼어들어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것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90%는 다르다. 내가 운전하면서 신호등을 빨간불로, 초록불로 조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반응은 조정할 수 있다. 나는 내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 조상님들은 ‘참을 인(忍)’ 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했다.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기분 좋게 술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한 친구가 술이 거나해지면서 갑자기 안하무인이 된다. 친구들에게 불쾌하게 대한다. 이 세상에 자기가 제일이라는 듯이 마구 떠들어댄다. 한 친구도 나서서 제지하려는 사람이 없다.
그 때 한 친구가 나서서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주정하는 친구를 윽박지른다. 주정하던 친구는 임자 만났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그 친구한테 덤벼든다. 그 친구는 주정하는 친구를 더 큰 소리로 윽박지르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고 비난한다. 더 큰 말싸움으로 발전된다. 그 친구가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일어나 주정부리는 친구를 떠민다. 둘이 맞붙어 실랑이를 벌인다.
판은 깨어지고 다른 친구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모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남은 사람들은 서너 명으로 줄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빛도 사나워진다. 친구들이 말려 말다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교통신호도 안 지킨다. 집에 돌아와 영문도 모르는 아내한테 시비를 건다.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 친구의 하루는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마감된다.
왜 그럴까? 그 친구가 오늘 보여준 반응 때문이다. 그 친구는 왜 나쁜 하루를 보냈을까? 모임이 원인이었나? 주정하는 친구가 원인이었나? 술이 원인이었나? 자신이 원인이었나? 그렇다 마지막 자신이 원인이었다.
그 친구는 주정부리는 친구의 행패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제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친구가 보인 단 몇 초 간의 반응이 그 친구의 나쁜 하루를 만들었다. 그 친구가 보였어야 하는 반응은 이랬어야 한다. 주정하던 친구가 모임 중에 취한 채로 몽니를 부린다. 좌중은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 친구는 “야, 친구야, 왜 이러나. 앉아서 조용히 얘기하자.”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주정부리는 친구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주위의 반응이 없으니 제풀에 꺾여 톤이 낮아지고 말수도 줄어든다. 그 때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다독이며 ”오늘 낮에 무슨 일이 있었니? 술이나 한 잔 더 하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분위기는 반전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임은 차분히 정리되며 종료된다.
두 가지 시나리오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둘의 시작은 같았다. 그러나 둘의 끝은 너무도 다르다.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의 10%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다. 나머지 90%는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유리컵을 깨뜨렸다고 화를 내고 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하루가 망쳐지게 된다. 화를 낼 시간에 유리컵을 깨뜨린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그 주위를 깨끗이 쓸면 된다. KTX가 연착되어 자신의 스케줄이 엉키게 되었다고 승무원에게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신경질 부릴 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신문을 보면 된다.
자신이 받고 싶다면 주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 내가 주면 빈손이 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된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따스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