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첫발을 디디고, 주춧돌을 놓다 1885~1890년 (4) 교회 설립과 전도 여행 이와 같이 언더우드는 내한 이후 열심히 조선어를 배우면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병원 일을 거들고, 고아원을 설립하고, 수많은 교리서와 사전을 편찬하고, 또 성경도 번역하면서 제한된 환경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씩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에게 그가 조선에 온 일차적이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였다. 그 생각만큼은 제물 포항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1916년 서거할 때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에서 지워진 적 없는 언더우드의 소명이자 사명이었다. 비록 종교를 직접 전하는 것이 금지된 금교의 상황이었지만, 언더우드는 말문이 조금씩 트이자 조선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에 대해 말이라도 건네볼 좋은 수가 없을까 꾀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선 사람들은 이야기 듣는 것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해, 길에서 소리 내서 책을 읽으면 주위에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번역한 소책자를 손에 들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 어귀의 큰 나무 밑이나 약수터에 가서 가만히 앉아 큰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한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언더우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게 무슨 뜻이오?” 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의 언더우드. ▲노춘경(왼쪽), 서상륜(오른쪽). 게다가 비록 조선 안에서는 금교의 상황이었지만, 만주의 로스와 매킨타이어 등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187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인 대상 선교 활동,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 하다가 개종한 백홍준, 서상륜 등의 조선인 신자들이 1880년대 초 부터 한글로 된 단권 복음 성경을 들고 압록강변의 한인촌이며, 의주며, 평양이며, 심지어 서울까지 다니며 가만히 전도 활동을 한 결과 세례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 결과 1884년 로스 등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우선 압록강연안의 조선인 정착지를 오가며 한번에 70명씩 100명씩 세례를 주기 바빴고, 1883년부터 서울을 부지런히 오간 서상륜의 전도 결과 1885년 서울에 이미 70여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아직 제대로 된 전도 활동도 채 시작하기 전에, 서울을 비롯한 이북지역에는 이미 조선 기독교인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전도 활동이 시작되었고, 신앙 공동체까지 작지만 형성되어 있었다. 언더우드가 내한한 후 1년쯤 되는 날인 1886년 7월, 노춘경이라는 사람이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서적을 읽다가 오히려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된 노춘경은 상경하여 알렌의 어학 교사와 사귀었다. 그를 통해 알렌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노춘경은 알렌의 책상에 놓인 한문 성경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보고 몰래 집으로 가져가 밤새 탐독했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로 언더우드를 찾아가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은 뒤, 언더우드에게 한문 주석서와 교리서 등을 빌려 고향에 내려가 읽기를 반복하면서 개종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886년 7월 18일 일요일, 헤론의 집에서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의 보좌를 받으며 조선에서의 첫 개신교 세례식을 비밀리에 집례했다. 비록 단 한명에게 은밀히 베푼 세례였지만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마치 그를 뒤따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조선에 동이 틀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한 사람의 신자는 바 로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임을 우리는 확실히 믿었다. 그 후 1886년 말, 서로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언더우드와 서상륜이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서상륜은 갑신정변 이후 서울에 오지 못하게 되어, 이후 동생 서경조가 있던 황해도 소래에 머물며 전도했고, 소래에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였다. 서상륜은 1886년 말 언더우드를 찾아가 20~30명의 신앙인들이 모여 있는 소래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야말로 “씨를 뿌리러 왔는데, 조선은 이미 수확할 시기가 되어 있었다”고 한 언더우드의 회고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교사가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이 아직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혹시 그들이 서울로 온다면 세례 집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뒤 서상륜을 돌려보냈다. 그 뒤 서상륜은 소래의 교인들 가운데 동생 서경조를 포함하여 정공빈, 최명오 등 셋을 데리고 1887년 1월 언더우드를 찾아왔다. 언더우드는 그들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발각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셋은 1월 23일 세례문답을 거친 뒤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헐버트가 문 밖에서 망을 보았다. ▲초기 새문안교회. 이후 이런 식으로 은밀히 언더우드를 찾아와 세례를 받는 소래교회 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1887년 9월 초에 또 11명이 세례를 받는 등 금교의 상황에서도 세례 교인의 수는 조금씩 늘어갔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저녁, 자신의 정동 사택에서 이렇게 세례를 받은 14명의 교인들과 함께 새문안교회를 창립했다. 교인들은 모두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었고, 이날 창립예배에는 만주의 존 로스 선교사와 서상륜도 함께해 그 의미를 더했다. 이때 교인 중 2명이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이로써 목사, 장로, 교인을 두루 갖춘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가 탄생되었다. 188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는 7명의 세례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새문안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창립 당시 교회의 이름은 정동장로교회였고, 후에 새문안제일교회, 그리고 새문안교회가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소래에서 기독교인들이 확산되어가고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는 일이 반복되자, 언더우드는 직접 소래를 가보고 싶은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소래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동에 위치한 곳으로, 송천(松川)을 우리말로 ‘솔내’라 했는데, 선교사들이 그것을 ‘소래’라고 불렀다. 하지만 외국인이 서울 밖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여행 허가증인 ‘호조’(護照)가 필요했다. 알렌과 헤론 등 다른 선교사들은 언더우드가 서울에 찾아온 소래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알렌은 언더우드의 무모한 행동으로 선교사 및 서양인 전체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세례 집례를 반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세례를 주러 지방으로 여행을 가겠다니, 알렌으로서는 안절부절못할 노릇이었다. 미국 공사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선교사 가운데 서울을 벗어나 지방 여행을 떠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불안한 정세 가운데 지방에 갔다가 조선인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때까지 누구도 감히 여행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때이다. 게다가 호랑이, 표범 등 야생동물의 공격, 도적 떼, 음식과 잠자리의 곤란, 연락의 어려움 등등 너무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자국민 보호의 임무를 띤 공사관으로서는 말릴 수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또한 중국에서처럼 선교사들이 지방에서 무리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물의를 일으켜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만류도 언더우드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는 조선 정부의 외부(지금의 외무부에 해당)에 1887년 10월 25일 여행 허가증 인 ‘호조’를 신청했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호조가 발행되었고, 언더우드는 그렇게 1887년 10월 말, 첫 번째 지방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 었다. 이때 언더우드는 약 한 달에 걸쳐 송도(지금의 개성)와 소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다녀왔다. 송도에서는 10~12명의 세례 청원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소래에서는 4명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백홍준과 서상륜 등이 오랜 시간 전도 활동을 펼친 의주 등 평안도 지역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하며 세례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언더우드는 가는 곳마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길을 잃고 망설이고 있을 때 지나가던 농부가 친절히 길도 알려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먹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의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타고 간 말이 지치고 노잣돈도 떨어져 곤란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평안 감사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더니 뜻밖에 감사는 편안한 방을 내주고 마음껏 머물 수 있게 환대하고, 언더우드가 떠날 때는 말도 내주고 노자도 얹어주어 오히려 언더우드를 당황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 언더우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고, 언더우드는 말에 잔뜩 싣고 간 교리서 등의 책을 모두 팔고 올 수 있었다. 첫 번째 지방 여행에서 여러 가능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온 언더우드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날이 풀리자마자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마음이 잘 맞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동행하기로 하고 다시 여행 허가증을 신청했다. 미국 공사 딘스모어(H. A. Dinsmore)가 이번 여행 중에는 ‘가르치고’, ‘세례를 베푸는’ 일을 절대 하면 안 된다며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 언더우드는 혹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넘어가 세례를 베풀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중국 ‘통행증’까지 발급받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렇게 하여 1888년 4월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함께 2차 여행을 떠났다.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공사와 약속했지만, 언더우드가 가는 곳마다 세례 청원자들이 줄을 이었다. 세례 청원자를 물리치는 것은 목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언더우드는, 2차 여행 때 송도에서 2명에게, 소래에서는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두 사람은 이번 여행에서 그들과 조선인 조사들이 뿌린 씨의 열매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2차 여행은 4월 22일 조선 정부가 갑자기 ‘야소교 전도 금지령’을 내리면서 중단되었다. 야소교(耶 敎)란 ‘야소’ 즉 예수를 믿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단어였다. 조선 정부는 가톨릭 신부들이 종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성당을 세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지금의 명동성당), 젊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종교를 전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조선 교섭통상 사무의 이름으로 아래와 같은 공문이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다. 대조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趙)는 조회합니다. 이 조회로 우리 정부에서 야소교를 포교하는 사람이나 전도하는 사람으로 서울에 머물면서 이교도의 도를 우리 군주 폐하 신민에게 계속 가르치는 사람에게 분명히 알린 바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대저 야소의 도를 가르치거나 어떤 종류의 학당도 조약 속에 그렇게 하라는 조목이 없습니다. 그런 고로 어떤 새로운 종교든 학당이든 오직 조선 정부에서 지시를 내린 것 외에는 반드시 엄격히 금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서울 시내나 조선 내에서 그런 기관의 설치를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공문을 받은 미국 공사는 황해도에 나가 있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조선 외부로부터 공식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 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을 조선 정부에서 알고 있고,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허가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하는 것 등이다”라고 하면서 즉시 서울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여행 도중에 급히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내려진 금교령으로 인해 그해 5월부터 9월까지 언더우드 고아원이나 배재·이화 학당 등에서는 아침마다 드리는 예배도 중지되었고, 지방의 신자들은 병인년의 천주교 박해 같은 무서운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 가지고 있던 교리서 등을 모조리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상과 종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을 정부의 금교령 하나로 누그러트릴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아니었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도 언더우드는 헤론 부인이 돌보는 여성들 가운데 4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세례를 희망하는 조선 관료 2명을 지도했으며, 새문안교회 소속 교인 5명의 문답을 지도하는 등 터진 둑으로 물이 밀려 오듯 교회로 학교로 병원으로 몰려드는 구도자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교회의 출석 교인 수는 벌써 50명을 넘어서 언더우드 사택의 사랑방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런 현상에 용기를 낸 언더우드는 금교령이 내려졌음에도 1888년 12월에 신학반을 열어 전국 각지에서 방문하여 오는 교인들이 고향에 돌아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수업을 시작했다. 신학반에서는 약 한 달에 걸쳐 성경 주석, 성경 입문, 교회 역사, 성서 지리, 교회 정치 등의 간단한 신학과 찬송 부르는 법, 예배 인도법, 기도법, 설교하는 법 등을 가르쳐 예배와 모임을 인도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1889년 세례 받은 교인은 장로회 60명, 감리회 40명 등 도합 100 명이 넘었고, 공식적인 예배가 서울의 두 곳에서 매주 열렸으며, 한 교회에 50~60명의 교인이 출석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한교총 #언더우드 #선교사 #선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