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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8월04일(일요일)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탐방일정
탐방지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역사의 정취가 가득한, 오래 머물고 싶은 미술관입니다.
남서울미술관은 역사의 정취가 가득한, 오래 머물고 싶은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이 둥지를 튼 이곳은 대한제국(1897~1910) 시절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된 건물(사적 제254호)로, 1905년 회현동에 준공되어 1983년 지금의 남현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길게 뻗은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자유롭게 배열된 두 개 층의 방들에서는 다양한 층위의 관람객에 특화된 공공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관람시간 : 평일(화–금) 오전 10시– 오후 8시, 토 · 일 ·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6시
휴관 : 1월 1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관람료 : 무료
주소 : 우편번호 08806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남현동)
대표번호 : 02–2124–8800]
탐방코스: [사당역 6번 출구~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실[SeMA 옴니버스 《제9행성》]~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권진규의 영원한 집]~사당역 6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8월04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50분 소요)
09:20~10:15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사당역으로 이동 [55분 소요]
10:15~10:20 사당역 6번 출구로 나옴
10:20~10:28 서울 관악구 남현동 1130-1 번지에 있는 사당역 6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번지에 있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이동 [8분, 458m 이동]
[119년이 된 건물에 깃든 미술관이 있다. 바로 남서울미술관이다. 지금의 남서울미술관은 1905년 벨기에 영사관으로 탄생했다(사적 제254호). 처음 있던 자리는 지금의 장소가 아니라 회현동이었다.
그런데 1977년 영사관 터를 포함하는 일대가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197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이 확정되었고, 1982년 마침내 외관은 원 모습으로 복원하고 실내 공간은 건축가 김수근의 의견에 따라 일부 변경하여 지금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미술관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1968년 영사관을 불하 받았던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무상임대함으로써 가능해졌다.]
10:28~12:00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SeMA 옴니버스 《제9행성》]을 관람
[SeMA 옴니버스 《제9행성》
전시기간 : 2024년07월31일~2024년10월27일
관람시간 : 평일(화–금) 오전 10시–오후 8시
토 · 일 ·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전시장소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실
관람료 : 무료
도슨트 안내 : 매일 오후 2시에 운영 (전시 개막일, 월요일 휴관일, 추석 연휴 기간 제외)
전시 부문 : 조각, 설치, 영상 등
전시 장르 : 기획
참여 작가 : 고창선, 뮌, 신정필, 염지혜, 전보경, 정승, 정혜정, 조은지, 황문정
작품수 : 15점
전시 문의 : 박지수 02-2124-8943
관람 문의 : 안내 데스크 02-598-6246,6247
전시 안내
“우리 시대는 단지 지구적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지구적 시대의 끝점이자 ‘행성적인 것(the planetary)’이라 부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 이신철 옮김(에코리브르, 2023), 13쪽.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발생하는 각종 생태학적 위기와 재난 상황들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의 존재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기계, 동물, 식물, 사상 등 다양한 형태를 띠는 비인간들은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간주되었고 사회적 현상들은 이러한 행위자들 간의 관계로 파악되었습니다. ‘지구’가 인간 중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행성’을 세계, 대지 및 지구와는 다른 대안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행성적 관점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에 따르면 지구적인 것은 인간적인 시간의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지칭하는 반면, 행성은 인간을 탈중심화하며 비인간적 차원의 광대한 과정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 형식보다 특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의 행성적 사유는 인간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동등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SeMA 옴니버스는 2024년 서울시립미술관 기관의제 ‘연결’과 관련하여 본관과 분관 등 4곳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소장품 기획전입니다. 그중 남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제9행성≫은 모든 것이 초연결되어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과 관계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현시점에 미술관 소장품을 통해 인간이 아닌 생물, 무생물 등 다른 행위자에 주목하고 여기서 촉발되는 질문들을 탐구합니다. 또한 더 이상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며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위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행성을 상상합니다.
전시명 ‘제9행성’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태양계의 8개 행성 외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아홉 번째 행성으로, 인간이 규정하고 이름 붙인 태양계의 여덟 행성과 다른 미지의 영역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기계, 로봇, 자연, 일상의 사물, 비가시적인 바이러스 등 다양한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연결을 그려내고 그동안 망각되었던 가치와 존재들의 의미를 되묻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번성하기 위해 만들어 온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인간의 관점으로 구성한 범주들을 흔듭니다. “지구적인 것 그 자체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차크라바르티의 말처럼 행성적 관점은 인간적인 지평에서 한발 물러나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유할 것을 촉구합니다.
[파트 1] 기계와 인간
전보경과 고창선의 작업은 기계와 로봇의 등장이 인간과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룹니다. 전보경은 4명의 무용가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로봇의 일률적 움직임을 독자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영상 작업을 통해 인간 고유의 특성과 비효율성의 가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갑니다.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 장치를 통해 구현되는 고창선의 작업은 작품과 관객이 맺는 능동적 관계에 중점을 둡니다. 작품 속에서 일시적으로 재설정되는 작품과 관객의 관계는 기계와 인간, 서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을 데이터화하고 시공간적 인식을 재구성하는 기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기계 혹은 기술과 함께 진화하는 예술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파트 2] 침투하는 존재
조은지, 정혜정, 황문정은 자연을 비롯한 유기물, 무기물 등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과 인간의 연결을 드러내고 실재와 가상을 넘나들며 다종의 존재들과 얽힌 생태계를 노출시킵니다. 조은지는 각종 차별적 경계들을 파괴하고 무화하는 수행적 작업을 통해 또 다른 행성을 상상하며 서로 다른 종 사이의 공명의 지점을 만들어 냅니다. 산호의 생물학적 특성에 착안한 정혜정의 구조물 설치 작업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혼종적 신체와 다양한 몸을 그려내며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온 개념들에 균열을 가합니다. 황문정은 도시 속에 존재하는 각종 비인간 존재들을 작가 특유의 로우테크적(low-tech) 접근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작품을 통해 비인간들의 생태계에 주목하고 그들의 환경적 조건을 재검토함으로써 이들과의 공생 방식을 고찰합니다.
[파트 3] 보이지 않는 것
염지혜, 뮌, 정승, 신정필의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가시화되지는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것에 대한 집중적 관심과 탐구를 통해 망각되기 쉬운 존재들의 의미를 밝혀 나갑니다. 염지혜는 2015년 메르스 확산으로 전 국민이 경험했던 공포와 불안을 바탕으로 우리 삶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을 둘러싼 소문과 루머 등으로 극대화된 감각을 노출시킵니다. 뮌은 우리가 몰입하는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사회 정치적 맥락을 들추며 텅 빈 경기장 속에 감도는 긴장감을 통해 군중을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은유적으로 드러냅니다. 정승은 산업 사회를 대변하는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은 자동차를 분해하고 그 파편들을 부드러운 펠트 천과 수공예적 기법으로 재현합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루며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던 부품들은 원래 모습과 다른 크기와 표피를 지닌 존재로 재탄생하여 산업 시스템 속 개인과 작은 존재들의 가치를 조명합니다. 신정필은 시각에만 의존한 사물 인식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재료와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고 그것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되살리고자 합니다.]
12:00~13:00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관람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기간 : 상시
평일(화–금) : 오전 10시–오후 8시, 토 · 일 ·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전시장소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
관람료 : 무료
도슨트안내
※ 6월 도슨트 운영시간 변경 안내
6/1~6/30 매일 오후 3시 30분에 운영됩니다. (월, 수, 휴관일 제외)
단,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는 상설전시실 개관 1주년 기념 특별 도슨트(허명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진행됩니다.
전시부문 : 조각, 드로잉, 아카이브
전시장르 : 상설
참여작가 : 권진규
작품수 : 작품 26점, 자료 88점
주최 및 후원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 후원: (사)권진규기념사업회, 에르메스 코리아
전시문의 : 한희진 02-2124-8970
관람문의 : 안내 데스크 02-598-6245~7
전시 안내
2021년 7월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많은 사람이 권진규의 작품을 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총 141점의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기증작품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조각, 소조, 부조, 드로잉, 유화 등으로 다양한데, 특히 1950년대 주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2022년 미술관은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대규모 회고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2022.3.24.―5.22.)를 개최했습니다. 전시 기간 중에 (사)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공동 개최하여 기존 연구의 오류를 정정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를 냈습니다. 이어 순회전으로 ≪영원을 빚은, 권진규≫(2022.8.2.―10.23., 광주시립미술관)를 공동 개최했습니다.
2023년 미술관은 권진규 작고 50주기를 맞아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 5개의 전시실을 권진규 상설전시실로 조성합니다. 구벨기에영사관과 권진규는 굴곡진 동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대한제국(1897―1910)은 세계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중립국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를 위해 벨기에와 외교적 연대를 맺고, 벨기에는 중구 회현동에 벨기에영사관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중립국화가 실패하면서, 이 건물은 광복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도심재개발사업으로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축되었고, 2004년에는 소유주인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영구무상 임대하여,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권진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한일국교단절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을 어렵게 오가며 조각가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미술관이라는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습니다. 이제 남서울미술관과 그의 작품은 서로를 품으면서 그 존재와 의미를 강화하게 됩니다.
권진규에게 진정한 작품은 자기 주변의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 연구하여 단순히 본질만을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 영원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종래는 이를 무화無化하는 작품으로 자신만의 모더니티를 구현했습니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이한다.”라는 권진규의 시구처럼, 지금은 어떤 제약도 없는 동시대 미술에서 그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해석으로 풀어낼 때입니다. 이에 미술관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상설전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개최합니다. 전시는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7개의 소주제에 맞는 작품과 자료로 구성되어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은 남서울미술관을 통해 권진규 관련 기관을 연결하여 작품과 자료를 공유하고, 연구자들이 새로운 연구결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상설전시는 앞으로의 연구성과물을 반영하여 정기적으로 작품과 자료를 일부 또는 전면 교체하여 변화를 줄 예정입니다. 이로써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권진규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 숨쉬는 집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관람포인트
- 권진규가 작업에 정진했던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새로운 조각’, ‘오기노 도모’, ‘동등한 인체’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7개의 소주제로 작품과 자료를 전시하여 권진규의 작품세계를 집약적으로 선보입니다.
- 권진규 아틀리에의 목조 가구, 선반, 창틀 등에서 영감을 받은 좌대를 배치하여 마치 아틀리에에서 그의 작품을 둘러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작품
기사騎士
<기사騎士>(1953)는 1953년 제38회 니카전에서 특대를 수상한 작품이다. 언뜻 보면 직육면체의 돌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목처럼 말 등에 올라탄 ‘기사’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정면에 보인다. 그 반대편에는 말 머리로 이어지는 기사의 팔과 다리가 묘사되어 있다. 앞쪽은 말머리, 뒤쪽은 기사의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위에서 보면 말머리의 정수리에서 갈기를 거쳐 기사의 머리로 이어지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섯 면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느낌을 준다. 동물의 특징을 단순하게 표현했지만, 고부조로 묘사한 기사의 인체와 저부조인 말머리가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 세부 묘사를 최대한 자제한 대신 돌의 질감을 강조하여 원시성이 돋보인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도모
<도모>(1951)는 일본 유학 시절 만난 후배 도모를 모델로 제작한 두상이다. 권진규와 도모가 함께 찍은 사진 속 얼굴과 비교해 보면 이 작품은 비교적 도모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했음을 알 수 있다. 좌우 엄격한 대칭 구도로 이루어진 이 두상에는 얼굴의 정중앙에 석고 뜨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쪼갬 볼을 꽂았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테라코타를 마치 브론즈처럼 채색한 점이 특이하다. 1959년 그가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편지를 받고 급히 귀국하면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도모가 소장하고 있었다. 도모가 세상을 떠난 뒤, 재혼한 그녀의 남편인 가사이 세고河西成吾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권경숙이 구입해 찾아왔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나부
<나부>(1955)는 권진규가 일본에서 지내던 1955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여성입상>, <보살입상>과 함께 목조로 제작한 작품 중 하나이다. 연인인 도모의 아버지로부터 공양상 제작을 의뢰받아 자신이 머무르던 곳 가까이에 있던 배 나무 밭에서 구한 나무로 작품을 제작했다. <여성입상>이 주문 받은 작품답게 잘 다듬어진 형태인 것과 달리 <나부>는 아프리카 원시 조각처럼 얼굴과 머리 형태가 투박하다. 왼쪽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두고 서 있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선 처리 역시 엄격한 정면성을 벗어나 다리가 향하는 방향과 같은 왼쪽을 향하고 있어 동세가 자연스럽다. 나무를 새기는 과정에서 코가 떨어져 나갔지만, 조각도의 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얼굴과 구불거리는 머리 모양을 격자처럼 새긴 형태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진지한 모습이 엿보인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남성입상
<남성입상>(1953년경, 사후제작)은 권진규가 일본 유학 시절 브론즈로 제작한 작품을 다시 브론즈로 재제작한 것으로, 1950년대 초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배운 조각 기법과 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작은 다소 일반적이지만 작가의 감정을 실은 거친 표면 처리에서 개성이 엿보인다. 특히 고개를 숙이고 사색에 잠겨 있는 표정과 매너리즘 회화처럼 길게 변형시킨 인체가 작가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두 팔을 생략하고, 머리는 작고 단순하게 처리해 수직적인 상승감이 고조되고 있다. 비록 습작기의 작품이지만 인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나부
<나부>(1953-54)는 뒤로 올린 머리를 하고 두 손을 자연스레 내려뜨려 선 여성 나상이다. 두 발은 벌려 서고 몸의 중심을 왼쪽에 주어서 인체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고, 왼쪽 다리가 수직에 가깝게 자리 잡았다. 쇄골의 높이 또한 미세하게 다르고 복근과 대퇴부로 이어지는 근육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자세에 의해 달라진 높이의 견갑골, 왼쪽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표현 등이 권진규가 충실하게 인체를 묘사하는 데 진력하였음을 보여준다. 재료는 석고에 어두운 채색을 올려 테라코타나 금속성의 브론즈 느낌이 나지만, 권진규가 흙으로 형태를 만들었을 때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얼굴은 눈, 코, 입 부분이 거칠게 조각도로 표현한 듯이 자리 잡았다. 표면 전체에 작은 흙 알갱이를 붙이고 이를 펴서 바른 흔적이 작가의 손자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작품 전면에 나타나는 거칠면서도 표현적인 표피는 그의 작품 전체의 특징 중 하나이다. - 조은정, 고려대학교(초빙교수)
자소상
<자소상>(1960년대)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큰 눈, 꽉 다문 입술 등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신의 모습을 마스크로 재현한 작품이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권진규는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이마가 넓고 뒷면이 뚫린 형태이다. 양미간을 찌푸린 표정은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 겪고 있던 내적 갈등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많은 자소상을 제작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이 자살로 마감되었듯이 자소상에는 이 작품처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세계로부터 소외된 자아에 대한 연민이나 자기혐오 등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춤추는 뱃사람
<춤추는 뱃사람>(1965) 은 권진규의 다른 부조 <두 사람>(1964)과 제작 방법이나 표현이 유사하다. 인체표현이 지극히 단순한데, 얼굴은 고대 에게 미술의 키클라데스 인형 얼굴처럼 코만 표현되어 추상적이다. <드로잉 북 3>(1964) 에서 7월 26일 자 드로잉 좌측 하단 그림 아래 “初期キクラテス文化 子持壺ケルノスの?片”, 즉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의 귀단지 케르노스의 파편”, 제일 아래 “마야 문화는 고구려(중국 동북지방)의 벽화와 흡사, 공통점이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라는 메모가 있다. 다음 쪽에는 채색 드로잉과 함께 "女人偶像, 初期キクラテス文化", 즉 "여인상,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 "ハ?プを?く人像" , 즉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에게 문명의 초기에 해당하는 '키클라데스' 문명의 유물인 <여신상 Female cycladic idol>(2,700-2,300 B.C.) , 도판을 보고 따라 그린 것으로, <춤추는 뱃사람>, <두 사람>(1964) 에 적용했다. 여러 면으로 구성된 작품에서 몸통은 흙을 콩알처럼 작게 뭉쳐서 하나하나 붙였고 배는 직사각형 무늬를 흙 위에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탕은 표면을 섬세하게 긁어내는 방법으로 다양한 질감을 담았는데, 이는 그가 따랐던 부르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각 조각은 구워 낸 뒤 합판 위에 석고와 접착제로 고정해서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했다.
앉아 있는 여성
<앉아 있는 여성>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머리 옆에 손으로 무언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드로잉 북에 모딜리아니가 그린 카리아티드를 모사한 드로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리아티드는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기둥으로 사용된 여성상이다. 모딜리아니는 나상의 카리아티드 드로잉을 70여 점 남겼는데, 권진규의 드로잉 북에는 여체의 다양한 동작과 함께 ‘모딜리아니Modigliani’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이 조각의 도상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은 인체 조각들은 신라 토우부터 서양 근대미술까지 다양한 미술 양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동세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것을 풍부한 양감을 지닌 조각으로 제작했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흰 소
<흰 소>(1972)는 이중섭의 작품 <황소>(1953)를 모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권진규는 1972년 3월 개최됐던 이중섭의 15기 유작전을 두 번 다녀왔는데, 여기서 작품 <황소>와 <흰 소> (1954년경)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는 급한 대로 마침 갖고 있던 『황순원 전집』 제2권 (창우사, 1964) 내지에 이들을 드로잉 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에 <황소들>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중섭과 함께 김환기, 박수근 등의 작품을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유족에 따르면 <흰 소>(1972)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중섭의 소만큼 생생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이라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선
<예선>은 당시 신인 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신예선은 1966년 『에뜨랑제여 그대의 고향은』을 출간했다. 권진규는 이 책을 읽은 뒤 그에게 모델을 제의, <예선>을 제작했다. 이는 그가 소설가로 활동하면서도 권옥연, 김흥수 화백과도 예술적으로 깊이 교류했기에 중간에서 권옥연이 다리 놓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 꾸준히 글을 썼고 극작가, 음악인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동시에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 역시 일찌감치 그의 문학에의 열정을 이해하고 내면의 단단함을 작품에 담았음을 알 수 있다.
경자
<경자>는 1967년 홍익대학교 제자 최경자를 모델로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의 틀을 이용해 1971년경 다시 건칠로 제작한 작품이다. 권진규는 일찍부터 건칠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69년 집 근처 부흥교회에서 의뢰한 그리스도상을 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칠 작업을 시작했다. 권진규는 주로 삼베를 사용했는데, 권경숙에 따르면 집에 삼베 이불이 많기도 했고, 그가 삼베가 오래가고 한국의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작업을 했다고 한다. <경자>는 마치 삼베가 다 일어나고 빛이 바랜 듯 보이지만, 실은 그의 건칠 작품의 고유 특성이다. 건칠 작품은 재료가 천과 옻칠인 데다가 속이 비어 가볍지만 작품의 느낌은 내면의 무게감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입산
<입산>(1964-65) 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을 구상하며 그린 드로잉에 ‘1964. 12. 목조木彫 입산入山 ’이라는 글귀가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조로 된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형태를 볼 때 일주문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 들어가기 전 세속의 번뇌를 끊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건축물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권진규의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그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1m가 넘는 대형인 데다 한옥의 결구結構처럼 못을 사용하지 않고 각각의 자재를 서로 연결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간결하고 소박한 형태, 나뭇결을 최대한 살리면서 목재를 우아하게 다듬은 흔적 등 전통 목조 건축에 대한 권진규의 관심이 잘 반영되어 있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불상
<불상>(1970년대)은 시무외인施無畏印(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모습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뜻이다)과 여원인與願印(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린 손 모양으로, 중생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의 수인을 한 불상으로 제작되다가 미완으로 남겨진 목조각이다. 얼굴이 완전히 마무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신체 비율을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5등신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가 크다. 이 작품은 일본 유학 시기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보살입상> (1955)처럼 머리의 중앙부를 봉긋하게 올리고 나발은 묘사하지 않았다. 권진규는 1970년대 제작한 불상에서도 도상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는데, 그것은 불상의 제작 과정이 그에게 제작 과정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통로이자 독자적인 창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경우 얼굴 윤곽은 다 잡혀 있으나 보살을 상징하는 장신구가 보이지 않고,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한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과 같은 불입상을 조각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신수경, 충남대학교(연구교수)]
[권진규(權鎭圭)
목차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3. 귀국 이후
4. 사후의 "권진규"
1. 개요
권진규(權鎭圭, KWON Jin Kyu; 1922년 4월 7일~1973년 5월 4일)는 대한민국의 조각가이다. 일본 체류시기인 1950년대의 초기 작품엔 석조가 많았고 1959년 귀국 후엔 주로 점토를 구운 테라코타와 삼베에 옻칠을 바른 건칠로 환조 및 부조 작업을 하였다. 동물, 여인초상, 자각상, 불상 등 조각 420여점(오리지날 326점, 사후복제 100여점)과 우화 및 데생 55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권진규의 구상적 조소는 인간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초월로 치닫는 정신적 치열함을 보여준다.
2. 생애
2.1. 초년기
1922년 4월 7일 함경남도 함흥부(현 함흥시)에서 사업가였던 아버지 권정주(權定周, 1897. 9. 11 ~ ?)와 어머니 영춘 조씨(永春 趙氏, 1894. 11. 15 ~ ?)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작은 누이 권경숙에 따르면 그녀의 오빠였던 권진규는 명랑하고 장난기가 많은 소년이었다. 1930년 함흥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재학 시절 늑막염으로 1년을 쉬어 1937년 졸업했고, 함흥부에서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는 바람에 다시 1년을 쉬었다. 1938년 4월 춘천공립중학교에 진학하였고, 1943년 3월 졸업하였다.
1943년 봄, 권진규는 친형 권진원을 따라 일본 도쿄도로 가 사설미술학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강제 징용되어 타치카와시에 있던 히타치 제작소 소속 공장에서 거친 노역살이를 하다가 용케 탈출하여 바다 건너 고향인 함흥에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 소유의 인근 과수원에 은신하며 지내던 중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그렇게 2년 여 후에 비로소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는데 누이 경숙은 오빠 진규의 성격이 그 사이 확 바뀌어 과묵하고 침울해졌다고 회상했다.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조선은행에 다니던 누이 권영숙,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던 권경숙과 함께 살았다. 권진규는 마침 인근에 이쾌대가 세운 성북회화연구소가 있어 그곳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이쾌대의 지도 하에 그림 공부를 하였다. 김창렬, 심죽자, 전뢰진 등이 그 때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었다. 이때 그는 일본 유학을 희망하였으나 부친이 아들의 미술 공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으므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기회가 다가왔다. 조각가 윤효중(1917~1967)이 당시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의 마무리 작업을 했는데, 이때 조수로서 약 6개월간 그를 도왔다. 속리산 법주사 대불 조성은 조각가 김복진(1901~1940)이 시작하였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이 기간에 권진규는 김복진이 남기고 간 다수의 작품을 윤효중과 함께 충무로 수장고에서 친견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최열, 2011; 39쪽). 아마도 이 때 권진규는 향후 조각가의 길을 꿈꾸게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일본에서 의사가 된 형 진원이 폐결핵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에 아버지 권정주는 가서 형을 간병하라고 동생 진규를 일본에 보냈다. 당시 한국과 일본 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던 바, 밀항해 들어갔다. 1949년 봄, 형 진원은 동생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권진규는 귀국하지 않았다. 그 때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쾌대의 소개 또는 추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27세였다. 당시 도쿄에는 큰 미술학교가 두 곳 있었다. 하나는 사학인 무사시노미술학교이고 관학으로는 도쿄미술학교가 있었다. 무사시노미술학교는 종전엔 데이코쿠미술학교로 불리었으며 1962년에 무사시노미술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권진규는 1953년 3월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권진규는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로댕 Rodin - 부르델 Bourdelle의 맥을 이어받은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Takashi Shimizu, 1897~1981)를 사사하였다. 1952년 37회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상하였고 1953년 38회 이과전(二科展)에서 특대(特待)상을 받았다. 출품작은 <백주몽白晝夢>,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 <기사騎士>로 모두 석조였다. 당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위치한 기치조지역 근처에는 묘석상이 다수 있었다. 권진규는 묘석상의 석공들로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시미즈 교수는 권진규가 돌로 조각하는 것을 언찮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시미즈 다카시는 주로 브론즈 작업을 하였다. <백주몽白晝夢>, 즉 "한낮의 꿈"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았는데 몸체는 사람이나 머리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마두馬頭 A>, <마두馬頭 B>는 직방형의 묘석을 최소로 깍아 말의 머리를 단순하게 형상화한 돌 조각이다. <기사騎士>에는 말과 혼연일체가 된 기수가 형상화되었다. 이처럼 권진규의 미술대학 시절 작품엔 말(馬)이 많고 이후로도 말이 평생의 테마로 자주 활용되었다.
1951년, 권진규는 같은 학교 서양화과의 오기노 도모(荻野トモ, 1931~2014)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였다. 도모는 진규보다 아홉살 연하의 짧은 머리 숙녀였다. 도모는 인상이 부드러웠지만 생각에 심지가 있었고 독립적 생활력이 있었다. 도모는 미술대학 졸업 후 마네킹 제작, 재봉과 공예 등으로 경제적 수입을 확보하여 평생 자기 그림을 그렸다. 권진규가 1951년 제작한 <도모>는 권진규의 현존하는 작품 중 최초의 것으로 권진규가 1959년 귀국하면서 도모에 맡겨졌다. <도모>는 도모가 2014년 이 세상과 작별하기까지 도모와 함께 하였다. 도모가 간 뒤 진규의 누이 경숙이 <도모>를 확보하여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진규와 도모가 함께 있게 되었다.
미술학교 재학 시기(1949년~1953년), 권진규는 생활이 어려웠다. 1950년 이후 한국전이 발발하고나서는 본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없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진규의 석조 여러점을 사주었다. 다나카의 사후, 누이 경숙이 수년 간 수소문 끝에 다나카 이사장의 딸을 만났고 그의 자택 정원에 놓여 있던 이들 작품들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1953년,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학교를 졸업하지만 연구생 신분으로 학교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진규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자상한 실력파 형 또는 선배였다. 진규는 학교 인근의 싸구려 하숙에서 도모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동거를 함으로써 그들은 생애 최고의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955년, 진규는 도모의 니카타 친가에 체류하면서 <보살입상> 등 나무조각을 하였다. 산책 길에 기와 공장이 있어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이를 계기로 진규는 테라코타를 하게 되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의 빈터에 가마를 만들어 흙을 구웠다. 진규는 영화제작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진규와 도모는 한동안 마네킹 공방에서 같이 일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음에도 진규와 도모는 고급 카페를 출입하며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1959년, 진규는 귀국을 결심하였다. 홀로 된 노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내적 동기가 더 컸다. 조각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지 10년이 넘었지 않은가?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시미즈 다카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기류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 그런데 한일 양국관계가 도모와 같이 귀국할 사정이 아니었다. "일단 혼자 귀국하여 자리를 잡고 양국 관계가 호전되면 도모를 데리러 다시 오리라." 8월 네리마(練馬)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고, 9월 하네다에서 홀로 비행기를 탔다. 진규의 귀국 전날, 도모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일어나 재봉틀에 앉았다. 진규의 작은 누이 경숙의 네 아이를 위해 옷 네 벌을 지었다.
3. 귀국 이후
귀국 해보니 경제적 여건이 기대보다 훨씬 열악하였다. 함흥에서 열 손가락 내에 들던 집이 아니었던가? 많은 재산을 북에 두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서도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머니가 꿍겨둔 돈으로 겨우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3가 256번지 언덕에 가마와 우물을 갖춘 아틀리에를 자신이 설계해서 2년여에 걸쳐 지었다. 기념동상 수주에 대비하여 층고를 높게 하였다. 은사의 은사인 부르델처럼 부자 조각가가 되자. 당당하게 성공하여 도모와 재회하는 진규를 꿈 꾸었다. (이후, 권진규는 기념동상 수주를 한 번도 못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고분 부장품과 고려의 불상, 조선의 왕릉과 왕궁의 잡상을 살펴보았다. 혼자 살다보니 저녁 노을에 고향의 전설과 추억이 주마등에 실려 춤을 추었다. 이것들이 흙으로 형상화되고 가마에서 구어졌다. <해신海神>과 <춤추는 사람>이 아틀리에에 들어섰다.
차츰 자기류의 예술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귀국시 희망적 기대와는 달리 생활 여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수입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덕성여자대학교 등 몇 군데 시간강사 수당이 다였다. 그는 워낙 눌변이었다. 입 발림엔 영 젬병이었다. 자존감이 왜 그리 센지 남에게 작은 부탁 하나 넣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어디에 대고 전임교수직 로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 언감생심, 어디에도 말을 못 꺼냈다. 진규가 문제였다. 어쩌랴, 진규는 진규인 것을.....
도모에게는 너무 미안해 진규는 편지를 못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본 처가에서 도모의 부친이 이혼서류를 보내왔다. 1965년 4월 도모와 법적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진규는 다짐했다. "성공한 조각가로 도모와 재회하리라".
1965년 9월, 서울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출품작은 <조국> (남자 등신대 입상, 석고>, <입산> (목조), <손> (테라코타), <희구> (테라코타 자소상) 등 45점이었다. 전시회에 대하여 사회적 반향이 거의 없었다 (싸늘하였다). 당시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열악하였던 탓이 크지만 권진규의 소조가 구상 위주여서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조류였던 추상 미술에 반하였기 때문이었다. 뜻밖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단번에 고개를 넘은 적이 있었던가? 매 고개마다 재수, 삼수를 하지 않았던가?
1966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출강하면서 여러 여학생들을 모델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였다. <지원의 얼굴>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1967년). 아틀리에가 제법 많은 여인 두상으로 채워져갔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아틀리에가 적멸공간으로 전환되면 도모의 환영이 나타났다.
한 살 차이로 15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서양화가 권옥연(權玉淵, 1923. 7. 4. ~ 2011. 12. 16.)은 여러 면에서 진규와 대조적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상남자였다. 옥연은 프랑스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1965년 일본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가 주선하여 1968년 7월 권진규의 제2회 개인전이 같은 화랑에서 열렸다. 출품작은 <재회>, <춘엽니(尼)>, <지원의 얼굴>, <싫어> 등 테라코타 30점이었다. 소식을 접한 도모가 전시회 첫날 내방하여 <재회>가 실현되었다. 도모의 첫 마디는 "권상, 바보!". 그리곤 눈물뿐이었다. 도모는 재혼한 상태였다. 옥연이 두 사람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도모가 울었고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재회하지 못하였다.
니혼바시 화랑 전시회에 대한 일본 미술계의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출품작 가운데 <춘엽니>와 <애자>가 일본 도쿄도 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제 권진규는 삶의 공간을 일본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측에 비상근 강사직을 요청하였고 긍정적 응답을 받았다.
귀국 후 건칠 작업에 착수하였다. 건칠(乾漆)은 과거 중국, 한국, 일본에서 잘 사용되던 전통적 기법이었으나 근래에는 전통이 단절된 고전이 되어 있었다. 진규는 건칠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삼베에 까만 옷칠을 하여 석고 틀 안에 붙였다. 하루에 수천번 되풀이하며 영원을 기원했다.
무사시노 인사건이 궁금했으나 소식이 없었다. 진규는 시미즈 교수에 재차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가 고개 숙여 남에게 청을 넣은 경우는 그의 생애에서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사건은 대학의 캠퍼스 이전과 관련된 학내 혼란으로 무산되었다. (권진규가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는 항간의 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협의건은 교수직이 아니라 시간강사직이었으며 그나마 성사되지 못하였다.)
1970년 젊은 화상 김문호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명동화랑을 열었다. 그는 미술품 거래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했다. 권진규에게 제작비를 선지불하고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 하였다. 김문호는 권진규에게 월 3만원씩 6개월을 지원했다. 1971년 12월 명동화랑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제3회 권진규 초대전을 열었다. 권진규는 테라코타 24점, 건칠 11점, 석조 3점을 출품하였으나, 기대를 걸었던 건칠 소조가 예술계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 문명대 교수가 주선하여 진행되던 사명대사 동상의 수주 건도 취소되었다. 1972년 들어 작가는 제작의욕을 상실하였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서 목불을 깍으며 마음을 추스리고자 하였다. 새로운 도전과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이규호 학예관이 고려대학교의 품의를 얻어 작품 2개를 15만원에 구입하였다. 그에게는 세상 살다보니 생긴 별일이었다. <마두>와 <가사를 두른 자소상>이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구니>가 따라갔다. 좋은 일이 이어졌다. 이규호의 소개로 알게 된 박혜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교수, 핵물리학 전공)이 선뜻 7만원을 내놓고 소품 2점을 골라갔다. 197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이 좋은 위치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박혜일의 자택에서 안동림(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강사), 김정제(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 학생)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5월 4일 오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재방문하여 미술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와 몇 명의 지인들에 편지를 써 발송하였고 누이동생 경숙(1927~) 앞으로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유서와 30만원을 남겼다. 오후 3시, 그가 예술혼을 불태운 아틀리에에서 세상을 떠났다.
4. 사후의 "권진규"
사후 언론보도는 짤막하게 나왔으며, 그의 시신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묻힌 1973년 5월을 기점으로 망우리 묘지의 안장이 금지되어 사실상 그가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권진규의 자결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그를 다시 보았다. 하루 아침에 권진규는 "비운의 천재"로 바뀌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변덕은 호들갑에 불과하다.
권진규는 그의 세대에서 특별히 운이 나쁘지 않았다. 운이 좋아 도모와 연이 닿았고 운이 좋아 착한 누이 경숙이 있었으며 운이 좋아 진규를 어떻게든 미술계 중앙에 넣고자했던 15촌 지간의 족질 권옥연이 있었다. 평론가 유준상, 박용숙 등은 진작 그를 알아봐주었고, 박혜일, 이규호, 안동림, 김문호 등 우인이 있었다.
사후 15주기인 1988년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엔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에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2009년은 모교 무사시노 미술대학의 개교 8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무사시노가 배출한 가장 자랑스런 동문으로 권진규가 뽑혀, 모교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그리고 서울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2004년,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가 국가등록문화재 제134호로 등록되었다. 2006년, 누이 권경숙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틀리에와 살림채를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http://www.ntculture.or.kr/에 기증하였다. 아틀리에는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영구히 보존하는 시민문화유산 제3호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http://www.ntculture.or.kr/culturalHeritage/3.
권진규 작품을 모아온 미술 애호가 박문덕 하이트문화재단 이사장과 김현식 대일광업 회장은 권진규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누이 권경숙과 권진규기념사업회가 2021년 유작 대부분과 일본에서 회수한 권진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2022년 권진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렸다(3.24~5.22). 또한 누이 권경숙의 손자, 즉 조카인 허준이가 물론 한국인은 아니더라도 필즈상을 수상하는 가문의 경사도 있었다.]
13:00~13:10 서울 관악구 남현동 1130-1 번지에 있는 사당역 6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3:10~13:25 사당역에서 합정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3:25~14:15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에서 합정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0분 소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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