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나무와 도마뱀 (외 1편) / 이 훤 사철나무를 볼 때마다 파충류 같다고 생각했어 입이 좁고 가는 애인이 말한다 올해는 봄이 기어가는 보폭이 넓네 듣던 이가 생각한다 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목을 싸매고 반짝이는 검정 기모(起毛) 내의를 입은 사람이 침대에서 미끄러져 다음으로 다음으로 잎이 가는데 왜 더 많은 힘이 들까 여러 개의 허리를 접으며 도마뱀이 생각한다 살과 가죽 두 개 다 갖고 싶어 새순이 손을 만나며 생각한다 애인과 나무와 도마뱀 척추와 마음을 이어 이끼는 너무 자주 밟히면 자라지 않기로 선택하고 어떤 시간은 자랐던 데서 다시 자라지 않는다 목도리를 벗고 기모 내의를 벗고 옆 사람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집이 자취를 감추고 집이 나타난다 4시 50분 단체 여행 가는 악몽을 꾸었다 버스에서 우리는 일사불란(一絲不亂)하고 혼자 휴게소로 가는 길은 복사되고 붙여지고 복사되고 붙여지고 계속 태어나는데 몸을 자꾸 나누는 돌과 산의 옆구리 그것이 입은 그물 드레스와 4시 2분까지 돌아오세요 잠에서 깨면 몸을 접었다 펴고 화장실에 가고 감자를 사고 덮을 옷을 찾고 처음에는 우리도 여기로 올 줄 몰랐어 모두 잘 때 잠들지 않은 사람이 휴게소에 내려 돌아오지 않는다 수백 마리 개미가 무리 지어 부지런히 하나의 집을 짓는다 실은 각자의 집을 짓는 것 나는 개미였던 적이 없고 그럴수록 화창하게 웃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멀미를 참는다 밖은 화창하고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 잘해주는 게 쉽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지니 4시 50분에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누군가 묻는다 그분 어디 가셨지 주소를 모르기 때문에 집을 외워버리는 사람이 복사되고 붙여지고 복사되고 붙여지고 복사되고 —시집 『양눈잡이』 2022 -------------------------- 이훤 / 시인, 사진가. 2014년 《문학과 의식》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양눈잡이』.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