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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1:1 |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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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1:2 |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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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1:3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놓아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 황제는 정치적으로 약아 빠진 자들이라,
포로 된 백성을 놓아주고 종교적 자유를 선언했다는 것은 우스운 소리다"라고 하면서
에스라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고레스 왕의 실린더가 발견된 후 그들은 더 이상 에스라의 기록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 실린더에는 고레스가 어떻게 539BC에 바벨론의 도시를 저항 받지 않고 취했는가를 보이며
그 실린더 위의 기록의 끝 부분에는 외국 포로에 대한 자유와 사회적 신분을 바로 잡아 주고
그들을 고 국의 땅으로 돌아가 전통에 따라서 예배하도록 한 고레스의 정책이 있다.
즉 "바벨론 거주민에 대하여는...
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제도를 폐지한다...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 보냈다".
또한 아래와 같이 성소재건과 예루살렘 포로귀환에 대하여 적고 있다.
“나는 고레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정정당당한 왕,
사방의 왕이며 위대한 왕 안샨의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
고레스의 손자이며… 테이스페스의 후손이며 (중략)"
"나는 오랫동안 황폐되어온 성소들과
그 안에 있던 신상들을 티그리스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환시켰으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시켰다…
(중략)”
한 때 성경의 역사적 기록은 불신의 뒷전에 밀려 홀로 서 있었으나
고레스의 기록이 발견됨으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확성을 확보했다.
또 우리는 다리오(522-486BC) 왕의 원통 인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훼방자들이 이 일을 방해하고 고레스(559-530BC)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I[530-522BC, 일명 캄비세스(Cambyses)]에게 이 일에 대해
금지 조서를 내리기를 바라는 상소문을 올렸고(에스라 4:7-16),
그래서 다리오(522-486BC)왕 2년 때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후 학개를 비롯한 사람들이 스룹바벨을 중심하여 성전 재건을 시도하자(에스라 5:1-2)
이번에는 또 다른 무리들(에스라 5:3 참고)이 다리오왕에게
성전 건축 금지 조서를 내리도록 상소하였기에
다리오는 古문서들을 살펴 고레스의 명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100%의 재건 자금과 함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렸는데,
그 조서를 내릴 때 여기에 있는 원통 인장으로 인을 찍었다.
이 원통은 굴리면서 찍히도록 사용됐다.
다리오의 도장은 그 뜻이 밝혀지지 않은 고대 페르시아어와 엘람어(Elamite)와
바벨론어로 된 명함으로 새겨져 있다.
2. 고레스대왕의 무덤 비문
고레스는 분명 다니엘로부터 페르시아가 영원할 것이 아니라
200여년 후 그리스의 젊은 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다니엘 2장, 7장, 8장, 9장의 성경예언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오리라고 예상하고 오래 전부터 여기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내가 이룩한 것이니 너는 내 무덤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헬라의 정복자 알렉산더대왕이 이곳 파사르가대 입구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고레스 대왕의 무덤 앞에 당도했을 때 대왕의 지석(誌石)을 발견하였고
그 지석의 글을 읽고 그의 망토를 벗어 대왕의 무덤에 덮어주며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다고 한다.
자료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nkm3927&logNo=130007140809
대한성경-29 메사의 비문과 고레스의 인권선언 | |
크리스찬타임스 2015-08-10 22:35 |
구약성경의 기록이 실제인지 이야기인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유물이 나오면서 구약의 역사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모압왕 메사의 비문(Mesha Inscription)이다. 이 비문은 성경 열왕기하 3:4-5절과 동일한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성경 기록의 역사를 증명한 유물이다. 이 유물은 1868년 독일인 의료선교사 클라인(F. A. Klein)이 발견하여 이동시키려 하였는데, 주민들이 파괴하여 탁본만 전해지고 있다.
이 석비(Moabite Stone)에는 이스라엘의 ‘오므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오므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므리는 오므리 왕조를 이룰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왕이었다. 오므리는 수도를 ‘사미라이’로 천도한 강력한 왕이었고, 모압을 정복하고 억압한 정복자 왕이었다. 모압왕 메사는 오므리가 죽자 그의 아들 아합과 전쟁을 벌려 억압에 풀려나왔다는 승전비가 모압의 석비이다.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 다음에 강력한 왕이 오므리 그리고 여로보암 2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여로보암의 죄’와 ‘아합 왕’에 대한 말씀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오므리 왕조의 뒤를 잇는 예후 왕조도 결국 ‘아합의 죄’를 심판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2세의 아들 스가랴가 즉위 6개월 만에 피살된 후에 반역이 연속되다가 결국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몰락하였다. 오므리가 건축한 ‘사마리아’는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직 이스라엘 사마리아는 약 500여명이 그리심산에 올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한다(참고 요한 4장). 이들이 갖고 있는 사마리아 오경은 가장 오래된 사본이지만,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레스 실린더(Cyrus Cylinder)는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BC559-529)가 제정한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서이다. 현재 세계인권선언의 원형이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벨론 정복지에 있던 관습, 종교 등에 자유를 선언하였다. 성경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혔던 유대인들을 귀환 명령을 내렸고,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스 1:1). 문명의 총화를 이룬 제국이 페르시아이다. 사막에 인공정원, 분수와 연못을 만들어 거주하였다. 가장 적합한 거주 형태였을 것이다. 고레스의 인권정책은 세계역사에서 유일한 것이다. 피정복자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고 활성화시키는 정복자는 세계역사에 없다. 정복자는 지배계급으로 피정복자를 종을 삼아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이 인간 역사이다. 그런데 고레스만 정복지에서 인권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것이 현재 정복자의 아량으로 되었지만, 정복자의 내면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고레스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인물로, 여호와의 목자로 지명된 인물이다(사 44:28, 45:1)
페르시아의 꿈은 서진이었고, 아테네 연합군에 막혀 중단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서 정복되고 지금의 ‘이란’이라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서의 분기점, 세계의 역사를 결정하는 마라톤 전투(BC 490), 테르모필레 전투(BC 480), 살라미스 해전(BC 480)이였다. 세계 역사의 중심축은 서양의 알렉산더로 로마로 이동하였다. 이 때 성경은 에스라, 에스더, 느헤미야 시대인데 성경에 언급이 없다. 예루살렘은 조용하였지만, 때가 차매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세계의 중심은 바벨론이다. 여호와는 갈대아(바벨론)에서 아브람을 불러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이 건축한 예루살렘, 다윗의 아들 예수가 죽은 예루살렘, 예수의 피로 세운 교회가 바벨론을 벗어난 세계의 중심이다. 예루살렘을 대적한 바벨론은 멸망하지 않고 지금도 교회를 유혹하고 박해한다. 역사에 오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Maranat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