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화 - 박라연 - 김유석 - 김용길 - 전원책 - 임영봉 - 이윤학
( 근황 : YTN라디오(FM 94.5) <전원책의 출발 새아침> 진행 中 )
아스팔트에 대한 방관
전원책
다들 집으로 갔다. 조금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옷을 벗기 위해
적당한 분노와 어설픈 취기를 곡 품은 채
헛딛지 않으려고 몸을 흔들며
내일은 양껏 술을 마시세, 그러나
저마다 사나운 개를 기르는 집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스스로 마련한 양식으로
식은 저녁을, 90년대의 어느 하루를 치울 것이다.
흘끔거리며 일제히 문을 닫는 이 평면적인
거리가 텅 빌 때쯤 유독 불켜진 상점이 보인다.
한 사내가 주머니를 뒤져 남아 있는 온기를 털어내고
개가 기다리는 빵을 사서
비스듬히 길을 갔다. 아스팔트 위에
엷게 달빛이 앉고 사내의 발자국은 없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왜 예배당 십자가는 밤새 네온을 켜고 있는가
음란해지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왜 습관으로 이해되는 것인가.
이류의 화장을 한 여자가 천천히 나타난다.
나이를 감춘 옷이 추워보일 뿐
그녀가 기억 속에 남을 이유가 없다.
누가 이 장면을 증언한다면
붉은 입술의 돌출만 말할 뿐이지
양심의 눈으로 그녀의 밀행을 잡지 못한다.
그녀는 불켜진 상점 앞을 천천히 움직인다.
겨울밤 시간이 훨씬 빠르다.
마침내 상점의 마지막 불이 꺼지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가로수들이 눈을 뜨고
세차게 웃어젖힌다.
내일은 꼭 부드러운 술을 마시세.
나는 무장시민이 결코 아니다.
방안의 석유 스토브 옆에 앉아
성에 낀 창틈으로 어렵게 이 사건의 전말을 엿볼 뿐
나는 그녀를 손가락 하나 범할 수 없다.
나는 어떠한 사건에도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석유 스토브 옆에 앉아 이제는 공연히 발을 떨며
조금씩 음란해지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전원책 수상 소감 中 : 나는 법률가가 된 것을 극심하게 후회하였으며 내 문화적 허영심은 다시 시를 쓰도록 부추겼다. 글을 포기한 지 10년만이었다. 인간을 심판하는 일보다 시를 쓰는 것은 확실히 멋이 있는 일이요,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