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고랑
박속같은 마음들이 박꽃처럼 피고 지는 내 고향 박실에 가면 비가 오면 도랑이 되었다가 그치면 길이 되는 오목고랑이라는 긴 골목이 있다. 그 골목 끝 집에는 디올할배가 살았다. 디올할배는 풍수를 잘 보는 한학자였는데 종실의 일을 보았다. 낚시를 좋아하여 비 오는 날 박곡지에서 낚시를 드리운 모습이 배만 없을 뿐 고주사립옹(孤舟蓑笠翁) 그대로였다. 그 할배 앞집에는 수호할배가 살았다. 나중에는 문산아재가 살았는데 문산아재는 하옥할매 넷째 아들이다. 문산아재 앞집에는 홰나무 집으로 불리는 선산할배가 살았다. 선산할배도 학자였는데 아이들의 이름은 거의 대부분 선산할배가 지었다. 마을과 같은 세월을 살아낸 속이 빈 홰나무는 나라에 큰 변고가 날 조짐이 보이면 한 밤중에 슬피 울었다고 하는데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내린다는 전설이 있어 풍찬노숙(風餐露宿)에 가지가 다 부러지고 껍데기만 남았지만 지금도 꽃을 피우며 골목을 지키고 있다. 그 앞집에 하남할배가 살았고 대를 이어 관동아재가 살았다. 관동아재는 디올할배 뒤를 이어 일가들의 만년유택을 잡아주곤 했다. 그 뒤를 이어 지금은 필자의 수필에 주인공이 된 “칠보형님”이 살고 있다.
관동아재 집 건너편에는 연춘아지매가 살았고 칠보형님 앞집에는 금(錦)이 아버지인 지조아재가 살았다. 금이 어머니는 엄마와 친했고 어릴 때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서 금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연춘아지매는 친정이 칠곡 하납실인데 친정 골의 처녀를 신호할배 아들인 내 아버지에게로 중매를 해서 내가 태어났다. 연춘아지매가 없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설이 오면 연춘아지매 사랑에 엄마와 같이 해를 거르지 않고 세배를 다녔다. 연춘아지매 앞집에 판개아재가 살았고 건너편에 서욱할배와 지걸아재가 살았다. 선산할배 둘째 아들인 판개아재가 대구로 이사를 가자 내 종조부인 학동할배 바깥마당 헛간채에서 살던 아버지가 판개아재 집을 사서 오목고랑 사람이 되었다. 서욱할배 앞집에는 고동아지매가 살았고 그 앞집에는 덕산형님이 살았고 덕산 형님 옆집에는 양촌아지매가 살았다. 딸 다섯(?)을 내리 둔 양촌아지매 집 마당에서 섭수리 누나의 언니 되는 큰 누님(주희)이 시집을 간다고 온 동리 일가친척들이 모여 잔치를 했는데 장닭 한 마리와 암탉 한 마리를 붉고 푸른 비단보자기에 사서 초례상에다 올려놓고 꼬꼬재배를 시켰다.
초례상에는 놋그릇에 쌀을 고봉으로 담아서 올렸는데 느닷없이 귀한 자리에 오른 닭이 놀라서 쌀을 쪼아 먹다가 버둥거리다가 했는데 그 생쌀이 액(厄)을 쫒는 양밥(良法)이라며 상곡댁이 내 큰어머니가 한 움큼 얻어 와서는 꼭 냄새나는 정낭에서 먹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며 주었다.(지금 생각하니 비위를 튼튼하게 하려는 옛 어른들의 지혜였던 것 같다). 양촌아지매 뒷집에 성호아재가 살았고 오목고랑이 시작되는 첫째 집에는 키 크고 목소리가 괄괄하던 태촌할배가 살았는데 비만 오면 도랑물이 넘치는 골목 안에 살던 우리 아버지가 그 집을 사서 오목고랑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 집에 뿌리를 내려 살던 어머니의 택호가 연산댁인데 이제는 두 분 다 아니 계시고 머나먼 이국땅 신사의 나라에서 온 영국 아주머니(Mrs. Hwang)가 살고 있다.
도랑도 되고 길도 되는 그 긴 고랑을 마을의 중심선으로 삼아 학우정할배 이름을 딴 서당을 세우고 웃각단 아래각단 하며 입향조 이래 450여년을 동래정씨 씨족들이 대동아 전쟁, 6.25 한국전쟁, 5.16혁명, 월남 전쟁, 새마을 운동을 거치며 명줄을 이어냈다.
누가 만든 길인지도 모른 체 저 홀로 흘러 가버린 세월을 지키다 속이 텅 비어버린 회화나무가 서있는 고향마을을 문화마을로 만든다며 작년부터 벽화를 그리고 있다. 마을 이장 옥표가 ‘아래각단’ 길섶에다 꽃을 심고 마을 어귀에 버려진 연자방아 돌을 가져다가 꾸며놓자 군수님이 비슬산에서 캐낸 공룡알 바위도 주고, 벽화도 그려주고, 저수지 둑에는 꽃도 심어주고 하더니만 올해는 ‘웃각단’에 까지 벽화를 그리고 있다. 골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깊어지는가. 기왕 벌이는 일이니 왜정시대(일제강점기)에 온 동민이 괭이와 바지게로 흙짐을 져 나르며 부역(賦役)해서 만든 박곡지 둘레길도 만들어 주고, 골바닥, 도장골, 불뫼덩, 너븐덩, 스무실, 골안 같은 옛 지명도 등산로 길에다 살려서 정 깊었던 그리움들을 되살려 주면 고맙겠다. / 수필가 정임표
* 옛 어른들의 택호는 귀에 익은대로의 기억이라 부정확 할 수 있음.
<향토 사학자 정세영님의 자문>
1) 디올 : 하빈면 대평리 길 건너 마을 "대월"
2) 하옥 : 지금의 동곡 고개를 중심으로 하남/하서/하복/하동으로 불림
3) 하남 : 지금의 문산리를 일컬음
4) 태촌/태전/태오 : 지금의 대구 서변동 일대
5) 내실 : 지천면 신리
첫댓글 시골이 고향인 사람이 때로 부러운 이유는 동네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 물론 그 이야기를 작품으로 엮어내는 작가의 실력도 만만찮지만.
오목고랑~~제목에 끌렸습니다~~~^^*
오목고랑 주위에 살고 간 사람들이
졸졸 정겹게 흐르는 오목고랑 물소리 같고
한 분 한 분이 윤슬의 오목고랑 물빛 같았습니다~~~^^*
끝에 가서 내용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 버려 감동도 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비가 오면 도랑이 되었다가 그치면 길이 되는 오목고랑이라는 긴 골목이 있다.'
그러고 보니 비가 그치면 바로 길이 되니 윤슬이 보일 리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글을 읽으면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 윤슬로 반짝이는 도랑을
사람 살이로 상상하면서 참 정겹게 읽었었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