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9일 토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 라테라노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면서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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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3-22)
He was speaking about the temple of his Body. Therefore,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he had said this, and they came to believe the Scripture and the word Jesus had spoken.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의 점령으로 무너졌으나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시를 보여 주신다. 에제키엘은 특히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자연과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것을 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이기도 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장삿집으로 전락한 것을 보시고 분개하시어 장사치들을 쫓아내신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 이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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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명절로, 이때에는 남의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이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였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그날에 200만 명 넘게 모였고, 제물로 바치는 양도 30만 마리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장사치들은 제물로 쓰일 가축의 값을 턱없이 올려 받아 폭리를 취했으며, 성전에 바쳐야 하는 세금도 외국 돈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에 환전상들의 횡포가 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순례객들은 부당한 거래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불의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전에서 쫓겨나시는 것 같은 상황을 보고만 계실 수 없으시어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이 두 가지 의미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46년 동안이나 지었다는 예루살렘 성전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또 다른 성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깨닫는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위한 것만으로 가득할 때, 정작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참된 거처가 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귤 1박스를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 다 먹기에는 분명 많아서 나누어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어떤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나누는 것을 뒤로 미루고 저는 저에게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받은 귤은 그대로 부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부엌에 갔다가 몇 개의 귤이 물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더 급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약간 추운 창고에 박스를 옮겨놓았습니다. 이렇게 추운 곳에 두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며칠 뒤, 저는 단 한 개의 귤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서 그대로 버려야만 했지요.
물러버린 몇 개의 귤이 전체의 귤에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저의 안일한 마음, 게으른 마음이 맛있는 귤을 아깝게 모두 버리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인간 사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은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칩니까?
몇 마리의 작은 감기 바이러스가 나의 하루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200원짜리의 물이 백만 원 이상을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노트북 위에 엎지르면 가능합니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작은 것들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몇 몇 사람을 통해서 전체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즉, 나쁜 영향으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으로 이 세상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대사제와 교회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만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온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있었지요. 우선 희생제물을 바칠 동물들을 팔았고, 그 동물을 파는 사람들에게 자릿세를 받아냈습니다. 또한 이 동물을 사기 위해서는 화폐를 지불해야 하는데, 성전 안이라는 이유로 이방인의 화폐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전을 통해서도 막대한 부를 모았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요?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폭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폭력은 정의를 세우기 위한 폭력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얼마 뒤, 예수님께 폭력을 휘두르지요. 그러나 이들의 폭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의한 폭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의가 넘치는 성전이라면, 그래서 찬양을 드리지 못하고 기도할 수 없는 곳이라면 당장 허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까요? 내 욕심 채우기에 급급함으로 인해 주님을 제대로 모실 수 없는 곳을 내 안에 만들고 있다면 지금 당장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혼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리석음 때문에 하늘 자체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호라티우스).

참된 성전 봉헌
-정희완 신부-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모든 생명이 자라는 곳, 모든 것을 살게 하는 기쁨과 평화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건축물을 지어 주님께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재물을 바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란 저마다의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헛된 욕망을 던져 버리고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과 작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은 내 마음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싹트게 하는 일은 관계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나와 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흐르게 하는 일은 참된 연인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따뜻함과 나눔의 정이 흐르게 하는 일은 진정한 공동체의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깨끗한 마음 안에, 따뜻한 연민의 실천 안에, 배려와 신뢰의 태도 안에, 속 깊은 이해와 사랑의 관계 안에,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
- 황영준 신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당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미사만 끝나면 5분도 안 되어 사람 하나 없는 빈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단체 회합과 봉사 때문에 교리실과 회합실은 사람이 바글바글거리는 데도 성당은 비어 있습니다. 때로는 성전신축기금 마련이다 뭐다 하면서 마당에서 물건을 파는데, 장사하는 재미에 미사도 빼먹고 장사에만 올인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탄제 준비한다, 캠프 준비한다.’ 하면서 교사들과 청년들이 하루 종일 성당에 머물러 있지만 정작 중요한 미사 시간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지. 어느 성당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 평일 낮엔 이용객 ( ?)이 없어 문을 걸어 잠근 성당도 많습니다. 가끔 성당 안의 예수님께서 우울증에 걸리시지 않을까 하는 장난 섞인 생각도 해봅니다. 성당은 아름답지만 우리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미사만 끝나면 성당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신자는 많지만 오로지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반대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요 ? 내가 몸담고 있는 성당이 아름다운 성당이 되려면 먼저 내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온 정성과 열정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하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면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성당입니다. 성당 주변에서만 분주하고 열심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조용한 성당 안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고 찾아가는 성전
-김찬선신부-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로부터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분의 집이 성당 건물로 알고 폐허가 된 성당들을 다미아노 성당서부터 시작해 셋이나 고쳤습니다. 그 후 하느님의 집이 건물로서의 성당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것임을 깨달았지만 성당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성당(교회)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기에 다음과 같은 말로 단순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는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래서 어디서건 성당이 보이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늘 빗자루를 갖고 다니며 더러운 성당이 있으면 청소를 했습니다. 그에겐 성당이 다른 어느 곳보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성당에서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 곳이 어디든지 계신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범신론자로 여길 정도로 모든 것 안에 깃드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바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바위를 조심조심 걸었고, 구더기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밟히지 않도록 길 가운데 있는 구더기를 길가로 옮겨놓았으며, 종이쪼가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에 종이쪼가리를 쓰레기로 방치하지 않고 고이 모셨습니다.
이런 피조물이 주님의 성전이 되었으니 우리 인간은 더더욱 주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선 자기가 성전이 되도록 자기 안에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였다고 전기는 얘기합니다. 이는 성녀 글라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봉쇄를 동정녀의 봉쇄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노의 영성에 따른 것이지요. 신부인 동정녀들은 신랑만을 위한 봉쇄구역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거기서 신랑과만 만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글라라는 이런 봉쇄를 부정하지 않지만 봉쇄를 어머니의 봉쇄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자궁이라는 작은 봉쇄 안에 주님을 모심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는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자궁이 주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님의 성전이기에 그 어떤 속화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나는 성전 정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파괴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나는 안팎의 두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성당이 사교장이 되거나 장터가 되지 않도록 잡스런 것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과 자궁이 하느님을 위한 성전이 되도록 하느님 아닌 것들을 품지 말아야 하고 있다면 치워야 합니다.
허물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발생하지 않으면서 겉치레만 화려한 눈에 보이는 성당 건물은 헐어버리고 내 안에 성전을 세움으로 나를 살아있는 성전으로 세우고, 나를 걸어가고 찾아가는 성전으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의대에서 서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학생이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모습을 본 한 학생이 말합니다.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이야!”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저으며 말합니다.
“아니야. 저런 자세가 나오는 것을 보니 디스크가 틀림없어!”
그리고 둘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옥신각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에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저기……. 화장실이 어디죠?”
이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이유는 속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은 서로 자기의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부족함을 늘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의 봉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희생동물들이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성전에 몰려있었지요. 따라서 하느님의 집이라는 성전이 얼마나 지저분했을까요? 완전히 동물시장 그 자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환전상까지 끼어서 각종 이권이 개입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한 모습이 옳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하며 따지고 있지요. 이렇게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성전 정화의 이유가 충분한데, 그들의 어리석음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전은 눈으로 보이는 외적인 성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의 성전 역시 우리가 정화해야 할 대상입니다. 내 마음에 오신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내 마음을 받아들이실 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주님의 집이라고 하실지, 아니면 각종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강조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굴이라고 하실지…….
이제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 몸이 거룩한 성전,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살아온 날이 아니라 살아온 날의 추억이다.

<교회=비틀거리는 공동체>
-양승국신부-
요즘 저희 수도회에서 자주 강조되고 있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통합’, ‘조화’ 같은 단어들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통합,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의 통합, 정신과 물질의 조화, 기도와 활동의 조화, 신앙과 삶의 조화...
오늘 날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참으로 불행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중요시합니다. 그들의 삶 안에는 빼어난 외모만 있습니다. 조각 같은 육체만 있습니다. 탁월한 지적 능력만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너무나 부실합니다. 맑은 영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올곧은 정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비심, 배려심, 측은지심, 양보, 희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조화와 통합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모는 왕자요 공주 같지만 알맹이가 쏙 빠졌기에 허깨비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조화요 통합의 삶입니다.
과대망상이란 증세가 있습니다. 이 증세는 자신의 지위, 재산, 능력, 용모, 혈통 등을 과장하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증상입니다. 예를 들어 전혀 아닌데 자신이 너무 잘생겼다고 믿는 증세입니다. 혹은 자신이 탁월한 영적 능력, 투시 능력, 예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이비 교주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즘 이러한 증세의 대표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누구라고 직접 거명하지 않아도 잘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반대의 증세가 있습니다. 자기혐오 혹은 자기비하증, 자기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증세입니다. 자신의 강점, 경쟁력, 긍정적인 측면은 완전히 뒷전이고, 오로지 자신의 약점, 부적절함, 한계, 어두움, 취약점에만 매달리는,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스타일입니다. 인생이 정말 괴롭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자기낮춤과 겸손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덕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혐오와는 엄연히 구별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 머무름으로 인해 완전해집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큰 죄인이지만 교회 안의 성사로 인해 거룩해집니다. 우리는 정녕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아 ‘교회’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진정한 교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님은 “여러분 각자가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규정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모자라고 나약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비틀거리는 공동체(community of struggling),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나눠지는 곳, 예수님의 정신과 영성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결국 매일 예수님 말씀이 육화되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영해지는 곳,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인간, 참으로 불완전하고 망가지기 쉬운 흙부스러기 같은 존재이지만 뜨거운 하느님 사랑으로 인해 성화의 길로 나아가며 하느님의 지체, 곧 성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인간, 때로 갖은 죄와 과오로 시궁창처럼 더럽혀지고 방황을 거듭하지만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힘입어 순결한 교회로 거듭납니다.
인간, 너무나 유한하고 나약한 상처투성이뿐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섬으로 인해 아름다운 교회로 건설됩니다.

거룩한 성전
- 장동현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탁자를 엎어버리십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진정으로 거룩한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이 갈망한 거룩한 성전은 모든 더러움에서 늘 정화되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온 마음과 진실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하느님 현존이 지속되는 지성소였습니다. 율법 공부의 중심지였고 구원이 풍요롭게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 거룩한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드러나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린 성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신이 그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합니다.(1코린 3, 16)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거룩한 성전이 파괴되지 않도록 성전을 잘 보존하라고 권고합니다. 내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가 다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안에서 끊임없는 정화가 일어나고 하느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현존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의 무리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축성하고 그 장소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것이 실현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셀 수 없이 많은 뽑힌 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영원히 노래할 것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
-전삼용신부-
점심을 먹고 방에 올라와서 잠깐 묵상을 한답시고 창문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습니다. 창문 밖은 훤히 트여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비가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빗물은 창문에도 튀겨 조금씩 시야를 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점차로 먼 곳이 아니라 물이 튀긴 창문에 머물기 시작하였습니다. 억지로 먼 곳을 바라보려 해도 창문의 물방울이 시선을 더 잡아끌었고 더 이상은 먼 곳의 경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쳐있었고 창문은 말라있었습니다. 밖에는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 먼저 보게 되나봅니다. 내 앞에 있는 창문을 깨끗이 닦지 않으면 밖은 볼 수 없고 창문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운전을 하는 경우라면 더 위험하겠지요. 군대에서 운전병을 했는데 한 번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눈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 보았지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돌아가야 했기에 조금 운전하고 가다가 눈이 차 유리에 쌓여 앞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면 차를 멈추고 내려서 유리를 닦고 또 다시 운전하고 가다가 또 멈추고 하는 것을 수 없이 반복하며 부대에 복귀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이 이유가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입니다. 당시 성전도 기도하는 집이었고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장사꾼과 속임수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먼 곳에서부터 제물로 봉헌할 소나 양을 끌어 올 수 없어서 그것을 팔아 돈으로 가져왔는데 성전에 오니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고작 다리 한 짝이 불구인 비둘기 한 마리라면 그것을 바치면서 어떻게 기도에 집중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사기 쳐서 얻은 수익의 얼마는 그 곳에서 장사를 하도록 허락한 성전 사제들에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렇게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정화되면 사라졌던 표징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몸이 죽어서 땅에 묻혀 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하리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 바로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이 정화되지 않으면, 즉 그들 마음의 성전을 깨끗이 닦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셔도 그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 표징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세상 것들로 더럽혀져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떼라노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떼라노 성전은 베드로 성전이 증축되기 전까지 천년 넘게 교황님이 계시던 성당입니다. 그 앞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크게 서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 크고 부자였고 프란치스코는 거지였습니다. 처음엔 프란치스코를 이해하고 알아보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가 이 허물어져가는 라떼란 성당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꿈을 꾸신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헌을 받아들이고 인준하여 줍니다.
우리 각자도 작은 성전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사시고 또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눈을 빼앗긴다면 예수님의 채찍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했듯이 성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전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 더럽혀져서 하느님의 집이라기보다는 정화가 필요한 집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보고 항상 우리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정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성찰
-김찬선신부-
서울 지역 프란치스칸 모든 가족은 프란치스코 회칙 인준 800 주년을 기념하여 11월 한 달, 매주 금요일을 프란치스코 요일로 정하고 말씀의 전례 안에서 프란치스코 영화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폐허가 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는 장면입니다. 쓰레기와 먼지에 파 묻혀 있던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십자가에 덮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폐허가 되었어도 주님은 거기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주님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기에 그 성당에서 떠났고 그래서 성당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폐허에서도 주님을 발견하고는 쓰레기 하치장을 다시 성당으로 바꿉니다.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고린토 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비록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자의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의식을 버리는 순간, 나는 성전이 아니라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는 쓰레기를 안고 사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며칠 전, 미사를 드릴 때 심사가 편치 않았습니다. 전날 들은 얘기가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미사 중에 그까짓 하찮고 부정적인 상념이 하느님 대신 저를 계속 차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이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니 신통하게도 그렇게 저를 어지럽게 하던 상념이 사라지고 내적 평화가 다시 왔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저희 회헌을 보면 공동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라고 얘기합니다. 비록 저를 비롯하여 형제들이 프란치스칸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과 포기는 악마가 가장 노리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실망은 사랑이 없는 교만한 욕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공동체와 형제를 사랑한다면 실망이란 없고 포기란 더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워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반대로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는 형제와 공동체를 사랑하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거기 아니 계시고 따라서 주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 많고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그 죄와 허물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은 계시고 그 공동체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
-양승국신부-
돌아가신 저희 아이들의 부모님들을 위한 연미사를 드리기 위해 명단을 좀 적어내라고 했습니다. 제대 위에 놓여진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편부 또는 편모 슬하에서 갖은 설움을 겪으며 살아온 아이들이 불쌍해서 혼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대 교회의 역할, 저의 수도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더욱 뚜렷하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고통 당하는 이들의 상처를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손길",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부여받은 첫 번째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는 지상의 나그네들의 공동체",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 "거룩함을 지향하지만 정화의 여정이 필요한 죄인들의 모임."
오늘날 우리 교회가, 또 수도회가 힘겹게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앞에 "희망의 징표"가 되고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진정 부끄러움만 앞섭니다. 양적인 팽창만을 위해서, 지독하게도 돈만 밝히면서 가장 소중한 손님인 가난하고, 천대받고, 죽어 가는 하느님 백성들은 철저하게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본당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제, 수도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위로의 손길을 느낍니까?
진정으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매일 기득권과 허세와 과감히 결별하고 보다 가난한 이웃을 향해 기꺼이 내려가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욕과 가식,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성전을 철저하게도 뒤집어놓으십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번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하느님과의 깊이 있는 내적인 만남은 뒷전인 교회, 허례허식이 판을 치는 교회,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겨우 마지못해 최소한의 신앙의 의무만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교회에 신물이 난 예수님께서 그릇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진정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늘 순례하는 공동체인지,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고, 그릇된 과거와 과감하게 결별하는 가난한 공동체인지 시시각각으로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쉐드 헴스테더는 “사람은 하루에 5~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생각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생각 중 85퍼센트가 부정적인 것이며 단 15퍼센트만이 행복하고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력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결론은 부정적인 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결국 사람은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행복해지기 위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불행해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노인이 길을 가는데 한 청년이 울고 있습니다. 노인은 이 청년에게 묻습니다.
“이보게, 청년. 왜 우시오?”
“제가 이 언덕에서 넘어졌는데 팻말을 보니 여기서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고 적혀 있으니 기가 막혀 그럽니다. 제가 3년밖에 못 산다니요……. 엉엉엉.”
이 말을 들은 노인이 껄껄껄 웃으며 위로합니다.
“그까짓 거 뭘 그리 고민하시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30번만 더 넘어지면 되잖소?”
1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사니, 30번 넘어지면 90년밖에 못 산다는 이야기겠지요.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해결책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불리하고 유리한 상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습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면 모든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선 심리학자의 말처럼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더욱 더 안 좋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장사꾼과 환전상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을 갖고서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예수님께서는 사흘 안에 다시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러나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바로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임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놀라운 말씀과 행적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으셨던 예수님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안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갇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놀라운 손길 또한 내 생각에 갇혀서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의 긍정적인 생각만이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체험하게 만듭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억지로라도 가져 보세요.

사랑·기도로 지은 하느님의 집
-배광하 신부-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
육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에 대한 수식어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 ‘모든 교황님들의 착좌식이 있었던 성전’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0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 되었던 로마 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세워진 성전이라는 의미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끔찍하고도 잔인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는 서기 313년 밀라노 관용령에 의해 끝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280?~337)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310~314년 재임)에게 자신의 라테라노 궁전을 선물로 주며 함께 성전까지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이 같은 성전이 324년 ‘실베스테르 1세’(314~335년 재임) 교황에 의해 봉헌되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지 불과 11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가 우리 한국 땅에도 있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의 세월 동안 길고 모진 박해 끝에 한국천주교회 첫 신앙의 모태인 명동(당시 명례방)에 명동 대성전이 봉헌된 것입니다.
1898년 명동 대성전이 봉헌되었으니, 신앙의 자유를 찾고 12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전국의 모든 신자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대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지고 보면 라테라노 대성전이나, 명동 대성전만 그러한 감격을 누렸겠습니까.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성전들이 모두 그 같은 기쁨과 감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하여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처음 건립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분명 달랐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성전 건립 기도> 중에는 이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온갖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주님의 뜻을 소홀히 했나이다.”
처음 성전을 건립할 때엔 욕심과 오만이 없었습니다. 이는 영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육의 성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허물라 하신 것입니다.
영의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보시며 불같이 역정을 내시고 성전을 허물라 하셨을 당시 유다인과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아가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 하셨을 때는 더더욱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예수님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육의 성전이 아닌 영의 성전, 마음의 성전을 강조합니다. 이를 사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우리말에 ‘더럽다’라는 말은 ‘덜없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무엇인가가 남아 있을 때, 그 상태가 더럽다는 뜻이 됩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였는데 설거지통에 오물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우리는 더럽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 안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미련과 욕망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그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마음 역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에 영의 성전, 하느님의 성전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시 성전 건립 기도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
저희가 힘을 모아 주님을 예배할 새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룩하여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고자 하오니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며,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전은 소중하고 귀한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 건립 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 같은 성전이 건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나눔과 눈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 고귀한 성전에 걸맞는 영의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탐욕과 착취의 장사꾼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성전에서 흐르는 생명수 "
-이기양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며 이상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인 성녀 축일은 지내도 성당이나 건물 축일은 잘 지내지 않습니다. 도대체 라테라노 대성전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 규모이며 어떤 의미가 담긴 건물이길래 해마다 이렇게 축일을 지내는지 의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큰 목소리로 전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는 차차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까지 들어가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곳에서 호된 박해를 받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황제 숭배 사상이 팽배했기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대대적 박해가 계속 이어졌는데 그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로마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고 희망을 주기 위해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대대적 박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교황께 자신의 별궁을 선물했고, 324년 11월 9일에 축성식을 했기에 오늘을 축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교황은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라테라노 대성전에 머무르셨고, 이 성전은 전 세계 교회 일치의 상징이 됐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인 오늘, 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 소굴로 만드는 이들을 호되게 야단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몸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건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며 사람 자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성당'하면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모임, 믿는 이들 모임 자체도 교회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전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오늘 제1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움터나고 숲이 번창하며 온갖 생명들이 번성합니다. 심지어 이 물은 사해의 죽은 물마저 단물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변화됩니다. 이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물이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물을 지닌 나를 통해 집에 생명이 움터 나오고, 나를 만나는 이웃을 통해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지며, 내가 나가는 회사가 나를 통해 빛과 정의의 집단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수로 변화한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몸을 모신 신자들 공동체가, 화려하게 치장한 성전보다도 주님의 현존을 더 강렬하게 드러내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지숙-
요한은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가지 표징을 사용해 보여주는데, 카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사건이 이에 해당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도 전하지만 거기엔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한 시기이고, 여기서는 공생활의 시작, 곧 복음서 맨 앞쪽에 배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는 더 정확한 편이지만 요한복음은 나름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지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2,13) 예수님께서 참된 파스카의 표지를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넌지시 비춥니다. 이스라엘 삼대 순례 축제인 과월절(파스카)·오순절·초막절이면 열세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를 세 번 맞이합니다. 세 해에 걸쳐 공생활을 보내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나뉘는데 이스라엘인의 뜰에는 선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십니다.(14절) 성전이 장사치들로 들썩이는 시장바닥 같습니다.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에는 유다인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 있어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세켈로 바꿔야 했습니다. 환전꾼들은 여기서 약간의 이익을 챙기고 동전을 교환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염소와 양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비둘기들은 정신없이 파닥거리며, 사세요 파세요 하는 흥정과 돈 바꾸는 소리가 성전 뜰에 가득합니다.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은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꾼들이 벌려놓은 상을 뒤엎으십니다.(15절)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셨나 봅니다. 이렇게 화내시는 예수님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셨는데…. 예수님께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69,10) 분노하실 만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말로만 명령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의 제물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을 실현하십니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시장 바닥은 좁고 시끄럽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이 어울리는 곳이지만, 성전은 넓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경건한 곳이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놀라 반문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18절) 유다인들은 합당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요구에 예수님이 꼭 응답하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뒷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표징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논쟁 대목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으로 요한 특유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둡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 대왕이 사십육 년이나 걸려 증축한 것입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20절) 유다인들이 생각한 성전과 예수님이 생각한 성전은 서로 다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사흘’ 안에 보여주시겠다고 장담하십니다. 그들이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1절)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죽음으로 ‘파괴되었다가’ 부활로 ‘다시 세워질’ 예수님 자신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말씀을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겠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2절)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고 나타나시는 곳입니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을 통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통해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성전 정화 이야기는 구원의 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인간의 내면에서 실현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의 주제는 정화입니다. 시장 바닥 같은 성전은 한편으론 인간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물의 피로 성전을 정화하듯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 육신과 내면의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특히 인간 존재를 기만하는 온갖 것에서 우리를 정화하셨습니다. 인간 내면에 뿌리내린 죄와 충동과 욕심 등 나쁜 모든 것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내적 무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육신도 내면도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됩니다.

새벽을 열며
바다가재는 밀물 때 해변으로 밀려오면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데리고 가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든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자기를 데리고 갈 바닷물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하지만 우리 역시 이 바다가재의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내 운명 속에서 그리고 내 고통 속에 자신을 그저 내 맡기는 바다가재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처지를 그저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갈 수 있도록 환경만을 지정할 뿐, 알맹이를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성전에 사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즉, 사랑을 채워야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느님의 몫인양 아무것도 안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은 포기하고, 세속적인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보실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예수님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지요.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실까요?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들의 몸 또한 성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모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들의 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어떤 재물과 명예만 쫓는 성전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성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또 다른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혹시 사랑이 아닌 다른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이 모습은 내가 세운 성전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채찍을 들고 나타나시지는 않을까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합시다.
빠다킹신부

가는 정 오는 정
-서현승 신부-
수련기 때 어느 신부님과의 면담 중에 ‘조건 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사랑….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저로서는 체험 속에서 쉽게 실감할 수 없는 사랑의 개념이었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수많은 관계 안에서 ‘거래’의 개념에 익숙한 사람이 하느님의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따금 농담처럼,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거래의 개념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고, 나아가 가는 정 오는 정의 미덕도 한국 사람이면 다 가진 기본 심성 아니냐는 얘기도 하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래의 관계는 의외로 참 많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루는 기도 안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이따금 발견하곤 하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모습은 아마도 그러한 무조건적인, 그야말로 선물로서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체험해가는 과정에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한 사랑에 그나마 가장 닮아 있는 사랑이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의 장사치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들 마음 안의 성전, 하느님께서 거처하실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서의 성전을 꿈꿔봅니다

한 사람의 힘
-김광태 신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결법에 따라 거룩한 돈인 옛 히브리 화폐로 성전세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환전이 필요했고, ‘이방인의 뜰’ 앞에서 바꾸어 주니 성전의 거룩함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상인들 역시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제물로 바칠 동물을 구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성전의 고상한 사제단이나 상인들이나 순례자 모두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예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탁자를 엎어버리셨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어졌을까? 이 일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결국 로마의 침공으로 성전이 없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둘 수 없으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셔야 했다. 그러나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이 일로 제거된 것은 성전 상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이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분 혼자서 시작하신 일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 일은 늘 한 사람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당신 몸을 성전에 비유하신다. 우리의 몸도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라면, 이 속에 은근슬쩍 잡상인들이 끼어들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것들을 몰아내는 일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고 슬그머니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한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 김종규 신부-
오늘은 성 베드로 성당, 성 바오로 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 4대 대성전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라테라노 대성전, 정확한 명칭은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입니다. 라테라노 대 성전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머리”라 일컫는 데, 그 연유는 이러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의 자유 칙령을 반포하고 나서 당신 교황이었던 멜키아데스에게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스타와 자신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살고 있던 궁전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 궁전의 일부를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라테라노 대성전의 모태가 됩니다. 곧 라테라노 대성전은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공식적인 교회로 박해 이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것입니다. 324년에 실베스테르 교황이 성전을 봉헌하여 로마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아직 이 안에는 로마 교구 교구청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는 특별한 곳이 하나있는 데, 이른 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유의 세례당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례를 받기 위해 만든 곳으로, 황제가 세례를 받기 전에 그만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에 전염을 두려워한 황제는 몰래 산에 숨어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황제를 찾을 길이 없던 실베스테르 교황에게 꿈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나타나 황제의 거처를 알려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곧 바로 교황은 황제를 찾아가 겨우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게 하였는 데, 놀랍게도 세례를 받자마자 황제의 나병이 깨끗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유의 세례당’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라테라노 대성전에는 12사도들의 대리석상과 여러개의 소성당이 있고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분명 라테란 대성전은 최초의 교황의 거처이며 첫 봉헌된 성전이기에 그 역사적인 의미는 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라테라노 대성전의 축일을 기념하는 까닭은 오래된 무수한 역사의 산물인 대성전 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참된 믿음이 많은 시련과 우연곡절 끝이라도 굳건히 지켜졌고 또한 우리에게 이어져 온 그러한 정신과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뜻과 맞지 않고 오히려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몸소 정화하시자 이에 반대하는 무리가 외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수백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새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놀라우신 힘으로 그들에게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성전에 하느님을 가두어 놓고 하느님의 뜻에는 눈을 감고 오히려 악을 일삼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머무시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인 체사리우스 주교께서는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강론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은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세례 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마귀의 신전이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에만 계시거나 거기에 갇힌 분이 아니라, 온전히 자유로우신 분으로 그 마음이 거룩하고 깨끗한 한 이들의 영혼과 마음 속에 머무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오늘 겉으론 화려할 지라도 하느님께서 안 계신 그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그들 앞에서 당당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영혼, 곧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성전을 더욱 순결하고 거룩해 지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참 성전이 되도록 우리를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당신의 영으로 채워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참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정화해 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경규봉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전으로 교회에서 가장 역사 깊은 성전이다. 이 성전은 320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건립하여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324년에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이 되었다. 1843년 이후 교회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교황성하께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이 성전에서 집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듯하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실 정도이므로 예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복음 안에 예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시는 대목은 이 대목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곧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집이다. 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하며,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꾼들이나 환전상은 순례자들을 부당하게 속이거나 폭리를 취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둑과 강도,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켰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전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성전을 가꾸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성체가 모셔진 성전이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셨다(21절). 사도 바울로도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3,16-17)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분명히 했다. 더욱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고린 6,19-20)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주님의 값진 피로 사신 것이다. 당신의 성전으로 쓰시기 위해 사신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에는 하느님만이 어울리며, 하느님만을 모셔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에 그 어떤 우상도 모실 수 없고 모셔서도 안 된다.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2고린 6,16)
오늘 성전은 하느님을 보여주고 만나는 하느님의 집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성전이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성전이 되도록 하자.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사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생각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자. 재물, 지식, 힘 이외에 그 어떤 우상도 내 안에 둘 수 없음을 생각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자. ...................◆

새로운 성전이 되신 예수님 - 안병철 신부 -
예수께서는 성전정화 사건을 계기로 성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요한 2,13-25).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요, 구심점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날마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봉헌했을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쳤습니다(사도 3,1). 삼대 축제인 오순절, 과월절, 초막절에는 온 백성이 성지순례를 하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는데, 최소한 일 년에 한 번 곧 과월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의무였습니다(루가 2,41). 성전에서 과월절을 지낼 때 어린양을 제물로 바쳐야 했고, 그 때 봉헌된 어린양은 가정에서 과월절 의식을 거행하면서 먹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행하던 의식들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다만 성전에서 거행되던 종교의식을 세속적으로 오염시키는 형식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단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격분하시어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전이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의 상거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성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가 결코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본질적인 곳을 향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 2,21)라는 복음서 저자의 해석은 예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기회로 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짐으로써 성전은 그 때부터 성역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마태 27,51). 새로운 경신례를 거행하게 되는 예수님의 부활 때에,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상업주의에 물든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성전이 지니고 있는 의미 자체도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성전을 예고하시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구체적인 만남의 장소로서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표명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 하신 시나이 산에서의 계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각자의 이해관계나 상황에 따라 만든 신을 섬기려는 인간적 경향을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 합니다.
나약한 본성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쉬운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 역시 형식주의 또는 상업주의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창일 신부-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더러는 로마에도 자리잡게 된다. 로마 제국에서는 250여년 동안 박해가 계속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라테라노 대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은 처음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궁전이었으나 그는 ‘구세주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교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세르지오 3세 교황이 그 자리에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세례자 요한에게 다시 봉헌하였다. 이후 이 성전은 로마 교구의 주교요, 전세계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머무는 교황좌 성당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라테라노 대성전 입구에는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곧 ‘로마와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저 멀리 로마에 있고, 보지도 못한 이 성당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성당이 성 베드로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 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그 교구 중심이 되는 것처럼 라테라노 대성전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성전 중심에 있는 성전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 성당 건물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새기는 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성전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수님 말씀이 선포되고, 그분 삶이 재현된다. 그리고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기억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전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자리잡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단순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한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며 떠나가고 냉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를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는 세상 앞에 하느님이 거처하시고 현존하시는 성전이며 감실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변자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인 성전이 거룩할 때 교회 공동체도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그분을 따라 부활하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도록 하자. ●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 -백광현 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장사가 성행하는 시장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십니다. 성전은 사제들의 봉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예식이 행해지는 곳이 아니라 사제 계층을 배부르게 하는 사리사욕의 장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도로 이루어진 성전 봉사가 부와 권력의 도구로 이용될 때 악의 소굴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더러워진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을 더럽힌 인간을 채찍으로 치지 않으시고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는 본질적인 장애를 없애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채찍까지 사용하시지만 인간을 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짓게 하는 근본적인 유혹의 구조를 제거하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거룩한 예수님의 몸을 모심으로써 우리 몸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 거룩한 성전을 늘 깨끗한 모습으로 보존하면서 모든 부정한 것들, 특히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을 끊어 버리고 늘 정화된 상태로 보존할 때 하느님께서 기쁘게 머무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

-윤지종 신부-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중의 하나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워 봉헌한 것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2년이나 먼저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입니다. 이렇게 의미깊은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맞아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유명한 성전 정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매년 과월절이 되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월절 축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 황소나 암소와 같은 동물들과 이들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주위는 이러한 희생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까지도 들끓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기 위한 성전이 완전히 시장터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돈벌이 하는 장터로 전락시킨 데에는 성전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상거래를 묵인하거나 허용함으로써, 많은 이익들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굉장히 분노하십니다.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울화통을 터뜨리십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성전을 사랑하셨고 아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이자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성전은 단순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라고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들어가는 성당 건물만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더 소중히 여기시고 더 사랑하신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그 어떤 아름다운 성전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 안에 머무르시고, 하느님과의 만남 역시 그 어떤 장소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집, 곧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고, 성전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성전,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지켜내신 성전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거룩한 집답게 단장을 하고 기도하는 집인 성전답게 지켜나가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안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 장사꾼 같은 모습이나 강도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입을 함부로 놀려 남을 험담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해대고,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장사꾼 같은 모습이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내고 불평해대며, 폭언을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구는 강도 같은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설쳐대고 있는 장사꾼들을 있는 힘을 다해 몰아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머무르는 성전인 여러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강도들을 채찍을 들어서라도 내쫓아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는 온갖 잡상인들과 싸우십시오.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강도들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단단히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보시고 분노하시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그런 성전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흡족한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전다워야 합니다. 시장터나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잡상인들과 강도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십시오.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성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님의 집으로!
-김희자 수녀-
로마에 있을 때 틈틈이 성당을 순례한 추억이 떠오른다. 시험이 끝나고 혼자 하는 도보 성지순례의 맛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감미롭고 행복했다. 성 클레멘스 성당,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당 등은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에는 영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많은 조물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어 생명의 주인이시고 온갖 피조물과 함께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관상하게 한다. 참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은 삶을 충만하게 하는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몇 년 전 수도서원 25주년이 되어 동기들과 함께했던 이집트·이스라엘·터키·그리스 성지순례는 모든 순례의 절정이었다. 하느님의 집에 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인가! 시편 122편에도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라고 하느님의 성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건물이다. 성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소다. 교회 지체들이 모여 함께 어떤 선물이나 은총을 구하면 그분은 귀담아들으시고 우리의 요청에 응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의 집이 기도의 집이 되기를 바라신다. 아기로 태어나 성전에 봉헌되셨고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를 만나셨으며 아버지에 대해 사람들과 대화하셨고 기도 안에서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셨다. 나는 기도하러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관상하고 그분을 닮아갈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는 시편 137편을 나의 노래로 삼고 싶다.

너희는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어라 - 이기양 신부-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며 이상한 생각이 들지는 않으시는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인 성녀의 축일은 지내도 성당 축일이라든지 건물 축일은 잘 지내지 않지요. 도대체 이 라테라노 성당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의 규모이며 어떤 의미가 담긴 건물이길래 해마다 이렇게 축일을 지내는지 의아해지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큰 목소리로 전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교는 차차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에까지 들어가게 된 그리스도는 그 곳에서 호된 박해를 받습니다. 로마에는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대적인 박해가 계속 이어졌는데 그 박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로마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고 희망을 주기 위하여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대대적인 박해는 313년까지 약 250년 이상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선언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교황님께 왕궁을 선물하였고, 그 때 처음으로 지어진 성당이 바로 이 라테라노 대성당인 것이지요. 라테라노에 교황좌가 있는 아주 큰 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교황님은 대부분이 라테라노 대성전에 머무르셨고 나중에는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기셨는데 베드로좌가 있었던 성전이 바로 이 라테라노 대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전 세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324년에 지어졌고 11월 9일에 축성식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을 축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축일인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단지 건물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성경은 우리의 몸 자체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탁자를 둘러엎으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16)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화가 나신 것일까요? 탁자를 둘러엎고 채찍을 들어 후려치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을 화나게 한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또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성당을 지으면서 우리는 장사를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요? 장사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좀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사건이 벌어진 곳은 과월절이 가까워진 때의 예루살렘 성전 마당입니다. 과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월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다인 성인 남자의 의무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에 2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 유다인 중 19세 이상 되는 사람은 일년에 한번씩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반 세겔 정도의 액수인데 이것은 성인이 2~3일간 일해서 받는 임금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이 성전세를 낼 때는 절대 다른 나라 돈으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외국 돈에는 그 나라 황제의 흉상이나 섬기는 우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므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낼 때는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인 세겔로 바꾸어서 봉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둘러엎으신 것이 이 환전상들의 가게였지요. 환전상들은 상권을 독점하고 부정과 착취를 밥먹듯이 하고 있었습니다. 환율에 따라서 환금 수수료를 적당히 받아야 하는데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세금을 놓고 그렇게 부정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를 둘러엎으시며 그토록 화를 내신 것입니다.
또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 등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봉헌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간편하게 헌금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이렇게 현물로 봉헌을 하였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소나 양, 비둘기를 잡아 바쳤고 그 예물은 전혀 흠이 없고 티가 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받기 전에 검사를 하는 검사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또 몹시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 짐승들을 파는 상점들이 운영이 되었는데 이 운영권을 대사제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물건의 값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자기네 가게의 짐승들만 합격을 시키는 부정과 비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뒤집어엎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신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성당 앞마당에서 장사하고 있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폭리와 비리에 물든 장사를 금하시고 부정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이 마구 대듭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2,20)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몸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의미가 건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건물 자체는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물 자체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으로 건물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 자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그 뿐만 아니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성당??하면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임, 믿는 이들의 모임 자체가 교회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자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과 일치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내가 바로 주님의 성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성전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이 오늘 제 1독서 에제키엘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움터나고 숲이 번창하며 온갖 생명들이 번성해 갑니다. 심지어 이 물은 사해의 죽은 물 마저 단물로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성당에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이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물, 생명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집에서 생명이 움터 나오고,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지며, 내가 나가는 회사가 어둠과 오류의 집단이 아니라 빛과 정의의 집단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수인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성전인 우리 신자들이 살아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 이상윤 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흔히 개혁가로 시대의 반항아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을 때 생기는 억측들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Jn 2, 13).’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에 무조건적인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동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지만, 그곳 성전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추잡스런 행위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성전은 거룩한 곳이라는 개념이 이미 사람들의 인식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거룩한 곳이 아니라 성전을 등에 업고 상행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이미 그러한 행위가 통용되고 자리 잡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당을 주님께 대한 신앙심으로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성당을 자신의 처세에 관련하여 성당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의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바라보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애청자 여러분들도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사람을 내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안으려 노력합니다. 그러하기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욱 풍성하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소위 성전 정화사건을 바라 보면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외적 행위보다 내적 자세가 중요함을 알려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제물의 수와 종류 그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롯이 되돌려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피력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을 ‘이곳은 기도하는 곳입니다’라고만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뭘 모르는구만’하고 응대하실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이 성전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보셨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그 자리의 사람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라고 반문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고 계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버지의 집’이 바로 성전이고 그 성전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코린토 전서 6장 19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내 이웃의 모든 사람을 주님 모시듯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양승국신부-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어제 오후 익산에서는 원불교 최고 지도자의 이취임식이 있었습니다. 타 종단들이 최고지도자의 이취임 때 마다 눈꼴사나운 종권다툼으로 인해 사분오열되고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것에 비해, 이분들의 이취임식은 너무나 아름다웠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간 전임자의 아름다운 퇴장에 이은 후임자의 겸손한 등장.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원불교 최고 지도자 장응철 종법사님께서 취임 직후 신도들과 국민들을 향해 던진 법담이 제 마음에 크게 다가왔습니다.
“마음 편히 하세요. 안심하는 것이 바로 극락입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한 가지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교회는 방황하고 흔들리는 신자들, 세파에 지쳐 힘겨워하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 천국을 맛보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그 누구도 주지 못할 평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어느 정도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자신의 존재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교회 안에 깨어있는 분들께서 그토록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교회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의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영적생활, 순례성, 청빈, 형제적 친교,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나눔과 섬김...이런 측면들에 대한 투신은 뒷전인 채 외형적인 성장, 화려한 치장, 세속과의 지나친 결탁에 몰두하다보니 그렇게 고민하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로마 시내 4대 성전 가운데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로마 성지 순례객들이 꼭 빠지지 않고 들르게 되는 단골코스 대성당입니다. 바티칸 대성당 못지않게 볼거리도 많을 뿐 아니라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역대 많은 교황님들께서 이곳에 안치되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님의 강론이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우리의 이 성전(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내맘의 정화작업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전이란 바로 당신 몸이라고 하신다.
우리 몸은 바로 성령의 궁전이라고 하였던가?
언제나 성령의 궁전이 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몸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인 이유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는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원적 권능이 살아 움직일 때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또한 먼저 죽어야 한다.
죽어야만 우리도 부활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그 구원의 샘물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 형제에게 구원의 샘물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상처만 더 남겨주었던 나의 몸은
결코 성전이 아니었던 셈이 아닐까?
또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죽기 싫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냥 하소연을 듣기만 하면서
그리스도 그분께서 친히 치유시켜 주시길 기도해야 옳지 않았을까?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마다하지 않으실 정도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내가 지니지 않고 있으면서
그 형제를 섣불리 훈계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성전이신 주님처럼
우리 몸도 성전이 되어야 할텐데
자칫 성령이 거하는 궁전이 아니라
악령이 거하는 사탄의 소굴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흠짓 놀라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분노하시면서 다시 성전 정화 작업을
우리 안에서 벌이셔야 하리라 생각된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으로 대표되는 악령의 집이 될 수도 있기에
오히려 우리 스스로 주님께 이런 잡상인들을 쫓아내어 주시면서
정화시켜 주시도록 청해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가슴 아프게 훌쩍 떠나버린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 본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리고 그 형제 안에 있는
정화되어야 할 마음 구석을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해 주십사 청해 본다.

아름다운 성전
-강영구 신부-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대에게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3,16-17)
성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대리석이나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대리석으로 지어 금은으로 장식한 성전일지라도 강도들이 드나들면 ‘강도의 소굴’(마태21,13)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성전을 만듭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과 재물, 지위와 명예, 지식과 학식 따위가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명품과 고급 화장품 그리고 귀금속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아닙니다. 맑고 밝은 가난한 마음,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돌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됩니다.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一明)

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이다.
-박상대신부-
오늘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념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324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274-337) 황제가 세웠고, 실베스터 1세 교황이 축성하여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으로 삼았다. 대성전에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에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거주하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그 후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 라는 명칭으로 베드로좌에 대한 전세계 교회의 존경과 일치의 표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세기부터는 세례자 요한의 대성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수세기를 걸쳐 화재, 지진, 약탈로 말미암아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였고,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가장 거룩한 구세주 예수"께 성전을 봉헌하고, 11월 9일을 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오늘날 교황은 성목요일 주님 만찬미사를 이곳 대성전에서 집전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성전이다. 우리고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고 해서 대성전의 건축물을 놓고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일치를 기원하고 기념하는 축일이다. 오늘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신비체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축일인 셈이다. 이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에 관한 복음을 듣게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이 이를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의로(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안에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選民)과 구원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상징은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商魂)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으리라.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역(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이는 유다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다. 구약(舊約)을 폐기하고 신약(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무슨 권한으로 정화행위를 하느냐(18절)는 유다인들의 비난에 맞서,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세우시기 위하여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된다.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신약의 성전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들의 몸이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성당 또한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곳이다.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가 없는 성당은 성전이기보다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만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