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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천문봉 새해맞이 길
올해가 광복 70주년 되는 해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 천문봉 꼭대기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을 맞이한다.
고도 2700m에서 1박 했는데 누구도 고산 증세 등 이상 증세는 없다. 가뿐히 일어나 각자 준비한 행동식을 나눠 먹고
밖을 나선다.
초강풍이 몰아친다. 눈사레기가 강한 바람에 날리며 시야 확보가 어렵고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진다 천문봉 가는 길 내내 노출된 살갗 부위는 찢기 듯 따갑다.
온도계는 영하 35도를 가리키는데 체감온도는 더욱 차갑다,
세찬 강풍이 몰아치는 천문봉 천지 전망대에 올라서지만. 천지는 짙은 스모그에 가려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일출 시간이 아직 20여 분 남아있어.. 해를 기다려야 한다.
출국 전부터 모두 추위 걱정을 많이 했고. 천문봉 칼바람에 대비해 가로 1.8m 세로 1.2m 높이 1.8m 정도 크기의 비닐 텐트 2개를
준비했다.
지지대도 없고, 노끈도 팩도 없다. 사람이 비닐을 덮어쓰고 앉으면 서로가 지지대와 팩 역할을 하게 되고. 바람이 불면 부풀어
오르는 돔 형태의
비닐 텐트로 무게는 1kg 정도로. 이동에 큰 부담이 없었고 효과는 200% 이상 발휘해
모두가 이색적 체험으로 좋은 경험을 하면서. 체감온도 영하 40도가 넘는 천문봉 칼바람에 20여 분 넘게 버틸 수 있었고
나무가 없는 고산지대에서 충분히 효과를 입증했다,
한겨레팀이 올라오고 천지 좌측 화개봉 뒤편에서 서서히 여명이 움트고 비닐 텐트를 박차고 나오지만
엄청난 칼바람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찢기 듯 카메라 작동이 쉽지 않다.
을미년 새해가 밝아 오는데 해는 스모그에 가려 맨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스모그가 걷히고 밝은 해를 기대하지만
해는 더 이상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스모 그 속 살짝 숨었다,
스모그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겨울 천지에서 이만큼 해를 볼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다....
칼바람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하산이다.
천문봉 휴게소에 들어서자 온기가 어느 때보다 따듯함을 느낀다.
먼저 하산한 박재동 화백이 덕담을 건네며 즉석에서 초상화를 하나 그려 사인을 넣어준다.
을미년 새해 큰 선물이다.
박재동 선생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 전한다.
컵라면으로 조식을 대신하고 겨울 천지가 보고 싶다. 천문봉에 다시 한번 오르기로 한다.
스모그가 걷히고 천지는 민 낯을 내밀 수 있다.
조금 전 천문봉에서 카메라 배터리가 얼어 작동이 쉽지 않고.. 품속에 넣었다 꺼내 겨우 한 장 찍으면 또 배터리가 얼어
작동되지 않았다... 다시 가슴에 품고 녹이기를 반복하지만 반 장갑을 낀 손가락 마디마디는 찢기 듯 따가웠다.
너무 어렵게 찍은 사진들이다.
. 칼바람 속 천지는 다를 바 없다. 천지는 짙은 스모그 속 살짝 숨고
칼바람이 몰아친다.
천지는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수줍은 조선의 처녀를 닮았다는 속설이 실감 난다.
해는 스모그에 가려 화개봉에 걸려 있고 천지는 짙은 스모그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0여 분 넘게 버티지만 더는 칼바람을 당할 수 없다. 하산이다.
이때 천지를 가린 스모그가 조금씩 밀려가기 시작한다.
스모그가 더 빠르게 밀려가면서 천지는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는 빛과 스모그.. 하얀 눈과
함께 어우러져 대자연의 걸작을 연출하고 있다.
천지다, 탄성이 터진다.
꽁꽁 얼어붙은 하얀 겨울 천지는 얼굴을 드러내고 천지 건너 장군봉이 다가온다
백두 대간이란???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2744m)에서 발원되고 마천령 산줄기를 따라 동으로 뻗어 함경도 두류산(2309m)에서
남으로 하나의 큰 가지를 친다. 차일봉(1742m)ㅡ철옹산(1085m)ㅡ추가령(752m)ㅡ금강산(1638m)에 이르러 휴전선을 넘고
남쪽 지역 고성군 향로봉((1287m)에서 바통을 받아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치닫는다.
진부령(529m)ㅡ미시령(826m)ㅡ설악산(1708m)ㅡ한계령(1004m)ㅡ오대산 두루봉(1422m)ㅡ선자령(1157m)ㅡ
대관령(832m)ㅡ청옥산(1407m)ㅡ두타산(1353m)으로 이어져 강원도 매봉산(1397m)에 와닿는다.
노송과 숲이 어우러진 비경의 매봉산. 북한강과 한강 이남의 모든 산은 매봉산이 고조산이다.
즉 매봉산의 남쪽 백두대간의 모든 생태계는 매봉산을 거치지 않고는 백두산을 갈 수 없다.
매봉산에서 한줄기 가지를 쳐 동해 해안선을 따라 부산 금정산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가 산경표에 표기된 낙동정맥이며
일본이 태백산맥으로 왜곡한 산줄기다.
매봉산에서 백두대간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치달는다
함백산(1573m)ㅡ태백산(1566.7m)ㅡ선달산(1236m)ㅡ소백산(1439m)까지 뻗어 내리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내려 소백산 연화봉을 거쳐.
죽령(689m)ㅡ이화령(548m)ㅡ조령산(1025m)ㅡ희양산(998m)ㅡ대아산(931m)ㅡ속리산(1508m)
추풍령(221m)에서 영 호남을 동서로 갈라놓으며 삼도봉(1177m)ㅡ덕유산(1614m)ㅡ육십령(734m)ㅡ고남산(846m)
만복대(1433m)로 이어지며 지리산 노고단(1507m)을 거쳐 임걸령과 벽소령을 넘고
천왕봉에서 섬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끝난다.
남(지리산 천왕봉)과 북(백두산 장군봉) 한반도의 끝과 끝을 잇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4000리를 뻗어 내려 산줄기로만 이어진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긴 하나의 산줄기다.
이렇듯 산줄기를 하나로 놓고 볼 때 한반도는 대륙으로 웅비하는 호랑이 모습이 나타난다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의 작은 산줄기 개념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가 하나의 대간을 여러 개로 쪼개어 (태백. 소백. 노령. 차령산맥등),
한국 지리라는 책자를 , 발간했고 당시 전국 각급 학교로 공급된다.
광복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검증절차 한 번 없이 또다시 책은 각급 학교로 그대로 공급되고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것 왜곡된 산맥 개념의 역사를 배웠다.
문제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산맥 개념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쪼개진 산맥 개념으로 한반도를 보게 되면 호랑이는 간 곳 없고..
산토끼와 생쥐 몇 마리가 한반도에 뛰 노는 꼴이 된다.
이렇듯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배웠고 지금껏 잊혀져 있다가
1980년 고지도 연구가 이우영 씨가 인사동 고서점에서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그린 산경표를 발견하고
우리는 이 엄청난 역사의 왜곡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산경표에 의하면 한반도의 산줄기는 1 대간 1 정간 13 정맥으로 나눠져 있었으나
90년대 후반 규장각에서 진본이 발견되고 그 진본에서 1 대간 2 정간 12 정맥이 정설이다.
일제 침략 전까지는 우리 선조들은 산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산줄기를 하나로 봄으로서 우리 민족은 하나라는 일체감이 생기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호랑이와 함께 웅비하는 모습을 그리고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며
백두대간은 반만년을 그렇게 우리 민초들과 함께한 것이다.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이 원칙은 반만년이 지난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다
산은 능선에서 물을 양쪽으로 나눈다는 아주 소박한 진리를 간직한 체..
1 대간 2 정간 12 정맥은 산경표에 표기된 기록이다.
하나의 대간은 윗글에서 소개한 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장백정간은 문제의 소지가 많다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동으로 정확히 발원되고 마천령 산줄기를 따라 동으로 뻗어 내렸는데 함경북도 두류산에서
동북 방향으로 하나의 작은 가지를 쳐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을 거쳐 두만강을 만나 끝난다.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이 산줄기를 장백 정간이라 표기하고 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청북정맥은 백두대간 마대산에서 발원되고 서쪽으로 가지를 쳐 낭림산을 거쳐
평안도 용천군에서 황해를 만나 산줄기는 끝난다
청남정맥은 청북정맥의 낭림산에서 발원되고 평양 근교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로 청남정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청남정맥은
청북정맥의 지맥으로 보는 것이 맞다.
해서 정맥은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발원되고 남서로 길게 뻗어 내리다 화개산을 거쳐 황해를 만나
산줄기는 끝난다. 해서 정맥 화개산에서 발원되고 예성강까지 짧게 내린 산줄기도 함진북예성남정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도 해서 정맥의 지맥이다.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발원된 한북 정맥은 파주 장명산(102m)에 이르러 임진강을 만나 끝난다.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정확히 하나의 정맥이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 매봉산(1307m)에서 하나의 가지를 쳐. 동해 해안선을 따라
부산 금정산(802m)을 거쳐 다대포 봉화산(278m)에서 남해를 만나 끝난다. 백두대간 12 정맥 중 가장 큰 정맥으로
정확히 백두대간에서 하나의 가지를 친 산줄기다.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발원되고 북으로 뻗어 내리다 경기도 안성 칠장산(402m)을 거쳐
충청도 태안 끝자락에서 자령산(218m)을 만나 서해에서 끝난다. 칠장산에서 가지를 친 한남정맥도
한남금북정맥의 지맥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금호남 정맥은 백두대간의 영취산(1076m)에서 발원되고 전주 만덕산(762m)과 광주 무등산(1197m)을
거쳐 남으로 길게 뻗어 내려 남해 광양 망덕산(197m)을 만나 끝난다, 금호남정맥 입봉(637m)에서 발원된 금남정맥 또한
금호남정맥의 지맥으로 보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 천왕봉 못 미쳐 촛대봉(1704m)에서 발원되고
남해 해안을 따라 동으로 뻗어내리다 김해 분성산(353m)에서 낙동강을 만나 끝난다. 백두대간 마지막 정맥이다.
근래 지도에 표기된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를 나누어보았으나 2 정간 12 정맥은 보이지 않는다..
장백정간을 하나의 정맥으로 보면 백두대간에 총 8개의 정맥이 나타 난다.
청남정맥, 함진북예성남정맥, 금북정맥, 금남정맥등 4개의 산줄기는 정맥에서 가지를 친 것으로 정맥으로 볼 수 없다. 하나의 지맥들이다.
나무도 원 둥치는 하나다. 원 둥치에서 큰 가지가 뻗고 큰 가지에서 작은 가지를 치고 열매가 열리듯 이것이 대 자연의
이치고 원칙이다.
여암 신경준은 200여 년 전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1 대간 2 정간 12 정맥으로 나누었으나 하나의 정간은 장백정간으로 하나는 표기
자체가 없다. 장백정간은 길이나 산세로 볼 때 낙동정맥의 반 정도다.
이 작은 산줄기를 당시 어떤 기준을 두고 정간으로 표기하고 2 정간 12 정맥으로 나누었는지 산경표는 명확히 기준이 없다.
장백정간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 사대 사대의 잔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남은 정간은 산경표에 표기 자체가 없다. 산경표를 비하할 생각 조금도 없다. 당시 조선 최고의 지도며
신경준의 백두대간의 발상 자체가 당시 위대한 발상이다.
그러나 위성이 내려다보는 현시점에서 정확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산경표에 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본다.
백두산에서 발원된 산줄기는 모두 3개다. 하나는 장군봉에서 발원된 부동의 백두대간이다. 또 하나는
천지 해발봉 부근에서 발원해 양강도 혜산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신의주까지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다
마지막 하나는 관면봉과 낙원봉 사이 능선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뻗어내려
장백현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단동 못 미쳐 박작성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다.
이 두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함께 백두산의 3대 산줄기지만 대동여지도나 산경표 등 어디에도 표기가 없다.
이것 또한 사대의 잔재가 아닐까? 조선 500년은 사대주의를 뿌리 깊이 남겨놓았다, 필자는 이 2개의 산줄기를
압록강정간과 백두정간으로 구분한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아래 2개의 지도가 보여주듯 확인되지 않는 정보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서운 칼바람 속 천문봉 1박과 해맞이 일정을 모두 마치고 9시 30분경 천문봉을 출발한다 지프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북백두 산문 입구에 도착해, 백두산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마치고 백하로 출발한다.
이도백하 외곽지 식당 한 곳에 들러 푸짐한 상으로 주문한다. 어젯밤 석식과 오늘의 조식까지 거른 탓에 배가 많이 섭섭하다.
식사를 기다리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온다
사진을 꼭 좀 보내달라고 한다. 새벽에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다.
오늘도 가장 먼저 일어나 어둠이 깔린 밖을 나서자 칼바람에 잠시도 버티기 힘들다..
숙소 건너편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온기가 느껴지고 5~6평 남짓한 작은 공간으로 노동자들의 식당 주방인 듯
아주머니 한분이 얼음을 녹이고 있다.. 주방 안쪽에는 이들의 숙소로 보이는 작은 방이 하나 딸려있는데 아주 열악하다.
이곳에 비하면 우리 팀의 숙소는 호텔급 수준이다.
이때, 아주머니가 따뜻한 커피도 내주고 삼겹살도 구워 두 접시나 내주었다. 이때 몇 장의 인증샷을 남겼는데
아주머니가 기억하고 알아본 것이다. 네, 보내 드려야죠 또 찍어요.
우리 팀과 어울려 식사를 함께 나누고 몇 장의 기념사진을 더 남긴다. 광복 70주년 기념 백두산 해맞이 북간도 여성동무들이다.
푸짐한 중식을 같이 나누는 동안 용정행 열차 시간이 다가온다. 아주머니들은 연길에서 관광
버스로 왔다며 연락처를 나누고 연길에서 다시 만나자며 아쉬운 작별을 나눈다
백하역에서 13시 17분발 용정행, 열차에 오른다. 북간도 횡단열차로 용정까지 220km다. 열차는 백두산 북쪽 지역의 밀림지대를 30여 분 넘게
지나 백두산을 벗어난다.
종착역이 용정역으로 십리평. 화룡을 거쳐 2시간 40분 소요된다 겨울 백두산 여행에서
가장 안전한 이동수단이며 버스에 비해 연길까지 두 시간 , 이상 단축된다
오랜만에 타보는 완행열차 색다른 경험이다.
2차 5월
천문봉에서 바라본 천지는 오늘도 맑게 열려 있다. 어제 서백두에 이어 천지는 오늘도 열려 있다.
쉽지 않은 행운이 이틀 연속 이어진다..
1차 팀이 거금을 지불하고 1박 한 숙소는 철거되고 기상 관측소 증축 공사는 는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하산길은 다시 지프차를 타고 약 15분이면 삼거리 환승구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폭포행 버스로 환승해. 약 5분이 지나
백두폭포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 계란 온천탕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는 노상온천수에 그대로 삶아 팔았으나
2009년에 들어 중국은 백두산을 국립공원으로 격상시켜 세계자연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를 준비하면서 노상온천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이후 상류 노상온천에 호수를 연결해 온천수를 받아 사용하고 있고 초기 메뉴는 계란 하나였는데 지금 오리알과 옥수수가 추가됐다.
계란 온천탕을 지나자 데크계단 입구에 백두폭포까지 1km 라는 안내 표지판이 하나 서 있는데 현재 백두폭포까지는
접근이 불가하고 600여 m 지점 폭포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바윗돌 너덜지대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지금 말끔히 정비돼 폭포 아래 전망대까지 데크 계단이
놓였다. 데크계단 우측 노상 온천수는 70년대까지 수온이 60도가 조금 넘었다고 하는데 반세기 채 안돼 현재 수온이
83도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수온 상승의 원인을 백두산 화산 폭발 전조 현상으로 지적하고 있다..
노상온천
백두폭포(비룡폭포)
백두폭포다.
중국은 장백(창바이) 폭포라고 부르나 조선의 많은 문헌에 백두폭포 비룡폭포로 기록돼 있다
우리 국민이나 재외 동포들은 백두폭포나 비룡폭포로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천지는 수백만 년 전 화산 폭발로 23개의 산봉우리가 타원형을 그리며 솟아났고 분화구 중앙에 천지가 탄생했다.
이곳 천지 호수 물이 외부로 유출되는 유일한 입구(수면표고 2257m)를 달문이라 부르며 달문에서 백두폭포까지
흘러가는 물길을 통천하 또는 송사하라고 부른다.
통천하는 철벽봉(2550m)과 차일봉(2595m) 사이 협곡을 따라 길게 흘러내리다 수직 벽을
만나 낙차고도 68m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백두폭포다.
폭포 물줄기는 통천하 끝부분에서 90도 꺾여 수직으로 떨어지는데 39m 지점에서 한 번 살짝 꺾여 떨어지며 낙차 끝부분까지는
68m며 낙차 지점은 해발고도 2100m다.
몇 해 전 폭포 아래서 발을 담그고 손을 씻을 수 있었지만 지금 출입 통제 라인이 설치되고 낙차 지점과 물가 주변은
접근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폭포 우측 인공 돌계단(540 계단)이 늘 눈에 거슬린다.. 초창기 한국 트레킹 마니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루트이나 2009년 중국은 백두산을 국가 지질 공원으로 격상시키고 낙석 등 위험을 이유로 지금까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백두산 관리 위원회 측이 지정한 현지 여행사 소속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출입이 가능한데 1인 20만 원 정도의 입산 경비가 소요된다.
북백두 트레킹 코스는 백두폭포 ~ 540 계단 ~ 통천하 ~ 달문 ~ 천지까지다. 천지에서 다시 돌아오거나 우측 차일봉으로 올라
옥벽폭포 능선길을 따라 소천지에서 마치는 것이 일반적 루트다.
2014년 8월 백두폭포
2013년 8월 당시 폭포 아래 발을 담그고 손을 씻을 수 있었지만 현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폭포에 떨어지는 물의 양도
1년 전후 두 사진을 비유해 보면 일정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3년 8월 백두폭포
백두산 온천
소천지 환승구간 정류장 건너편에 자리한 온천장이다. 백두산 산문 내 유일하게 하나 남아있는 호텔로
한국식 작은 패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객실 9개가 전부다 1층에 식당 로비 등 객실 4개 2층에 객실 4개 3층에
객실 하나가 있다. 여름 시즌이면 중국 공산당 중앙 고위직들이 다 차지한다고 한다..
5월 비수기를 맞아 우리 팀이 통재로 예약했는데 객실료가 만만치 않다. 비시즌의 경우 객실 하나에 최소 500원이다.
고객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고 여름시즌이나 해맞이 같은 특수 한날은 가격이 없다, 3~4배는 기본이다..
장기간 이용한 경험상 가격대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새해맞이 같은 경우에는 새벽에 이곳에서 지프차를 바로 랜탈할 수 있는데 비 공식 영업이라 요금 역시 만만치 않다.
2017년 새해 첫날 새벽 지프차 요금 1인에 2십만 원을 요구했다,
호텔 뒤편 전체가 노천탕이다. 백두산 산문 내 마지막 남은 노천탕으로 상류 노천에 호수를 연결해
온천수를 받아 사용하고 있다.
5월인데 아직 잔설이 많이 남아 있고 날씨도 싸늘하다
적당한 온도의 온천탕에 백두산의 신성한 에너지 다 쏟아진다.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으나 노천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등잔에 불이 들어온다.
지상과 천상 신선이 따로 없다.
달님이 살포시 구름 안고
달빛 별빛 쏟아진다. 뚜레박이 내려온다.
백두산 산골밤이 깊어 간다.
다음 날 아침 백두산의 신성한 에너지에 계곡 골바람이 스치는데 너무 신선하다.
1층 식당에 차려놓은 조식도 신선한 골 바람이 더해 한층 맛이 더하다. 며칠을 두고 더 머물고 싶은 온천장,
하룻밤 여운을 남기고 오늘도 일정을 따라가야 한다.
온천장 주차장 앞에 데크로 된 육교를 건너면 10여분 거리에 소천지가 자리하고 있다, 백두산에 처음 생긴 육교다.
육교 우측에 백두폭포를 바라보며 대형 부처가 서 있는데 폭포에 가려 부처 가시권이 1km 전방 백두폭포까지다 더는 세상을 볼 수 없게
설계 됐다. 중국식이라니 할 말이 없다.
2015년 여름까지 볼 수 없던 조형물인데 2016년 하반기에 육교와 함께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육교 아래 소천지 환승 구간에서 버스를 타고 약 15분이면
산문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변 기념품 가게에 들러 막네 선물을 하나 고른다. 천지가 선명하게 그려진 손거울이 예쁘다.
25원이라고 한다. 10원에 달라고 흥정해 보지만 한족 아주머니는 본전도 안된다며 정확히 우리말을 구사한다.
그럼 말고 돌아서자 10원에 가져가라고 한다.
주변 한족 상인들 거의가 다 본전도 안 된다. 공짜다 공짜 이런 우리 언어를 정확히 구사하고 있다.
우리 여행객들은 이들의 언어에 현옥 되지 말아야 한다. 또 백두산 주변의 숙박. 식당. 택시 등 많은 곳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바가지
상혼이 극성을 부린다.. 우리 여행객들의 성숙한 대응이 필요하다.
내두촌
11시경 8인승 승합차를 몰고 내두촌 촌장이 산문으로 왔다. 택시 1대를 불러 2대에 나누어 타고 내두촌으로 출발한다.
백하 가는 길 중간쯤 삼거리 우측 갓길에 백두산 경마장 표지판이 하나 서 있고, 이곳에서 우회전길에 접어들자
좁은 시멘트 포장길로 10여 분 들어가자 좌측에 백두산 경마장이 나오고 전방 좌측에는 2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나온다. 내두산이다.
이곳에서 다시 10여 분을 더 들어가자 작은 언덕 좌측에 김일성 장군 항일 유격전 기념비가 나오고 전방에는 내두촌아 펼쳐진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내두촌 외는 어떤 조형물도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지는 백두산의 숲평선이다.
내두촌
차량이 마을 중앙으로 들어선다.
마치 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남쪽 마을을 보 듯 마을 중앙이 말끔히 정비돼 있다.
1980년대 한때 김일성이 방문한다는 소문이 돌고 중국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주택개량 사업이 일정 부분 됐다고 한다.
내두촌은 백두산내 가장 고지대에 자리한 밀림 속 촌락으로 백하서 100리(40km) 함경도 삼지연서 100리
사방 100리 가 밀림으로 둘러 싸인 숲 속의; 섬이다. 북간도 최오지 촌락으로 60년대까지 국가 관리인도 없었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았다는 무정부 촌락이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경 함경도에 긴 흉년이 들고 기근에 허덕이던 함경도 백성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화전민 형태의 촌락이 형성되고.
이후 항일무장 유격대원들이 일본군에 쫏겨쫏겨 이곳에 숨어들고 이때 김일성도 함께 쫏겨 들었다
이후 일본군이 들이닥쳐 독립군의 근거지라는 구실로 일본군이 아랫마을에 상주하면서 윗마을 주민들을 아랫마을
한 곳으로 이주시켜 감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복 후 다시 평온을 되찾은 내두촌은 감자. 콩, 옥수수 등 작물과 지천에 늘린 산삼과 약초 등 야생동물의 포획 등으로 당시
중국 국민소득 수십 배 웃도는 부촌으로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
당시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또 한족이 살지 않는 조선족 마을로 지금까지 연변에서 유일하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80년대 들어 중국의 개방 정책에 맞물려 서서히 쇠퇴기에 접어들고 잠시 한국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동아일보 창사 70주년 특집 기사에
내두촌은 90여 가구와 인구 250여 명으로 마을 인구 반 정도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특이한 기사를 실었고
2000년 mbc 특집프로에서 60여 가구에 인구 150여 명
2008년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30여 가구에 인구 60여 명이라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급속히 인구 감소
추세를 보이는데 70년대 우리 농촌 산업화 과정을 그대로 보는 같다
한 번 찾고 싶었는데 교통 사정 등 매번 여건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 출신들의 유입 과정과 이주당시 생활상맟 또 백두산 호랑이 등
많은 궁금점을 안고 내두촌의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
마을 중앙 한켠에 차가 멈추고 차에서 내리자 주변 주택 전부가 우리 농촌 주택과 같은 팔짝 지붕이다.
주택 한 곳에 안내받고 주택 안으로 들어 가자 내부에는 원룸 형태의 방 하나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주방이 함께 들어있고
화장실도 내부에 들어있다.
눈이 많고 차가운 북간도 지역의 전형적 주택의 형태다. 특별한 체험이 될 것 같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다.
80 넘은 노인들은 내두촌 이주 초기 당시 생활상 등을 고스란히 다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예약 당시 80 넘은 노인들이 생존해 계시느냐?? 네 분이 살아 계신다 고 했다.
그분들이 초기 개척 당시 실상을 다 기억할 것이다. 그분들과 대화 좀 나누게 해 달라. 이번 기회에 그분들을 대접하고 싶다.
돼지 한 마리 잡자 그분들과 술상을 차려놓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분들에게 이주 초기 과정이나 경상도 사람들의 유입 과정 등 당시 백두산에 분포된 동식물까지 고스란히 전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자
같은 형태의 집 두 곳을 배정받아 짐을 풀고 이주 초기 당시 사람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안내를 받는다.
마을 어귀에 폐비닐 등 어수선한 풍경들이 우리 농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을에서 1km 정도 떨어진 밀림 속 깊이 들어가자 가옥 3동이 폐가로 방치 돼 있다.
이주 초기 당시 이곳에서부터 내두촌 정착이 시작되었다 고 한다.
주택의 형태는 많이 변형되었다. 간혹 한국 무속인들이 백두산 에너지를 충전받는다며 이곳에서 장기간 기도처로
이용한다고 한다. 3동의 건물이 있으나 이 주택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
시멘트 기와등. 적벽돌 굴뚝과. 시멘트를 깐 기초 바닥 등은 90년대 이후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리모델링된 것으로 보이고
원형 대부분 훼손된 상태다. 이주 당시 주택은 다 너와집으로 굴뚝 또한 통나무 굴뚝이다.
폐가 앞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국경 넘어 북녘에서 흘러온다고 한다. 이곳에서 북. 중 국경까지는 약 16km의 거리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내내 흙 길이 이어진다. 정겨운 산골길 싱그러운 흙내음이 어릴 적 옛 고향길 추억이 아런 하다
잠시 다녀온 사이 조촐한 새참이 준비돼 있다. 백두산 봄나물 등 싣네도 상에 올라온다.
새참이 끝나고 80 넘은 노인이 기거하는 집으로 안내를 부탁하자 가까운 이웃집으로 안내한다.
할아버지는 투병 중으로 작은방에 누워 있고 할머니가 반긴다. 할머니 나이를 묻자 71살이라고 한다. 80 넘은 노인은 마을에
안 계시느냐??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한다. 확인하지 못한 나의 실수가 크다.
71살이면 광복동이로 이주 당시 실상을 알 수\ 없다. 할머니가 책자 한 권을 들고 나온다. 음악과 문학이라는 책자에
자신이 작사했다는 내두산 아리랑이 담겨 있다.
웅위롭고 장엄한 백두산 정기 타고
천지의 기백으로 자랑스레 솟았구나
풍요로운 내두산 살기 좋은 내두산
아리따운 여인의 사랑스러운 품이더냐
아리랑 아리랑 우리네 내두산 아리랑
세세대대 이어가며 부르고 부르리
자연 속 산사람들의 순수성이 묻어있는 손혜도 할머니의 글이다. 산골 자연에서 다 신선들이고 시인일 것이다.
이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하자 대문을 나선다.
마을 중앙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말끔히 정비돼 있고 마을 주택 반 이상이 너와집인데 원형 그대로 허물어진 상태로 방치돼 있어
마을의 흉물이 되었고
반 정도의 주택은 팔짝 지붕으로 리모델링되었지만, 굴뚝은 주택 전체가 통나무 굴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리모델링되기 전 다 너와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와집
통나무굴뚝
마을 어귀 한 곳에 넓은 농지들이 방치돼 있는데 지금 농사 지을 사람이 없다며 2000년대까지는 저 넓은 농지 전체가
미나리 밭이djT다고 소개한다. 지금은 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가고 또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마을에 사람이 없다며
이야기 내내 할머니 표정에 회환이 묻어난다.
할머니 이곳에서 호랑이 본 적 있으세요
어릴 적에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마을에도 가끔 나타났는데 10여 년 전부터 호랑이 본 사람이 없다며. 곰과 사슴 등은
지금도 자주 나타나 밀렵도 한다며 산삼과 약초 등은 숲 속에 늘렸다고 한다.
얼마 전 마을 사람이 숲 속에 들어가 산삼 수십 그루를 캐는 횡재를 했다고 자랑하면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다며
미안해한다. 괜찮습니다 좋은 구경 많이 했습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할머니 손에 사탕 한 움큼을 쥐어 준다
호랑이도 내두촌을 떠났다
옛사람들은 호랑이를 인간의 떼가 묻지 않은 깊은 산골을 찾아다니는 산신령으로 신성시했다.
내두촌은 한중수교 이후 90년대 중반 한국 언론의 관심을 잠시 받았다 그때 각종 언론에 노출되고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오면서 잠자던 산사람들을 끼우고 온통 마을에 거품을 일게 해 물질만능의 세속을 찾아 당시 산 사람들은 다 떠났다.
이때 호랑이도 함께 떠났다 그 빈자리를 지금 물질이 대신하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는 현재 20여 마리가 백두산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중국 측은 추측하고 있다. 세계 10대 멸종 위기 동물로
지정된 백두산 호랑이는 중국 측도 현재 보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근래 들어 백두산 호랑이는 인간들의 문명을 피해 행동반경이 흑룡강성까지 넓어졌다고 한다, 눈 내리는 겨울철 흑룡강성 깊은
산골 농가에는 가축을 습격하는 호랑이 사건이 근래 빈번히 일어난다고 한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생활이 윤택해진 중국 소수 기득권층들이 떼거리로 밀려오면서 산신령 영역마저 이들의 인해전술에
무너지고 말았다.
마을 총무가 경운기를 몰고 온다. 특별한 메뉴를 선보이겠다며 경운기에 타라고 한다.
경운기를 타고 싱그러운 흙길로 잠시 들어가자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가 나온다..
마을 총무가 장화를 갈아 싣고 배터리를 메고 냇가로 들어간다. 능숙한 솜씨로 물고기 사냥을 시작한다.
전류로 기절시킨 물고기를 빠르게 건져 올린다.
자신들의 영역역을 점령한 세속의 인간들을 나무라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분을 토하며 바라본다.
그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다시 안 오마
백두산 밀림 속은 이제 봄이 오고 있다.
냇가 주변은 이름 모를 새싹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물고기를 가득 잡아 싱그러운 흙길로 다시 돌아온다 출국 전 미리 주문한 백두산 흑돼지는
어느새 부위별로 해체되고 마을에서 가장 젊은 아주마이가 내장을 손질한다
아주마이 한번 활짝 웃어 주세요 인증샷을 하나 남긴다
수돗가 식수는 백두산 지표수며 천연 생수 그대로 물맛이 아주 좋다.
맥주도 담그고 잡은 물고기는 회쳐 먹기로 한다
비늘을 벗기고 정성스럽게 다듬는다
백두산의 별미다. 상에 오르기 바쁘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잔치를 벌인다.
신선들의 잔치가 따로 없다.
백두산 자연석 돌판에 생삼겹살 바비큐는 쉬지 않고 구워진다.
신선한 공기가 더해 맛도 한층 더하다..
어둠이 내리고 내두촌 밤이 깊어간다.
다음날 아침 숲평선 너머 해가 올라온다. 백두산 밀림 속을 잠 깨우며 장엄하게 밝아온다.
처음 접하는 숲평선 해돋이 새로운 체험이다.
. 고지대 날씨는 아직 많이 차갑다.
방으로 들어가자 윗목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행들이 싸늘한 냉기에 감기가 왔다며 힘겨워한다. 천국이던 온천장과 달리 지옥이라며
언론 벗어나자고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오늘 일정은 이곳 특산품인 감자 칼국수로 중식을 나누고 백하역에서 13시 17분 발 용정행 열차가
예정돼 있으나 바로 떠나기로 한다. 열악한 주거 환경이 발길을 재촉한다..
백하발 연길행 첫 차는 7시 50분에 있다
간략히 차린 밥상에 컵라면 등을 곁들여 조식을 대신하고 서둘러 떠날 준비를 마친다,.
백두산 산골에서 하룻밤의 인연을 뒤로하고 차는 속도를 내고 있다. 백하 터미널까지 30여 분 소요되고 연길행
첫차에 오른다.
백하 시가지를 벗어나자 안도현 132km라는 안내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안도현에서 연길까지는 75km다
곳곳에 도로 보수 작업등으로 버스는 평시 속력을 내지 못한다.
4시간 넘게 걸려 12시경 안도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부터 도로 상태가
많이 좋아진다
70년대 우리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적한 도로 전방에 정겨운 글씨가 하나 시야에 들어온다
오 호령 차굴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차굴을 지나 30여 분 후 연길시에 도착한다. 오후 1시가 넘었다.
1차 1월
열차가 정시 도착되고. 13시 20분경 백하역을 출발한다. 우측 차창가로 비치는 광활한 백두산 밀림 지대는 온통 하얗게
펼쳐지며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송강을 지나자 좌측 차창가로 토문강 최상류가 밀림 중앙을 가르며 하얗게
꽁꽁 얼어 있다.
토문강
긴 터널을 하나 지나자 잠시 후 십리평 간이역이 나오고. 좌측 산기슭에 조선족 마을이 정겹게 펼쳐진다,
십리평 마을이다.. 이곳에서 잠시면 화룡시다.
화룡시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로 우리들에게 늘리 알려져 있다.
김좌진은 1889년 충청도 홍성지역의 만석꾼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백야다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망명해. 이곳에서 자리 잡은 서일을 찾는다..
1919년 서일의 대한정의단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되고 1920년 3월에 서일은 십리평에 군사간부 양성소 사관연성소를
설립한다. 이때 서일은 김좌진을 훈련 교관 책임자로 임명한다. 당시 학생 대부분이 대종교 청년 신도들과 십리평
덕원리에 있는 명동학교 학생들로. 명동 학교도 서일이 세운 학교다.
사관 연성소는 1920년 9월 6개월 속성반에서 1회 졸업생 289명을 배출했고. 졸업생 대다수는 북로군정서에
소속되고. 서일은 북로군정서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에 당시 20세이던 이범석을 임명했고. 당시 북로군정서 총병력은 1500명이다.
이 무렵 홍범도는 두만강변에서 대한독립단을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무산, 회령, 남양 등지에서 일본군
초소를 습격해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하며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해, 승리를 거둔다
봉오동 전투와 국내 진공작전 등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은 북간도에 활약하는 무장 독립군들을 진압하지 않고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대적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일본군은 그 첫 번째 작전이 자작극 훈춘 사건을 일으켜 자국민 보호 명분을 구실로 함경도 나진에 주둔하던 일본군 18사단 등
3개 사단병력 5만여 명을 훈춘에 투입시켜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학살을 자행한다
이후 일본군은 두만강 상류를 따라 봉오동으로 진격하지만 홍범도 대한독립단은 보이지 않는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는 8월에 청산리 2도 구로 이동해 지형적 우위를 차지하고 대한독립단 병력
700여 명을 매복시켜 두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십리평 서일의 북로군정서에도 연통이 날아든다. 일본군의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알려 온 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을 감지한 서일은 근거지 이동을 결정하고 백두산에 북로군정서 본부 근거지를 새롭게 구축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말경 백두산으로 이동한다. 10월 10일 안도현과 경계지역 청산리 삼도구에 도착하여.
청산리 이 도 구에서 일전을 준비하던 홍범도 장군을 만난다. 홍범도와 서일은 대책을 협의하지만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서일과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홍범도 간에 서로 의견 대립을 보이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느새 일본군 5만 여 병력이 청산리 주변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서일은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북로군정서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키며 싸움을 피했으나 청
산리 삼도구의 막다른 고지에서 더 이상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운평 위쪽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에 북로군정서 병력 1.500여 명을 매복시켜 두고 일전에 돌입한다.
10월 21일 오전 9시경 야스카와가 이끄는 추격대의 선발대가 청산리 삼도구 계곡으로 접어들고 이후 쌍방 간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고지대 우위를 차지하고 정확한 조준 사격에 일본군은 견디지 못하고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기 시작한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추격을 멈추고 갑산촌으로 다시 철수하도록 지시한다.
그 시간 청산리 이 도 구에서는 홍범도 대한독립단이 남북에서 협공하는 일본군과 쌍방 간 치열한 전투가 벌이 지는데 일본군은
지형에 밝은 홍범도 대한독립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에 이어 또 한 번 승리를 거둔다
한편 전날 갑산촌으로 후퇴한 서일과 김좌진은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을 것을 대비해 어랑촌 부근의
874 고지로 이동하여 전투를 준비하던 중 오전 9시부터 사방에서 포위해 공격해 오는 일본군의 공격에 북로군정서는 수적 열세로 위험을 맞이한다.
이때 산 아래 이 도 구에서 새벽까지 전투를 끝내고 철수하던 홍범도 대한독립단이 포위돼 있던 서일의 북로군 정서와
일본군을 사이에 두고 협공을 벌인다. 홍범도 대한독립단이 가세하면서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고 홍범도는 청산리 이 도 구에 이어 또 한 번
승리를 거둔다..
일본군의 연대장을 비롯 150여 명이 사살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에 이어 또 한 번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후 북간도에서 투쟁하던 모든 무장 독립 단체는 러시아 연해주로 집결해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과 합류한다
이때 북간도의 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의 전체 지휘권을 두고 연해주 독립군 내부에서 파벌싸움이 일어나 흑하 사변이 일어난다.
흑하사변이 일어나기 수일 전 서일과 김좌진은 통합된 대한독립단에서 이탈해 부하들을 데리고 다시 북간도로 돌아오던 중
중. 러국경에서 중국 비적들을 만나 부하 수십 명을 잃는 참사를 당한다. 그 자책감에 서일은 그곳에서 자결한다.
산시성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이때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죽이고 마을까지 찾아가 처형하고 목을 치고
귀를 잘라 마을 어귀에 달아놓는 등 광적인 행동들이 소문나면서 김좌진은 어느새 북간도 동포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김좌진은 또 일본경찰의 공작금을 받고 독립립운동가들을 처형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김좌진은 변절자라며 북간도
동포 사회에 악명을 떨친다.(출처 1995년 연변 조선족 문예지 발표)
결국 김좌진의 악행은 오래가지 못했고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앞 자택에서 200m 떨어진 정미소에서 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41세에 목숨을 잃는다..
북간도 연변 사회 학자들은 김좌진의 당시 행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박창욱(연변대) 교수는 『김좌진이 반 공산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이전까지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자고
주장했고. 북간도에 명망 있는 민족독립운동 단체들이 김좌진에 대한 처단을 엄중한 문제없이 경솔하게 내릴 수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박교수가 얘기한 엄중한 문제가 바로 최근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김좌진의 변절여부다. 연변학계 일부에서
몇 년 전부터 김좌진이 일제와 결탁해 변절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암살결정은 정당한 것이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양환준은 김좌진이 공산당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일제 경찰에 제공해 주고 그 대가로 활
동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증언했다. ML파 공산당 조직에서 활동했던 지희겸(전 연변대교수)도
김좌진이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부장 마쓰시마와 밀담 후 공산당원을 많이 죽였으니 만약 화요파에서 죽이지 않았다면
우리 ML파에서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김좌진 암살 당시 공산당 측에서 계파와 관계없이 김좌진이 일제와 내통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회고는, 연변역사연구소 연구원 강룡권선생이 자전거로 동북지방을 답사하며 취재한 기록에서도 부지기수로
나온다. 또한 허다한 생존자들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이곳의 관련부문 학자들이 김좌진을 무섭게 미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한 학자들은,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 장군에 대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수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 오히려 공산당 계통 항일연군과도 선뜻 합작했고, 실제로 몇 차례 전투도 같이
진행한 바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양세봉장군은 공산당계통 항일연군 수령인 양정우 장군 부대와 여러 차례 합작 헸다.
그리고 당시에 있어서 침략자 일본은 한중 두 민족에 있어 서로의 공동의 적이었다. 때문에 반일독립운동이 거의 자취를 감춘
1930년대에 접어들자 한인 청년들은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 대부분 공산당 계통의 항일부대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만주지방에서 공산당 활동은 1920년대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김좌진이 피살당한
1930년에는 벌써 많은 한인청년들이 공산당 계통의 항일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놈들보다 공산주의자들을 더욱 미워했던 김좌진은, 결국 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앞에서 잠깐 소개한 양세봉장군은 왜놈들과 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도 선뜻 합작했는데 이와 달리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종당에는 할빈영사관의 왜놈 경찰이 주는 돈까지 받으며 주구노릇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소문나게 되었다.
지금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을 통합해 보면, 이런 소문들은 결코 일제 패망 후, 양환준 같은 사람들의 회고에 근거해서 새삼스럽게
만들어져 나온 것만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좌진 장군에 의해 자식을 잃은 가족들에, 예하면, 김좌진 장군은 중동 철도선상의
산시역을 지나다니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한인청년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 때리기도 하고, 살해도 하고, 때로는 귀나
코를 잘라 그 청년의 집에 보내 군자금을 빌미로 돈을 협작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분명하게 김좌진 장군은 왜놈들도 미워했지만, 왜놈들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도 미워했던 사람이다.
그 미워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왜놈들을 죽이듯이 공산주의자들도 잡아들여서 인정사정없이 물고를 내고, 귀
를 자르고, 여차하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때려 처단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마을 동구밖에 던져버린 것을,
그 동네(산시) 사람들이 땅을 파서 묻어주기도 했다, (출처 1995. 연변 문예지발표)
광복 후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김좌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1급 홍범도와, 이범석에게 2급 김좌진의 직속상관
서일에게는 3급을 준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18년 정권 내내 공산당 빨갱이 안보팔이에 김좌진은 가장 좋은 모
델이 된다.
여기에는 청산리전투 당시 김좌진의 부관 이범석의 회고록 모닥불도 한몫 거들었다. 홍범도, 최진동, 서일. 김좌진 등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은
하나같이 다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는다. 한 사람이 살아남았다. 김좌진의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당시 20살의 나이로
김좌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이범석이다. 광복 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국무총리가 된다.
약관 20살의 나이에 청산리 전투 당시 일개 소대장 역할을 했던 이범석은 어느새 청산리 전투를 이끈 주역에서 다시 장군으로 둔갑되고 당시 영웅이 된다,
이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권력을 쥔 산자의 입맛대로 쓰인 대한독립 운동사 모닥불..
많은 자료들을 검색하면서 역사는 어떻게 조작돼 가는지 생생하게 접할 수 있고.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학계서도 민주화
바람이 불고 왜곡된 청산리 전투의 진실을 하나식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연장선에서 홍범도의 지략이었다는 것이 지금 학계의 정설이다.
아내와 자식까지 조국 독립운동에 희생물로 다 바친 홍범도
그는 아버지도 머슴이고 자신도 머슴 출신이다.
북간도 횡단 열차는 화룡을 지나 4시경 용정에 도착한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버스와 택시 기사들의 호객행위로 역 광장이 분주하다
연길행 작은 미니버스에 탑승하고 좌석이 다 채워지자 차는 곧바로 출발한다 연길까지 15분이 체 걸리지 않는다.
어둠이 내릴 무렵 연길 시가지에 도착한다.
연길시는 인구 약 65만이 거주하는 도시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심 도시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천지개벽한 도시다. 먼저 억양부터 바뀌고 있다.
한중수교 초기당시 이들의 억양은 함경도 작은 도시로 착각할 만큼 함경도 억양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 내 작은 서울로 탈바꿈하면서 말씨도 서울 말씨로 바뀌고 모든 것이 한국식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은 남한에서 노무 등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특히 이곳 한국방송의 영향이 가장 크다.
대부분 가구에 위성안테나를 설치해 한국 방송을 시청한다. 또 한류 드라마도 한몫했다.
연길 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호텔 한 곳에 미리 예약됐으나 베트남에서 이번 1차에 참가한 김 선생이
북한의 외화벌이로 운영하는 유경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다고 해 숙소가 양쪽으로 나뉜다.
호텔 3층 식당에서 준비한 단체식을 함께 나누고 김 선생과 함께 유경호텔로 이동한다.
유경호텔은 북녘의 외화벌이 호텔로 이곳에서 반세기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택시로 2~3분이면 도착한다. 유경호텔에 들어서자 1층 식당에 공연이 막 시작되고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식사를 나누고 있다.
남쪽의 디너쇼 형태다.
빈자리가 없다..
평양 미인들이 장구와 북, 거문고. 가야금 등 전자 오르간까지 동원해 한 시간을 넘게 아리랑 등, 홍도야 울지 마라, 울려고 내가
왔나 등 우리 남쪽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고 있다,.. 흥겨운 노래판이 벌어지고. 손님들은 어깨춤을 들썩인다.
노래와 흥을 좋아하는 조선 민족들로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1차 공연이 끝나고 3층 객실로 안내받는다
늘 반갑다. 내게 는 20여 년의 인연이다. 2년 전 여름 큰딸과 하룻밤 묵은 객실이 배정돼 더 따뜻함을 느낀다
객실에 싱글베드 2 개식 놓여 있고 벽지도 커튼도 욕실도 당시 그대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북간도 밤이 깊어 간다.
대구미녀와 평양미녀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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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하는 자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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