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빨강, 냄새. 상해 푸동 공항에 첫발을 디딜 때 느꼈던 생소함들이다. 내 나라가 한자 문화권이라 한자가 그리 낯설지 않은데도, 사방천지가 한자인 세상, 그것도 번체가 아닌 간체로 모든 것이 표시되어 있는 세상은 낯설기 이를 데 없었다. 글자를 모르는 세상은 막 태어난 신생아가 된 기분이다.
흔하디 흔하다는 게 이렇게나 낯설 수 있는지, 역설이 느껴졌던 색깔, 빨강. 중국인들의 빨강 사랑은 유별나서 명절이나 기념일의 축의금에 주는 돈을 홍빠오红包라고 한다. 빨간색 봉투라는 뜻이다. 그리고 집 현관문 앞에 복福자를 새겨놓은 빨강색 장식, 춘절이나 국경절에 으레껏 곳곳에 걸리는 홍등红灯, 이런저런 계몽문구를 세워놓은 빨간색 표지판 등, 너무 흔해서 생경했던 빨간색의 세계는 선혈의 낭자함을 보는 듯 강렬했다.
한 대상을 애정한다는 것의 지표는 뭐니뭐니 해도 냄새에 대한 호불호이다. 못생긴 사람이나 성질 더러운 사람과는 살아도 적응되지 않는 냄새 나는 사람과는 못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냄새야말로 가장 자기다운 정체성의 산물인가 싶은데, 중국만의 냄새가 있었다. 한국인에게 마늘 냄새가 난다는 것처럼 생강과 팔각이 섞인 듯하면서, 여기에 뭔가 퀘퀘하게 눅진 습기 가득힐 냄새가 코를 자극했을 때 이곳이 한국이 아닌 중국임을 실감했다. 중국 남방지역의 냄새다.
한번도 살게 될 것이라 꿈 꿔 본 적 없는 중국이다. 생경했다. 이밖에도 새로운 것 하나하나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글자는 중국어 책을 읽을만큼 익숙해졌고, 빨간색 또한 백의민족의 하얀색만큼이나 살가와졌다. 비 오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서야 중국에 첫 발을 디뎠을 때의 그 냄새를 비로소 기억할만큼 냄새에도 적응하게 되었다. 3년 반의 시간이 가져다 준 변화다.
더이상 새롭다 느끼지 않을 즈음이 되었다. 오게 된 일이 갑작스러웠던만큼 떠나는 일도 갑작스러웠다. 이렇게 빨리 중국을 떠나게 될 줄 몰랐다. 남편은 이곳에서 퇴직을 하고 싶다고 했으니 한 10년은 살게 될 줄 알았다.
떠나는 길이다. 처음 입국했을 때와 똑같은 길을 달린다. 코로나 상황으로 자주 출입국을 할 수는 없었지만 몇 번 오가던 길이다. 작년, 큰녀석의 입시차 출입국을 했을 때도 오갔던 길이다. 그때는 다시 돌아올 중국을 떠나는 길이었다. 그 길은 여상했다.
대륙의 땅은 널따라서 땅의 저 끝을 바라보노라면 시름 잃은 평온함을 느끼곤 했다. 검은 지붕에 하얀색 벽돌집은 이곳에서 가장 흔하게 본 풍경이다. 메마르고 앙상한 겨울 가지는 으레 그런 것이다. 물이 흔한 곳, 그만큼 호수가 많고 하천이 많았던 풍경은 중국에서의 빨간색 간판만큼이나 흔하디 흔하게 목격한 것이다.
지금 다시 오지 않을 길을 떠난다. 시간의 끝에서 바라보는 길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익숙함을 희석시켰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것들을 끝에서 보는 것은 첫 만남만큼이나 낯설었다. 이별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도록 재주를 부렸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경구를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흔한 것은 어렵다. 이별이 이 어려운 것을 해낸다. 어제의 것이었으나 왠 일인지 더이상 과거의 것이 아니다. 익숙함이 낯설어져 가슴에 한 켠에 알알이 새겨지는 것, 하여 더 많이 애정하게 하는 것. 이별은 이런 것이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 이것은 다른 언어로 매일 '날'日을 떠나보냄이다. 매일 오늘과 이별하는 것. 끝에 서보는 것. 하여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오늘이지만 더 새로운 오늘을 살아보자고, 더 자주 익숙한 오늘과 이별해보자고, 마지막을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고 다짐해본다. 안녕 쑤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