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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 이규리
시멘트와 물을 비벼 넣으니 단박에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로 순식간에
안과 밖이 나왔다
단단하구나 너에게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비벼 넣었으니
어쩌자고 저물녘을 비벼 넣어 백년을 꿈꾸었을까
벽이 없었다면 어떻게 너에게 기댈 수 있었겠니
기대어 꿈꿀 수 있었겠니
벽이 없었다면 날 어디다 감추었겠니
치사한 의문들 어떻게 적었겠니
받아주었으니, 기대었으니
그거 내 안으로 들어온 밖 아니겠니
밖이 되어 준 너 아니겠니
외로움은 길이 된다 / 구석본
러닝머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길이 열린다.
나무도 사람도 산도 구름도 없다.
오직 길,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다.
내장된 외로움이 스르르 열린다.
외로움은 길이 된다.
내가 달리면 외로움도 달리고
외로움이 걸으면 나도 걷는다.
주어진 시간이 다할 때까지
외로움은
나와 함께 걷는다.
외로움의 본색本色-2 / 송용식
한참을 울고 나서
체중계에 올랐다
눈물이 빠져나가
가벼워질 줄 알았더니
우는 날이 많아질수록
무게가 더 나갔다
체중계는 마음을 재고 있었다
외로움의 면역체계 / 김경선
틈날 때마다 외로움을 수집하는 것은 나의 취미
외로움도 희석이 되면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비 개이면 잠시 딴전 피다가 여우비처럼
스멀스멀 내 영혼의 발목을 적시기도 하는,
외로움은 나의 오래된 지병
할머니를 뒤지고
어머니를 뒤져 누대의 계보 따라가면
굵고 가는 빗방울처럼
외로움에도 두께가 있다
수집한 외로움은 몇 종이나 있는 거죠?
멸종 위기에 있는 희귀종이 궁금해요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 것도 있나요?
글쎄요
궁금하긴 마찬가지에요
어느 박사의 연구논문 중 외로움 잘 타는 사람일수록
면역항체가 줄어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외로움의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낳고
돌연변이는 또 다른 외로움을 낳는다
수위 조절에 실패하면 외로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의 몸에도 절망이 잠복중이다
식물들의 외로움 / 임동확
한사코 어미의 품에서 떼쓰는 아이들처럼 찰진 논바닥에 도열한 벼들. 낱낱이면서 하나인, 또 하나이면서 낱낱인 식물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건 결코 내부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다.
홀연 태풍처럼 밀려왔다가 그 자취를 감추고 마는 낯선 동력. 누구에게나 단호하고 거침없는 죽음 같은 바깥의 힘.
필시 하나의 정점이자 나락인, 끝없는 나락이자 정점인 푸른 줄기마다 어김없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을 외로움의 화인(火印)이 찍혀 있는,
여럿이면서 홀로인 벼 포기들이 끝내 제 운명의 목을 쳐 내는 낫날 같은 손길에 기대서야 겨우 고단한 직립의 천형을 벗어나고 있다.
일요일의 고독/ 이 원
햇빛이 어린 나무 그림자를 아스팔트 바닥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아이가 제 그림자 속에 공을 튕기며 걸어갔다
비둘기 두 마리가 나란히 땅에서 하늘로 수평을 끌어올리며 솟구쳤다
타워크레인의 기다란 줄 끝으로 나무 한 그루가 끌어올려졌다 비닐 안에 뭉쳐진 흙더미가 뿌리를 감추고 있었다
시간은 수십만 개의 허공을 허공은 수십만 개의 항문을 동시에 오므렸다
58세 내 고독의 構圖 / 최승자
고독은 끄려 하면 낱낱이 흩어져 보이지 않는다
고독은 먼지처럼 편재한다
그것은 58세, 내 고독의 구도,
부르봉 왕가 태생도 어쩔 수가 없다
이 풍경의 구도 속으로 누가 흠칫 발을 들여놓는다
그림자도 없는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칠판 위에 써놓는다
See thing as they really are
그러나 나는 안성맞춤의 정반대로 읽을 수 있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虛한 시간들이 밀려온다
삶도 죽음도 없는, 有無를 넘어선,
虛虛가 밀려온다, 有有無無의 총체를 넘어선
道可道 非常道* 노래했던 사나이는
저 초월의 虛에도 불구하고
질펀하게 쏟아지는 현실의 虛를
어떻게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虛를 道로 대체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래도 58세, 내 고독의 구도
부르봉 왕가 태생도 어쩔 수가 없다
(폐허로 오시라 나의 아씨들이여,
더욱 슬퍼하기 위하여 오시라 내 詩의 아씨들이여
고독과 슬픔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
*노자, <도덕경>의 첫 두 구절.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 김선우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소년을 끌어안은 채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자기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흘러내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 기억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네
응응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 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나도…… 사생어른이야……
검은 고독, 흰 고독 / 김연아
—변기의 말
그녀는 검은 올리브 같은 열매를 한 알씩
내 입으로 떨어뜨렸다
죽은 물고기와 재스민 냄새가 내 얼굴에 스민다
오라, 오라, 나는 노래하는 변기
내 목구멍은 회전문처럼 열리고 닫힌다
당신은 땅의 자궁에 부어질 것이다
아니, 나는 변기가 아니고, 오그라든 자궁이 아니다
이곳은 고해가 행해지는 신성한 화장실
당신은 눈물과 잉크로 가득 찬 가방
장엄한 보리수 아래 앉듯
이 비어 있는 왕좌에 앉으시라
흰 고독 위에 앉은 검은 고독, 당신은 깨끗이 정화될 것이다
고행자도 끌어안고 걸인도 끌어안고
즐거운 배설물이 담긴 황홀한 반죽통,
내 목구멍으로 당신의 피가 흘러갔다
당신의 심장에선 아직도 잉크가 새고 있나?
몸을 비울수록 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눈물로 가득 찬 목구멍
뱃속에서 부화시킨 새끼를 입으로 낳는
이브검은쇠숲개구리처럼, 당신의 입은 둥근 자궁
이것은 하늘을 향해 열린 동굴, 밤으로 통하는 입구
나의 길은 하느님의 창자보다 더 길고
모든 노선은 나를 통하게 되어 있다
고백과 예언이 뒤섞이는 밤,
나의 길은 당신이 낳은 미로를 끌고 멀리 가는 것이다
눈물 흘리는 아이들의 옹알거림처럼
이미 씌어진 것들을 지우기 위해
당신의 조율에서 멀리, 잘 닦여진 메모로부터 멀리
나는 인간의 연대기를 간직하고 거대한 속삭임을 듣는 자
당신이 동물을 먹고 산 채로 동물을 묻는 동안
귀머거리가 벙어리에게 귀 기울이는 동안
나는 씌어진다 흰 고독 위의 검은 고독으로
혹등고래처럼 엎드려 자기 별자리를 향해 가는 나는
잠이 없는 어두운 동물이다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 심보선
고양이 한 마리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다
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
코끼리 같은 버스가
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 있다
누군가 말한다
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
누군가 답한다
종점에서 바퀴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새 시장은 계몽된 도시를 꿈꾸지만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그 증거다
멀리서 아련히 사이렌이 울린다
한때 그것은 독재자가 돋우는 공포의 심지였으나
이제는 맹인을 이끄는 치자꽃 향기처럼 서글프다
누군가 말한다
두고 봐
종점에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거야
하루 또 하루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친구들과 죽은 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고양이 한 마리 또 한 마리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 손택수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를 하던 그가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 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꼽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잘 가라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추락이야말로 어쩌면 모든 집중된 순간 순간들의 아찔한 황홀
당겨진 근육들이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를 응원할 때
나른하던 공기들도 칼날이 지나간 듯 쫙 소름이 돋는다
뜨거운 포옹과 날렵한 결별 속에서 태어나는 몸
사랑에도 근육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겠다
출렁, 깊게 패이는 메트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쏘아올려야 하는 자의 고독이 장대를 들고 달려간다
폭발하는 한 점 한 점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물수제비 물결이 인다
고독한 사람/ 최영철
말수가 뜸한 사람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를 아무나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어 잠시라도 멀어지면 심심하고 보고 싶어서 입술이 파리해지는 사람이다 잠시 떨어져 헛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가면 금방 침이 말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발과 팔다리의 취미가 고독인 사람이다 소싯적 취미란에 아무 의심 없이 고독이라고 쓴 적이 있는 사람이다 손발과 팔다리가 제 일에 바빠 조금만 흩어져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람이다 팔다리가 한통속으로 무슨 일을 도모할까 봐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다 보고픈 이도 없고 찾아 나서거나 악수할 이도 하나 없는 사람이다 온 힘을 풀고 손과 발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 홀로 묵상하는 척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가장 고독한 자세로/ 문리보
칩칩한 동굴 끝자락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쥐로 살지 않는다
새로 살지 않는다
무엇으로도 살지 않으니 무엇으로도 살 수 있다
텅 빈 눈동자가
보채는 어린것의 작은 얼굴을 가만히 핥는다
툭
박쥐, 네 거꾸로 사는 세상은 눈물도 거꾸로 흐른다
자기고독 / 문저온
자기고독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시인이 말했다
나는 토막 난 고등어처럼 앉아
자기고독,
읊조렸다
읊조리면서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된장을 푼 양념장을 내 몸에
끼얹었다 편으로 썬
무 위에 납작 누워
자기고독,
엄마가 죽을 때는
고등어조림 비법을 유언으로
받아 적어야 할지 모른다
내장을 긁어 낸 몸과
간장과 고춧가루와 찧은 마늘과
옆자리에 누운 모르는 고독
낙태하고 멍하니 눈 뜨던 대낮
체면을 구기니 胎자를 果자로 바꿔 쓰고
낯을 쓸어내리는데
낯이 없다
원반던지기 선수의 고독 / 홍일표
너는 하나 남은 태양을 쥐고 있다
차고 딱딱한
어느 날의 이별 같은 것
단 한 번의 사랑 같은 것
해 지는 저녁에도 너는 너를 던져서
사라진 방향을 읽는다
내가 어디 갔지?
잠시 어리둥절한 사이
몸에서 빠져나간 몸은 눈보라로 산화한다
고백하자
우리는 언제나 이곳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단지 구름의 높이로 부풀어 꽃피는 심장이었다고
입이 없는 노래처럼
너에게 날아가는 돌멩이는 불붙지 않는다
심장을 조여 매고
겨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크고 둥근 태양을 강행한다
몸밖으로 던진 슬픔이
다시 돌아와 발등을 짓찧는 날
반쯤 기울어 빈 수숫대로 서 있는 저녁
흙투성이 태양을 방패처럼 잡고 혼자 어스름을 견딘 몸이 말한다
길 끝에 서서
밤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의 눈가에 죽은 이의 이름들이 오래 붐비고 있을 거라고
마네킹, 고독을 입다 / 구석본
거두절미(去頭截尾)된 마네킹, 머리 없는 사람이다.
입 이전의 입으로 그가 말한다.
웃음 이전의 웃음의 표정을 짓는다. 지금 나는,
치명적인 환상의 정면에 서 있다.
표정 이전의 웃음소리가
조명등 불빛으로 현란한 몸짓으로 퍼져나가면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의 고독이 입 없는 말로
은밀하고 단호하게 속삭인다.
거두절미하라. 석고로 굳은 눈물은 슬픔의 폐기물일 뿐, 추억이 말라버린 그리움은 박제된 영혼일 뿐, 단칼에 잘라라. 이전의 생각을 생각으로 자르지 말라. 빛 같은 바람, 어둠 같은 빛으로 자를지니 그리고 그 자리에 고이는 허공을 머리처럼 둥글게 말아 올리면 조립된 석고의 추억과 슬픔이 일으켜 세우는 매혹적인 외로움, 너의 골격이 되어 비로소 꽃을 수놓은 의상을 입으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버렸다.
그날 이후 거두절미된 나는,
밤마다 꽃으로 수놓은 고독을 입었다.
조명이 꺼진 쇼윈도 같은 내 안의 방에서.
다만 저 집의 고독은 / 김관용
저 집은 자정에 듣는 목소리 같다
첫 단추를 끄르기 위해 고독은 잃을 게 없다
가령 심장을 움켜쥐는 돌발적인 질병도 있겠으나
더운물의 욕조에서 손목을 긋거나
비싼 넥타이로 목을 맨 채 의자에 올라 확실하게 미끄러진다고 치자
이건 영혼의 일이 아니다
현관문과 지붕, 허파나 쓸개의 진실이 되어 보는 일
고독의 뼈와 살을 꺼내 다오
외쳐 보지만 당연하게도 고독은 사인이 될 수 없는 것
늦은 점심 후의 식곤증인 줄 알았다
믿지는 않았지만
대기업에 다니다 잠시 쉬고 있다는
돌멩이라도 던지면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은 고독
조금쯤 취해 다녀온 공원이 그를 감싸는 껍질이었고
웃음이 터질 때까지 울어 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
본일 말고는 다 아는 고독이었으니
늙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지루해
다시 태어나도 여기가 항상 고비일 거야
달리 갈 곳이 없었으므로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것일까
결국 소름 끼치게 잔혹한 복수란 이런 것일까
우울증에서 시작해 알코올 중독으로 끝나는
죽은 지 두 달이 다 되어도 냄새로만 발견되는
그런 집이 들것에 실려 나온다
아직 오지 않은 집이었고 기억에서 사라진 집이라고 하자
다만 여기까지가 자정이었다
밤의 별채 같은 고독 / 장석주
-자동기술법으로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 무지몽매한 몸으로 떠도는 우리,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산다. 오후에 한가롭게 중국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때, 당신은 다육식물을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려면 몇 억 겁의 세월도 모자란다.
천 개의 폐를 가진 밤, 바람이 스칠 때 별은 기침을 한다. 오늘 밤 하늘에는 별의 기침 소리로 가득 찼구나! 건강은 인류의 과거다. 방광이 깨끗하다는 건 지독히 외로운 일이다. 외로움은 당신에게만 일어난 존재 사건이다. 외로움이 늘 슬픔을 부양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담낭에서 시를 끄집어낸다. 고양이는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유일한 야간 노동자다. 김밥 한 줄을 먹고 외투를 걸친 채 산책에 나선다. 눈사람이 서 있는 거리에서 참다운 고독은 돌연한 존재의 정전停電이다.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뒹구는 검은 비닐봉지 속의 주검. 고양이의 수염과 사지는 이미 뻣뻣하다. 당신은 항상 늦게 도착한다. 모든 것을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리기엔 늦었다. 당신은 쓸개즙 같은 검은 고독 속에서 표류한다. 고독은 3억 8천 6백만 년 전의 숲에서 살아온다.
밤의 밑바닥에 당신의 이름을 썼다가 지운다. 이름은 세계와 나 사이의 중재자다. 눈 속으로, 하얀 눈 속으로 빠지는 당신의 발. 눈사람은 자꾸 어디로 사라진다. 당신은 말하고 입을 가리고 겨울의 시든 풀밭처럼 조용히 웃는다. 봄이 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우리는 기린을 보러 동물원에 간 적이 없다. 봄이 오면 당신은 초록 화관花冠을 쓰고 거리를 걷겠지. 잘 웃는 당신, 겸손한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한다. 당신이 시금치를 먹을 때 소량의 철분이 당신의 핏속으로 녹아든다. 당신 속으로 하루치의 고독이 녹아서 스며든다. 당신은 밤의 별채 같은 고독을 끌어안으며 웃는다.
고독지옥孤獨地獄 / 서윤후
1.
입장은 언제나 고독함
세탁기나 복사기 앞에서의 시간까지도
기다림은 그동안 잘 빚어 온 것
인간은 불구의 마음을 받아들고는
너무 일찍 자신의 간병인이 되는 일을
2.
이 저수지는 무척 지루하고 볼 것 없는 풍경이지만 언젠가 있는 힘껏 던진 돌들이 여기에 모두 잠들어 있다
고독한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음
사람이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일을 서두름
악몽은 비좁은 통로로서
이를테면 우산을 두고 내린 버스가 영원히 종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비가 그치자 지나온 길이 희미해지는 것
장대비는 금방 삶은 애저녁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반바지
호주머니 안쪽이 가장 늦게 마르는 비밀의 하수
3.
입장은 계속 난처할 수밖에 없음
딱히 아픈 곳 없어 소화제나 처방받았던 환자가 몇 분 뒤 다시 찾아와 진료를 기다린다 의자가 지루해하는 엉덩이 알코올 솜이 마르는 시간보다 빨리 찾아온 통증은
기다림도 어쩔 수 없었다는 고독
지켜볼수록 커지는 불길처럼
이 구경거리는 잠든 돌을 깨우는 아름다운 양식
입장은 입장이 되어 가는 순간에도
고독을 쉬어 갈 수 없음
삼각김밥 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앞에서도 설익은 컵라면을 후루룩 삼키는 편의점의 저녁 속에서도
고독은 글피에 다시 오기 위해 허기를 간직함
4.
파쇄기가 파쇄기 속으로 들어가는 생각
다짐의 돌을 물 밖으로 꺼내오는 생각
호주머니 속에는 젖은 돌멩이가
한 사람이 죽기 위해선 몇 명이나 필요해요?
구해 달라고 고백하는 사랑은 이미 끝난 게 아닐까요?
어쩔 수 없음
고독은 입장을 표명함
혼자 남은 지구의 고독 / 이 원
체육관에는 공 튕기던 소리가 빽빽하다 엇갈리며 빠져나가던 발들이 가득하다 2층에는 스탠드가 있다 오래 비어 있었는데도 사람 형상이다 곳곳에 함성이 굳어 있다 문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밀고 있는 순간은 벽을 벗어난다
뛰기 좋아, 뛰는 발들이 있다 발을 들면 허공이 시작된다 더 뛰어오르는 허공이 있다 울기 좋아, 문이나 창 삼키지 않고 주륵주륵 흘러내기 그 자리에서 미끄러지기 불길처럼 날뛰기 이것은 허공의 놀이 쇄골에 알들이 놓이던 날 바닥은 피부처럼 벗겨지고 있던 날 둥그렇게 깎는 법을 알고 싶다 넓은 깃 셔츠처럼 허공을 입어보던 날 이것은 지구의 천성
뛰기 좋아, 자꾸자꾸 사라지고 체육관은 남는다 아직도 텅텅 울리는 탁탁 내리치는 턱턱 막히는 소리가 있다 벽은 더 물러선다 체육관은 계속된다 그림자들을 펴서 말리고 있다 성한 울음을 골라내고 있다 공은 뒹굴고 있다 발소리들은 몰린다 가장자리에 오도 가도 못하는 희미가 있다
체육관은 약간 높은 곳이다 자세히 보면 그렇다 조금씩 조금씩 밀어 올린 것인지도 모른다 벽의 놀이인지도 모른다 놓친 제 얼굴처럼 허공이 체육관을 쓸어보는 장면도 있다 자국은 허공에 난다 체육관은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희고 단층인 그곳은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라고도 들었다 휘슬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외로움이 미끼 / 김명인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낚싯줄이 닿아서
그와 줄 하나로 이어졌으나
등 푸른 고등어가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줄 끝의 내가 아니라
세 칸 낚싯대의 탄력으로 버팅기는
등 뒤의 산맥이었으리
깊이를 몰라 뒤채는 물보라 허옇게
부서져 나가자
심해의 밑자릴 넘겨주시려는지
퍼덕거림의 뿌리가 가슴속까지 덜컹,
수심으로 전해진다
그토록 박차고 싶었던 외로움의 해구를 지나와야
비로소 감지되는 바다 검푸른 촉수가
내 몸에서 돋아난다
그녀의 외로움은 B형 / 마경덕
앞집 렌지후드에서 빠져나온 저녁메뉴와 반쪽 창문에 걸린 거실 표정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잠을 설쳤다.
프라이팬과 여자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닭다리튀김, 소시지볶음, 햄, 생선튀김…여자는 늘 프라이팬을 의지한다. 팬은 지나치게 입이 크다. 뱃살이 늘면 외로움도 품을 넓힌다.
먼저 ‘마른 A형’과 ‘비만 B형’으로 외로움을 분류한다.
소파나 여자의 무릎에서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고양이 울음도 B형이다. 두 마리 고양이와 비만형 여자는 24시간 서로를 의지한다. 주방에서 맴도는 고양이의 허기는 여자의 우울증과 비례한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면 여자는 프라이팬과 고양이를 붙잡고 있다.
간간이 끼어드는 기침소리, 그 음습한 소리는 주방 반대편에 산다. 문턱을 넘지 못한 누군가 그 방에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 여자는 가끔 방문을 향해 프라이팬을 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기침소리에 그녀는 왈칵 고등어통조림처럼 쏟아진다. 마당 늙은 살구나무가 창문을 가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 ‘외로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프라이팬, 폭식과 허기는 사랑과 동일한가? 리포트는 아직 미완성이다.
고독의 形式 / 김륭
미아삼거리 허름한 여관 세면대에서 양말을 빨았죠
팬티도 아니고 양말을 빠는데 거참, 물이 사람을 물고기로 봤는지
구중꾸중 꾸짖는 소리, 목 늘어난 넌닝구처럼 마구 쥐어짜는
물소리 한번 참 몰상식하데요
집나간 마누라행세를 하데요 발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당신 또한 구멍난 양말을 신고 다닌 바람이었는지 모르죠 입을 틀어막기엔 걸레보다 양말이 낫다며 덜덜 목이 부러져라 얼굴을 돌리는 선풍기, 뒤돌아보면 늘 목이 탔던 길이어서 킁킁 양말 속으로 코를 들이밀었겠지만 몸이 화끈 달아오르데요 콧구멍에서 생선가시로 변한 나무 몇 그루와 구름이 조금 흘러나왔지만 나비넥타이를 매고 살기엔 머리가 너무 무거워졌더군요 발가락이 숨을 할딱거리데요 어항 속을 뛰쳐나온 금붕어처럼 울긋불긋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렸지요
내가, 내 몸을 벗어나기엔 사각 침대가
너무 깊더군요
고독한 코끼리 / 김만호
지구의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운 상태에서 아무 감시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변덕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고독한 코끼리’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는 데 있다. … 문제는 CIA가 감시를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기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단적이며 ‘고독스러운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2002년 2월, “제네바협약의 어떤 조처들도 우리 (미국)와 알카에다의 분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특별히 명시한 법령에 서명했다. - 저격수가 꼼짝도 하지 않고 옥상 바로 아래 층 깨진 창문에 총을 괴고 엎드려 있다 확실한 사살을 조준하는 저격수를 꿈꾼 적이 있다. 어메리칸 드림처럼, 배 아래 숨죽인 밀항하는 아시아인처럼, 이 모든 일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그는 연설에 강한 코끼리, 긴 코를 세워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는 당신을 휘감아 올리고 있다.
*출처 : 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의 글
절대 고독 /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는
외로움 / 안도현
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는 날
혼자의 넓이 / 이문재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 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소외/ 고정희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외로움의 우산을 쓰고, 외로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요.
밤의 외로움 / 박서영
열대야를 고장 난 선풍기 한 대로 보냈다
빗나간 목을 두꺼운 스카치테이프로 동여맨
밤새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정이 들었나
선풍기를 끄면 잠이 오지 않는다
밤새 텔레비젼을 켜놓고 자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이서 한꺼번에 한 사람을 지목한 적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는 달은 병을 앓다가 그들을 놓아주었다
나는 달의 뼈 하나를 집어 뭔가 쓰고
쓰다가 지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괜스레 선풍기의 미풍 약풍 강풍 버튼을 번갈아 눌
러보았다
죽기 전에 저 고장 난 선풍기를 가장 먼저 버려야
겠다고
심장에 몇 마디 꾹꾹 매장해 보는 가을밤
선풍기는 어떤 무늬를 가진 새처럼 울기 시작했다
고장 난 선풍기 속에 부엉이가 사나
밤의 외로움은 날개를 접고 부엉부엉 울다가
슬픔을 탈탈탈탈 털어내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선풍기에서 깃털 같은 바람이 쏟아지곤
했다
외로움을 향해 / 고형렬
뱃속에서 개구리가 개굴개굴 운다
개굴개굴거린다 뱃속에서
나는 비 오는 길 끝을 본다
멀지 않은 산속을 본다 개굴개굴
끊임없이 울어대는 뱃속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남으로 뻗은 먼 길을 내다본다
비 오는 산속 나뭇길 쏟아져
잎가지 내려오는 물살 센 계곡물
소리를 괄괄 들으면서 지금
그 길을 가로막은 찻길에서 바라본다
나보다 오늘 나보다 먼저 가는 나
모든 말을 버리고 갈 그대여
모든 빗방울이 해변가로 이어져
폭포로도 들로도 이어진 그
물길을 나는 조용히 보고 섰다
언젠가는 그 외로움의 길로 들어설 것을
뱃속에서 개구리가 운다
개굴개굴 비 오는 뱃속에서 개굴개굴
아 나의 퉁퉁 불은 배여
외로움을 향해 비 오는 산을 본다
외로움에 대하여 / 김선우
괜찮아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와 함께이니까
괜찮아
어떤 경우에도
내가 나를 믿어 주는 한
일곱번째의 외로움 / 이대흠
빈 깡통에 고이는 장맛비처럼 외로움은 차고 넘쳤습니다 한 외로움이 오고 금세 다른 외로움이 줄을 지어 옵니다 처음의 외로움은 무겁고 큰 외투처럼 불편했습니다 나는 해충 피하듯 외로움으로부터 도망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외로움은 더욱 사나워졌습니다 외로움이 많을수록 외로움이 더 외롭습니다 어떤 외로움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나를 물어뜯습니다 오래도록 나는 외로움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저 혼자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나를 찾아온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은 열일곱번째의 외로움이 왔을 때입니다
잃어버린 외로움을 찾아서 / 이운룡
외로움을 찾아서 외로움과 함께
비를 기다리네.
발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고
온몸이 젖어 마음을 비우고
불러들일 나를 찾아서
떠나고 만나는 걸음들
이미 흩어져 간
한밤의 역광장 시계탑 아래
보내고 맞을 사람도 없이 나는
혼자 외로움 만나 외롭지 않은
참 오랜만의 내 어릴 적
꾀벗은 기쁨
외로움을 모르고 외로움 없이
어떻게 풀잎이 섰겠는가,
풀꽃이 피었겠는가,
기를 쓰고 악을 쓰며
휙휙 지나가는 시간에 실려서
흔들리고 깨지는 자갈길을 가면서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이 뒤집혔는지
모르고 덜컹거리는 우리들
가슴 밑장을 들여다보면
어느 틈새에도 외로움은
보이지 않네.
외로움을 모르고 외로움 없이
어떻게 인생을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외로움 얻어 돌아오는 길 빛나거니 / 이성부
크낙한 슬픔 한 덩리를 들고 나와
햇빛에 비춰보는 사람은
비로소 큰 기쁨을 안다
잃어버린 말 잃어버린 웃음
잃어버린 날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끝내 더 큰 획득에 이르지 않았더냐!
무릎 꿇고 멍에를 짊어지고
긴긴 밤 하늘에 내 별 길을 잃어
나타나지 않았지만
다음에 온 더 맑은 밤들마다
승리에 반짝였으니
이제 또 봄이다
아픔을 나의 것으로 찾아가는 사람만이
가슴 뛰는 우리들의 봄이다
외로움을 얻어 돌아오는 길
더 빛나는 우리들의 봄이다.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고재종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탱자울에 방자한 참새떼 소리
이제 그만 시끄럽다 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 몇몇
죄다 비닐하우스에 가버리면
하느님도 간간 바람으로 스쳐와선
후진 곳에 쓰레기 버리듯
은행나무 잎새를 우수수 쏟아버리게 한다
외로움은 빛나서 별이 되지 못하고
청대숲의 청대잎들
저희들끼리 몸을 버히게 하고
까짓것 알몸으로 알몸으로 온통 덤벼도
어느 손목뎅이 하나 건드리지 않는 홍시들
이제 그만 붉은 눈물 떨구게 한다
외로움은 질기고 질겨서
그래도 남은 무엇이 있다는 듯
삼밭의 폭배추를 포탄이 되게 하고
여차하면 날아버릴 듯 웅등거리게 하고
더는 반짝반짝 닦아내지 않는
장독대의 옹기들을 온통 검푸르게
간이 들게 하고, 간이 들어
미륵불처럼 처연하게 하고
반갑다, 어디서 개 한마리 짓는 소리에
마을 가득한 햇살만 출렁! 하게 한다
아아 외로움은 흘러서 강이 되지 못하고
봉두난발 갈대꽃만 미쳐 흔들고
강둑의 미루나무 끝으로나 달아나서는
이제는 외로움 저도 외로워
우듬지 한 떨림으로 청천하늘 치받는다
고독 / 고영민
그림자 아이들이 마당에 나와 논다
엎질러진 물처럼
일거리 없는 하늘이다
피 흘린 곳에 묻어다오
하나들 훝어진다, 아이들이
초저녁잠에 든다
내 꿈에 오너라
성(聖) 고독 / 천양희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바쳐
예순여섯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 고백하는 뱃고동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소리를 고통소리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손을 타면 닳게 마련인데
고독만은 그렇지가 않다 영구불변이다
세상에 좋은 고통은 없고
나쁜 고독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공사중인데
고독은 제 온몸으로 성전이 된다
먼 곳의 고독 / 나태주
그곳이 얼마나
낯선 곳이니?
그곳이 또 얼마나
먼 곳이니?그러니 외롭고
먹고 자고 사는 일이
고달플 거야
그렇지만 말이야
여기서 생각할 때는
그곳이 또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이고
아름다운 곳이니!
돌아오면 분명
그곳의 날들이
그리워질 거야
그곳의 고독과
그곳의 불편까지가
새로워질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그곳에 있을 때 충분히
그곳의 고독을 느끼고
그곳의 불편까지를
껴안아 주기 바라
돌아와 섭섭해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고독이 거기서/ 이상국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바닷가에 '고독'이라는 까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인데
지날 때마다
마당에 차 한대 없는 걸 보면
고독이 정말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은 아주 오래된 친구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혼이나 밤을 맡겨놓고
함께 차를 마시거나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온몸을 간판으로 호객행위를 하며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므로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가끔 동해안 국도를 지나다보면
고독이 거기서
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