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애의 이야기를 쓸 시간이 되었나 보다.
내 생애 최초로 반지를 선물해준 아이.
기억의 동굴 속 더듬어 내려가면 초등학교 1학년 단발머리 가시내 내가 있다.
별로 말도 없고 원기 팔팔하지 못해 늘 조용했던 아이.
고무줄도 친구가 권하면 같이 할 뿐, “내 딜라도~”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구경하던 아이.
수업 시간에 오줌보 터지려 해도 선생님께 말 못하고 참느라 얼굴만 빨개지던 아이.
믿거나 말거나 그때의 나는 그런 아이였다.
아이들 소리 왁자한 가운데 ‘유야무야’ 말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었다.
별로 할 말 없던 아이는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또디기’ 딸을 학교에 보낼 때마다 외는 어머니 주문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눈과 입, 칠판에 쓰여진 글자까지 뇌리에 남아 꿈 속에서도 또렷했다.
예습 복습 없이도 시험 점수는 잘 나왔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칭찬 받던 나날이었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내심 자부심을 감추고 있었던가.
옆짝지 머스마가 공부 못한다고 은근히 무시했던 모양이다.
내가 말 한 마디 건넨 적 없고, 그 애도 내게 말을 먼저 건넨 적 없었다.
우리는 서로 투명 인간처럼 모른 채 매일매일 흘러갔다.
집에 오면 나는 달라졌다.
물을 길어 나른다, 앞냇가에 앉아 빨래를 빤다...
괜시레 바빠지고 부지런해진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날랬다.
아버지가 “저기 재떨이 좀 가져 오너라!” 하면 굼뜬 언니가 채 엉덩이도 들기 전에 먼저 갖다 놓고 앉아 있었다.
완전 집 체질이었다.
이런 나를 언니는 꼬봉처럼 부려 먹었다.
언니의 지시나 명령을 거부할 명분 없는 동생으로 난 즐겁게 시중을 들었다.
치약으로 자기 손톱을 문지르며, 그동안에 어린 나더러 설거지를 하라 하면 신탁처럼 명 받들어 실시했다.
가끔 오원씩 받는 재미도 있었다.
그 중에 딱 한 가지 심부름은 하기 싫었다.
오원인지 십환인지 돈을 쥐어주며 길 건너편 구멍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 오라는 거였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사탕, 먹어도 먹어도 녹지 않던 바로 그 사탕이다.
우리는 마지막에 깨 한 알 같은 씨가 남던 그 하얀 사탕을 ‘서울 사탕’이라 불렀다.
나도 서울 사탕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 구멍 가게가 바로 옆짝지 머스마 집 가게였기 때문이다.
운 좋은 날에는 없었지만, 대체로 하교 후에는 그 애가 가게에 나와 있었다.
어떤 때는 그 애한테 직접 “서울 사탕 도고!” 하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부끄러움도 내숭도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쑥쓰럽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 나이에 이상형이 있겠냐마는 그 점으로 봐도 머리 빡빡 깎은 머스마가 뭐 그리 잘 나 보이겠나.
나도 비실비실, 저도 슬금슬금.
우리는 눈도 부딪치지 않고 대충 돈 주고 사탕 받아오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암할 일이 생겼다.
그날 따라 학교에 일찍 간 나는 선생님을 기다리며 붙박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무슨 마음인지 옆짝지 머스마가 쭈뼛쭈뼛 하더니, 슬그머니 무언가 책상 위로 밀어주었다.
‘세상엔 별 일도 많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하며 옆눈으로 보니 옥반지였다.
‘이걸 왜 내가 가져?’ 눈으로 물었다.
그 애는 옥반지를 다시 더 내 쪽으로 밀며 “너, 가져!” 하고 일어서 나가 버렸다.
보아하니, 자기 가게에서 팔던 것 중에 하나 가져 온 모양이다.
받기도 그렇고 안 받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그렇고 화내기도 그렇고.
참 난감했다.
수업하려면 공책도 펴야 하고 책도 펴야 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옥반지를 멀그니 바라 보았다.
문득, 측은지심이 들었다.
저 애도 호주머니에 넣고 온 옥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얼마나 망설였을까.
별난 머스마 같으면 냅다 던져 버리면 되겠지만, 저나 나나 성질 부릴 주제비도 못 된다.
난 옥반지를 그 애가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슬그머니’ 가방에 넣어 두었다.
물론, 나는 그 반지를 단 한 번도 낀 적이 없다.
집에서도 끼어 본 적이 없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끼어 본 적도, 버린 적도 없는 그 옥반지는 어느 땐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다.
60년 가까운 세월.
그래도 남아 있는 또렷한 기억은 그 애 이름과 동그란 옥반지다.
그 애 이름은 이충국.
3년을 한 학년 같은 반으로 올라 갔지만, 단 한 번도 말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3학년 이후로 지금까지 그 애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이충무공’이 책에서 나올 때마다 연상되던 그 애 이름과 연이어 떠오르던 옥반지 사건.
그 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애는 그때의 에피소드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아니, 살아 있기나 한 걸까.
4학년 끝나자 마자, 부산으로 전학 와 버린 나는 그 애랑 초등학교 동창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산 월포 초등학교 동창회에 한 번 들려 볼까.
아니면,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도 만나 “야, 옥반지 선물 고마웠다고 말이나 전해도~” 하고 전갈이라도 보낼까.
오늘, 페이스 북 <친시조>에 올라 온 ‘옥가락지’란 작품을 보고 떠오른 어린 시절 동화다.
(지희선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