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2.火. 역시 비는 장맛비가 비다워.
글쎄, 그런데 왜 웃느냐구?
웃음의 종류도 비의 종류만큼이나 많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은 죄다 빗물이고 그것을 통틀어 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빗물이 땅을 향해 떨어지는 양이나, 방식, 상황에 따라 각기 개성 넘치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처럼 웃음도 그렇다. 누구의 마음이라도 눅여주는 봄바람 같은 잔잔한 미소가 있고, 보는 사람까지 더불어 흥겨워지는 파안대소도 있고, 뱃가죽이 당기도록 웃음이 그치지 않는 폭소가 있으며, 손바닥을 두들기며 크게 웃는 박장대소가 있고,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한 눈웃음이 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스런 너털웃음도 있고, 얼굴에 홍조까지 곁들인 함소含笑가 있다. 그런데 웃음이란 즐겁고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참다못해 비시시 삐져나오는 실소가 있고,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표현방법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 조소嘲笑와 냉소冷笑와 고소苦笑도 있다.
요순우탕의 태평성세도 지난 지 오래고, 말똥만 굴러가도 까르륵거리던 청춘도 지난 지 역시 오래라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웃을 일이란 별로 없어 보인다. 예전에 비해, 예전에 비해,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도 문제지만 세상의 변화變化나 만사萬事를 웃음으로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내 보내는 내 자신의 조직체계에도 분명 구조적 결함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세상에 웃을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세상에 웃음이 더욱 필요하다는 부술 수 없는 반증인데도 불구하고 나부터서도 웃으려는 노력보다는 웃지 않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져있을뿐더러 그나마 웃지 않고 살아가려고 작정을 한 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웃음이란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처럼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고,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렇지만 이렇게 그럴듯하게 미사여구를 써가면서 웃음에 대해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한 번 잊어먹고 살아온 웃음을 그 순수했던 예전으로 돌리기란 하늘에 대고 턱걸이를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 어떤 장소에서 서로 친구인 듯한 두 사람의 대화가 근래 웃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집에 T.V가 없기 때문에 드라마라든가 많은 예능 프로그램이나 웃음을 보여주는 개그 방송을 보지 못한다. 집에 T.V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T.V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화려한 볼 것들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전해오는 정보나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마 두 친구는 얼마 전에 함께 보았던 개그 방송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던 듯한데, 그 대화의 요지는 한 친구는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은 보는 이들의 웃음을 유발시켜 시청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킴과 동시에 즐거운 바이러스를 주변에 퍼트려서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는 내용이고, 다른 친구는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웃음의 유발은 공영기기인 T.V라는 공공매체를 악용해서 문화의 저질화를 이끄는 유치의 표본이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각자 자신의 주장을 앞세워 갑론을박을 하더니 찬성 편에 선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개그맨들이 무대에 나와 무언가를 하려하면 그것을 지켜보면서 험 잡을 준비만 하고 있을 뿐 웃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데, 그래 가지고서야 웃음은커녕 그들의 험만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웃을 준비’
이 한 마디는 그야말로 조금 부족한 육십여 평생 동안 내 사전에는 없었던 말이었는지라 청천벽력처럼 내 정수리 위로 쏟아져내려왔다. 아, 그렇구나! 시험이나 결혼,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웃음에도 준비가 필요한 것이구나. 언제나 웃을 준비를 하고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란 항상 웃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의 권리이자 의무였구나. 마치 커다란 행운처럼 웃음도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애씀의 보답이었구나!
그래, 웃을 준비는 돼 있수?
내가 회원으로 소속돼 있는, 문화답사와 환경보호 단체인 시민모임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원단합과 올 후반기 일정 확인 등을 삼계탕으로 몸을 보신해가며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어놓았다는 초대의 말씀이었다. 그런데다 한 가지 더, 웃음치료 전문가를 초빙해서 웃음에 대한 특강을 듣는 자리까지 만들어놓았다면서 꼭 참석을 부탁해왔다. 이제 슬슬 복날도 가까워오는 이 시점에 정성을 들인 삼계탕이 어디냐 하는 심정에 회의 내용이야 안중에도 없이 참석하려했는데 글쎄, 웃음 특강이 마음에 어딘지 조금 찜찜했다. 그래도 삼계탕은 먹어야겠지요, 아무렴요!
사무실에 도착을 한 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 회원님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전부 여자회원 분들만 보였다. 얼른 보아도 내가 도울 일은 없을 듯해서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40대 초반쯤의 남자 한 분이 먼저 와 있었는데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내가 모르는 회원이구나 생각하면서 역시 반갑게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말을 나누고 악수를 했다. 그러면서 그 중년남자의 첫인상이 참 잘 웃는 얼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남자 분은 시민모임의 회원이 아니라 오늘 특강을 위해 오신 웃음치료 전문가인 권용진 씨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 동안 여러 가지 웃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범을 보고, 실습을 하면서 웃음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과장은 아닐 듯싶다.
처음 30분 : 물론 그럴 테지. 그렇지만 앉아 있는 시간이 조금 아깝군.
다음 30분 : 그래, 그렇게 설명을 하니 그런 것도 같은데.
그 다음 30분 : 호오, 그렇다는 말이지.
나머지 30분 :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봐야지.
이 특강을 듣지 않으신 분들께는 아쉽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특강 내용을 밝힐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권용진 웃음치료 전문가에게는 사업상의 기밀사항이고, 사무국에서는 큰 비용을 지출하고 준비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물어 오시면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놈의 정이 무언지, 에이 좋습니다. 약간 맛 뵈기를 드린다면 요要는 이런 내용입니다. 마치 우리가 시시각각 당연히 행하는 숨쉬기처럼 어느 때고 웃음을 웃을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웃음을 시원하게 웃으려면 웃음을 알고 웃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웃음에도 많은 연습과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웃음은 더 크고 더 많은 웃음을 사방팔방으로 자연스럽게 퍼트려준다는 것 등이랍니다.
삼계탕 한 그릇.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라는 책이 있다. 얼마 전엔가 이 책이 한 차례 언론의 각광을 받으면서 우리들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이 책에는 따스한 가족애가 있고, 소박한 인정이 있고, 가슴이 울컥해지는 마음의 울림이 잘 녹아있어서 감동에의 입맞춤 같은 책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신 있게 추천을 하고, 두 번 세 번 읽었던 것을 스스럼없이 자랑하고 다녀도 괜찮은 책이다. 그런데 간혹 이 책에는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책일까 하는 느낌을 가지면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관련된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어서 어쩌면 내 시선만으로 읽지 못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보았다. 내 두 눈으로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시선으로 책을 꼭 읽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형화된 이미지가 머릿속에 형성이 되어 있어서 내 눈을 통하되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책을 읽거나 사물을 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잊고 살아간다. 얼마 전에 우연히 우동 한 그릇이라는 책의 허상에 대해 지적을 해놓은 비평을 읽어보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을 했다. 세상이나 책이나 생활이나 그래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 시선으로 바라보기란 생각처럼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미 권력화 되어 있는 영향력이 큰 시선들의 틈새를 파고 들어가 나만의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그만한 외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길러져 있을 때야 만이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의 글이나 이해인 수녀님의 시도 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삼계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생각까지 해가며 콧등에 땀이 솟는 줄도 모르고 달게 먹어치웠다. 좋은 분들과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삼계탕을 맛나게 먹기는 했지만 닭에게는 미안했고, 이 더운 날 탕을 끓여주신 분들께는 고마웠고, 생각은 분주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선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 선禪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선禪을 하기에는 아직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듯하다. 나도 언젠가는 세상사와 사물을 더 단순하게 읽고, 보고, 느끼고 그리고 채식을 하며, 제대로 웃고 바르게 숨 쉬며, 바람처럼 살아가는 날이 있겠지.
(- 그래, 웃을 준비는 돼 있수? -)
첫댓글 그 다음 30분: 호오, 그렇다는 말이지~
나머지 30분 :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봐야지...(2)
그래요....나도 그렇게 항시. 어디서나 웃을준비를 하고 있답니다...ㅎ
항상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마음도 평화로울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ㅎ ㅎ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