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 미륵사지석탑 동측면 (1910년) >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이 본모습을 되찾았다.
20일 오전 11시부터 익산 미륵사지현장에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여 년간 진행한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사업 성과와
석탑의 모습을 공개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은
1998년 전라북도에서
구조안전진단을 한 결과 콘크리트가
노후화 되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단에 따라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 수리하기로 결정된 바 있다.
이후 2001년부터 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 기술 조사연구,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하였다.
< 익산 미륵사지석탑 서측면 (1910년)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은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석탑이며,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문화인류학에서 어떠한 사물이나 문명이 탄생하였을 때 그것은
발생기 - 발전기 - 성숙기 - 쇠퇴기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석탑 문화는 발생기와 발전기 없이
곧장 최고조의 성숙기로 발전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사퇴하였다.
말하자면 바로 성숙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백제인의 뛰어난 과학과 이성 때문에 가능했다.
백제인은 미륵사지석탑을 낳았고,
석탑 문화의 발생기에 태어난 미륵사지 석탑은
이미 우리나라 탑파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명품이다.
익산 미륵사는 7세기 백제 무왕 대에 창건되어 조선 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사찰로써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와 가람배치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 익산 미륵사지석탑 수리 전 동측면 > (사진=문화재청)
미륵사탑의 최대 수난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어났다.
우리나라를 강제침탈한 일제는 원만한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우리 문화의 모든 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의 저명 학자들이 총동원된 이 연구는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망라되었는데,
고적 조사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발굴과 약탈을 자행하여
당시 천황과 데라우치 총독에게 우리 문화재를 진상하기도 하였다.
조사로 인하여 일제 강점기의
우리 문화재는 전대 미문의 수난을 겪게 된다.
조선시대 이후 석탑은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는데,
일제는 석조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가지 변형을 가했다.
당시 최첨단 소재였던 시멘트가 복원의 소재였다.
경주의 석굴암도 이때 시멘트로 복원되었다.
1915년 세키노는 미륵사탑의 붕괴 위험을 지적하면서
미륵사탑의 동쪽 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시멘트로 무자비하게 복원하였다.
< 익산 미륵사지석탑 수리 전 남동측면 > (사진=문화재청)
한편,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학계, 불교계 등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석탑의 건립 시기(639년),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이 밝혀졌으며,
이후 수습한 유물들이 학술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것도 성과 중 하나이다.
< 미륵사지석탑 전경 >
< 해체 된 미륵사지석탑 >
< 시멘트가 제거 된 미륵사지석탑 >
< 복원 된 미륵사지석탑>
<도면, 미륵사지 가람배치도>
어느 나라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가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조상
즉 관음을 중심으로 여래를 좌우로 배치하는 도상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중생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랐다.
오늘날 미륵사는 비록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1400년 전 그때처럼 백제인의
미륵정토에 대한 염원은 미륵사 그곳에 있다.
첫댓글 우리집에서 차타고 한 20분정도 가면 나오는데 복원전이나 복원중일때 봐도 존멋..
ㅁㅊ 시멘트 돌았다 진짜ㅋㅋㅋ
진짜 속상하다 많은사람이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어 익산사는 사람들도 사실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익산에서도 많이 지원해줘서 관광명소됐으면 좋겠다 미륵사지쪽에 순두부찌개 존맛 탱구리 있으니까 오면 꼭 먹고가길💜
초딩때 방학숙제가 항상 미륵사지 가서 사진찍고 감상문쓰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