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민중항쟁에 비춰본
2008년 촛불시위
하주영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사프로젝트 피플파워 하주영입니다.
촛불집회의 향방을 놓고 많은 고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국민토론회가 준비되는가 하면
주민소환과 제헌에 대한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화물노동자 파업에 이은 노조 총파업까지 예고하고 있어
국면의 전환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87년 610항쟁이
현재 우리의 모습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요,
오늘 167회 피플파워는 610항쟁을 비롯한 근현대 민중항쟁과
2008년 촛불집회를 돌아보는 특집으로 준비했습니다. 먼저 영상부터 시작합니다.
#3. 현장플러스
근현대 민중항쟁에 비춰본 2008년 촛불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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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영상 : 87년 610항쟁과 2008년 촛불집회 S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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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영/ 오늘 이야기 나누실 분은 노동자육센터 박준성 부대표님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부대표님 안녕하세요?
박준성/ 인사
하주영/ 네, 오늘은 2008년 촛불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텐데요,
먼저 지난 6월10일이 87년 6월항쟁 21주년이 되는 때였고
그날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 했는데요,
먼저 87년 6월항쟁부터 살펴봤으면 합니다. ①
박준성/ 먼저 6월항쟁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봤으면 하는데요,
85년에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대학생들이 진행하고 노동자들 투쟁이 시작됩니다. 구로노동자 연대투쟁이 6월에 진행되는데, 구로공단내 대우어패럴·가리봉전자·효성물산 및 양평동의 선일섬유 등 4개업체 노동자 1200여 명, 구속자 석방·노동자 탄압 중지·노동법 개정 등 요구하며 연대농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말부터 민추협이 개헌추진을 위한 서명운동을 준비하게 되지요.
86년에는 개헌서명운동이 시작되고 이른바 인천 5.3사태가 발생하고, 김세진 이재호 열사는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분신하고요, 부천에서는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지요. 위기에 처한 정권은 금강산 댐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형성해서 건대에서는 대학생 1500여명을 구속시키는 건대사태까지 발생합니다.
87년 들어서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되지요, 1월에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하자, 이를 조작해서 발표합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 - 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를 발표하지요. 5월에 재야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조작 성명이 발표되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구성되고 4.13호헌철폐와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운동이 시작되지요. 그러다가 6월9일에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됩니다. 그렇게 6월 10일이 열리게 되었지요.
하주영/ 그럼 6월항쟁 이후는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②
박준성/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주최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22개 지역에서 약 24만여 명이 참가하여 가두시위를 진행합니다. 시위의 주된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이고 이날부터 15일까지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하게됩니다.
같은 날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민주정의당) 당대회,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요, 범국본 주최로 연일 가두시위가 전개됩니다. 6월18일 16개 지역 247곳에서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가 열리고 전국에서 150여 만명이 참가합니다. 연동교회가 경찰에 의해 완전 봉쇄. 기독회관 1층으로 집결 중 고려대생과 전경 대치, 2500여 명의 학생들은 동대문에서 연좌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 외침. 종로 5·6가 일대 시민·학생 1만여 명 등 시내 곳곳에서 오후 3시 30분경부터 11시까지 시위 지속. 부산에서는 30여 만 명이 서면로타리에 집결하여 민중봉기 형태로 진행되지요.
6월26일 ‘평화대행진’은 전국 38개 지역에서 130여 만 명이 시위 참가했고 전국의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탔습니다. 결국 6월29일에 6.29 선언,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이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지요. 국민운동지도부와 김대중 김영삼을 분열시키고 민주대연합을 와해시키려는 전두환 정권의 전술. 노동자 민중이 생존권 생활권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7월5일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시고 7월9일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 시민·학생 1백만여 명이 서울 시청 앞 운집하여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하게되고 정부는 김대중 등 2335명 사면·복권, 357명 석방, 270명 수배 해제 합니다. 곧이어 노동자들의 7,8,9월 대투쟁이 시작됩니다.
하주영/ 이 과정에서 87년 7,8,9노동자 대투쟁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나?
먼저 이 부분도 배경부터 살펴봤으면 합니다. ③
박준성/ 6월 항쟁으로 16년 만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싸워서 얻은 성과였습니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민주화 운동 세력은 선거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때, 6월 항쟁에 참여하여 승리의 경험을 맞보았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도 민주화를 이루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목소리를 터뜨렸지요. 17년 전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22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하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17년이 지났어도 대부분 노동자들은 군대와 같은 통제를 받으며 일해야 했습니다.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머리가 귀를 덮으면 정문에서 출근을 막고 짧게 머리를 깍고, 군인들처럼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도록 하였지요. 출근할 때 푸른 작업복을 입지 않으면 회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을 천시하고 비하하는 말이 공장 다니는 돌이와 순이에서 나온 ‘공돌이’와 ‘공순이’였습니다. 군인들을 ‘군바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우리들을 군바리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해도 임금은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낮은 저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요구와 이해를 위해 싸우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했는데, 노동조합이 없거나 있어도 회사측 앞잡이 노릇을 하는 어용노조가 많았습니다.
하주영/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된 것인데요, 어떻게 전개되었습니까?④
87년 6월항쟁에 이어 노동자들의 대투쟁 일어나
박준성/ 1987년 7월 5일 울산에 있는 현대 엔진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7.8.9 노동자대투쟁이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이 중소영세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면 87년 노동자 대투쟁에는 재벌계열 대기업 노동자들도 앞장서 참가했습니다. 울산에서 시작한 노동자 투쟁은 부산, 수출 공단이 있던 마산 창원을 거쳐, 거제도에서 구로까지, 강원도 태백 광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지요.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 부두, 선원, 사무직, 전문직, 판매서비스직 같은 모든 산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전두환 정권과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빼앗고,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해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제도 옥포에 있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고, 거세게 타올랐던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정권의 강경한 탄압을 받아 9월 중순부터 수그러들었습니다.
하주영/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본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인간선언이자 주인선언
박준성/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인간선언’이고 ‘주인선언’이었습니다. 17년 전 전태일 열사가 혼자 외롭게 '근로자도 인간이다'고 외쳤습니다. 17년 뒤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함께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보수 정치인들이나 중간층이 6.29 선언으로 투쟁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섰지만 노동자들은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존권과 생활권을 확보하려고 투쟁의 불꽃을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을 천대하고 비하하던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이 우리사회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벗으려고 했던 푸른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예전처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투쟁하면서 스스로 노동자라는 의식을 높이고, 연대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면서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7.8.9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노조운동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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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2 : 2008년 610항쟁 21주년S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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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영/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텐데요,
87년 6월항쟁 당시의 항쟁 주체와 오늘날 촛불집회 대중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⑥
박준성/87년 당시 6월항쟁의 주체는 주로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노동자였습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생산직 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했지요. 그에 비해서 이번 촛불집회는 중고등학생, 일반시민, 주부, 대학생, 노동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은 1960년 4월 혁명 때도 마찬가지 중고생들인 10대들이 먼저 나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부대상 사이트 중심 아줌마들의 활동과 참여도 매우 활발합니다. 82cook.com, miclub.com, 패선전문사이트 ‘소울드레서’, 유모차부대엄마와 같이 실생활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의식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주영/ 항쟁당시 대중의 문화, 노동자들의 문화와
오늘날 촛불집회 시위대중의 문화를 비교해 본다면? ⑦
박준성/
ㅇ 6월 항쟁 - 지침, 구호 단순, 보도블록과 화염병이 중요한 무기
ㅇ 촛불시위 - 자발적 주체, 특정 지도부 부재, 토론의 활성화, 촛불 집회, 놀이 다양한 구호, 노래, 다양한 구호, 핸드폰, 인터넷,
디지털 카메라가 중요한 무기.
직접만든 다양한 피켓.
하주영/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넘어 교육, 의료, 대운하, 공공부문 민영화 등
현 정부의 정책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⑧
촛불시위, 자본에 대한 반대의식 깔려 있어
박준성/ 먼저 굴욕협상을 짚을 수 있겠습니다. 검역주권 상실에 따른 자존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의 기본인 밥상을 위험하게 만드는 건강권의 훼손에 대한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의 부패와 무능 시대착오적이고 독단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혐오와 분노 - ceo식 밀어붙이기, 대통령이 아니라 장사꾼, 국민을 상품 소비자로 취급하는 국정운영에 대한 총체적 불만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상황을 보면 정권에 대한 반대와 자본에 대한 반대의식이 결합되어 나타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영방송 장악, 민영화 - 반민주 반독점 / 쇠고기 - 미국 축산 자본 / 공기업, 건강보험 민영화 - 독점 자본 / 대운하 - 건설자본, 땅투기 자본에 대한 반대의식들이 결합되어 총체적으로 정부 정책 전반의 불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인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 확장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행동이 청와대로. 100일 밖에 안된 ‘이명박 퇴진’, ‘이병박은 물러나라 훌라훌라’로 표현되고 있는거지요.
하주영/ 촛불시위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⑨
박준성/ 촛불시위를 보기 전에 3.1운동,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4월혁명, 6월항쟁과 7.8.9노동자투쟁, 96.97노동법개정투쟁의 역사적 경험으로 먼저 보았으면 합니다.
하주영/ 그럼 차례차례 살펴볼까요? 3.1운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⑩
박준성/ 3.1운동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들끼리 또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으며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의 분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일본군이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면서 진압함에 따라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거의 중단되었을 때도 노동자들은 공장 단위로 분산적인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줄기차게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3월 10일 이후 서울에서는 노동자가 평상시의 10% 정도밖에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운동 뿐 아니라 공장을 멈추는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에 동참했지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들은 84건의 파업을 벌였으며 9011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요구가 바로 3.1운동의 한쪽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으며 투쟁을 이어나갔던 힘이었습니다.
하주영/ 또 어떤 항쟁들이 있었습니까?⑪
박준성/ 1946년 9월 전평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의 9월 총파업, 대구에서 폭발한 10월 인민항쟁을 촉발시켰습니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9월 23일 부산에서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구에서도 9월 24일 1천2백여 명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대구와 서울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9월 총파업이 불러일으킨 10월 인민항쟁은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하여 12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2달 반에 걸쳐 38선 이남 전역에서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등 200-300만명이 참여하였다. 해방정국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항쟁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됨 셈이지요. 그러나 9월 총파업은 10월 인민항쟁을 부추겼지만 노동자 파업과 인민항쟁이 분리되어 전개되었다.
하주영/ 그 외 내용들은 어떻습니까?⑫
항쟁 과정에서 노동자 역할 두드러져. 항쟁을 촉발하거나 지속시켜
박준성/ 1960년 4월혁명이 전개되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민주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투쟁은 해방 이후 제2의 고양기를 맞는데요, 4월혁명 희생자 186명 가운데 94명이 하층노동자 또는 무직자였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시위과정에 개별로 참여했음을 알려줍니다. 시위참여와 함께 조직노동자들의 노동쟁의도 봇물처럼 터졌습니다.
또, 1979년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치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신민당 의원들의 구타, 김영삼 의원직 제명, 부마민중항쟁에서 결국 10.26이 발생하게 됩니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유신체제 몰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6. 97 노동법 개정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준비된 정치적 총파업인데, 조직된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하였습니다.
하주영/ 대중의 직접행동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인데, 진보진영의 역할은 무엇인가요?⑬
진보진영, 자율적인 주체들의 확장에 기여해야
박준성/ 2008년 5.6월의 촛불집회 양상을 보면 대중의 직접행동이 가장 진보적이다. 대중은 배후의 조종이나 동원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낡은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학습하면서 스스로 주체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직접행동을 주도해 나가는 대중과 함께 행동하고 소통하면서 낡은 권위를 깨트려 나가는 발랄함, 참신함을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진영 스스로 버려야 할 낡은 것은 무엇인지, 계승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성찰했으면 한다.
또한, 집단지성, 다중지성, 대중지성, 군중지성, 이성적 군중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성의 출현과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두가 엘리트가 되는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진보진영은 어떻게 자율적인 주체들의 확장에 기여할 것인가가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주영/ 촛불시위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본다면 무엇일까요? ⑭
박준성/ 우리 근현대사를 길게 보았을 때, 조선후기 ‘민란’이라고 부르는 1862년 농민항쟁, 1894년 갑오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해방후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1960년 미완의 4월혁명,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노동자 투쟁, 1996.97년 노동법개정투쟁의 역사를 보면 커다란 대중 투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 운동의 지향이 달라졌습니다.
제도의 운영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인적쇄신과 개선으로, 제도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제도의 개혁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구조의 변혁을 추구했습니다. 진보진영은 지배 집단 블록의 개선과 개혁을 부추기되, 그 본질을 분명히 인식하고 개선과 개혁을 디딤돌 삼아 사회구조의 변혁을 추구하는 임무를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책무는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이다.
하주영/ 끝으로 촛불시위의 과제를 짚어 본다면? ⑮
촛불시위에 이어 노동자들의 역할이 필요한 때
박준성/ ‘4월 혁명’은 진정한 민주정권으로 귀결되지 못하였습니다. 투쟁의 주체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실업자 학생들의 힘이 결집되어 낡고 썩은 질서를 쓸어 없애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해결하는 거대한 혁명으로 더 나아가질 못하였습니다. 권력은 허정 과도정권을 거쳐 ‘그 밥에 그 나물’인 민주당 정권으로 넘어갔습니다. 자유당과 뿌리가 같고, 보수기득권 세력인 민주당은 혁명을 위임 받을 의지도 완수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1987년 6월항쟁도 선거혁명의 환상, 비판적 지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의 분열, 노태우 당선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도 야합에 의한 합장선언, 김영삼 문민정부, 김대중 국민정부, 노무현 참여 정부까지 죽쒀서 개줬고 남은 죽은 쥐새끼가 차지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절차상의 민주주의의 확장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인식의 일상화, 억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 - 촛불시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이런 성과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자들의 역할이 더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주영/ 네, 박준성 부대표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박준성/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