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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동경(憧憬)
작가 : 난이 (nekrinan@hanmail.net)
배경음악 : [쾌도홍길동OST] 태연-만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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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오빠! 환자가 무슨 힘이 그렇게 세?”
“후후 아무리 그래도 넌 나를 당할 수 없지!!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어서 이리로 와!!”
“에이~~ 싫어.”
“어랏!! 너 오빠 말 안들을 거야?”
시연의 목소리에 저만큼 물러나 있던 우연이 머뭇대며 다가왔다. 그런 우연을 장난 끼가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시연이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우연이 다가오자 한손으로 우연을 잡아버리고
다른 손으로 우연을 간지럽혔다.
“하하하~~ 오빠 그만. 그만해. 쿠쿡… 내가 잘못 했어. 하하하 다시는 오빠한테 안 덤빌게.”
시간이 지날수록 우연의 얼굴은 고통에 찌푸려지고 있었다.
너무 웃었더니 배가 땡겨 왔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그때서야 우연을 놓아주었다.
웃느라 너무 지친 우연이 보조침대에 풀썩 누워 버렸고,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우연을 웃으며 바라보는 시연이었다.
똑똑.....
조용한 병실을 울리는 노크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누워있던 우연이 곧 옷매무새를 다듬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찰칵 하는 문소리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씬 섹시함을 풍기는 여자였다.
짧은 컷트 머리에도 그녀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조금은 화려해 보이는 옷차림에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시연에게 다가서는 여자가 반갑다는 듯이 시연이의 이름을 불렀다.
"시연아~~!!"
"누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연에게 핀잔을 주는 여자였다.
"나야 혜영이. 이 자식 설마 나도 기억 못하는 거냐?"
"앗, 혜영이? 네가 혜영이라고?"
“자식, 나까지 잊었음 넌 죽은 목숨이었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시연에게 다가와 포옹을 했고,
그녀를 대하는 시연이의 얼굴은 너무나 놀라워하는 표정과 함께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그런 시연의 모습을 보며 또 다시 불안함을 느끼는 우연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 뭐지. 이 여자 시연오빠와 어떤 관계이길래. 오빠가 이리도 반가워하는 걸까?
불안해.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뭐냐고!!’
옆에 있는 우연을 바라보지도 않고 또다시 시연과 얘기를 나누는 혜영이었다.
"너 교통사고로 입원했단 소식도 들리고 해서 잠깐 나왔다. 자식, 많이 힘들지?"
"힘들긴."
혜영은 병실 안을 들어오기까지 온갖 나쁜 상상을 했었다.
처음 시연의 소식을 들었을때 바보처럼 은수를 따라가려 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고,
은수 때문에 아직도 많이 아파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시연은 밝은 표정으로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혜영의 눈에 그때서야 우연이가 눈에 띄었다.
"근데 저 여자 누구야?"
"야. 내 여자친구한테 저 여자가 뭐냐? 말조심해라."
시연이의 말을 들은 혜영은 어이가 없었다.
평소 냉정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빈틈없어 보이는 혜영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완벽주의자인 그녀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혜영은 많이 놀라있었다.
"머... 뭐라고? 네 여자친구?"
"어."
순간 얼굴이 굳어지는 혜영이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시연을 보며 잠시 냉정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우연을 한번 훑어보았다.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처럼 차갑고도 날카롭게 우연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혜영이 때문에 우연은 가슴이 떨려왔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다시금 눈길을 시연에게 돌린 혜영은 화를 내고 있었다.
화를 내는 혜영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너 은수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여자 사귀냐! 실망이야."
혜영이의 한마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우연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 나가야 할지 막막해지기만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에 겨웠다.
은수의 얘기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우연과 달리 아무 생각 없는 듯한 표정으로 혜영에게 되묻는 시연이었다.
"은수? 죽었다고? 누군데?"
“야!! 김시연. 지금 장난 하냐?"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 혜영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혜영이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 시연이었으나,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고 소리치는 혜영의 모습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고함을 친 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혜영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시연이었다.
“무슨 말이야?”
"너 네가 어떻게 은수를 잊을 수 있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시연이를 다그치자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우연이 말을 꺼냈다.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그런 우연이를 잠시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혜영이가 대답했다.
"그러죠."
병문 앞 복도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우연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선 통성명부터 하죠. 전 정우연 이라고 해요.”
"난 조혜영. 바쁜 사람이니까 본론만 얘기해요. 어떻게 된 거죠?"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시연오빠랑 어떤 관계인지...”
"그걸 왜 당신한테 말해야 하죠?"
“제가 시연오빠 여자 친구이니까요. 제게 그 정도는 알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연이의 말에 조소를 띄우며 말하는 혜영이었다.
"후후 이봐요 꼬마아가씨. 거짓말도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에요. 그런 얼굴로 말하면 누가 믿겠어요?"
혜영의 날카로운 지적에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우연이었다.
처음부터 강해보이는 이미지만큼이나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대로 그만둘 수 없었다.
‘어렵게 마음먹고 시연오빠를 잡은 건데 이대로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내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증명할 길이 없잖아요? 난 얼마 전부터 시연오빠와 사귀기로 약속한 사이에요.”
최대한 마음을 굳게 먹고 따지듯 말하는 우연의 말은 혜영에게 아무런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혜영의 화를 더욱 돋구었을 뿐이었다.
"오호 그래요? 이봐요. 당신 시연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죠? 난 시연이와 소꿉친구에요.
은수보다도 더 시연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그 녀석 은수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그렇게 쉽게 당신 따위한테 마음 열어주지 않았을 거야. 내 말이 틀려요?"
그 상황에서도 웃으며 우연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우연에겐 그런 혜영의 웃음이 잔인하다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생각을 혜영에게 말하고 이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우연이 말을 꺼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오빠가 은수언니 못 잊어 한다는 거 알면서도 제가 사귀자고 했어요.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까지 제가 매달려서 어렵게 얻은 사람이라고요.
시연 오빠 부분기억 상실이에요. 은수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어자피 지금 현재가 중요한 거 아닌가요?
오빠는 제가 옆에 있어도 언제나 은수언니만 그리워하며 많이 힘들어 했어요.
오빠도 많이 힘들어했지만 그런 오빠 보면서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오빠에게도 저에게도 이번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제발 혜영이 같은 여자로써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필요이상의 말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우연의 말들도 효과가 없었는지 싸늘하게 바라보던 혜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독기가 스며있었다.
"당신 참 뻔뻔한 여자군요. 은수한테 미안하지도 않나요?”
은수의 이름이 나오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우연이 자신조차 은수에게 죄를 지었다 생각했기 때문에….
허나 혜영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시연이 옆에 붙어있는 다면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명심해요. 이건 경고니까. “
혜영은 말을 마친 후 미련 없이 자리를 일어나 시연의 병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연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혜영이 은수와 어떤 관계 이길래 자신을 이토록 미워하는 건지 이렇듯 무서운 여자와 적이 되어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연이의 곁을 떠나 잊고 살아갈 자신도 없었기에 한없이 복잡해지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서둘러 혜영을 잡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당신이 은수언니와 어떤 관계이든 이미 죽은 사람인데
왜 시연 오빠를 그냥 놔두지 않는거에요! 부탁해요.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시연오빠가 그냥 은수언니 잊고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줘요.”
혜영을 붙잡고 말하는 우연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차갑게 우연을 내려다보며 냉정한 한마디를 던지는 혜영이었다.
“난 절대 당신을 도와 줄 수 없어요.”
너무도 단호한 말투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없다는 생각에 우연은 울면서 혜영에게 매달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애절하게 매달리며 울었다.
“왜요, 왜 도와줄 수 없어요. 제발 부탁해요. 제발… 흑흑...”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혜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금 우연을 데리고 벤치로 가 앉았다.
자신의 손수건까지 넘겨주며 우연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혜영이 우연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없는 이유가 은수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보죠…?
은수와는 상관없는데…. 훗…..”
혜영의 웃음에 섬뜩함을 느끼는 우연이었다.
어느 정도 우연이 안정을 되찾자 혜영은 차분하고도 냉정한 말투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말을 꺼내는 혜영의 표정은 처음 우연을 대할 때와는 달리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말하는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우연은 그 슬픔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난 시연을 사랑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 유학 가 있는 것도 은수와 시연이, 그리고 나 자신
이 세 사람을 위한 내 선택 이였어요. 하지만 은수가 없는 지금 난 다시 돌아 올거야.
나의 베스트 프렌드인 은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이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마음,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당신한테 이번이 기회라면 나에게도 기회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은 기억 못하지만 난 기억하는 사람이니 어찌 보면 내가 좀더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설마 시연이가 은수까지 잊었을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이번엔 시연이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에요.
충고하나 할까요? 나와 부딪히게 되면 당신 많이 힘들어질 거야.
이제 시연이를 알게 된지 1년 조금 넘어놓고 감히 나에게 대들 생각 하지 말란 말이에요.
내 말 알아듣겠죠?"
'..........'
혜영의 말을 듣고 있는 우연의 몸이 떨려왔다.
확고한 말투에 당당하게 충고까지 하는 혜영이의 존재가 너무도 두렵게 다가왔다.
단도직입적으로 시연을 사랑한다 말하는 혜영 앞에서 단 한마디의 반박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혜영이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이유가 은수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우연은
혜영이 시연을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여자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수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무너져 내린다.
나 이대로, 이대로 시연오빠를 포기해야 하는 거야?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거야?’
자신감 가득한 혜영에게 대적 할만한 힘이 없는 우연으로써는 혜영의 존재가 절망감으로 다가왔다.
넋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있는 우연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못을 박는 혜영이었다.
"나 다음주에 귀국할거에요.
그때는 시연이 옆에 당신이 보이지 않길 바래.
더 이상 할말 없으면 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병실로 향하는 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연은 할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더 이상 혜영에게 매달리고 부탁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느낀 우연은 자리에 앉은 채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시연아.”
"어 혜영아. 무슨 얘기가 그렇게 길어. 우연이는 왜 안 들어와?"
"......."
혜영은 차갑게 굳은 얼굴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딱 부러지는 성격에 고집불통인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혜영이의 표정은 처음 보는 시연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몰라도 자신에게 만은 언제나 서슴없이 편하게 대해주던 혜영이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시연의 마음까지 시려올 정도였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시연은 그런 혜영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유독 우연이 얘기만 꺼내면 화를 내는 혜영이가 야속하기도 했다.
“너 내 여자친구한테 왜 그러냐?”
은수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는 건 혜영이 그들로 인해 얼마나 슬퍼했고,
얼마나 힘든 결 정을 내려야만 했는지 까지 다 잊었다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은수도 아닌 다른 여자를 감싸는 시연의 모습에 혜영은 너무도 화가 났다.
"저 아이가 정말 네 여자친구라고 믿는 거니?"
싸늘한 혜영의 말에 점점 짜증이 몰려오는 시연이었다.
시연으로써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계속해서 몰아 붙이는 듯한 혜영에게 무척이나 서운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금은 가라앉은 시연의 목소리에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린 혜영은 차근차근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그냥 널 좋아하던 애일뿐이야. 네가 사랑하던 사람은 얼마 전에 죽었어.
내 친구이기도 했고.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하늘에서 은수가 보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
아무나 쉽게 믿지 말란 말이야! 널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도 믿지도 마. 알았니?
바보같이 우연이란 아이의 거짓말에 놀아나지 말라고!!”
또다시 우연에 대해 나쁜 말을 늘어놓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리라 마음먹었던 시연은 혜영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지금 혜영의 말들이 사실이라면 무조건 혜영을 탓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연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네 기억이 돌아오길 두려워하고 있어. 네 기억이 돌아오면 널 잃게 될 테니까.
네 과거기억을 찾는 건 내가 도와줄게. 아무도 믿지 마. 나만 믿어. 나 아버지 몰래 잠깐 귀국 한 거야.
다음주에 완전 귀국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있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생긋이 웃으며 시연을 한번 안아준 혜영이 병실을 나섰다.
평온하던 시연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은 채 병실을 나서며 아직까지도 벤치에 앉아있는 우연에게 다가갔다.
“다음주 내가 귀국하기 전까지 시간을 주겠어요.”
우연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말을 끝내고는 그대로 멀어져 가는 혜영이었다.
그 말은 그 시간 안에 시연과 정리를 끝내고 떠나라는 말이었다.
‘시연아 사랑해. 빼앗기지 않아. 꼭 지킬 거야!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을 거야.
나 은수에게 널 양보하고 평생을 후회할 뻔 했어. 이젠 혼자인 너를 되찾을 거야.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그 누구도 내게서 널 빼앗아 갈수 없어!’
시연이가 잠들어 있는 사이 조용히 병실을 들어와 침대 옆으로 다가간 우연은 울고 있었다.
"시연오빠, 오빠 자요?"
“............”
여전히 대답이 없는 시연이의 손을 꼬옥 붙잡고, 너무도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며 말을 하는 우연이었다.
"흑흑… 오빠. 우연이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나 오빠와 함께하고 싶어서 학교도 휴학 하고 이렇게 옆에 있는데,
오빠와 헤어져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시연오빠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어요.
너무나 행복했는데 그 행복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또 이렇게 울고 있어야만 해요.
왜 나에겐 이 작은 행복조차 누릴 수가 없는 거죠? 왜!
많은걸 바라지 않아요. 그저 내 옆에 오빠만 있으면 되는데….
난 행복을 꿈꾸면 안돼요? 흑흑….”
잠들어 있는 시연이 깨기라도 할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얘기하는 우연이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끼는 우연을 느끼며 시연은 마음이 아파왔다.
사실 시연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아까 혜영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했던 시연은 우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어색하게 대할까 걱정이 되어서 일부러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 아픈 말들을 들으며 계속해서 자는 척을 하고 있는 시연이 또한 표정관리를 하느라 무척이나 힘겨웠다.
그런 시연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은 어느 정도 울음이 잦아들자 또다시 시연을 향해 부탁의 말들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오빠를 포기할 수 없어요. 오빠는 내 전부인걸.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오빠가 우연이 좀 잡아주면 안돼요? 나 견딜 수 있도록 나 좀 바라봐 주면 안돼요?
이제 내게 남은건 오빠뿐이에요. 제발 오빠까지 날 버리지 말아줘요. 제발."
속이고 있다는 혜영의 말에 약간의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시연은 부탁인지 혼자 기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흐느끼는 우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나에게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고는 하지만난 기억조차 나지 않는걸.
지금 내 옆에서 힘들어하는 이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미안하다 혜영아. 네 친구였던 내 여자친구, 은수한테도 미안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우연이에게 향해있어.
혜영이는 내 절친한 친구니까 이런 내 마음 이해해주리라 믿어. 난 우연이 옆에 있어주고싶어.’
잠에서 깨어난 시연은 평소처럼 따뜻한 웃음으로 우연을 대했고,
우연 또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망설임의 연속으로 하루하루 지냈다.
어느덧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
혜영의 태도와 자신감에 엄청난 부담과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여전히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시연의 병실에 머물러 있던 우연은 병실 문이 열리고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던 혜영과 다시금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시연아~ 기뻐해라. 혜영이 완전 귀국했다!"
웃으며 들어오던 혜영이의 표정이 우연을 보고 싹 굳어버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에 왠만한 남자들도 굳어버리게 만드는 위압감을 풍기며 천천히 우연이를 향해 걸어왔고,
또각또각 하는 혜영이의 구두소리가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다시금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했을 텐데."
"........."
혜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연이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연이 얼굴을 굳힌 채 혜영에게 말했다.
“그만해. 내가 옆에 있어달라고 했어.”
시연의 말에 혜영은 다시금 화를 냈다.
"뭐라고? 김시연. 너 제정신이니?? 이 애는 너에게 거짓말만 하고 있어!!
거짓말하는 애를 어떻게 믿으려고 옆에 둔다는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야.
그리고 그게 거짓말이었다 해도 나에게 피해주는 그런 거짓말은 아니었잖아."
단호한 시연이의 표정을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연이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혜영이가 느끼는 배신감은 너무도 컸다.
"말도 안돼. 네가 은수한테, 그리고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보다는 눈앞에 내 사람이 더 중요해.”
시연이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놀란 가슴으로 시연이를 바라보던 혜영이의 분노는 곧 우연에게로 이어졌다.
"너 시연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내 충고를 무시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니?"
우연이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하는 혜영이였다.
죽일 듯 우연을 노려보는 혜영에게 시연이 다시금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만해!! 내가 선택한 거라고 했잖아!!
우연이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단지 내가 우연이를 옆에 두고 싶었을 뿐이야..”
너무나도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연이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예전의 아픔을 느끼는 혜영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린 혜영은 이성을 잃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눈물이 혜영의 시야를 흐려놓았다.
"그래서 지금 뭐야? 은수에 대한 기억은 찾고 싶지도 않다. 이런 말이니?
그렇게 날 힘들게 만들어 놓고 넌 또 다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 하겠다고?
왜 나한테는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는 건데! 내가 너한테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니?
은수보다 우연이란 아이보다 내가 그렇게 못났어?"
“무슨 말이야?”
지금 시연이의 기억 속에 혜영은 좋은 친구일 뿐이었다.
힘들게 말했던 혜영의 고백을 무참히 거절한 것도, 항상 은수만 바라보던 시연이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어했던
혜영의 모습들을 모두 잊고, 다시금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 말하는 시연이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정말 모르겠니? 나 조혜영이가 정말 나쁜 자식 김시연을 사랑 한다고!
네가 은수를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너만 바라 봤었다고!!"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치는 혜영이 말을 마치자 병실 안은 침묵에 휩싸인 채 혜영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때 갑자기 노크소리가 나며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낸 혜영이 다시금 시연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귀국하자마자 아버지보다도 너에게 먼저 달려온 나에게 네가 이럴 수 있는 거니?”
"저, 아가씨."
무슨 말을 더 하려던 혜영이는 다시금 밖에서 들려오는 재촉하는 목소리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것만 확실히 기억해둬.
너랑 우연이란 아이 둘 사이는 내가 인정 못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뒤로한 채 병실을 나가버리는 혜영을 바라보며
또다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시연과 그런 시연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우연만이 병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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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난이
함께하는 시간만큼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만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적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시작하는 것보다 지켜나가는게 더 어렵다고들 하지요...
그런 걸 보면 사랑해 온 시간이 길다고 사랑이 더 깊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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