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판석 이야기(노무현 아버지)
※ 읽어보시고 널리 전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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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아버지인 노판석 이야기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6.25 당시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노무현의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 1953년 노무현이 5살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약 20~30명 가량의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했다고 전해온다.
노판석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가 철천지원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은 좌익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할 때 못 본 체 했다.
노판석은 왜 빨치산이 되었나? 노무현의 조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해방이 되자 동네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괄시와 무시를 당하게 됐다. 이에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갖고 있다가 6.25가 터지고 나서 괴뢰군이 전남 강진을 점령하자
괴뢰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철저한 앙갚음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됐다고 한다.
빨치산들에게 자발적으로 식량과 물품을 대줄 민간인들은 없었기 때문에 여느 빨치산처럼 노판석 역시 지리산에서 가까운 남원 부근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혹이 있다 한다.
1953년 아군이 괴뢰군을 격퇴하고 남한 전역에 치안과 질서를 확립해 나가자 노판석은 동네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무현(5살)과 노건평을 데리고 목포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야반 도주를 했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가족을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한 노판석은 산골 오지인 경남 진영으로 도망을 간다. 그곳서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 한다.
당시에는 전란 직후의 혼란기로 호적을 새로 만들기가 매우 쉬웠다. 그리곤 또 다시 김해로 도주를 했고, 이후부터 노무현 집안은 경상도 출신 행세를 해온 것이라 한다. 노무현은 김해에서 역시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던 권오석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권오석은 6.25때 인민군 앞잡이로서 지역주민 11명을 살해한 경력이 있다. 이후 노무현은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직을 채 1년이 못되게 하고 난 후 변호사 개업을 한다. 이때 노무현을 도와준 이가 김광일 변호사다. 김광일 변호사는 수습 변호사로 자기 사무실에 온 노무현에게 돈까지 빌려주면서 노무현의 변호사 개업을 도와준다,
이 때 빌린 돈은 불과 3개월 만에 다 갚았다. 김광일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시국사범들에 대한 인권 변론을 하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참여 시키기도 했다.
김광일 변호사 덕에 시국변론을 몇 번 하던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 덕에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알게 된다,
YS의 추천으로 공천을 얻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된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훨씬 지난 후 책을 출간했다. 책에서 노무현은
'YS로부터 봉투를 많이 받아서 원도 없이 써봤다' 라고 썼다. 그리고 5공 청문회가 열렸다.
노무현은 이때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졌고 이 덕분에 호남지역사람들과 DJ 눈에 들게 됐다.
얼마 후 민자, 민주, 자민의 3당 합당 반대에 나서면서 이를 명분으로서합당을 극렬 반대 했고,꼬마민주당에 잠시 머물다 DJ 진영에 합류했다.
이후 DJ와 노무현의 관계는 양부, 양자 관계까지 발전을 하게 된다. 노무현 장인 권오석의 정체
권오석에 의해 학살된 양민 유족 중에 변재환 박사(58세)가 있다. 그는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의 대표다. 그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權오석씨는 태생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權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였다. 권씨는 사상관계로 의심을 받아 다른 면에 있다가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6.25가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었다. 눈이 먼 권씨는 동네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2002년 5월 3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장인의 묘소에참배를 하면서 “장님(장인 권씨)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권양숙은 아버지 권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때 나는 어려서 부모님 일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은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후천적으로 실명한 권씨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권씨의 경우 장님이 된지 얼마 안 되었고 남편이 양민을 등급별로 손으로 판정하고 있을 때, 옆에서 부축했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의 장모였다.
노무현 부부의 거짓말에 대해 변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장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 되나. 나는 권양숙씨와 동갑이다.
나도 아버지를 통해 숙부님의 학살사건을 낱낱이 듣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렸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것인가?
더욱이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당시 권양숙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갔는지 들었을 것 아니냐?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서 안 것은 아니지 않나.”
“학살당한 11명의 유족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6.25 이후 부모 두 사람이 있어도 어려운 살림인데 아버지 없이 산 유족들은 그야말로 피눈물 흘리는 세월이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했더라면 유족들은 부모형제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지 모른다.
노무현 부부와 장모는 죄 없이 죽은 11명의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사과해야 한다”
권오석의 좌익 부역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있다.
피해자측 증언들에 따르면 권오석은 일제시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일했을 정도로 똑똑해서 양민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인민재
판에서 검사, 변호사, 판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생사를 가름하였다고 한다.
'실록' 책자에는 권오석이 죽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피해자 측 주장은 11명이다.
卞百燮 (4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卞先燮 (34,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卞曾燮 (3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金玉甲 (5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金万祚 (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시락리 金聖甲 (46, 농업) 창원군 진전면 창포리 朱正浩 (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朴宗洙 (51, 區長)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朴周漢 (47, 농업)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鄭奉柱 (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광촌리 權五乾 (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피해자 유족의 주장 중에는 권오석이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으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또 치안대가 되었겠는가?
눈이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시각장애인을
간부로 기용한 사실은 권오석의 좌익사상이 투철하였고 좌익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한다
송정호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양민학살로 수감 중이던 권오석이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폐
결핵등의 질병 때문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고, 5.16 이 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27일 재수감됐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김일성이 죽기 전 남조선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과 의형제, 그리고 막내동생과 그리운 여인. 이들 4명을 가장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일본의 左派 거물 정치인 故 우스노미야 參의원과 김일성 사이에 1974년 9월 평양 대동강 별장에서 2박3일 회
담을 하고 남긴 '김일성-우스노미야 단독회담 보고서'라는 비밀 보고서가 일본 공안 조사청 지하실과 평양 김일성 궁전 비밀금고에 남아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우스노미야 를 통해 "우스노미야 선생과 나는 형제간 이고 내가 2살 더 많으니 형이 되는 셈이지요. 또 아
우님과 남조선의 김대중이 형제지간 이라고 하니 우리는 3형제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 3형제가 손을 잡으면 아시아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우님께서 일본 총리가 되시고 막내 아우님인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
령이 되면 우리 3형제가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항, 큰소리 치는 아시아의 龍이 될 것 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또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韓完相 대한적십자 총재이며,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여인은 前 YWCA 총재를 지낸 孫寅實 여사 였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를 넘어서' 를 보면 손인실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상당부분 묘사돼 있는데 한때는 남조선으로 밀사를 보내 북한으로 탈출시키려고 까지 했었다.
그 다음으로 꼭 만나고 싶어한 - 평양으로 탈출까지 시키려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 로동당·빨치산 혁명투쟁 교육시간에 등장하는 '남조선 남로당 권오석 동지의 투쟁사'의 그 권오석이다.
권오석 동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임에도 6.25 민족 통일전쟁(?) 에 앞장서 남조선 반역자들을 가려내 처단하는데 혁혁한 攻을 세웠으며, 馬山지구 전투에서 미군 몇 명을 포로로 잡아 오는데도 큰 功을 세웠다.
그는 패전 후 이승만 정권에 체포됐으나 끝까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은 채 북조선 조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며 감옥 안에서 최후를 맞은 영원히 수령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남조선 빨치산 투쟁 영웅' 이었다.
그 위대한 '남조선 빨치산투쟁 영웅'의 사위가 남조선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 입성 하는 날, 평양 방송은 며칠 동안 권오석 동지의 공로와 그 영웅의 사위와 딸이 남조선 대통령이 된 사실을 방송하며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정신이 승리했다'고 열 올리며 광분했다.
또 금강산에 "김일성 수령님이 가장 사랑하는 남조선 영웅 권오석 동지의 딸 청와대 입성" 이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까지 크게 만들어 걸어 놓았는데 한국 국회에서 말썽이 일자 이를 철거했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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