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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뼈 위에서 치러지는 사탄의 놀음을 멈추게 하겠다.”
- 2014년 소치 올림픽을 앞둔 도쿠 우마로프의 경고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은 러시아가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이후 두 번째로 치르는 올림픽이었다. 소련 시절인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아프간 침공에 대한 항의로 서방 진영이 불참한 반쪽 대회였기 때문에 제대로 치르는 러시아의 첫 번째 국제 스포츠 행사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
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개최국의 저력을 만방에 과시함으로써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만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2012년 자신의 3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푸틴 대통령에게는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과시하며 새로운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을 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2007년 과테말라 IOC 총회에서 직접 유치 연설하는 푸틴
이를 정확히 이해했던 푸틴 대통령은 2007년 과테말라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직접 ‘영어’로 연설하여 ‘평창’을 제치고 개최권을 따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380억 달러를 뛰어넘는 500억 달러(50조)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도로, 철도, 호텔, 선수촌 등 기반 시설을 구축하였다. 겨울 기온이 높은 편(1월 평균 기온이 영상 5도)인 소치에 눈이 녹는 경우를 대비해서 수백대의 제설기를 준비하고 거대한 눈 창고(45만 제곱미터)에 눈을 비축해둘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소치 올림픽 주요 경기장 원경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만 한다면 분명 소치 올림픽은 푸틴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성공적’으로 치르기에는 큰 변수가 하나 있었다.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흑해 연안의 휴양지 소치는 도쿠 우마로프가 이끄는 코카서스 반군들의 활동 지역인 카프카즈 산맥과 비교적 가깝다는 것이었다. 특히 스키 등 설상 경기는 카프카즈 산맥인 크라스나야 폴라냐에서 진행되는 만큼 반군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에 테러를 가한다면 올림픽을 치르는 모든 장점을 최악의 단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실제로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 선수단 2명을 죽이고 9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서독의 진압 실패로 9명 인질까지 모두 사살되었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2명이 죽고 111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두 대회 모두 성공한 올림픽과는 거리가 멀었다.
뮌헨 참사 추모비
도쿠 우마로프는 푸틴에게 중요한 행사인 동계 올림픽이 자신에게도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2013년 7월 3일 소치 올림픽에 대한 짧은 메시지를 발표했다. 우마로프는 소치 올림픽이 “흑해 연안에서 죽은 많은 무슬림의 무덤 위에서 치러지는” 만큼, “우리 조상들의 뼈 위에서 치러지는 사탄의 놀음을 멈추도록 하겠다.”고 명확히 경고하였다.
19세기 서카시아(아디게) 전사들
코카서스 산맥 북서쪽의 서카시아인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약 150만이 죽었다.
도쿠 우마로프의 경고는 2013년 12월에 러시아 남부 볼고그라드에서 2건의 자폭 테러가 발생함으로써 더욱 섬뜩해졌다. 12월 29일 볼고그라드 1번 철도역에서, 12월 30일 제르진스키 지역 출근 버스에서 발생한 2건의 자폭 테러로 출근하던 승객 중 34명이 죽고 85명이 다쳤다.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다게스탄 지부에서 저지른 공격이었다.
볼고그라드 제르진스키 지역 버스 폭파 현장
이미 뮌헨과 애틀랜타의 사례를 통해 올림픽 기간에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고, 모스크바 극장과 베슬란 초등학교, 도모데도보 국제공항 등 어디서나 테러를 저지른 코카서스 반군들이 그 당시의 테러범들보다 실행력이 낮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소치 올림픽에 참가하는 각국 정부는 선수단 안전을 위해 비상을 걸었다.
소치 올림픽 선수촌을 경계하는 러시아 경찰
미국은 테러 발생 시 비상 탈출을 위해 흑해 지역에 전함 2척과 수송기를 대기하였고, 프랑스는 경찰과 헌병대를 소치 현지에 보냈다. 영국과 미국은 선수단복을 입고 경기장 밖을 다니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으며, 카자흐스탄은 아예 흑해에 유람선을 띄워 자국 선수단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올림픽 경기장 근처의 대공 미사일 기지
2014년 2월 8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소치 올림픽은 개막식을 열었다. 러시아는 소치를 중심으로 가로 70킬로, 세로 100킬로를 ‘강철 고리’라는 특별 경계구역으로 지정하고, 4만명의 경찰력과 보안요원을 배치하여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만약에 테러를 저지른다면 개막식이 가장 주목받는 순간이었다. 88개국의 2,925명의 선수들은 조심스럽게 개막식에 참석했다.
소치 올림픽 개회식
역대 최대의 예산인 50조가 투입된 올림픽답게 개막식은 정말 화려했다. 안타깝게도 5개의 눈꽃이 펼쳐지며 5륜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1개가 펴지지 않는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러시아의 아름다운 음악과 웅장한 연출로 기억에 남을 개막식이었다. 이후 2월 23일 폐막식까지 올림픽은 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진행되었다.
소치 올림픽 성화대
도쿠 우마로프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밝히는 편이었다. 2011년 12월 러시아 하원 선거에서 부정 선거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데, 2012년 2월 3일에 “현재 푸틴을 지지하지 않는 러시아 시민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작전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만큼 이슈에 민감하였다.
2011-2013년 대규모 반 푸틴 시위
더군다나 사전에 소치 올림픽 개최에 대해 경고한 만큼, 소치 올림픽 전후로 해서 뭔가 언급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었다. 하지만 소치 올림픽 폐막식을 마치고 각국 선수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도 도쿠 우마로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올림픽 개최 전인 2014년 1월 16일, 체첸 대통령 람잔 카디로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도쿠 우마로프가 죽었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사실 우마로프는 과거 사살됐다는 오보가 7번이나 있었고, 러시아 FSB에서는 그런 정보가 없다고 말해서 이번에도 신빙성이 낮아 보였다. 다만 판단의 근거가 좀 특이했다. 카디로프의 체첸 정부군이 직접 사살했다는 것이 아니라 반군들이 도쿠 우마로프의 ‘후임’을 논의 중인 것을 도청했다는 것이었다.
람잔 카디로프
소치 올림픽이 끝나고 약 1달 뒤인 2014년 3월 18일, 코카서스 반군들은 공식적으로 도쿠 우마로프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이후 4월 8일에는 러시아 FSB 수장인 알렉산더 보트니코프도 “러시아의 특수작전에 의해” 도쿠 우마로프가 제거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양측 모두 우마로프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도쿠 우마로프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양쪽의 설명이 많이 달랐다. 2014년 7월, 코카서스 반군들은 우마로프의 장례 영상을 올렸는데, 우마로프가 2013년 8월 잉구세티아 남부 산악지역에서 다른 반군들과 음식을 먹다 ‘뱀독’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같이 있던 4명의 반군은 즉사했지만 우마로프는 1달을 버티다가 2013년 9월 7일에 죽었다. 반군들의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의 특수 작전이 아니라 그야말로 ‘불운’의 결과라는 것이다.
도쿠 우마로프의 장례 영상에 나온 체첸 반군 지휘관들
왼쪽이 함자트(아슬란 바투카에프), 가운데가 마흐란(마흐란 사이도프)
러시아 정부에서는 ‘특수 작전’에 의해 우마로프가 제거되었다고 했지만 반군 측에서 먼저 알리기 전에는 정확한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볼 때, 도쿠 우마로프는 정말 ‘우연히’ 뱀독에 의해 죽었거나, 아니면 러시아 정보부에서 반군들의 음식에 독을 넣었는데, 그 음식을 우마로프가 먹을지를 몰랐거나 둘 중 하나로 보인다.
2010년 러시아의 특수작전으로 독살당한 야시르 알 수다니
코카서스 반군들의 음식에 독을 넣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
도쿠 우마로프는 1994년 1차 체첸전 당시 겔라예프 소속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처음 전쟁을 시작했다. 2차 그로즈니 전투(1994년) 당시 23개의 러시아군 장갑차를 격파하는 등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우마로프는 1996년부터는 겔라예프로부터 독립하여 ‘보르즈(늑대)’ 부대를 지휘하였다. 1차 체첸전이 끝날 무렵 도쿠 우마로프는 준장의 자리와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2개의 훈장(국가의 영웅, 국가의 명예)을 받는 등 자신의 입지를 확보했다.
1차 체첸전 당시 체첸군
1996년 8월 하사 유르트 협정으로 1차 체첸전이 종료되자 도쿠 우마로프는 마스하도프 정부의 국가안보위원장으로서 납치 등 범죄에 대응하고 치안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다. 특히 아르비 바라예프의 납치극에 적절히 대응을 못했는데, 바라예프와 개인적으로 유착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는 2006년 6월 체첸 5대 대통령이 된 도쿠 우마로프가 2007년 10월에 체첸 내부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아르비 바라예프를 다시 준장으로 복권시켰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친분을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었다.
1996년 러시아 RTV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쿠 우마로프
2차 체첸전 발발 후 도쿠 우마로프는 4차 그로즈니 전투(2000년)에 참전하였고, 2000년 2월 그로즈니 탈출 당시 지뢰밭을 돌파하면서 턱에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루지아에서 요양한 우마로프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체첸으로 건너가서 2002년 여름 체첸공화국 서남부 전선 사령관이 되었고, 2004년 함자트 겔라예프가 사살된 이후에는 그 수하 병력도 흡수하여 체첸 서부지역(아코이-마르탄, 우르스-마탄, 샤토이 등)의 주요 전투 및 2004년 잉구세티아 나즈란 기습 등에 참가하였다.
도쿠 우마로프
도쿠 우마로프는 위험을 피하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고, 뭔가 느낌이 이상할 경우 평소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접선 자체를 피하거나 머무는 장소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십명이 집결하는 코카서스 반군들의 지휘관 회의나 기자 인터뷰(2005년 라디오 리버티의 안드레이 바비스키 기자와의 인터뷰 등)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위험을 피하면서도 필요한 선전 활동을 적절히 수행하는 능력이 있었다.
2005년 라디오 리버티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쿠 우마로프
체첸 4대 대통령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는 2005년 6월 2일, 도쿠 우마로프를 부통령이자 자신의 후임으로 지명하였다. 2006년 6월 17일 사둘라에프가 사살되자 도쿠 우마로프는 체첸 공화국의 5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약 1년 뒤인 2007년 10월, 도쿠 우마로프는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는 물론 서방 세계(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에도 선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스스로 ‘에미르(사령관, 총독)’가 되었다. 기존의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은 코카서스 에미레트 산하의 ‘빌라야트 노흐치초(체첸인의 땅)’으로 변경되었다.
도쿠 우마로프
에미레트 선포 이후 녹색의 이치케리아 국기는 가운데가 검은 성전 깃발로 바뀌었다.
도쿠 우마로프의 코카서스 에미레트 선포는 체첸 외의 다른 코카서스 반군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동기 부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었으나, 대신에 ‘체첸 독립 전쟁’을 ‘국제 이슬람 성전’으로 변모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지지는 앞으로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미국은 2011년 5월에 ‘코카서스 에미레트’를 테러 단체로 지정하였고, 영국, 캐나다 등 다른 서방국가도 뒤따랐다.
또한 체첸 반군들이 우마로프의 리더십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2010년 8월 체첸 전역의 반군들은 우마로프가 “외부의 명령에 따라 협의체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규모로 반기를 들었다. 다게스탄 등 코카서스 다른 지역 반군들의 지지를 토대로 우마로프는 2011년 7월에 다시 체첸 반군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으나, 이미 체첸 반군들의 사기와 열의는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그 증거로 우마로프가 직접 위협했던 소치 올림픽은 세계 각국의 우려 속에서도 안전하게 치러졌다.
도쿠 우마로프
본인의 판단에 따른 최선의 선택을 했으나, 체첸 전쟁의 성격을 영구히 바꿔버렸다.
도쿠 우마로프의 사망 이후 코카서스 반군들은 누구를 후임으로 정할 지를 논의했다. 약 7개월의 논의와 설득 끝에 코카서스 반군들은 코카서스 에미레트의 2대 에미르로 이슬람 율법 재판관(카디)인 다게스탄 샤밀스키 출신의 알리 아부 무하나드(본명 알리스캅 케베코프)를 선출하였다.
알리 아부 무하나드
2009년부터 다게스탄 반군에 가입하여 활동 중이었다.
반군들의 대화를 도청했던 람잔 카디로프에 의하면, 무하나드 본인은 자신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체첸인 지휘관(아슬란벡 바달로프 등)이 후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카바르디노-발카리아 반군들은 다게스탄쪽에서 수장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체첸 반군 쪽에서도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고, 현 시점에서는 이슬람 학식에 의한 권위가 전투력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반군들은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아부 누르 대학에서 이슬람을 공부한 알리 아부 무하나드를 2대 에미르로 선출했다.
다게스탄 반군들
코카서스 반군의 주도권은 이제 다게스탄으로 넘어갔다.
1991년 체첸 공화국 독립 선언 이후 코카서스의 대러시아 항쟁의 중심은 체첸인이었지만, 이 시점 이후로 그 주도권은 다게스탄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전쟁의 성격이 ‘체첸 독립 전쟁’에서 ‘이슬람 성전’으로 변한 만큼 상대적으로 ‘와하비’의 비율이 높은 다게스탄 반군들에게 그 주도권이 넘어간 것이다. 이후 코카서스 에미레트에서 체첸인 수장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처 : https://www.rferl.org/a/insurgency-commanders-divulge-of-umarovs-death/25467747.html
https://en.wikipedia.org/wiki/Dokka_Umarov
https://www.belfercenter.org/publication/doku-umarov-finally-dead
https://www.rferl.org/a/doku-umarov-dead-questions/25236011.html
https://en.wikipedia.org/wiki/Aliaskhab_Kebekov
https://en.wikipedia.org/wiki/December_2013_Volgograd_bomb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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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오랜만이네요! 감사히 잘 읽겠습다!
반러 전담일진이던 체첸이 어쩌다 이 지경이... ㅜㅜ
잘보고 갑니다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선댓글 후감상ㅋ
오랜만이네요. 그나저나 소치면 김연아 은메달 논란이 생각나네요
데헷 드디어 글이 올라왔군요~
https://www.youtube.com/watch?v=U9xCxaCg_gM
PLAY
몇 달 전에 뜬 영상인데 체첸 반군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나봅니다.. 이 사람 68화에 나왔던 아슬란 부투카에프 같아요. 이런 거물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니 놀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