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과 기적” - 민수기 20:1~13
오랜만에 설교요약을 올려봅니다. 마침 오늘이 모의고사라 조금 여유도 있고 지난 주 설교가 워낙 좋아서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근데 잘될지는 모르겠네요.. 안되는 것은 둘째 치고 혹시 심각한 왜곡과 오해가 있을까 약간 두려우면서...^^;
그럼 시~이작!!
오늘 민수기의 본문 말씀에서는 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쉔베르크의 오페라 ‘.......’(제목 기억 안남)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어눌한 모세와 달리 유려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며 대중들에게 모세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미리암은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끈적끈적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도록 이끌어내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의 지도력은 서로 결합되어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리암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서로 결합되어서 작용하던 지도력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노예로 살던 민족을 끌어내어 광야로 나왔다는 것...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이득이 아닌 추상적이고 막연한 해방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입니다. 게다가 그 불가능을 함께 떠받치고 있던 한 축인 미리암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눈앞에 닥친 위기에 긴장했을 듯합니다.
(이 부분에서 제 생각에 잠시 이야기가 번져나감...)
특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는 정말 광야와 같습니다. 점점 강력해지는 자본 그리고 물질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피폐해지는 민중들.. 이런 강력한 현실 앞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입니다. 이런 외부의 조건을 보지 못하고 현재의 난관이 개인적인 무능이고 잘못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진함과 착함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의 욥은 오직 신앙에만 복종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모두들 달려와서 욥에게 네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된 것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말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세계는 사람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멈추고 상품을 소비하는 부속품으로 기능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다시 제자리로...^^)
계몽주의적 세계관(오직 자연성, 물리적 법칙 등이 지배하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 기적은 없다)에 입각한 성서비평학에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에 대해 항상 얼버무리거나 강력히 부정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세계의 법칙에서 이탈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소멸할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예상과 달리 종교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삶에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번창하게 되며 그것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가 최근 유행하는 영성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전통에서 기적은 하느님께서 약속했던 것이 실현되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의 약속한 바를 이루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신다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내어 보여 지는 순간이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하느님의 예언과 약속에 순종했던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과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기적을 구해야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향해 광야를 헤매던 선배들의 꿈이 오늘 나의 삶에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단호히 실천해야합니다. 그것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만남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약속하는 영원성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순간을 살지만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간은 이런 약속되고 마침내 성취되는 하느님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잘못된 현실에 갇혀있습니다. 마술은 잘못된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을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결정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는 예언된 것이 상식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기적은 일상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금융체제야말로 이런 마술의 전형입니다. 아무것도 일하지 않고 돈을 뻥튀기 하는 향연의 마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은 발딛어야할 곳을 잃고 붕 떠버리고 맙니다. 주식현황판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과연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인간의 꿈.. 자부심.. 낙관 등!! 그런 것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라진 그곳은 가장 활발해 보이지만 그곳이야말로 마술의 장소이며 무덤입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지 못하여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광야에서 느껴지는 자신을 압도하는 막막함... 그리고 미리암의 죽음과 백성들의 반기 앞에서 모세는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느님의 예언과 마침내 이루어질 성취를 믿었다면 “~우리가 이것을 하랴?”라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통과 절망 앞에서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일하심을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너희가 의심하느냐?”라고 꾸짖어야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권위가 회복되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부족을 보인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고통과 불가능 앞에서도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켜야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적을 만드는 지도력입니다. 하느님을 통해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건너가게(돌파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절망과 꿈이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
기도하시겠습니다...
여기부터는 저의 짧은 후기..
그래서 그런 믿음 안에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현실을 선취해서 사는 삶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내 삶에 끌어들인 그래서 그것을 당당히 살아내는 존재들이 참된 신앙인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삶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삶의 모습과는 다른 예외적인 삶들일 것입니다. 이런 예외적인 삶은 주변에 그리고 사회에 어떤 강한 울림과 충격을 던지고 그 충격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한살림교회는 저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힘을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힘입는 바가 크고 말씀과 신앙을 함께 듣고 고민하고 나누며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교우들이 있어 삶에 근원적인 토대가 되는 것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교회 예배가 끝나고 나면 같이 술 마시고 놀고 싶어집니다..^^;
다음 주에 뵈요~~~!!
첫댓글 김샘, 명료한 정리 감사합니다. 짧은 후기도요.. 교회 안에 작은 모임들이 생겨서 그런 여운을 따로, 또 같이 하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쇤베르크의 오페라는 <모세와 아론>일 거에요.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뒤 1957년에 초연됐고, 보통 오페라는 작곡과 대본을 따로 맡게 되는데 이 작품은 작곡가인 쇤베르크 자신이 직접 대본을 썼다고 하네요. 종교관이 다른 모세와 아론 형제의 대립을 그렸다고 하고, 모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능한 신을 믿는 반면 아론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현상을 믿는 대중들의 편에서 우상 숭배의 옹호자로 묘사되었다고 하네요. 제가 오페라를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모세와 아론'은 전에 발라데서의 '신학적 미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같이 공부하던 분이 CD를 사서, 복사해 주셔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음학이론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매우 단호한 모더니스트라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 바그너 오페라를 해설한 책인 '트리스탄 코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그너 오페라는 DVD를 구할 수 있는 게 꽤 있습니다. 언젠가 바그너 오페라로 설교할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단호한 모더니스트... 적확한 표현이네요. 쇤베르크가 시도했던 음렬주의가 바로 그런 이념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이제 오페라까지 넘보시는 목사님의 욕망이 부러워요. 저도 오페라 공부하고 싶은데, 바그너는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 빨리 그 꿈 실현되기를... 설교 들으면서 공부하면 되겠네요^^
다시읽으니 새롭고 좋습니다 승현씨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음,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으네요. 저도 몇 달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저의 삶에 임하셨다는 것에 대해 많이 순간순간 묵상합니다. 두고두고 몇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렇게 써야 김샘이 자꾸 정리해 주지. ㅋㅋ)
목사님 가장 가까이 늘 무릎끓는 수제자는 역시 다르군요.. 삶에 놓인 어려움들을 늘 돌파하며 살아갈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김쌤, 고마운데.... 설교요약 올리기 전에 나한테 한번 보여주면 안 되나요? 그럼 조금 더 좋을 수도 있을텐데....
윽!! 우려가 현실로..^^; 다음부터(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원(목사님을 제외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요약을 가끔씩 올려보고 싶은 것은 위에서 '물고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설교의 여운을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누군가 그 날의 설교가 참 좋았다면 요약이던 후기 형식이던 글을 올리고 다른 교우들은 자신이 받았던 느낌이나 생각을 함께 나눈다면 목사님의 설교를 계기로 좀 더 풍부한 신앙나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도 바빠서 무지하게 오랜만에 올렸지만서도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격려와 칭찬도 물론 감사하지만 설교에 대한 나눔이 좀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 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현실을 선취해서 사는 삶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 하나님이 약속하신 현실은 어떤것일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어떤것일까요? 알고도 행하지 않아 모르는 것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