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죽은 약과 음식의 만남
요즈음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가는 가운데 한약재로 만든 건강음식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약과 음식의 뿌리는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을 실천하고 증명하는 셈이다. 그 중에서 비록 원초적이지만 가장 합리적인 형태가 바로 약죽이라 하겠다. 죽의 역사는 농업의 시작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하지만 약죽 역시 이에 못지 않은 장구한 역사를 가진다.
약죽의 장점을 알아보면 음식의 영양가와 약의 만남이니 서로의 장점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식보(食補)라 하여 밥만으로도 보약인데 약재의 효과를 더하는 셈이다. 약효가 쌀의 영양분과 어우러져 순화되고 게다가 소화흡수가 쉬운 죽의 형태로 된 것이다. 소화흡수가 쉽다는 것은 대부분의 환자가 위장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치아가 좋지 않아 잘 씹지 못하는 사람에게 죽은 고마움 그 자체다. 그러므로 약죽은 일반인의 건강식으로도 좋지만 특히 병후나 산후회복 만성질환자나 노약자들에게 더 권장할 수 있는 음식 치료법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치료와 함께 한끼 식사를 해결하는 일석이조라 할까?
약죽이라 하여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고 약차 달인 물에 쌀이나 찹쌀 아니면 밀가루 등의 곡식을 넣어 잘 저어가며 죽을 쑨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약재에 따라 약재와 쌀을 함께 넣어 끓이는 경우도 있고 약재를 갈아서 넣는 경우 아니면 집에 분쇄기가 있으면 약과 쌀을 함께 갈거나 찧어서 죽을 쑤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재료에 따라 약죽 끓이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약성분과 죽을 잘 배합한다는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취향에 따라 물엿이나 흑설탕 꿀 생강 파 마늘 소금 등을 첨가해도 좋다. 알아 둘 것은 약차의 쓴맛은 감미료를 많이 넣어 중화시켜도 큰 무리가 없지만, 약죽은 쓰다고 설탕 등을 너무 많이 넣으면 먹기가 오히려 거북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약죽 처방에는 많은 종류보다 주로 한두 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약죽은 약이라는 의미와 함께 음식으로서의 의미도 살려야 한다. 쌀과 배필이 잘되는 한두 가지 약재를 그것도 소량 배합하면 담백하고도 맛있는 약죽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약재가 들어가면 먹기가 거북해질 수도 있다. 음식과 약의 만남인 약죽에 있어 약재 종류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음식대표로 혼자 나온 쌀이나 찹쌀이 상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약죽은 우리 주위에
약죽은 역사가 깊은 만큼 요즈음도 흔히 먹고 있는 약죽들이 많다.
먼저 팥죽하면 ‘그게 무슨 약죽이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좀 더 아는 사람은 ‘본래 역귀(疫鬼)를 쫓는 데서 유래된 동짓날 절식(節食)이 바로 팥죽이지’ 라고 할지도 모른다. 팥죽이 대중화된 식품이건 동짓날 절식이건 간에 그 작용은 엄연한 약죽이다. 잡곡 중의 하나인 팥은 한방에서는 적소두(赤小豆)라 하여 해독(解毒) 및 소염이뇨제(消炎利尿劑)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팥죽은 소변을 시원하게 하고 산모의 부기(浮氣)를 내리고 젖을 잘 나오게 하며 음주 후 해독에도 도움을 준다. 물론 찹쌀 새알심을 넣은 팥죽이나 설탕을 넣은 단팥죽 등은 별미나 간식으로도 널리 퍼져 있다.
식품화된 약죽을 열거하자면 율무(薏苡仁)죽은 몸을 가볍게 하고, 녹두(綠豆)죽은 성질은 차지만 약독을 풀어주고, 땅콩(落花生)죽과 고구마죽은 따뜻한 성질로 속을 보강해주고 몸에 영양분을 준다. 밤죽은 기운을 세게 하고, 전복죽은 맛은 짜고 성질은 서늘하지만 눈에 좋고 영양도 좋고 맛도 좋다.
잣죽은 허약하고 어지러운 증세를 보강해 주는 한편 변비에도 좋다. 쌀과 잣을 분쇄기로 갈아서 조금 끓이다가 잘게 썬 밤을 넣고 다시 끓여서 임산부들이 먹게 되면 자궁의 안정에도 도움을 준다.
은행죽은 호흡기가 약한 사람에게 좋고, 호박죽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소변을 잘 누게 한다.
호두죽도 있는데 호두 살을 끓는 물에 담가 속을 벗겨내고 삶은 대추와 함께 갈아서 물을 붓고 찹쌀가루와 함께 죽을 쑤어 먹으면 머리카락은 검게 해주고 머리 속은 총명하게 해준다.
이처럼 우리 주위를 조금만 살펴봐도 약이 곧 음식이요 음식이 곧 약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약죽들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감초보다 단 용안육죽
한약 중에 제일 단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감초지 뭐’ 하고 대답하기 쉽지만 감초보다 열 배나 더 단 약재가 있다. 아열대지방에서 자라나는 용안나무의 과육(果肉)인 용안육(龍眼肉)이 바로 그것이다. 한의원에 일하는 사람들이 입이 심심하거나 술 안주할 때 축을 내는 약재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색도 흑갈색에다 보혈작용도 있고 맛도 좋다. 그래서 숙지황이 들어간 처방을 먹고 탈이 났을 때 대타로 나서는 제 1순위 약재로 꼽히기도 한다. 이 용안육으로 죽을 만들면 설탕을 안 넣어도 당연히 단팥죽 이상으로 달다.
일단 용안육과 씨를 제거한 대추를 달인다. 다음으로 건더기를 건져내도 되고, 아니면 그대로 멥쌀을 같이 넣어 죽을 쑤어도 된다. 건져내지 않은 경우 나중에 용안육과 대추가 흐드러지므로 씹히는 맛이 있다. 잘 저어가며 한참을 끓이면 약밥처럼 초컬릿색을 띤 죽이 된다. 용안육이 적게 들어가 맛이 좀 싱겁다 싶으면 흑설탕을 조금씩 넣어가며 더 끓이면 된다.
좀 더 빠른 시간에 죽을 쑤고 싶으면 쌀을 분쇄기로 대충 갈아 원미(元味)죽처럼 끓여 먹어도 된다. 쌀을 아주 가루로 내어 풀이나 수프처럼 달이면 시간이 더 단축된다. 이처럼 개척정신을 발휘해 몇 번 죽을 쑤다보면 누구나 죽 만드는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용안육죽은 달고 맛만 좋은 것이 아니라 건강에도 좋다. 먼저 피와 진액과 기운을 도우니 빈혈이나 헛땀나는 데 좋고, 심장과 정신을 안정시키니 신경쇠약이나 불면증 건망증 등에도 좋다. 용안육도 영양분이 많지만 같이 들어가는 대추 역시 자양성분이 많아 산후나 병후 회복과 체력증강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이나 수험생들에게 잘 어울리는 약죽이라 하겠다.
◇몸을 도우는 약죽
황기 인삼을 <2:1>정도의 비율로 넣고 진하게 달여 짜낸 다음 쌀을 넣고 죽을 쑤면 황기인삼죽이 된다. 이 처방은 이미 송나라때 나온 성제총록이라는 의서(醫書) 제 189권째를 보면 ‘보허정기죽(補虛正氣粥)’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질 설사후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로 헤맬 때 먹이는 약죽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허약증을 회복시키는데 다 좋을 것이다.
기운 돋우는데 있어서 1,2위를 다투는 인삼과 황기가 다 들어간데다 속을 보하는 쌀까지 들어갔으니 보익(補益)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 원기회복 체력강화 식욕부진 등에 효과가 있다.
인삼에 황기 대신 백복령이 들어가면 삼령죽(蔘?粥)이 되는데 역시 몸을 돋우는데 좋은 약죽이다. 백복령은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체(菌體)덩어리로 얇게 썰어 사용하는데 하얀 색을 띠며 누르면 쉽게 으스러져 석회가루처럼 된다. 황기가 기운과 몸을 도운다면 백복령은 마음을 도와 안정시키고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서 옛날 도(道) 닦는 사람들이 생식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위(脾胃)에 습기(濕氣)를 제거해주고 소변을 시원하게 하는 작용도 있다. 백복령 <5> 인삼 <1> 생강 <1>의 비율로 넣고 달인 약물에 쌀을 넣고 죽을 쑤면 된다. 백복령은 잘게 부수어 물에 풀어 넣고 인삼 생강은 얇게 썰어 넣는다. 삼령죽은 비위허약을 위주로 한 모든 허약한 증세를 도와 보강시켜 준다.
호흡기가 약하거나 마른기침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삼(沙蔘)죽이나 천문동(天門冬)죽을 권할 수 있겠다.
사삼은 도라지과에 속한 더덕뿌리인데 잘 달인 물에 쌀을 넣어 죽을 쑤면 된다. 사삼죽은 폐나 기관지에도 좋지만 몸 속의 진액을 생성시키고 자양(滋養)해 준다.
천문동 달인 약물에 쌀을 넣어 끓이면 천문동죽이 되는데 사삼죽도 마찬가지지만 맛이 쓰면 감미료를 넣어도 좋다. 보통 보약의 성질은 따뜻한 것이 많은데 사삼과 천문동은 성질이 차가운 보약으로 폐열 등을 내리고 갈증을 풀어주면서 우리 몸을 기름지게 보강한다.
해삼은 우리 주위에 있는 식품화된 약재다. 해삼죽은 남자에게는 정력을 부인에게는 혈액에 도움을 준다. 해삼(海蔘)의 성(性)은 따뜻하고(溫無毒) 미(味)는 짜다(鹹)고 되어 있는데 약효에 앞서 자체의 영양가가 풍부하다. 마른 해삼을 물에 불려 잘게 썬 다음 쌀과 함께 죽을 쑨다. 양념은 취향에 따라 하면 된다.
◇몸을 데우는 약죽
방풍과 대파를 달인 물에 멥쌀을 넣고 죽을 쑤면 방풍죽이 된다. 방풍은 다른 약초뿌리에 비해 쓴맛이 덜하고 달고 구수한 뒷맛이 있어서 약죽의 재료로 적합하다. 대파의 흰 뿌리는 총백(?白)이라 하여 땀이나 나쁜 기운을 겉으로 발산시키는 작용이 있는데 감기약 등의 처방에 흔히 같이 넣어 달이기도 한다.
방풍죽에서 대파는 방풍을 도와 풍한(風寒)기운을 제거하고 진통작용을 전신에 잘 전달하게 한다. 한마디로 방풍죽은 그냥 몸을 데운다기보다 감기 등으로 열이 나면서 아파하고 추워하는 증세를 풀어주고 속이 차가워서 오는 설사를 치료한다. 방풍죽 한 그릇 끓여 먹고 땀을 쭉 빼면 감기도 쭉 빠져 달아날 것이다.
다음으로 회향 중에서 대회향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되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소회향을 구해서 죽을 끓여 보기로 한다. 소회향은 회향의 과실인데 과실이라기보다는 납작한 볍씨에다가 연한색의 테를 두른 듯이 보인다.
달여보면 회향 특유의 맵고도 화한 향이 난다. 회향 달인 물에 멥쌀을 넣고 죽을 쑤면 된다. 회향죽은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하여 기(氣)를 순환시키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장기능도 활발하게 한다. 배가 차가워 아프거나, 장이 처져 내려와 생기는 산증(疝症)치료에도 좋다.
계피차는 앞서 알아보았지만 계피죽도 추위를 물리치고 양기를 돋우고 위장기능을 촉진한다. 계피보다 좀더 두껍고 크고 좋은 것을 육계(肉桂)라 하는데 계피보다 열성(熱性)도 강하다. 육계를 구해 진하게 달인 물에 쌀로 죽을 쑤면 된다.
그 외 오수유나 부자 등의 약재로 우리 몸을 데우는 죽을 만들 수 있지만 약성이 강하거나 독성이 있어 전문가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반대로 몸을 식히는 약죽으로는 결명자죽, 치자죽, 생지황죽 등이 있는데 찬 성분의 약은 너무 오래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생활 속의 약차 약죽
이상 약차와 약죽에 대해 주마간산 식으로나마 알아보았다. 약차나 약죽을 만드는 방법은 꼭 여기에 쓰인 대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운용방법은 취향에 따라 무궁무진하고 쉬운 약재는 일반인도 융통성 있게 용량 용법을 조절하고 개발할 수 있다.
사실 한약재를 이용한 음식은 약선(藥膳)이라 하여 옛날부터 의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어 왔다. 약죽도 따지자면 약선의 일종이라 하겠다.
약차 역시 우려 먹거나 가루를 태워 먹는 경우도 있지만 약재를 넣어 달이면 일종의 탕(湯)인 셈이다. 탕이란 국의 높임말로 한약처방으로 달이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건더기 있는 국물음식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먹는 술에다가 약재가 들어가면 약주(藥酒)가 되고 우리가 먹는 떡에 약재가 들어가면 약병(藥?)이 된다. 이처럼 한약재는 우리 먹거리와 잘 융화되어 왔고 약재 자체로도 훌륭한 음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한의원에서 잘게 썰어 볶고 찌는 등 수치(修治)를 하면 의약품이 되지만 그 직전까지는 농산물 취급을 받는 약재들이 대부분이다. 언뜻 생각하면 한의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좀 더 깨우친 한의사들은 그것을 오히려 큰 자부심으로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너무 독성이 강한 약재나 아니면 단위 높은 합성신약으로 다루다 보면 환자에게 잠시의 행복을 줄지는 몰라도 작은 구멍을 막기 위해 더 큰 구멍을 만들어 주는 결과를 낳기 쉽다. 그러므로 가장 음식에 가까운 약재로써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연의 순리를 가장 잘 지키는 치료법이 된다는 것을 깨우친 의사들은 한방 치료 방식에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약재 역시 대부분 한약재 시장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노파심에 한 번 더 강조해야 될 말이 있다. 한약이 좋다지만 그 중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도 있고 체질에 맞지 않으면 독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약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약재로 차나 죽을 만들 때에는 아무리 쉬운 약재라 할지라도 독극(毒劇)경계경보하에서 사용해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듯이 복용에 신중을 기하며 의심스러운 것은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옛 말씀에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인생을 일부러 어렵게 살 필요는 없다. 아마 경솔하게 사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일 것이다. 약차 약죽으로 하루아침에 슈퍼맨이 되기를 바라지는 말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차를 마시며 식사를 하면서 아니면 술 한잔하면서 질병도 예방하고 체력을 증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누가 마다 하겠는가? 바로 약차 약죽 약주 속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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