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식당에는 대낮부터 낮술에 취한 사내들로 활기를 띠고 있다. 혜순은 감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식당 앞에서 머뭇거리며 땀을 닦는다. 열린 문을 통해 식당 안에서 사내들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가씨 때문에 술맛 절로 나는군. 그 예쁜 손으로 한 잔 더 따라 주게나!"
"서울식당은 앞으로 미스 김 때문에 매상 엄청나게 올리겠는걸."
"이 집 아줌마가 이번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미인계로 아주 승부를 걸었군."
"이 사람아 그래야 저 건너 부산식당과 경쟁할 수 있지 않겠어?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술집도 경영 쇄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야!"
"맞아, 맞아! 경영 쇄신의 중요한 대상은 사람이지. 더구나 이런 데선 우리 같은 사내들을 상대로 물장사 하는 만큼 젊고 예쁜 색시가 있어야 돈이 벌린다구! 그렇지, 미스 김?"
"그래요. 아저씨들 날 예쁘게 봐주세요."
"아무렴. 난 미스 김을 처음부터 잘 봤다구. 부산식당의 미스 신 보다 대(大) 서울식당에 오늘 부임한 미스 김이 훨씬 더 예쁘단 말야. 앞으로 그 집 손님들 다 빼앗게 생겼는걸. 미스 김 때문에 그 집 망하는 것 아냐?"
혜순의 귀에는 온통 귀에 거슬리는 말들뿐이다. 문 안쪽을 주의 깊게 엿보니 단정하게 차려입은 연분홍빛 한복 차림의 앳된 여인이 사내들 틈에 끼어 있다. 그녀는 남자손님들의 술시중을 들기 위해 새로 고용된 접대부가 분명하다. 혜순이 주방 쪽을 살폈으나 미화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호호호.... 그런 걱정일랑 마시고 앞으로 최선을 다해 서비스하겠으니 서울식당을 자주 찾아 주세용."
여자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사내들에게 아양을 떤다.
"암!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나 우리 집 안방처럼 여길 드나 들거야."
"이 사람 혼자 미스 김을 독차지할 모양이군."
"호호... 저를 두고 벌써부터 친구들끼리 시비하면 어떡해요. 저는 안주 같은 여자일 뿐이에요."
"그럼 그럼. 미스 김은 어느 한 사람이 독차지할 물건이 아니고 안주 같은 여자일 뿐이야. 우리 모두 미스 김을 안주 삼아 술이나 맛있게 마시자구."
사내들의 수작을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리고 비위가 상해 혜순은 도무지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
남편 없이 홀몸으로 사는 미화 엄마가 꾸려 나가는 서울식당은 주로 술꾼들로 흥청거리곤 해 술집이나 다름없다. 아예 사람들은 그 식당을 대폿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화네가 어서 돈을 벌어 다른 장사하기를 바라며 기도하던 혜순이로서는 마치 아득한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현기증이 느껴진다.
기생까지 끌어들여 술손님들로 하여금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이게 된 지경에서 어떻게 미화를 격려하고 인도해 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모처럼 마음먹고 온 심방인데, 미화 엄마를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미화는 오늘까지 3주일째 주일학교를 결석하면서 헌금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화는요 오늘도 집에 일이 있어 바쁘대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정은이가 미화의 헌금과 함께 전해 주는 그녀의 결석 사유는 매주 한결같았다.
혜순은 미화가 첫주일 결석했을 때만 해도 불신자 가정의 자녀로서 집에 붙들릴 만한 바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주일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이 막연한 결석 사유만 듣게 되자 미화 엄마가 갑자기 못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은이도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 봤다고 했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더란 것이었다. 겸연쩍게 웃기만 하며 돌아서 버리더라고 했다.
혜순은 두 번째까지 심방을 미루었다. 한 번 결석해도 쉽게 찾아 나서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미화만은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여자 5반 교사를 맡고 나서 혜순은 미화의 어머니를 만나거나 심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미화가 잘 나왔기 때문에 심방할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가정 형편을 모른 체하며 지내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아서였다. 술장사하는 현장을 굳이 확인해야 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또 그것이 미화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녀의 어머니에게 부담을 줄지도 모른다고 심방만큼은 자제를 해 왔던 것이다.
엄마의 식당 일이 잘 되는지 미화는 여느 부잣집 외동딸이나 다름없이 깨끗한 새옷을 자주 갈아입고 다녔다. 한 개의 동전이나 내는 아이들에 비해 미화는 언제나 두셋 닢을 헌금할 정도로 호주머니 사정도 넉넉한 편이었다.
미화네가 돈 좀 벌었으면 딸의 교육을 위해 맹자 어머니처럼 다른 장사로 바꿀 만도 한데 이미 맛들인 물장사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혜순은 용기를 내어 서울식당의 문턱을 넘어 들어간다.
"미화 어머니 계세요?"
혜순은 사내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외면한 채 주방으로 똑바로 눈길을 주며 이렇게 외친다. 주방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대신 혜순의 왼 쪽 편에서 사내들 틈에 끼어 있던 여자의 대꾸가 들린다.
"아줌마는 오늘 점심 때 읍내 나가셨어요. 해거름에나 들어오실 모양인데, 어떻게 오셨죠?"
혜순은 힐끗 여자 쪽을 돌아본다. 그 여자는 마악 불을 붙여 한 모금 당긴 듯 끝이 조금 타 들어간 한 개피의 담배를 오른손 손가락들 사이에 끼우고 도도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를 끼고 앉은 사내들과도 눈빛이 마주친다. 남자들은 세 명인데, 모두 젊은 청년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은 무척 익은 얼굴이라 혜순을 당황하게 한다. 그 사내도 혜순을 알아보고 이렇게 소리친다.
"어! 문혜순 씨 아냐? 어째 이런 델 다 왔어?"
"어머머머머........."
혜순은 모른 체하고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애써 눈길을 피하며 더듬거리기만 할뿐이다.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무성한 그는 혜순의 초등학교 동창생 창식이다. 뿐만 아니라 창식은 한때 혜순과 같은 교회의 주일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소문난 건달로 변했다.
"기왕 만났으니 술 한 잔 하게. 참! 너 예수쟁이잖아. 나도 그 때 멋 모르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
창식은 옛날 주일학교 다니던 시절이 갑자기 기억난 듯 내뱉었으나 교회에 대해서는 매우 냉소적인 투다. 혜순은 곁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친구들과 여자의 눈길을 의식하며 그를 상대하는 것이 몹시 괴롭다. 그녀는 다소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그의 말에 대꾸하며 공연한 질문을 던진다.
"그, 그랬지. 그 때 너의 모습이 참 좋았다고 기억되는데, 왜 어른이 되면서 불신자가 되었지?"
"술과 여자가 좋아서지......"
"그럼 그럼! 술과 여자가 최고지, 안그래 미스 김?"
한 사내가 창식의 능처스런 대꾸를 냉큼 받아 맞장구를 치며 여자의 허리를 덥석 껴안는다. 여자도 역시 능구렁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뿌리치거나 반항하지도 않고 점잖게 한 마디 내뱉는다.
"신사 분들이 주책도 심하셔."
그녀는 담배 연기를 듬뿍 빨아 그 사내의 얼굴에 훅 부는 것으로 싫은 내색을 할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사내가 여자의 몸에서 손을 거두고 펄쩍 뛰는 시늉을 한다.
"앗 뜨거!"
그녀가 딴전을 부리면서도 피우고 있던 담배 끝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아쥐고 있던 사내의 손등에 슬그머니 갖다 대고 불침을 놓은 것이다.
"장미는 가시가 있다는 것 몰랐나요. 앞으로 조심하세요!"
"아따! 그 가시 독이 대단하군!"
"여보게 이 분은 옛날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나한테는 귀중한 손님일세. 천사와 같은 신앙을 가진 교인이기도 하니 제발 예의를 좀 지키게."
비로소 창식은 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혜순을 보기가 민망했던지 친구들을 점잖게 타이른다. 혜순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미화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혜순아 이리 와 좀 앉아라. 술을 못 마신다면 억지로 권하지는 않을테니 음료수라도 한 잔 하시지?"
"사이다나 콜라 한 잔 드릴까요?"
"아뇨, 아뇨. 난 미화를 만나고 갈 거예요. 미화 지금 집에 있습니까?"
혜순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고 미스 김이라 불리는 여자에게 묻는다.
"저 안에 들어가 보세요. 툇마루가 있는 맨 끝방에 가서 문을 두드리거나 이름을 불러 봐요."
혜순은 그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주방을 지나 안 쪽 뜰로 들어간다. 살림집 냄새를 풍기는 낡은 기와집과 벽돌 담장 사이에는 양팔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별로 넓지 않는 마당이 있다. 길쭉한 마당 끝에는 골목으로 나갈 수 있는 대문이 있어서 혜순은 그나마 미화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화가 가게의 술꾼들 사이를 지나지 않고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에 황갈색 얼룩이 진 작고 아담한 강아지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오며 깽깽거린다. 낯선 사람이 왔다고 기척을 내는데 불과할 뿐 위협적이지 않다. 강아지 집과 마주하고 있는 맨 구석진 방문 앞에서 혜순은 멈춘다.
"홍미화, 홍미화!"
당장 반응이 없어 혜순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몇 번 두드리자 그제서야 대답이 들리며 방문이 열린다.
"어머나 문혜순 선생님이시네요! 전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미화는 두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 혜순에게 인사를 한다. 혜순은 폭이 한 뼘이나 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가 미화가 들어오라고 하자 신발을 벗고 올라선다.
"선생님 우리 집은 이런 곳이에요."
혜순이 잠시 묵상기도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미화가 던진 첫마디다. 기왕 자신의 치부 깊숙히 들어와버린 스승에게 숨길 것 없다는 자조섞인 말인 것 같다.
"뭐 어떠냐. 다들 살아가는 게 그렇지. 그래도 넌 아담한 네 방을 갖고 있어서 좋다! 마당에 놀고 있는 강아지도 참 예쁘고 귀엽던데......."
혜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두루뭉실 감탄사를 늘어놓는다. 다행히 그녀의 방은 식당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신앙을 보여주는 액자와 소도구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주일학교에서 상이나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 초상화와 성경구절이 적힌 크고 작은 서화, 이스라엘 성지 사진의 달력 따위가 걸려 있어서 사뭇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진작 첫주일에 심방을 왔어야 하는 건데, 네가 모범생이라고 믿고 난 기다리고만 있었지. 미안해. 이렇게 3주씩이나 결석할 줄은 몰랐어. 그 동안 주일 오전마다 그렇게 믿음 좋은 너를 붙잡았던 일이 뭔지는 몰라도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올 수 있겠지?"
혜순은 자세한 결석 사유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하고 다만 앞으로의 출석을 약속하고 다짐받고 싶다.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미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게 대답한다.
"왜 또 바쁠 것 같애?"
"네."
"무슨 일이야? 혹시 엄마가 널 못가게 하려고 심부름을 시키거나 일거리를 맡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
미화는 열린 문을 통해 담장 그늘 아래 졸고 있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인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혜순은 추궁하듯 물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가슴에 더욱 상처를 주는 것 같아 잠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고 싶다. 그녀의 얼굴에 밝은 웃음을 줄 수 있는 마땅한 화제를 찾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문 선생님 저어....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화가 먼저 침묵을 깨고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씀드려 선생님 그 동안 저 하나도 안바빴어요. 엄마가 교회 못가게 한 일도 없고요. 엄마한테 교회 가는 체 하고 일찍 집을 나와 딴 짓하고 다녔지요. 정은이 한테 헌금만 부탁하고는 안믿는 친구들 집에 가서 숙제하고 같이 만화방에도 가 실컷 만화를 보기도 했지요. 선생님 전 원래부터 정말 못된 계집애고 불량기가 많은 가시나예요."
"미화야, 너와 나는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중한 딸이야! 왜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몰고 가며 실천하려고 애쓰는 거니? 미화 너 정말 이상해졌다!"
"그래요! 선생님, 우리 엄마가 술집 한다고 교회 아이들까지 날 이상하게 보는데 내가 안이상해질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그러니까 아이들이 널 이상하게 보는 눈초리가 싫어 교회를 못다니겠다는 말이구나. 미화야 혹시 널 그렇게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더라도 좋게 이해를 해야지. 너의 경우에는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가정에서 나오는 아이들보다 네가 주어진 특별한 환경에서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기특해서 호기심을 갖고 널 바라보는 게 아니겠니?"
"그렇지만 어떤 아이들은 날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있단 말예요."
마침내 미화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누가 널 멸시했어?"
교회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명랑하게 잘 어울린다고만 여겼던 헤순이로서는 큰 충격이다. 하지만 혜순은 미화가 철이 들수록 자신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열등감에 자꾸만 빠져들면서 자신에게 들리는 사소한 말에도 필요 이상으로 오해하는 습관이 생겼을 것이라고 판단해 보기도 한다.
"난 네가 항상 밝고 명랑한 얼굴로 친구들과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었니?"
"물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있어요. 하지만 교회 오빠들이 날 멸시하잖아요."
"교회 오빠들이?"
미화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이성문제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 같다. 혜순은 그녀가 마음에 두었던 어느 남학생에게 당한 배신을 말하는 게 쑥스러워 "오빠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그녀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성에 눈을 떠 가고 있는 시기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까.
미화의 "교회 오빠들" 속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은 가깝게는 유년부 남자 6반 아이들을 비롯해 따로 모임을 갖는 중고등부 남학생들이다. 혜순은 그 범위를 좁혀 남자6반 아이들을 한 사람씩 떠올려 본다.
계절에 따라 들쭉날쭉하는 이들을 빼고는 대체로 고정된 아이들이 네 명 정도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교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직분자의 자녀들이다. 각기 담임목사, 장로, 권사, 회계집사 아들들끼리 모였다. 따라서 모두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교회생활을 잘 하는 모범생들이다. 가끔 짓궂은 장난으로 야단도 잘 맞지만 그래도 그들은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있다. 원래 믿음의 뿌리가 있는데다 뭐든지 시키면 잘 나서서 자신있게 척척 해내는 적극적인 성격을 한결같이 가졌기 때문이다. 또 무슨 발표회나 무대에 올라설 기회가 있을 때면 준비한 만큼 못해도 재치와 기지로 넘기는 임기응변에 강해 관객들에게 함박웃음을 선사하며 인기를 독차지한다. 자연히 여자반 아이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멋있는 "오빠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오빠들이라면 남6반 아이들을 말하는 거니?"
"......."
혜순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미화는 대답을 않고 울기만 한다.
"울지마. 남6반 전상호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그 녀석들 혼내주도록 할테니까. 그런 일 있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혼자 속 썩이고 교회도 안나오면 너만 손해잖아."
뼈대있는 신앙가정에서 교육받고 자란 것이 오히려 교만이 되어 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한다는 것은 혜순으로서도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 녀석들 혼나봐야 돼. 너한테 사과하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줄테니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꼭 나와라, 응?"
"아니에요, 선생님. 걔들 그냥 내버려 두세요."
미화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충혈된 눈으로 혜순을 바라본다.
"왜 그냥 놔둬?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목사님 아들이든 장로님 아들이든 간에 부모님들 보는 데서 마구 쥐어박고 싶은데...."
"제 개인적으로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요, 선생님."
"뭐? 개인적으로 해결해?"
혜순은 미화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게 대꾸하는데 대해 저으기 놀란다. 그녀가 굳이 "개인적"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혜순은 남자 6반 전부가 아닌 그 중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짐작만 하고 굳이 누군지 묻지 않기로 한다.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 싫다면 너희들끼리 해결하고 화해할 수 있겠어?"
"......."
정작 미화는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의 문제로 조용히 묻어두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것 봐. 너 혼자서 해결할 자신도 없으면서...."
어느 누구의 개입도 바라지 않고 공개적으로 문제삼기를 거부하는 그녀에게 자꾸만 따져 묻는 일은 더 큰 상처를 안겨줄 것 같다. 혜순은 오늘 저녁 예배 때 만나게 될 남자 6반의 전상호 선생과 의논해서 묘안을 찾아 조용히 해결하리라 마음먹고 일어나기로 한다.
"좋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야. 마지막으로 같이 기도하자."
혜순은 미화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다.
"미화의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
이렇게 첫 마디를 던졌는데, 갑자기 목이 메이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다음말을 잇지 못한다. 간신히 심호흡을 하고 일을 열면 "오 주여!"만 짧게 반복될 뿐이다. 끝내 두 사람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쏟아놓고 만다.
그들은 거의 흐느낌과 눈물로 기도를 대신하고 일어난다.
"미화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오빠들의 마음도 잘 다스려 주시리라 믿어. 앞으로 잘 대해 줄 거야. 다음 주일부터는 꼭 교회에 나오는 거야?"
혜순이 대문을 통해 골목으로 나서기 전 미화에게 위로하며 마지막 다짐을 받기 위해 묻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한다.
"헌금만 보내드릴께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했으니 그것만 내면 교회 안가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엉뚱한 해석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빈 손으로 오지 말고 감사의 예물을 갖고 오라는 뜻이지. 주일날 헌금만 부치고 딴 짓 해도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야. 몸은 다른 곳에 가서 예배 대신 전혀 엉뚱한 일을 하는데 그런 헌금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겠니?"
"......"
"그래도 난 네가 결석하면서 헌금이라도 꾸준히 보내는 정성이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픈 마음 이해하시고 그 헌금을 기쁘게 받아 주셨으리라 믿어. 그렇지만 너의 몸까지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더 원하신단 말야."
혜순은 조용히 타이르듯 설명한다.
미화는 골목 밖 한길까지 혜순을 따라나온다. 혜순이 대문 앞에서 들어가라고 해도 미화는 동구밖까지 배웅해 드리겠다며 나란히 걸음을 같이 한다.
막상 한길로 면한 서울식당 안에서 노래소리가 들리자 혜순은 미화를 마주보기가 민망스럽다. 창식을 비롯한 그 사내들의 목소리이다. 젓가락 장단까지 맞춰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유행가를 부르고 있다. 물론 그 속에는 가늘면서도 찢어지는 듯한 한 여자의 음성도 섞여 기묘한 불협화음의 합창을 만들어낸다. 길 건너 철물점 안집 마당에 매여 있던 커다란 삽살개 한 마리가 낮잠을 훼방당한 게 억울한 듯 고약한 상으로 서울식당을 노려본다. 혜순과 미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 놈은 공연히 버둥거리며 사납게 짖어댄다.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서울식당 앞을 지나간다. 혜순은 창식이가 자신을 불러 세우지나 않을까 괜히 뒷덜미가 당기며 겁이 난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식당을 지났고, 노래소리는 멀어졌다. 혜순은 창식에 대한 이야기를 교훈삼아 들려주고 싶지만 그런 사람을 상대해서 장사하는 그녀의 엄마를 생각해서 차마 입을 뗄 수가 없다. 그저 마음으로만 그녀가 장차 창식이나 미스 김 같은 여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젠 들어가."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동구밖 농산물 창고까지 배웅나온 미화를 돌려보내고 혜순은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회가 있는 혜순의 마을까지는 두어 마장 쯤 걸어야 한다.
길 양쪽으로 넓은 들판에는 한껏 성숙해 무르익은 벼이삭들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넘실거린다. 그것은 마치 황금으로 지은 옷을 입은 수 많은 천사들이 도열해서 절하는 모습같다. 천국길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그녀의 발걸음이 마냥 가벼워진다.
그런데 맞은 편에서 몇 명의 소년들이 나타난다. 활 한 바탕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그녀는 그들을 알아보고 흠칫 놀란 걸음을 멈춘다.
"어머나! 쟤들이네!"
그들은 바로 "교회오빠들"이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세요?"
그들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녀에게 명랑하게 묻는다.
"으으응! 저어기......"
혜순은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다가 분명하게 알려주는 대신 돌아서서 한참 멀어진 장터마을을 가리킨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디 가는 거니?"
"헤헤헤... 우리도 저어기 갑니다."
"우리도 저어기요. 히히히......"
그들 역시 혜순의 말과 행동을 흉내라도 내듯 똑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막연한 대답을 한다. 장난기있는 웃음까지 곁들였으므로 그녀는 "예끼 이녀석들!" 하고 나무라는 시늉을 하며 같이 웃는다.
안그래도 잔뜩 벼르고 있던 참이라 잘 만났다 싶었는데, 그들은 혜순과 바짝 가까워지자 빠른 걸음으로 비켜지나 거리를 다시 크게 벌려 놓고 만다. 그 중 서 장로의 아들 봉태는 손에 들려져 있던 물건을 자기 몸 뒤에서 앞으로 얼른 옮기며 숨길려고 애쓴다. 그것은 흰 포장지에 보라색 끈으로 산뜻하게 포장돼 누구에게 전해줄 선물꾸러미가 분명하다.
그녀는 그것을 못본 척하고 그들을 그냥 가게 내버려둔다. 단지 한 마디 따뜻한 충고만 던진다.
"얘들아, 너무 저물 때까지 있지 말고 일찍 집에 돌아가도록 해라!"
"네에! 이것만 어디 전해주고 갈 거예요."
봉태는 그녀에게 들키고 말았다고 생각했는지 숨길려고 애쓰던 그 선물 꾸러미를 번쩍 치켜들며 소리친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이들이 그의 손에서 얼른 그것을 나꿔채거나 가릴려고 애쓴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오냐. 잘 다녀와!"
그녀는 그 선물에 관해서 짐짓 무관심한 체 하며 묻지 않기로 한다. 비로소 그녀는 미화의 "오빠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복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멋쩍게 웃어본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가의 코스모스는 분홍빛 얼굴에 웃음 가득 머금고 하얀 장갑 낀 손을 흔들어준다. 황금빛 들녘 속으로 멀어져가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동안 그녀의 검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맑은 유리알같은 이슬이 맺힌다.